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장군님을 수령으로 모시던 나
김일성 만세 유인물 배포하던 이들이 이제는 민주주의 만세
NGO 신입 상근자로 급여 70만 원 받아
과거 팔아 현재를 사는 일은 이제 그만
조국, 윤미향, 한명숙, 유시민…사람은 되지 못해도 괴물은 되지 말자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6월 7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에서 관계자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솔직히 나는 졸업하지 않길 바랐다. 노동운동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복학하면 1년 더 학교를 어지럽게 만들 수 있겠다고 내심 의욕을 불태웠다. 그럼에도 거의 억지에 가깝게 졸업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이 의식화된 골칫덩어리를 어떻게든 하루빨리 학교에서 내보내야겠다는 학교 측의 세심한 배려(?) 덕분이었고, 스스로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오길 지긋하게 기다려주신 고3 담임 선생님의 따뜻한 인내 때문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언제쯤 올 것 같으냐?”
대입 학력고사를 100일 앞둔 날. 그 시절 막 나가는 학생들의 전통대로 나는 백일주를 잔뜩 마시고 이튿날 술 냄새 폴폴 풍기며 점심 무렵에야 학교에 갔더랬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몽둥이를 들고 찾아오셨다. 끼리끼리 도시락을 먹으며 왁자지껄 시끄럽던 교실 안이 순간 정지 버튼을 누른 듯 고요해졌다. 선생님은 맨 뒷자리에 엎드려 자고 있던 나를 톡톡 쳐서 깨워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오라 하셨다. 낮게 깔린 준엄한 목소리였다. 체벌의 비명이 울려 퍼지겠구나, 나도 친구들도 모두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당신 자동차에 태워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는 것 아닌가.어디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실컷 두들겨 맞을 줄 알았다. 자동차는 먼저 문구점 앞에 멈췄다. 그 무렵 나는 가방조차 들고 다니지 않았다. 하나 고르라 하셨다. 내가 가방이 없어 그러는 것이 아닐진대 어쨌든 쭈뼛쭈뼛 ‘참교육’ 마크가 붙어 있는 검정 가방 하나를 집어 들었더니(그 문구점은 당시 전교조 사태로 교단을 떠난 해직 교사 부부께서 운영하고 있었다) 계산을 치르시고는 나를 다시 차에 태웠다. 이번에는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소고기가 듬뿍 든 설렁탕을 곱빼기로 주문하신 후 소주도 한 병 달라 하셨다. 잔은 두 개. “술은 역시 해장술이지!” 하시면서 내 앞에도 또르르 따라주셨다. 주룩 눈물이 흘렀다. 그날 나는 선생님께 심장을 흠씬 두들겨 맞았다.
“네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언제쯤 올 것 같으냐?”
불콰하게 달아오른 선생님께서 불쑥 물으셨다. 좋은 세상이라…. 고민 없이 “20년 후”라고 대답했다. 당시 어린 나로서는 20년이라는 시간이 굉장히 거리감 있는 시간이라고 가늠했던 것 같다. 아주 긴 시간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답을 고른 것인데 선생님은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표정을 잠깐 지으시더니 “그때가 되면 네가 나를 잘 봐달라” 하시며 사람 좋게 웃으셨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전교조 소속도 아니고 특별히 정치의식이 있는 분도 아니었다. 그러한 선생님의 시각에서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주류(主流)가 바뀐다는 뜻이고, 당시 운동권에 속한 사람들이 나중에 국회의원 되고 장관, 대통령도 되는 그런 세상쯤으로 가늠하셨던 것 같다. 그날이 벌써 30년 전이다.
북한에 흡수된 세상 꿈꿔
김일성,김정일 동상. [뉴스1]
솔직히 그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북한에 흡수된 세상’이었다. 겉으로는 연방제 통일을 이야기하고 반미(反美) 자주를 표방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김일성 장군님”을 수령으로 모시고 있었으니, 본질적으로 내가 만들려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다. 내가 특이했던 것이 아니라 1980~90년대 학생운동 상층 핵심이라면 대부분 그랬다. 이제 와 그것을 민주화운동이라 치장하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아니 숨겨서는 안 되는, 분명한 오점이다. 반미, 종북이 본질이었던 우리 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 부르는 것은 도둑질하려고 은행에 들어갔다가 우연찮게 은행 강도를 잡은 도둑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형국이랄까. 물론 강도를 잡은 것은 맞지만 원래 자신의 의도를 고백하지는 못하더라도 조용히 반성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설렁탕집에서 담임 선생님과 ‘좋은 세상’을 떠올린 날로부터 10년 후, 나는 스스로 전향을 선택했다. 남한을 민주화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가 북한을 민주화하는 일이라 생각하게 됐다. 남한에서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도우려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목표와 방향을 바꿨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북한인권운동을 시작했다.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시민단체를 만들어 상근 간부로 활동했다. 그것이 내가 지은 ‘사상적 죄’를 조금이라도 속죄하는 길이라고 다짐했다.
내가 처음 북한인권 비정부기구(NGO)에서 일할 때, 신입 상근자로서 받은 급여가 70만 원 정도였다. 20년 전이라 지금보다 물가가 낮았지만, 교통비 식비 등을 빼면 남는 것이 없는 급여였다. 월급이라 부르기도 민망해 우리끼리는 그냥 활동비라 칭했다. 정말 최소한의 ‘활동’만 할 수 있는 금액이니까. 나중에 급여가 조금씩 올라 6년 후에는 130만 원 정도까지 받았지만, 가장으로서 제구실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반지하 월세방에 살고, 글쓰기 프리랜서를 부업으로 삼고, 맞벌이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나만의 고난이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NGO가 있고, 모두 제가끔 이유를 갖고 NGO 활동가의 길을 걷지만, 활동가 대부분의 삶이 이렇다. 돈 많고, 시간 많고, 할 일 없어 그런 고난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을 직접 몸으로 만들며 실천하겠다는 신념을 잃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지나치게 순진한.
비정부(Non-Governmental) 수식어가 무색해진 NGO
위안부(혹은 정신대?) 문제 해결을 사명으로 앞세운 어느 시민단체가 회계 부정, 일감 몰아주기, 가족 고용, 비정상적 부동산 거래, 개인 모금 등 NGO라는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온갖 추잡한 혐의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편의점 점주이자 시민의 일원으로 나도 분노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한때는 나도 NGO에서 일했던 사람인지라 자칫 시민운동 전체가 매도되고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적잖은 사람이 NGO가 모금 활동을 통해 상당히 많은 재원을 확보하는 줄 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번에 정대협-정의연의 모금 규모가 연간 12억 원을 조금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도 살짝 놀랐는데, 연간 10억 원 넘는 기부금을 확보하는 단체는 대한민국 NGO 상위 1% 정도에 해당하는 아주 특별한 경우다. 절대 다수 NGO는 연간 모금액이 수백~수천만 원 수준이다. 아예 모금 실적이 없는 단체도 부지기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나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같은 일반 구호단체가 아닌 일종의 정치적 지향점을 지닌 단체로서 그 정도 기부금을 유지하는 단체는 정대협-정의연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 단체 대표자가 이번에 국회의원이 됐다는 이유도 있지만 정대협-정의연에 유난히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자금력’이 활동력의 현실적 원천이 되는 시민사회운동에서 정대협은 그저 그런 시민단체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다.
NGO의 내면을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갖는 또 다른 오해가 있다. NGO 활동가들이 외부에서 후원을 받아 “별로 노력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수군거림이다. 그 ‘노력’을 직장인이나 자영업자들의 땀방울과 스트레스에 비교한다면, 내가 NGO에 있을 때 그렇게 치열하게 노력했던가, 과거의 나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곤 한다. 단순히 월급을 적게 받는다, 대의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왔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다른’ 노력의 견지에서 보자면, 작금 한국의 NGO가 굉장히 노력하는 부분이 있긴 하다. 바로 정부 보조금을 받기 위한 노력이다.
정대협-정의연이 연간 수억 원의 국고 보조금을 받는 것을 알고 이번에 역시 놀랐는데, 이 또한 대한민국 상위 몇 % 안에 들어가는 수준이다. 이른바 쉼터 같은 건물을 대기업에서 후원받는 단체도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런데 정부 보조금이라는 것이 매년 일정하게 규모가 확보되는 예산이 아니라 상당히 유동적이고, 꽤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친다. 경쟁도 치열하다. 정부는 “객관적 심사 기준에 따라 보조금을 배분한다”고 말하지만, 그동안 보조금을 잘 받고 있다가 갑작스레 축소되거나 탈락하면 NGO 입장으로서는 갖가지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NGO가 정치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왜 윤미향 씨처럼 저축하지 못했을까
NGO가 정부 보조금에 의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논리 모순이지만, 워낙 재정이 열악하다 보니 ‘나라에서 돈을 준다는데’ 응모하지 않을 수 없다. 공짜 앞에 장사 없는 법. 최근 재난지원금을 준다니 부자들도 예외 없이 수령하는 원리와 똑같다. 그리하여 갈수록 정부보조금에만 의존하는 단체가 늘어나더니, 이제 일부는 비정부(Non-Governmental)라는 수식어마저 무색한 관변단체가 돼가고 있다. 바야흐로 그들에게 필요한 ‘노력’이 있다면 정치권에 부지런히 줄을 대는 일이다. NGO 본연의 의미에 충실하겠다고 시민들의 자발적 후원금을 기다리는 길보다 자기 단체 활동가를 정치판에 들여보내 권력의 힘을 활용하고 이리저리 인맥 관리를 하는 편이 훨씬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똑똑한(?) 학습효과를 얻어가는 중이다. “정치를 통해 더 큰 이상을 실천하겠다”는 아름다운 명분도 충분하다.그럼 NGO 활동가는 정치를 하지 말란 말이냐. 영영 재야에만 있으라는 말이냐. 물론 아니다. 특히 구호-봉사단체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와 관련된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일수록, 이것이 결코 사람들의 자세나 인식의 변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근본적으로 제도와 정치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활동 자체가 이미 정치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외곽’에서 할 수 있는 역할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과제 또한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정대협-정의연 활동가들이 국회나 정부기관에 진출하는 것도 얼마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정대협-정의연 같은 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지극히 깨끗할 것이라 섣불리 단정할 수 없으며, 거기서 고생했다는 이유로 검증조차 건너뛸 수는 없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나 역시 시민단체에서 적잖은 시간을 일했지만 그렇게 개인 계좌를 열어놓고 주먹구구식으로 모금 활동을 펼치고 마치 감시자를 조롱하는 듯 편의대로 회계장부를 작성하는 사례를 본 적 없다. 재정감사는 물론이고 다음 연도 보조금 심사 때문에 어떤 단체든 촘촘하고 꼼꼼하게 장부를 작성한다. 이번에 드러난 정대협-정의연의 행위를 보면 ‘누구든 우리는 건드리지 못하리라’는 자신감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다. 무엇이 그들에게 그토록 두둑한 배짱과 오만을 선사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물론 나는 정대협-정의연 활동가들이 재정을 그리 막무가내로 운용했을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들의 ‘근본’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나름대로는 양심의 잣대에 따라 살아왔는데 최근 여러 비난에 직면하니 억울한 감정도 많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기대하는 역할이 큰 만큼 책임도 크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너무 억울해 말고, 돌아보아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 인정하고, 털 것은 털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 단체의 대표였다가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윤미향 씨의 경우는 갈수록 이해가 안 되는 의혹투성이다. 시민단체 활동가라고 내내 가난하게 살란 법은 없지만, 다른 부수입 없이 오직 시민단체 활동에만 전념했다는 사람이 쥐꼬리만 한 급여로, 그것도 대출 없이 오로지 현금만으로, 어떻게 가족들이 연달아 아파트를 매입할 수 있었는지 우선 그것이 궁금하다. 그것은 ‘사돈이 땅을 샀다니 배가 아픈’ 치졸한 딴죽 따위가 아니다. 국민이 국회의원에게 갖는 당연한 의문이다. 본인은 어물쩍 “저축하는 오랜 습관”이 있어 그랬다는데, NGO에서 활동했던 사람으로서, ‘나는 왜 저축하지 못했을까?’ 의문을 갖는다. 굳이 비교하는 것은 그렇지만, 내가 속한 NGO 대표자는 부모님이 소유한 조그만 집 한 채까지 담보로 잡혀 자금을 조달하다가 결국 빈털터리가 됐고 항상 빚에 쫓기는 신세였다. 누구는 급여를 알뜰하게 잘 관리해 ‘내 집 마련’에 성공하고, 누구는 그저 흥청망청했던 것일까?
세상에 숱한 디자인 회사가 있는데 하필 남편이 운영하는 인터넷 신문사에 소식지 편집을 맡기고, 배너 광고를 달고, 아버지를 위안부 쉼터 관리인으로 임명하고, 자기 딸 대학 등록금이 피해자 할머니가 준 용돈(?)과 연결돼 있는 등 공사(公私)를 구분하지 못한 흔적도 한둘이 아니다. 만약 우리 단체 대표자가 그렇게 행동했더라면 집행부나 이사회 등에서 반드시 제재를 받았을 것인데 어떻게 윤미향 씨가 오늘까지 건재할 수 있었는지 그것도 참 아리송하다.
상근자 한두 명이 간판만 걸고 일하는 작은 단체가 아니고,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해 세상 물정 모르는 신생 NGO도 아니고, 정부 보조금을 수억 원 받고 후원금도 수십억 원을 거둬들이는 지명도 높은 단체가 말이다. 이런 모든 의혹에 “수상하다” 고개를 갸웃하는 일은 지극히 합리적 의심 아닐까? 그런데 그것을 묻는 여론을 향해 “운동가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김두관 의원)며 오히려 역정을 내고 있다니! 이건 운동가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에게 묻는 일이다. 국민이 왜 국회의원에게 ‘예의’를 지켜야 하는가.
사람은 되지 못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른 바 있는 중국 작가 왕멍은 소설 ‘변신인형’ 서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이상은 현실을 개조하지만, 이상은 반드시 현실의 노력을 통해 현실을 개조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도 이상을 개조한다. 이 과정은 비록 고통스럽지만 그래서 오히려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이상을 갖고 현실을 개조하려 했지만 결국 현실을 통해 이상이 개조되며 나는 오늘도 ‘변신인형’으로 살아간다. 편의점에서 손님을 맞고 상품을 팔며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아직 NGO에서 궁핍한 상황을 견디며 묵묵히 이상을 실천하는 옛 동지들을 볼 때면 미안한 마음도 많지만, 지금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 믿고, 그렇게 변화한 현실 가운데 그 나름의 의미를 찾으려 애를 쓰며 살아간다. 세상 많은 사람이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TV를 켜면 한때 어깨를 겯던 선후배들이 국회의원, 장관, 기관장이 돼 화면을 통해 얼굴을 내민다. 후배들 때려 패는 것으로 악명 높던 선배가 지금은 정치판으로 무대를 옮겨 활극을 벌이고, 낮과 밤의 행실이 확연히 다르던 친구가 지금은 약자의 편이라며 연단에서 눈물 흘리고, 정치 낭인처럼 직업 없이 돌아다니던 사람이 지금은 다선 의원이 돼 지방 호족처럼 행세하고, 김일성 만세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던 사람이 지금은 국회에서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는 현장을 목격한다. 그들 역시 ‘변신인형’으로 살아가고 있다. 누구든 자신의 인생을 살아오며 자기 나름대로 반성과 참회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 믿고, 대체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그대로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굳이 캐묻고 싶지 않다.
다만, 그들의 정치 비즈니스 영역이란 것이 원래 그렇다지만, 과거를 팔아 현재를 살아가는 일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더구나 자신의 과거조차 아닌 일을 끌어다 스스로 대변인을 자처하고 나아가 심판자의 역할까지 자행하며 역사와 양심을 독점하고 있는 양 으스대는 거만한 목소리도 이제는 자중할 때가 됐지 않나 싶다. “나의 변신은 신념이고 너의 변신은 배신”이라는 식의 괴이한 악다구니 역시 멈췄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30년 전 선생님께서 물으셨던 ‘좋은 세상’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이 오늘과 같은 세상은 아니었지 않나 하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당신들의 새로운 기득권을 만들어주려고 우리가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아무리 모두가 ‘변신인형’으로 살아가는 세상이라지만, 어느 영화 대사처럼 “사람은 되지 못해도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해주고 싶다. 조국, 윤미향, 한명숙, 유시민, 당신들 말이다. 이런 치들을 ‘결사옹위’ 하겠다고 오늘도 용을 쓰는 친구들을 보면서 서글픔을 넘어 좌절감을 느낀다. 반복건대, 좋은 세상이 결코 이런 세상은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