2021년 9월호

“과학 기술 없으면 안보까지 위험해진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⑲] “21세기는 기술패권주의 시대”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1-08-0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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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팍스 테크니카‘ 시대 예언

    • 기술은 첨단이 아니라 차별화가 중요

    • 가장 중요한 자원은 시간

    • 빨리 보다는 먼저가 중요

    • 제록스의 삼고초려에서 배워야할 것들

    경제와 공학, 역사학을 넘나들며 ‘통섭’의 관점에서 국가발전의 키워드를 ‘기술력’으로 풀어내고 있는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는 6월 13일자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는 강한 자가 아니라 빠른 자가 독식하는 세상이다. 일단 승자가 되면 전리품 규모가 국가 단위를 넘어설 정도로 어마어마하고, 시장에 대한 독점적 체제도 반영구화 한다. 나라 빚을 늘려서라도 미래 투자에 나서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성공 여부는 산업기술에 얼마나 투자할지, 과학기술자들을 얼마나 양성하고 신산업을 얼마나 많이 육성할 지에 달렸다. 기술에 투자하면 빚은 나중에 이윤으로 회수된다.”

    이건희 회장이 2004년 반도체 30년 기념물에 서명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이 2004년 반도체 30년 기념물에 서명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팍스 테크니카 시대 예언

    기술이 지배하는 ‘팍스 테크니카 시대’라고들 한다. 총성 없는 미중 전쟁도 결국 기술전쟁이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3월 국가안보 가이드라인에서 “과학기술에 재투자함으로써 다시 세계를 주도해 미국이 새로운 규칙과 관행을 수립해야 한다”며 “양자 컴퓨팅과 인공지능(AI)이 경제, 군사, 고용은 물론 불평등 개선에까지 도움을 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과학기술정책실(OSTP) 실장을 장관급으로 격상하고, 유전학자 에릭 랜더 MIT 교수를 내정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국 정부도 올해부터 시작하는 제14차 5개년 계획에서 양자 기술을 중심으로 한 AI와 반도체 기술 개발을 중요 분야로 꼽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5월 3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내 최고 과학자, 엔지니어, 연구원 3000여명을 모아놓고 “과학기술 혁신이 국제 전략 게임의 주요 전쟁터가 됐다”며 ‘과학기술 자립자강’을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은 일찍이 ‘팍스 테크니카’ 시대를 예견했다. 그의 글 ‘야구공의 실밥’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선진국들은 과학 기술을 국가안보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과학기술이 부족하면 경제 식민지가 될 뿐 아니라 국가 안보마저도 남의 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9세기가 군사력, 20세기가 경제력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기술패권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본래 한국이 과학기술 선진국이었는데 뒤처진 것이 안타깝다며 나름대로 원인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한때 과학기술 선진국이었다. 금속활자나 한글, 동의보감, 거북선, 측우기가 그랬고, 김치에서 보듯 발효 개념까지 알고 있었다. 정보화와 관련되어 본다면 금속활자는 세계 최초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글은 기막히게 과학적인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우수했던 우리가 오늘날 뒤떨어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먼저 과학기술을 천시했던 사회풍토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성인, 교양인으로 행세하려면 피카소, 셰익스피어는 알아야 하지만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나 반도체를 발명한 쇼클리 박사는 몰라도 된다는 사람이 많다.

    역사에 대한 보존의식도 희박했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박물관은 그 수와 소장품 질에 있어서 선진국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의 인식도 아직은 미흡하다. 그림이나 불상은 오래 전부터 문화재로 지정해왔으나 물시계, 해시계 등이 과학기술 문화재로 인정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항상 30년 앞을 내다보고 일을 구상해야 한다고 말했던 고인은 미래세대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과학 기술입국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의 생활화, 대중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어릴 적부터 장난감, 동화, 놀이 속에서 과학을 생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야구공의 실밥이 물리학의 공기 저항 원리대로 공의 스피드를 높이고 다양한 구질을 만들어낸다는 과학의 이치를 쉽게 깨우쳐 주어야 한다는 거다. 대통령이 되고 법관이 되기보다 연구실에 밤을 지새우는 고독한 과학자의 길을 가겠다는 어린 새싹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이건희 회장이 2010년 1월 9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CES 2010’를 참관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이 2010년 1월 9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CES 2010’를 참관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기술은 첨단이 아니라 차별화가 중요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남긴 책에서 유난히 ‘기술’에 대한 철학을 강조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던 ‘기술 경영’에 고인이 얼마나 집중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회는 주로 그가 남겼던 글을 중심으로 생전 고인의 생각을 깊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가 생각하는 기술경영이란 건 무엇이었을까. 우선 고인의 기술관부터 짚고 넘어가보자. 흔히 사람들은 기술경영이라고 하면 최첨단을 먼저 떠올리는데 고인은 이와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한다(글 ‘남다른 기술로 승부’에서 인용).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다 보니 기술이라고 하면 시대를 앞서 가는 최첨단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기업 경영에서는 첨단기술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세계 1등 기업이라고 반드시 세계 최고 기술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 경영을 제대로 하려면 기술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기술 경영의 요체를 끊임없는 첨단기술에의 도전도 있지만 남과 다른 차별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모두가 연필깎이를 쓸 때 혼자만 손으로 능숙하게 깎는다면 이것도 훌륭한 기술이다.

    또 세계 최고 호텔이 되려면 첨단 전산 시스템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전산시스템이 훌륭해도 프런트 직원이 고객 이름 철자하나만 잘못 입력해도 그 고객에 대한 정보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내가 아는 어떤 호텔은 도어맨부터 시작해 모든 직원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신호로 단골인지 아닌지, 고객 취향이 어떤지를 주고받는다.”

    결국 아무리 최첨단 기술이라도 그걸 다루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때 도요타 자동차의 부품 재고관리 혁신 방식으로 세계 경영학계의 칭송을 받던 ‘간판 방식’에 대한 언급에서도 이어진다.

    “한참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도요타 자동차의 ’간판 방식‘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간판이라는 조그만 카드를 가지고 부품과 재고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이다. 서구기업들이 막대한 돈을 들여서 정보시스템을 구축할 때 일본 기업들은 간단한 카드 하나로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경쟁 우위에 섰다. 나는 기업 경영에서 생산, 연구개발 뿐 아니라 판매. 경리, 노무관리 등 투입물을 산출물로 바꾸는 모든 경영 활동이 기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사급 고급 인력들이 장기간 연구해서 개발한 침단 기술 뿐 아니라 호텔 직원과 도요타 자동차 직원들의 차별화된 숙련 기능도 훌륭한 기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필자 주: 여기서 간판이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가게 간판이 아니라 일종의 카드다. 필요한 부품을 생산라인 간판에 써 붙이는 ‘간판 방식’은 생산현장의 효율성 혁신을 가져온 도요타의 대표적 생산 방식이었다. 하지만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겪으며 효율성을 희생하더라도 정상적인 공장 가동을 우선시하다는 쪽으로 전략이 바뀐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건희 회장의 기술관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기초 연구가 부족하고 자금도 충분치 않은 우리 기업들이 세계 일류 첨단기술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차별화된 기술을 가질 수 있다면 세계 시장에서 우리 몫을 제대로 차지할 수 있으리라 본다. 언젠가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가 있다는 ‘맥가이버’라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이 아무런 첨단장비 없이도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치 맥가이버처럼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발한 발상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이 아닌가 생각한다.”

    기술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시간

    그렇다면, 기술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무엇일까. 이 회장은 다름 아닌 ‘시간’이라고 했다. 글 ‘빨리에서 먼저로’의 한 대목이다.

    “과거에는 기업을 경영하려면 돈, 사람, 설비, 기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새로운 경영자원으로 부각됐고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기업경영에 요체가 되었다.”

    고인은 글 ‘시간 경쟁력’에서 이를 다시 새롭게 설명한다. 우선 간단명료하면서도 쉽게 다가오는 ‘시간의 역사’에 대한 언급이 흥미롭다.

    “시간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먼 옛날 원시시대에는 해가 뜨면 낮이고 해가 지면 밤이라는 두 가지 시간 개념만 존재했을 것이다. 그 후 농경사회에 들어와 농산물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생활패턴이 정착되면서 하루 세 끼를 먹는 아침·점심·저녁이 사람들이 느끼는 시간 개념이 되었다. 그러다가 교역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하루를 12등분한 십이간지(十二干支)라는 좀 더 세분된 시간개념으로 발전했고, 이어 산업사회를 맞이하여 교역 범위나 빈도가 넓어지고 높아지면서 현재와 같은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개념을 갖게 된다.”

    그런데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시간의 가치는 또 완전히 달라진다고 이 회장은 설명한다.

    “시, 분, 초 단위는 그대로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필요한 활동을 하지 않으면 기회를 잃고 마는 시대가 정보화 시대다. 경영 컨설팅, 법률자문은 시간 단위로 가격이 매겨 지고, 증권 거래, 선물 거래는 찰나에 가격이 바뀐다. 시간의 가치가 극적으로 커지고 있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며칠에 걸쳐 해야 할 정보처리를 1초안에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초 단위 시간 개념도 의미가 없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이미 컴퓨터 성능을 비교할 때는 10억 분의 1초인 나노(nano)초를 다투는 시대가 아닌가…과거의 기업 경쟁이 가격과 품질 경쟁이었다면, 앞으로는 시간 경쟁력이 승부를 좌우할 것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삶 속에서 시간 단위가 갖는 가치가 점점 높아지기 때문에 고객이 원하는 바를 경쟁업체보다 빨리 만족시켜 주는 쪽이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서울~부산 간 기차요금은 비행기 요금보다 저렴하지만, 도쿄~오사카 간 신칸센 요금은 같은 구간 비행기 요금과 비슷하다. 공항까지 오고 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신칸센이 비행기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고객의 시간 낭비를 얼마나 줄여 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빨리보다 먼저가 중요

    이건희 회장이 2010년 5월 17일 삼성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개최된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했다.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이 2010년 5월 17일 삼성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개최된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했다. [삼성전자 제공]

    앞서 김태유 교수는 “4차 산업혁명시대는 강한 자가 아니라 빠른 자의 시대”라고 했는데 이건희 회장도 이미 20여 년 전에 ‘속도’에 주목했다. 그런데 고인이 강조했던 건 ‘빨리’가 아니라 ‘먼저’였다(글 ‘빨리에서 먼저로’에서 인용).

    “그동안 우리는 자본이나 기술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간이라는 경영자원을 적절히 활용, 짧은 기간 내에 고도성장을 이룩하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남들이 쉬고 있을 때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빨리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우리 건설업계가 해외에서 횃불을 켜놓고 밤샘 공사를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공기 단축과 돌관 작업(突貫作業·장비와 인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한달음에 해내는 공사)은 한국 건설업체의 트레이드마크로 정평이 나있다.

    반도체 산업이 세계 정상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도 남들은 2년이나 걸리는 공장건설을 반년 만에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빨리 경쟁력’을 확보하게 된 것은 남다른 근면과 그것을 촉발한 헝그리 정신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빨리만으로는 안 통하는 세상이 됐다. 국제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우리의 빨리 경쟁력을 후발 개도국이 답습, 추격해오고 있다. 우리 자신 또한 빈곤에서 벗어난 마당이라 과거와 같은 근면성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시간 경쟁력의 질적 전환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빨리’를, 기회를 선점하는 ‘먼저’의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면서 내건 캐치 프레이즈가 ‘먼저, 제때, 자주’다.

    “나는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하면서부터 기회 선점 경영을 특별히 강조해왔다. 신경영 1기 3년 동안에는 질(質) 중심 경영을 강조해왔지만 신경영 2기부터 ‘먼저, 제때, 자주’의 스피드 경영을 강조해오고 있다. 반도체 사업이 그 좋은 모델인데, 내 자신이 타이밍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남보다 먼저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 시간과 피나는 싸움을 벌여왔다.

    아직도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볼 때는 먼저라는 개념이 희박한 상태에 있다. 하지만 반도체를 비롯한 몇몇 분야에서는 세계 시장 선점의 가능성이 보인다. 반도체분야에서는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 1기가 D램을 개발했고 CDMA분야에서는 모토롤라보다도 먼저 상용화 기술을 개발했다.

    앞으로 기업경쟁의 승패는 시간 자원을 누가 더 먼저, 누가 더 빨리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로 손자병법의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상지상(上之上) 전략을 경영에 도입하면 남보다 먼저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을 선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록스의 삼고초려

    어떻게 해야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 우선은 남의 기술을 사오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자체 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다. 필요할 때는 기술을 사오는 것도 전략이다…다만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그저 돈 주고 물건 사오듯 할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진지한 자세와 열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배울 때에는 머리를 숙여서 겸손하게 가능한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도록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 배우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뛰지 않거나 심지어 귀찮아하며 ‘내가 오너인데’ 하는 값싼 자존심만 내세운다면 앞선 기술을 가질 자격이 없다.”

    ‘제록스의 삼고초려’란 글에서는 이런 에피소드도 소개되고 있다.

    “창업 이래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며 복사기의 대명사로 군림하던 제록스는 1980년대 들어 캐논이라는 새로운 경쟁자를 맞아 90%를 유지하던 시장점유율이 한때 37%까지 떨어지는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결국 제록스는 세계 최고라는 자만심을 버리고 후발업체인 캐논을 삼고초려했다. 캐논에 찾아가 원가를 낮추고도 세계적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운 것이다. 벤치마킹(앞선 분야배우기)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탄생시킨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제록스는 과거의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마침내 시장점유율을 80%대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1991년에 회사에서 혁신 운동을 한다고 하기에 우선 분야별로 전문가를 모아서 일본, 미국의 선진기업부터 살살이 둘러보라고 하면서 이제부터라도 최고 기업을 목표로 설정하고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혁신 운동의 성과가 ‘전년 대비 몇% 개선’ 식으로 채워진다면 아예 보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APRO-S(Ace Professional-Samsung)라는 이름의 경영혁신 운동이었다. 지금도 회사별로 선진기업을 꾸준히 벤 치 마킹하고 있다. 그 중 하나로 삼성조선은 미국·일본·덴마크 회사들과 매년 수차례 기술 교류회를 갖고 있다.

    제록스 같은 초일류 기업도 삼고초려의 고통을 감내하고 후발업체한테 배우는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신라호텔 요리사에게 세계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분위기를 맛보도록 권하는 것도 최고를 모르고서는 최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최고가 아니더라도 우수한 기업, 우리보다 못한 기업에서도 배울 게 있는 것이며, 망한 기업에서도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 회장은 기술을 사올 때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도 하면서 일본 회사 도레이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도레이가 뒤퐁으로부터 나일론 기술을 들여오기 위해 자본금보다 더 많은 기술료를 냈던 것은 일찍이 기술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이다…일본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총 370억 달러를 미국 등 외국 기업에 기술료로 지급했다. 기술을 도입할 때는 파는 쪽에서 요구하는 금액을 다주는 것이 유리하다. 100만 달러를 요구하면 100만 달러를 아낌없이 다 주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의 실패 사례까지 덤으로 배울 수 있다. 몇 푼 아끼겠다고 기술료를 반으로 깎으면 틀림없이 그들은 10만 달러어치밖에 가르쳐주지 않는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서 1983년에 64KD램을 개발하고 10년만인 1992년 64M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할 수 있었던 것도 기술료를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주었고, 기술자를 영입할 때도 급여를 당시 삼성전자 사장보다 3배나 주면서 기술자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경제사상가이건희 #팍스테크니카시대 #기술전쟁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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