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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게 일본 타도를 외치는 건 어리석은 일”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⑳] “조용히 실력을 키우면 될 것을…”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시끄럽게 일본 타도를 외치는 건 어리석은 일”

  • ● 구매를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리라
    ● 삼성은 조달청에 버금가는 큰손
    ● 장인의 예술화, 용역의 예술화
    ● ‘샤프’나 ‘산요’보다 마진을 더 주라
    ● 떡이 돼버린 휴대폰 단박에 고친 우에다
    ● 중소기업인력개발원을 기증한 이유
    ● 새끼 거북에게서 배우는 지혜
    ●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 하청도 있지만 상청도 있다
2011년 7월 29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2011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 참관해 제품 설명을 듣는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2011년 7월 29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2011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 참관해 제품 설명을 듣는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기술경영을 내건 이건희 회장은 ‘전자업의 개념’을 제당이나 섬유사업처럼 대규모 설비가 필요한 장치산업이 아니라 수많은 부품의 조합이 필요한 ‘조립산업’이라는 데 주목했다. 그러면서 강조한 것이 중소 부품업체와의 협력관계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를 도덕·명분적 시각에서 돕고 살자는 게 아니라 ‘전자업의 본질’적 측면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글 ‘2인3각’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구매를 예술 수준으로

“양산 조립을 주축으로 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협력회사 역할을 제외하고 대기업의 경쟁력을 논할 수가 없다. 우선 대기업이 독자적으로 제품을 완성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동차의 경우 부품이 2만 개, VCR은 800~900개인 걸 감안하면 제품 하나에 70~80% 이상은 중소기업에서 생산하는 부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완성품이 소비자에게 전달될 때까지 거치는 수많은 공정 중 상당 부문도 협력회사가 맡게 된다. 만약 어느 한 곳에서 불량품이 발생하면 그동안 투입한 부품, 노동력, 자금 등 자원에 막대한 손실이 발생한다.

지금까지 많은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을 하청(下請)업체라 부르며 마치 상전이 하인을 대하듯 해왔다. 지금도 환갑이 넘어 보이는 중소기업 사장이 대기업의 새파랗게 젊은 사원이나 간부에게 거래대금을 받기 위해 굽실거리는 장면을 가끔 볼 수 있다. 중소기업을 공존공영의 동반자가 아닌 원가절감의 대상으로만 인식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일방적 거래는 대기업에도 커다란 손실을 가져왔다. 마지못해 가격을 인하하고 낮은 마진을 감수해야 했던 중소기업들은 ‘검사에만 안 걸릴 정도로 적당히 넘어가자’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또 품질 향상에 대한 동기부여가 적었기 때문에 불량률이 높아졌고 납기 지연을 당연하게 여겼다. 결국 대기업은 품질에 대한 고객의 신뢰라는 자산과 당장 손에 잡히는 원가절감을 맞바꾼 셈이 된 것이다.”



협력업체와의 관계를 말할 때 이 회장이 만들어낸 말이 ‘구매의 예술화’다. 신경영 선언 때 고인의 육성이다.

“올해(1993)만 해도 삼성그룹 총 구매액이 9조8000억 원, 품목 수는 52만5000개, 구매업체 수는 1만9000개에 달한다. 제조원가에서 차지하는 원자재비 비율이 삼성전자는 60~70%이고, 신세계가 75%, (삼성)물산이 99%다. 전체 원가의 평균 50~60%를 협력업체에 의존하는 상황이니 사업의 성패는 구매 단계에서 이미 결판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합상사나 백화점의 경우는 대기업의 생존권 자체를 중소기업이 쥐고 있다고 봐야 한다. 중소기업 사장들을 존중해 줘야 삼성에 대한 충성심이 생기고 물건도 잘 만들자고 생각할 것 아닌가, 갑(甲)으로 여겨지는 삼성이 갑질을 안 하고 잘해 주면 더 감동하지 않겠나. 구매를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리라.”


삼성은 조달청에 버금가는 큰손

‘구매의 예술화’와 관련해서는 기외호 전 코리아헤럴드 사장의 증언이 생생하다. 그는 비서팀장을 하다가 신경영 선언이 선포되기 직전인 1992년 삼성전자 구매담당 임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신경영 이후 ‘구매의 예술화’를 현장에서 실행하는 일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그의 말이다.

“1993년의 경우 삼성전자는 해외 2000여 개, 국내에는 무려 3000여 개에 달하는 ‘협력회사’가 있었습니다. 이들 회사로부터 부품과 설비를 매년 수조원씩 사들였으니 조달청을 넘어서는 대한민국 제일 큰손(?)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품목 수만 5만 개가 넘었습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조립과 장치산업의 차이를 더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이렇게 부연했다.

“기존에 삼성의 주력사업이었던 모직이나 제당, 또 포스코 같은 철강 기업은 원당·원모·철광석 같은 원재료를 투입해 완제품인 설탕·섬유·철강을 만듭니다. 어마어마한 설비가 필요하지요. 이런 장치산업은 예를 들어 총생산량이 1만t이라고 할 경우 불량률이 1%라고 할 때 불량품만 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전자 같은 조립 산업은 부품 하나, 재료 하나하나가 완성품의 품질을 좌우합니다.

휴대폰만 봐도 아무리 다른 걸 다 잘 만들어도 버튼 만드는 중소기업이 불량품을 납품하면 휴대폰 자체가 불량이 되는 이치이지요. 자동차도 엔진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기름이 새거나 창문이 잘 닫히지 않으면 그 차 자체가 불량품 아닙니까. 조립과 장치산업은 이처럼 업의 개념이 완전히 다릅니다. 시장에서 배추 한 포기 사봤을 리 없을 이건희 회장이 ‘구매의 예술화’를 꺼내 든 것은 이처럼 업의 개념에 대한 확실한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회장은 생전에 남긴 글에서 ‘파이프’를 예로 들며 기업 내부나 대기업 중소기업이 고르게 발전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름 100cm짜리 파이프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중간 부분이 50cm로 줄어 있으면 그 파이프는 결국 50cm짜리 구실밖에 할 수 없다. 파이프는 입구에서 끝까지 지름이 일정해야지 어느 한 부분이라도 좁아지면 바로 그 좁아진 부분을 기준으로 용량의 최대치가 결정된다. 같은 식으로 총연장 10km인 10차선 도로에서 어느 부분이 2차선으로 줄어들면 그 도로 역시 2차선 도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예들을 기업 경영에 비추어 보면 경영관리, 생산, 유통, 판매 등 모든 부문의 최저 기준을 고르게 높여야 전체 수준이 향상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장인의 예술화, 용역의 예술화

이 회장은 왜 굳이 구매라는 말 앞에 ‘예술’이란 말까지 붙였을까. 기 전 사장의 추측은 이렇다.

“그만큼 구매 담당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일에 대한 격을 높여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물건을 사는 구매 부서는 어떤 회사든 갑(甲)의 입장입니다. 크든 작든 비리가 생길 소지가 있고, 비리까지는 안 가더라도 ‘내가 당신네 회사 물건을 사주는데’라는 식으로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회장은 이런 문화를 바꾸려면 구매 담당 직원들의 품격과 능력이 한 차원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에는 영혼이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각자 자기 본업에 영혼을 불어넣는 구매 예술가가 돼 멋지게 한번 해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여기서 잠깐,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을 만났을 때 ‘구매’라는 업의 본질에 대해 들은 말이 기억나 소개하고 싶다. 손 전 원장 말이다.

“1979년인가 이탈리아에서 온 한 구매 전문가가 삼성이 만드는 압축기 3분의 1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빅딜’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일본 마쓰시타와도 협상 중이라고 하면서 삼성과 경쟁을 붙여 한 푼이라도 더 싸게 사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터무니없이 싼 가격을 요구했습니다. “안 된다”고 하자 완전히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자기가 압축기 원가 구조를 분석해보니 제일 많이 차지하는 게 구리라면서 삼성이 사는 것보다 30%싸게 공급하는 회사를 소개해주겠다는 겁니다. 구리 말고 다른 원자재도 글로벌 소싱을 통해 지금보다 더 싸게 조달해 주겠다면서 말이지요.”

손 전 원장은 당시 그의 말보다 노트에 눈길이 갔다고 한다.

“노트를 살짝 들여다보니 압축기 가격, 원가 구조, 부품·소재 가격은 물론 관련 글로벌 소재 기업 리스트가 죽 망라돼 있더군요. 이 모두를 조합해낸 가격 시뮬레이션도 다 적혀 있었구요. ‘아, 이 사람은 우리보다 삼성을 더 잘 알고 있구나’ 살짝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우리는 그저 ‘깎아 달라, 안 된다’며 입씨름을 벌이던 수준이었는데 말이죠.”

손 전 원장으로서는 치밀한 원가 분석을 통해 글로벌 업체들의 부품 생산 및 조달 방법을 훤히 꿰면서 상대를 쥐락펴락하는 구매 전문가를 처음 본 것이었다. 협상은 결렬됐지만 구매라는 게 그 어떤 분야보다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한 분야라는 걸 절감했다고 했다. 그는 훗날 삼성SDI로 간 첫해(1996년)에 구매 혁신만으로 1조 1000억 원을 아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12인치에서 시작한 브라운관이 14인치, 20인치로 계속 커지면서 유리 가격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턱없이 비싸게 부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추가되는 유리 양은 이 정도인데 왜 더 비싼가’라고 따지며 직접 원가 구조를 분석해 새 가격 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무작정 ‘싸게 만들라’고 압력을 넣는 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소 협력업체들도 기술개발을 통해 원가를 내리게 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구매의 예술화’를 ‘용역의 예술화’ ‘장인의 예술화’란 말까지 확장했다. 불량품을 줄이기 위해서는 협력업체 사람들을 잘 대해주고 대금결제를 빨리 해주는 걸 넘어서 아예 자금과 기술까지 제공해 이들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리라는 거였다. 회장의 육성이다(1993년 도쿄회의).


“‘샤프’나 ‘산요’보다 마진을 더 주라”

“내가 평소 말해 온 ‘5가지 why가 무엇인가?’, 사물의 근원을 찾아내는 것이다. 왜 불량이 나는가? 조립 불량인가, 부품 불량인가, 납땜 불량인가? 파고 들어가면 알 수 있다. 이익이 당장 나지 않아도 좋다. 종업원, 작업반장, 협력업체까지 다 모아서 개선 방법을 찾아라. 상품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해 협력업체를 교육하고 자금과 기술력을 제공해 관련되는 수십 개 협력회사를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우리가 하는 조립업이라는 업의 개념이다. 부품을 만드는 수십 수백 개 협력업체를 잘 키우는 일, 이것이 바로 ‘장인의 예술화’이다. 협력업체를 등쳐서 싸게 사는 것, 잔재주 부리는 것, 우리만 덕 보자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협력업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기술도 키워주고, 자금도 도와주는 게 예술이다.”

그러면서 일본 기업들보다 마진을 더 주라고도 한다.

“일본 수준으로 불량률을 낮출 수 있다면 적자가 나도 좋으니 협력업체에 10억~20억씩 선금을 줘도 좋다. ‘샤프’나 ‘산요’보다 마진을 더 주라. 그렇게 해서 삼성 제품이 시장에서 샤프 제품과 같은 값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샤프가 타도되는 것이다. 쓸데없이 ‘샤프 타도’ 떠들어봐야 좋을 게 없다. 지금 샤프가 우리한테 부품도 안 팔려고 하지 않는가. 조용히 실력을 키우면 될 것을 ‘타도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여서 상대방이 경계하고 담을 쌓도록 만드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 회장은 “이제부터라도 중소기업은 고개만족과 품질향상을 위해 함께 뛰는 ‘2인3각’의 파트너로서, 하청업체가 아니라 자식까지 대를 물려가면서 거래하는 공존공영 관계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며 이렇게 덧붙여 말한다(글 ‘2인3각).

“대기업은 하드적인 자금지원은 물론 소프트적인 정보제공, 기술지도, 경영 컨설팅까지 해주어야 한다. 일본에서는 검사과, 검품과라는 부서가 점차 없어지고 있다. 애당초 불량품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력회사를 지도하기 때문이다. 물론 협력회사라고 무조건 감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불량을 눈감아주는 것은 고객 입장에서 보면 범죄를 함께 저지르는 공범자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자율과 경쟁이라는 원칙에서 ‘배우자를 얻는다’라는 마음가짐으로 협력회사와 동반관계를 맺어야 한다.

정부 차원의 지원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정치 논리에 의한 과보호 장치보다 대기업과 실질적인 협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부동산 담보 위주 대출제도도 시급히 개선돼야 할 과제다. 경영자의 생활철학, 신념, 기술 수준을 고려하여 대출해 주는 선진국에 비한다면 우리나라 금융 관행은 아직도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경영자도 장인정신과 프로 정신을 발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경영자’라는 기업가 정신을 길러야 한다. 품질개선과 기술개발에 노력하여 대기업이 ‘제발 당신회사 제품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해 올 정도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일류 중소기업이 되는 것이다.”


떡이 돼버린 휴대폰 단박에 고친 우에다

이건희 회장은 2013년 5월 22일 제임스 호튼 코닝 명예회장을 만나 만찬을 함께 하며 협력 증진 방안을 논의했다.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은 2013년 5월 22일 제임스 호튼 코닝 명예회장을 만나 만찬을 함께 하며 협력 증진 방안을 논의했다.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이 역점 사업으로 추진한 일본인 고문 활용이야말로 ‘장인의 예술화’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옮긴 상징적인 일이었다. 다시 기외호 전 사장 말이다.

“1991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삼성전자 휴대폰은 통화 중에 수시로 끊기고 상대방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삼성 임원들도 쓰기 꺼릴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키패드(key-pad·문자와 번호판)가 지금처럼 터치 패널식이 아니라 버튼식이었는데, 좀 쓰다 보면 일부 버튼은 누르면 다시 올라오지 않는 문제까지 나왔습니다. 업계 용어로 ‘떡’이 되는 거였죠. 버튼 속에 있던 스프링 탄력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문제였습니다. 해외에서도 ‘버튼에 문제가 많다’는 클레임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경기도 변두리에 있던 납품업체 공장을 헐레벌떡 찾아갔더니 업체 사장은 “우리가 성의가 없거나 원가 절감하려고 나쁜 재료를 써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밤을 새워가며 고쳐보려 해도 되지 않으니 정말 죽을 노릇”이라며 도리어 울다시피 하소연하는 것 아닌가.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기외호의 뇌리를 스치는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무거운 마음으로 회사로 돌아오는데 문득 일본인 고문으로 와 있던 우에다 씨 생각이 났습니다. 일본 회사 퇴직 후 삼성으로 건너와 일하고 있었는데 금형 사출 성형 전문가였습니다. 급히 그를 불러 현장에 급파(?)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원인을 파악해 해결책을 내놓는 것 아니겠습니까. 업체 사장과 직원들은 만세를 불렀습니다. 우에다 고문은 고졸이었는데 서울 공대 나온 기술자들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단박에 해결한 겁니다. 하기야 일본 공장에서 그런 유의 시행착오를 수없이 경험한 사람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습니다.”

그는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일본인 고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휴대폰 겉면이 소니 것처럼 반짝반짝 윤이 나지 않는 문제도 이유를 알지 못해 전전긍긍했는데 결국 일본인 기술자들이 해결했습니다. 선진기술과 현장 경험의 노하우가 그토록 귀하다는 걸 여러 번 깨닫는 순간들이 있었죠.”

그러면서 이건희 회장이 왜 그렇게 큰 비용을 들여 일본인 고문들을 영입했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다들 기억하다시피 당시 전자산업을 선도한 나라는 미국도, 독일도 아니고 일본이지 않았습니까. 세계 최고 산업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기술자들이니 얼마나 노하우가 많았겠습니까. 처음에는 일본인 고문들을 활용하라는 회장 지시를 마뜩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집과 차를 주고 기사에 비서까지 붙여주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데 ‘돈이 아깝다’ ‘말이 안 통해 거추장스럽다’는 분위기도 있었지요. 하지만 앞서 키패드 불량 사례에서 보았듯이 도저히 우리 실력으로 안 되는 문제 한 건만 해결해도 그 사람들 채용한 ‘본전’을 뽑는 거 아니겠습니까. 중소기업 입장에서 무슨 재주로 일본인 기술자를 데려다 쓸 수 있겠습니까. 회장은 바로 그런 애로 사항들을 삼성 같은 모기업이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중소기업인력개발원을 기증한 이유

이건희 회장은 중소기업들을 위해 아예 교육기관을 세우는데 바로 경기도 용인 문수봉 산자락에 있는 중소기업인력개발원이다. 매년 전국의 중소 벤처 소상공인들이 찾아 교육을 받는 연수시설인데, 대규모 빌딩에 잔디구장까지 갖췄다.

건물 입구 비석에는 ‘중소기업인의 열망과 이건희 회장의 뜻이 함께하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회장의 지시로 삼성이 만들어 중소기업중앙회에 기증한 것이다. 연수원 추진 시작부터 관여한 이상대 전 삼성물산, 삼성엔지니어링 부회장 말이다.

“회장은 ‘중소기업들이 장기적으로 국제경쟁력을 가지려면 역시 사람을 키워야 한다’면서 직접 연수원을 만들어 중소기업중앙회에 기증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중앙회 입장에서야 당연히 오케이였죠.

회장은 우선 시설 면에서 삼성 연수원보다도 더 좋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은 해외 연수원 시설을 둘러보는 벤치마킹 출장을 많이 다녔습니다. 회장은 또 짓고 나서 나 몰라라 하지 말고 삼성인력개발원 사람들이 교육뿐 아니라 건물 운영까지 맡으라고 했습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은 지난해 이건희 회장 별세 다음 날인 10월 26일 언론 인터뷰에서 “창문틀부터 칠판 하나까지 삼성 연수원과 똑같은 것으로 꼼꼼하게 챙기셨다”고 회고했다.

드디어 연수원 준공식을 하던 날, 현장 호응은 굉장했다고 한다. 다시 이상대 전 부회장 말이다.

“수백여 명이 ‘이건희, 이건희’를 연호하며 서로들 달려가 ‘회장님 고맙습니다’ 인사하느라 왁자지껄했습니다. 회장님도 너무 기분이 좋아보였습니다.”
이날 개원식에서는 이 회장에게 가위가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테이프 커팅식이 진행되는 작은 ‘의전 실수’가 있었는데, 회장이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위 모양을 하면서 커팅하는 시늉을 해 좌중에 웃음이 번졌다고 한다.

다시 이상대 전 부회장 말이다.

“회장은 이후 증축은 물론 삼성스포츠센터를 만들어 중소기업 간부들과 삼성 간부들이 만나 함께 운동하고 대화하는 소통의 장을 만들라고까지 했습니다. 중소기업의 애로 사항뿐 아니라 삼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면서 말이지요.”

2002년 중기중앙회는 이건희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한다. 회장은 “중소기업한테 패를 받기는 처음”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평소 동물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았던 고인은 글 ‘새끼 거북에서 배우는 지혜’에서 ‘파이를 독점하는 이기주의는 일시적으로는 득을 보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모든 것을 잃는다. 협력해서 파이를 더 키워 나누는 상생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글의 전문이다.


새끼 거북에게 배우는 지혜

“어미 바다거북은 산란기가 되면 바닷가로 올라와 500개에서 많게는 1000개 알을 낳는다. 모래 속 깊이 구덩이를 파고 한번에 100개가량을 낳은 뒤 모래를 끌어모아 덮는 식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낳는 것이다. 그럼, 새끼 거북들은 어떻게 이 모래 웅덩이를 빠져나올까. 100마리나 되는 새끼들이 뒤엉킨 상태일 텐데 어떻게 그 좁은 구덩이를 빠져나올 수 있을까.

동물학자들이 관찰한 결과 역할 분담과 협력을 통해 빠져나온다는 것이 밝혀졌다. 구덩이에서 막 깨어난 새끼들 중 꼭대기에 있던 녀석들이 천장을 파내고 가운데 있는 것들은 벽을 허물고 밑에 있던 새끼들은 떨어지는 모래를 밟아 다지면서 다 함께 모래 밖으로 기어 나오더라는 것이다. 또 실험하면서 알을 한 개씩 묻어놓았더니 27%, 두 개씩 묻어놓았을 때에는 84%, 네 개 이상 묻어놓았을 때는 거의 100%가 알에서 깨 구덩이 밖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새끼 거북들은 이처럼 협력을 통해 구덩이에서 대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고인의 상상력은 여기서 기업경영에 대한 더 넓은 비전으로 확장된다.

“오늘날 세계의 흐름 역시 반목과 대립에서 벗어나 경쟁자에게도 내 것을 주고 협력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국내 사정을 돌아보면 우리는 아직도 좁은 테두리의 소모적 상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파이를 키우기보다 얼마 되지도 않는 파이를 나누는 데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고 있다.

나눌 몫이 적다 보면 피를 나눈 가족도 이기적인 갈등과 대립이 생기게 마련이다. 아직 우리는 파이를 더 크게 키우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하는 단계에 있다. 대승적 차원에서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는 상생의 길이 장래 더 큰 몫을 가져다주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 회장은 기업활동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경쟁의 세계이지만 경쟁이란 게 시장에서 몰아내는 게 아니라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기업경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성장하고 이익을 내기 위한 것이지 경쟁 기업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게 아니다. 더구나 우리 기업들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다국적기업들과 국내 시장에서 1대 1로 맞서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자칫하면 우리 기업 상당수가 언제든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기업 활동은 경쟁하면서도 공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역사의 흐름이나 사회발전 흐름으로 보더라도 반목과 대립의 시대는 지났다. 완승하거나 완패하는 게임, 모든 것을 얻거나 잃어버리는 게임보다는 모두가 이기는 상생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이 회장의 이런 상생의 철학은 기술경영의 핵심이기도 했다. 그는 무한경쟁시대에는 적과 동지가 따로 없다고 했다. 전략적으로 제휴하고 협력해서 외톨이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의 글 ‘소니가 JVC에 패배한 이유’의 전문이다.

“이미 전개되고 있는 무한 경쟁의 무대에는 나름대로 최고의 제품들만 오르게 되어 있다. 최고의 품질을 갖추어서 이 무대에 오르려면 역시 남보다 한발 앞선 기술개발노력이 있어야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 음 더 나아가, 하나의 기술을 여러 연관 기술과 결합시켜 기술의 확대 재생산울 일궈내는 ‘기술의 표준화 가 필요하다고 본다.

기술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개발된 기술이 그 자체만으로 독립 상품이 되어 개발한 회사가 바로 돈을 버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개발된 기술이 다른 기술과 결합해야만 빛을 보게 되는 경우다. 이 둘 중에서 내가 더 관심을 갖고 있는 쪽은 후자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나온 ’윈도‘라는 컴퓨터 운용기술의 경우, 기존 기술에 비해 화면표시 기능이 월등한 장점을 가진 신기술이다. 그러나 이 신기술은 독자적으로 상품화될 수 없고, 이를 공개하여 다른 기술들과 결합해야만 빛을 볼 수 있다. 윈도에 맞는 컴퓨터를 만드는 하드웨어 회사, 윈도에 맞는 인터넷, 게임 등 각종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들의 유기적인 협조가 있어야 비로소 대량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 개발된 기술을 과감하게 공개해 다른 관련 기술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대량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바로 기술표준화다. 여기서 기술표준화란 법적으로 승인된 기관에 의해서 결정된 표준, 즉 KS, JIS, ISO 등과는 다른 개념으로 의미상의 구별을 위해 ‘사실상의 표준(De Facto Standard)’ 이라고도 부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라는 신기술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기술표준화까지 성공한 회사다. 기술표준화에 성공한 예를 더 든다면 일본 JVC의 비디오 VHS 방식,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등을 꼽을 수 있다.

기술개발에는 성공했으나 표준화에 실패해 땅을 치는 경우도 있다.

세계 최초로 베타(β) 방식의 비디오를 개발한 소니는 그보다 1년 늦게 시장에 뛰어든 NC의 VHS방식에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소니는 기술을 공개하지 않고 기술의 배타적 소유를 통해 큰 이익을 확보하려고 한 데 반해 후발자인 JVC는 자신의 기술을 과감히 경쟁사에 공개해 기술의 표준화를 이루었다. 그 결과 JVC의 비디오가 소비자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 시장을 석권하게 된 것이다.

결국 기술에 집착한 소니는 1986년 비디오 생산을 포기해야 했고 마침 내 베타 방식의 비디오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삼성전자도 세계적인 표준을 무시하고 4mm 캠코더를 개발했다가 8mm가 세계 표준으로 정착 되는 바람에 막대한 개발비를 날려버린 쓰라린 경험이 있다. 앞으로 기술 자체는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한 한 가지 조건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표준 구축 여부가 경쟁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일단 개발된 기술은 곧 공개되고 기술의 라이프 사이클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 앞으로는 자체 개발한 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의 기술이라도 남보다 빨리 표준화시켜서 수익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하청도 있지만 상청도 있다

이건희 회장은 직원들에게 중소기업들을 하청업체가 아닌 ‘협력업체’라 부를 것을 주문했는데 이 용어를 고인이 만들어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고인이 직접 책에서 한 말이다.

“용어는 시대변화를 리드하고 때로는 한 사회나 조직의 철학을 대변하기도 한다. 삼성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하청업체가 아닌 협력업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조직 내에 널리 인식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와 관련해 배종렬 전 제일기획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회장님은 나름대로 전문 용어를 많이 만들었어요. 커뮤니케이션을 심플하게 하려면 서로가 빨리 말을 알아들어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야 한다면서 삼성에서만 통하는 용어들을 만들었는데, 한 100여 가지가 넘는 것 같아요. 상생이란 말도 지금은 너도나도 쓰지만 당시에는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약간 샛길로 빠지는 듯 하지만) 배 전 사장의 ‘전문용어’라는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대목이 있다. 이 회장이 생전에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를 창조해서 사용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일화를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은 이렇다.

“어느 날, 제게 뜬금없이 ‘진 박사, 상청이 뭔 줄 알아?’ 물으시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모르겠습니다’ 했더니 ‘상청(上請)은 윗사람이 자기 말을 듣도록 만드는 거야, 아랫사람은 그런 걸 잘해야 된다’ 하시더라고요. 순간, 머릿속에 확 박혔지요. 사실 일 잘하는 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을 일하게 하는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윗사람을 설득시키는 ‘팔로우십(followship)’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회장은 그런 걸 ‘상청’이라는 당신만의 언어로 표현한 거죠. 하긴 하청이란 말이 있으니 상청이란 말도 있을 법 하지 않겠어요? 회장은 또 ‘윗사람한테 한 이야기가 나한테 지시로 돌아오면 그게 최고의 상청’이란 말도 하셨어요. 직장 생활하는 내내 가슴에 남는 말이었습니다.”

#경제사상가이건희 #구매의예술화 #삼성 #신동아



신동아 2021년 9월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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