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호

최태원 ‘미래 투자’ SK 뇌전증 신약, ‘K바이오’ 새 역사 썼다

성과 재촉 않고 실패해도 투자 확대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20-06-2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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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개 치료제 복용에도 발작 계속되는 환자 대상 임상 진행

    • 33억 달러 규모 美 뇌전증 치료제 시장서 5월 판매 시작

    • 후보물질 발굴부터 FDA 허가까지, 국내 제약사 자력 완수 첫 사례

    • 1993년 신약개발연구팀 조직 뒤 27년 만의 결실

    • 최태원 회장 “실패 가능성 커도 신약 개발로 승부 보겠다” 의지

    [SK바이오팜 제공]

    [SK바이오팜 제공]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세계경기가 침체했지만 주식시장에는 돈이 몰리고 있다. 특히 바이오 관련주에 대한 투자자 관심이 높다. 6월 23~24일 공모청약에 들어가는 SK바이오팜은 그중에서도 기대주로 손꼽힌다. 5월 미국 판매를 시작한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미국제품명: 엑스코프리)를 개발하는 등 세계적 기술력을 갖췄다는 평가다. 

    세노바메이트는 국내 제약사가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시험, 미국식품의약국(FDA) 승인, 현지 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독자적으로 수행한 첫 신약이다. 5월 말 열린 제21회 ‘대한민국신약개발상’ 시상식에서 신약개발부문 대상을 받았다. 조정우 SK바이오팜 대표는 세노바메이트 개발 공로를 인정받아 4월 ‘과학기술훈장 혁신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세노바메이트 투약환자 20% 이상 완전발작소실

    국내 최초의 독자 개발 글로벌 신약 
세노바메이트(미국 제품명: 엑스코프리). [SK바이오팜 제공]

    국내 최초의 독자 개발 글로벌 신약 세노바메이트(미국 제품명: 엑스코프리). [SK바이오팜 제공]

    뇌전증은 뇌신경세포에서 발생한 이상 흥분으로 경련·발작이 반복되는 질환이다. 뇌전증 환자는 이 때문에 일상생활과 경제활동 등에 어려움을 겪고,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세계적으로 약 6500만 명이 뇌전증을 앓고 있으며, 매년 2만 명 이상 신규 환자가 생기는 것으로 집계된다. 비교적 흔한 질환이라 일찍부터 여러 제약사가 뇌전증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환자가 부정기적 발작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는 게 현실이다. SK바이오팜이 개발한 신약에 대중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세노바메이트는 FDA 승인을 앞두고 실시한 임상시험에서 환자 발작 빈도 감소 효과를 입증했다. 약물 투여 기간에 발작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완전발작소실’ 비율도 위약 투여군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미국, 유럽, 아시아 지역 뇌전증 환자 임상시험 결과를 보면 약물 치료 유지 기간 동안 발작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환자 비율이 세노바메이트 투여량에 따라 각각 4%(100㎎), 11%(200㎎), 21%(400㎎)로 나타났다. 반면 위약군의 완전발작소실 비율은 1%에 그쳤다. 



    기존 뇌전증 치료제를 1~3개 복용하는데도 발작이 멈추지 않은 환자 22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또 다른 임상시험에서도 세노바메이트는 유효성이 확인됐다. 세노바메이트를 부가적으로 투여한 환자의 발작 빈도가 위약군 대비 낮아졌고, 투약군의 28%에서 완전발작소실이 나타났다. 세노바메이트 임상시험 결과 관련 논문은 미국신경과학회(AAN) 공식 학술지 뉴롤로지(Neurology) 등에 실렸다. 

    세노바메이트 임상시험에 참여한 스티브 정 박사(미국 애리조나주 배너대 메디컬센터 신경과학연구소장 겸 뇌전증 프로그램 책임자)는 “임상시험 중 세노바메이트를 복용한 환자 가운데 28%가 유지 기간 동안 완전발작소실을 나타낸 건 고무적인 연구 결과”라고 평했다. SK바이오팜 관계자도 “FDA가 세노바메이트 허가 과정에서 특히 이 점을 눈여겨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발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곧 뇌전증 환자 삶의 질이 근본적으로 개선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노바메이트는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을까. 그 출발점을 찾자면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SK그룹이 에너지·화학 분야 사업에 강점을 갖고 있던 때다. 최종현 당시 SK회장은 그룹이 갖고 있는 정밀화학 쪽 전문성을 발전시키면 제약·바이오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를 목표로 1993년 대덕연구원에 ‘P프로젝트팀’을 꾸렸다. 제약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Pharmaceutical’의 첫 글자를 프로젝트명으로 삼은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시작된 중추신경계 신약 개발의 꿈

    2월 6일(현지시각) 미국 뉴저지주에서 열린 ‘이노베이터 어워드’ 시상식에서 조정우 SK바이오팜 대표(왼쪽에서 네 번째)를 비롯한 회사 관계자들이 바이오 뉴저지협회 혁신상을 수상했다. [SK바이오팜 제공]

    2월 6일(현지시각) 미국 뉴저지주에서 열린 ‘이노베이터 어워드’ 시상식에서 조정우 SK바이오팜 대표(왼쪽에서 네 번째)를 비롯한 회사 관계자들이 바이오 뉴저지협회 혁신상을 수상했다. [SK바이오팜 제공]

    그 무렵, 이미 글로벌 제약업계는 신약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평가한 상황이었다. 반면 국내 제약사 다수는 상대적으로 실패 확률이 낮은 복제약 생산에 집중하고 있었다. P프로젝트팀은 다른 길을 택했다. 곧바로 중추신경계 질환 치료제 연구개발에 뛰어들었다. 이왕 제약·바이오 분야에 진출한 만큼 성공했을 때 고수익 실현이 가능한 제품으로 승부를 보는 게 좋겠다는 경영진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SK는 1990년대 중반 미국 뉴저지에 의약개발전문연구소를 세우는 등 일찍부터 글로벌 진출을 염두에 둔 행보도 펼쳤다. 국제적 연구·개발 네트워크 속에서 신약 관련 사업을 이어가던 SK그룹 내 조직이 2011년 물적분할을 통해 독립한 게 SK바이오팜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20년 넘는 세월 동안 중추신경계 관련 연구·개발을 한 덕에 우리 회사는 중추신경계에 특화된 화합물 라이브러리를 갖추게 됐다. 이를 기반으로 이번에 세노바메이트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1993년 신약 개발에 도전한 이후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혁신과 패기, 열정으로 지금까지 성장해 왔습니다. 글로벌 신약 개발사업은 시작할 때부터 여러 난관을 예상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꾸준히 투자해 왔습니다. 혁신적인 신약 개발의 꿈을 이룹시다.” 

    2016년 6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SK바이오팜 생명과학연구원을 찾아 구성원들 앞에서 한 발언 일부다. 전문가들은 SK바이오팜이 지난해 한국 최초로 독자 신약 개발에 성공한 배경에 최태원 회장의 이러한 ‘뚝심’이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한다. SK 제약·바이오 부문의 씨앗을 뿌린 건 고 최종현 회장이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를 통해 사업을 성장시킨 건 아들 최태원 회장이라는 의미다. 

    신약 개발에는 보통 막대한 비용과 오랜 시간이 투여된다. 제약업계에 따르면 신약 후보물질 1만 개를 연구해도 제품화돼 시장에 나오는 것은 한두 개에 불과하다. 특히 많은 제약사가 고배를 마시는 건 사람 대상 임상시험 때다.

    한국 최초 독자 개발 글로벌 신약

    최태원 SK그룹 회장(오른쪽)이 2016년 6월 8월 SK바이오팜을 찾아 신약 개발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SK그룹 제공]

    최태원 SK그룹 회장(오른쪽)이 2016년 6월 8월 SK바이오팜을 찾아 신약 개발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SK그룹 제공]

    실험실에서 약효가 입증된 물질을 찾아낸다 해도 그것을 인체에 투여해 유효성과 안전성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안전 기준이 높아져 임상시험에 드는 시간과 비용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임상시험은 보통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작은 실수라도 생기면 약물 승인이 좌절되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자본과 기술력이 글로벌 제약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국내 기업은 임상 1상 혹은 2상 단계에서 해외 제약사에 기술을 넘기고 이익을 분배받는 방식을 택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러한 ‘기술 수출’ 또한 한국 제약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그런데 SK바이오팜은 한발 더 나아갔다. 세계 23개국, 24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 전 과정을 직접 진행했다. FDA 신약 허가 신청도 스스로 했다. SK바이오팜의 미국 법인 SK라이프사이언스에서 FDA 대응을 총괄한 다샨 파텔에 따르면 “신청서만 230만 페이지가 넘어 데이터를 온라인에 업로드하는 데만 12시간 넘게 걸릴 정도”였다. SK바이오팜이 FDA에 관련 서류를 제출한 게 2018년 11월 21일이다. 그 결과를 기다리던 2019년 초, 조정우 SK바이오팜 대표가 발표한 신년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지난 20여 년간 우리는 국내 누구도 도전하지 않았던 ‘글로벌 신약 독자 개발’의 길을 걸어왔으며, 그 기간만큼 우리 안에 신약개발 역량과 전문성을 축적해 왔습니다. 올해 우리는 전 세계에 우리 역량을 보여줄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멈출 것인지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비장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는 조 대표뿐 아니라 20여 년에 걸친 세노바메이트 개발 과정을 알고 있는 SK바이오팜 직원 모두의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지난해 11월 21일, 꼭 1년의 기다림 끝에 FDA 승인 확정 서류가 SK바이오팜 미국 법인 사무실에 도착하자 현장은 순식간에 환호성과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고 한다. 일부 직원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SK바이오팜 관계자는 “신약 개발을 시작해 FDA 승인까지 받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성공 소식에 직원들 모두 무척 감격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최태원 SK 회장도 FDA 승인 20여 일 뒤 열린 지난해 SK바이오팜 송년회 현장을 깜짝 방문해 “신약 개발의 여정을 같이 걸어온 여러분에게 감사한다”며 함께 기쁨을 나눴다. 이날 직원들 앞에서 “이 세상에 꾸준히 하는 것보다 더 믿을 것은 없다”고 말하는 등 27년에 걸친 신약 개발 여정을 곱씹는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실패했을 때 오히려 투자 확대” 뚝심 지원의 결실

    SK바이오팜 미국 법인 SK라이프사이언스가 2019년 12월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열린 ‘2019 미국뇌전증학회 연례회의(AES)’에 참가한 모습. [SK바이오팜 제공]

    SK바이오팜 미국 법인 SK라이프사이언스가 2019년 12월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열린 ‘2019 미국뇌전증학회 연례회의(AES)’에 참가한 모습. [SK바이오팜 제공]

    최태원 회장이 언급한 ‘꾸준히’는 SK 신약 개발 역사를 요약할 수 있는 단어다. 최 회장은 2002년 “바이오 부문을 육성해 2030년 이후 그룹 중심축 가운데 하나로 세운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신약 개발뿐 아니라 의약품 생산, 마케팅 분야에서도 독자적인 사업 역량을 갖춘 글로벌 바이오·제약 기업을 일구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이후 관련 투자를 이어나갔다. 2007년 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때도 신약개발 조직을 분사하지 않고 지주회사 직속으로 뒀다. 그룹 차원에서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중간중간 위기도 있었다. 특히 2008년, SK가 임상 1상 완료 후 존슨앤드존슨에 기술 수출한 뇌전증치료제 ‘카리스바메이트’가 FDA 신약 허가를 받는 데 실패했을 때는 그룹 안에 신약 개발 사업을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회의론이 확산했다고 한다. 오랜 투자가 성과 없이 마무리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신약 개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SK라이프사이언스에 글로벌 제약사 출신 전문가를 다수 채용함으로써 신약 독자 개발 역량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관련 조사기관에 따르면 2018년 61억 달러(약 7조 3000억 원) 규모인 세계 뇌전증 치료제 시장은 2024년 70억 달러(약 8조4000억 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세노바메이트는 이 시장에서 글로벌 제약사 개발 약물들과 ‘진검 승부’를 벌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SK바이오팜은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 내 마케팅과 영업을 현지 경험이 풍부한 다국적 제약사에 맡기는 대신 자력으로 해내는 것이다. 이 경우 독자 개발한 신약의 매출 이익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세노바메이트는 의사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는 전문의약품이라 대중을 상대로 마케팅할 필요가 없다. SK바이오팜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숙련된 뇌전증 전문의 약 1만 3000명을 대상으로 영업망을 구축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도전이 결실을 본다면, SK바이오팜은 독자 신약 개발에 이어 또 한 번 한국 제약사에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길 전망이다. 

    한편 SK바이오팜은 세노바메이트 외에도 FDA 승인을 받은 수면장애 신약 솔리암페톨(미국 제품명: 수노시)을 보유하고 있다. 솔리암페톨은 SK바이오팜이 임상 1상까지 완료한 후 2014년 미국 바이오기업 재즈 파마슈티컬즈에 기술 수출해 개발한 신약이다. 지난해 FDA 허가를 받아 본격 판매를 시작했다. 

    28년간 중추신경계 관련 질환 치료제를 집중 연구해 차별화한 파이프라인(신약후보물질)을 구축한 SK바이오팜의 다음 신약은 소아용 뇌전증 치료제 ‘카리스바메이트’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SK바이오팜 관계자는 “카리스바메이트가 2017년 FDA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됐고, 현재 미국에서 임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SK바이오팜은 또 뇌암, 희귀신경계질환,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조현병, 조울증 등의 치료제 연구 개발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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