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경주’ 제안한 오딘, 여신을 첩 삼겠다는 거인
토르와 일전 앞두고 ‘진흙 인간’ 만든 거인族
맷돌 박살 내고 죽을 고비 맞은 토르
치료 주문 잊은 그로아, 토르는 파편이 박힌 채…
‘토르:다크월드’(2013)에 등장한 ‘천둥신’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분). [Walt Disney Pictures]
북유럽 신화에도 참전용사들처럼 맷돌 파편을 평생 머릿속에 지니고 산 신이 있다. 그 신은 북유럽 신들 중 거인들과 가장 많은 전투를 벌이고, 마치 부메랑처럼 주인에게 다시 돌아오는 ‘묠리르’라는 망치를 들고 다닌다. 바로 ‘천둥신’ 토르다.
어느 날 토르는 흐릉그니르라는 거인과 일대일 대결을 펼친다. 그때 그가 던진 망치에 산산조각 난 거인의 맷돌 파편이 날아와 토르의 머리에 박힌다. 파편은 머릿속에 너무 깊숙이 들어간 터라 토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빼낼 수가 없었다.
‘愛馬’ 슬레이프니르 vs 굴팍시
오딘과 애마 슬레이프니르, John Bauer, 1911
오딘은 오래전부터 이렇게 무료할 때를 대비해 염두에 둔 것이 있었다. 바로 거인으로 그들 중 가장 힘이 세다는 흐릉그니르였다. 그렇다고 오딘은 그 거인과 힘을 겨루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 거인이 동료들에게 자신의 애마인 굴팍시가 오딘의 슬레이프니르보다 더 빠르다고 떠벌리는 게 늘 거슬렸다. 굴팍시는 ‘황금 갈기’라는 뜻이다. 오딘은 이참에 흐릉그니르와 경마를 벌여 누구 말이 빠른지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흐릉그니르의 저택은 요툰헤임에서도 아주 외지고 황량한 곳에 있었다. 저택 주변이 온통 드넓은 황무지인지라 경마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오딘은 황무지를 한참 달려 마침내 흐릉그니르의 저택에 도착했다.
거인은 오딘의 애꾸눈을 보고 이방인의 정체를 알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누구냐고 물었다. 오딘이 지긋이 미소만 짓고 있자 흐릉그니르는 대뜸 “멀리서 달려오는 것을 보니 말이 참 빠르다”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아마 오딘의 의중을 눈치채고 미리 선수를 친 것이리라. 이에 오딘이 “이 세상에서 나의 말보다 빠른 말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흐릉그니르가 “그것은 혼자만의 생각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말은 단연코 나의 애마인 굴팍시”라고 맞받아쳤다. 오딘이 “무슨 소리냐”며 “나의 말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시합에서 진 적이 없다”고 소리쳤다. 거인이 다시 “도대체 굴팍시의 명성을 들어본 적이 없다니 말이 안 된다”고 응수했다. 이렇게 한참 티격태격하다가 마침내 오딘이 흐릉그니르에게 “그럼 한번 겨루어보자”며 말에 훌쩍 올라타자마자 박차를 가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흐릉그니르도 재빨리 굴팍시에 올라타서 그 뒤를 쫓았지만 오딘은 벌써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흐릉그니르의 굴팍시도 만만치 않았다. 녀석은 금세 슬레이프니르의 꽁무니를 따라잡았다. 하지만 흐릉그니르는 아무리 달려도 오딘을 추월할 수는 없었다. 오딘이 흐릉그니르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도록 속도를 조절하며 그를 아스가르드로 유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그렇게 쫓고 쫓기며 달리던 그들은 어느새 요툰헤임과 미드가르드를 지나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토를 건너 아스가르드의 발할라 궁전 앞까지 달려왔다. 흐릉그니르는 그제야 자신이 승부욕에 사로잡혀 앞만 보고 달려왔음을 인식하고 얼른 말을 멈추고 돌아서려고 했다. 그 순간 오딘이 그의 등에 대고 “굴팍시도 여간 좋은 말이 아닌 것 같다”며 은근히 그의 자존심을 세워줬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피곤할 테니 나의 궁전에서 잠시 쉬어 가라”고 외쳤다.
“아스가르드 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흐릉그니르는 마침 목도 마른 터라 선뜻 오딘의 제안을 받아들여 굴팍시를 밖에 매어둔 다음 발할라로 성큼 들어섰다. 오딘이 돌아오자 그의 늑대 게리와 프레키가 마치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이 외출한 주인이 돌아올 때처럼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맞이했다.마침 발할라에서는 아스 신들이 그동안 미드가르드의 숱한 전쟁터에서 전사한 수많은 영웅과 함께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또한 갓 전사한 영웅들도 발키리아(갑옷과 투구로 몸을 감싸고 말을 타고 지상 전쟁터로 가서 영웅에게 죽을 운명을 부여하는 임무를 맡은 여신)의 안내를 받아 속속 도착해 연회에 합류하고 있었다. 거인 흐릉그니르가 들어오자 영웅들이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오딘이 “이 거인은 오늘 나의 초대를 받아 손님으로 왔으니 예를 갖추라”고 명령하자 모두들 경계심을 풀고 잠잠해졌다.
오딘은 거인을 자신의 옆자리에 앉힌 다음 발키리아에게 토르가 쓰던 커다란 술잔을 두 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토르의 술잔은 발키리아 한 명이 하나밖에 들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흐릉그니르가 그 술잔을 두 손으로 덥석 하나씩 받아 들자 오딘이 그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영웅심이 발동한 거인은 좌중을 한 번 둘러보더니 두 술잔을 하나씩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것은 토르도 두세 번 꺾어 마시는 엄청난 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기운이 돌자 흐릉그니르는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오딘을 향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이까짓 발할라 궁전쯤이야 통째로 들어서 단숨에 요툰헤임의 나의 집으로 옮길 수 있다”고 외쳤다. 술 취한 사람이 다 그런 것처럼, 자신은 “진짜 할 수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식탁에 앉아 있던 신들과 영웅들이 모두 가소롭다는 듯 박장대소했다. 거인은 이들을 쳐다보며 “이까짓 아스가르드쯤이야 한 손으로 바다에 처넣을 수 있다”고 외치면서 다시 자신은 “진짜 할 수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오딘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 “그러면 우리 신들은 어떻게 할 셈이냐”고 물었다. 흐릉그니르는 약간 흐릿한 눈초리로 신들을 차례차례 둘러보며 “앞으로 아스가르드에 있는 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생각”이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사랑의 신 프레이야와 토르의 아내 시프를 보자 “둘은 죽이지 않고 집으로 데려가 첩으로 삼겠다”고 대답했다.
오딘은 이제 흐릉그니르의 주정을 보고 더는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를 그냥 놔뒀다가는 신들과 영웅들이 들고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나서서 그를 제압한다면 손님을 불러다가 홀대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프레이야에게 눈짓을 해서 흐릉그니르에게 술을 더 권하도록 했다. 그가 술에 만취해서 저절로 쓰러져 잠들게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거인은 프레이야의 술잔을 연거푸 몇 잔 받아 마셨는데도 오딘의 예상과는 달리 전혀 쓰러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흐릉그니르는 신기하게도 맨 처음 술에 취한 상태 그대로 계속해서 주사를 부렸다. 오딘은 하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외출한 토르에게 사람을 보냈다.
“감히 발할라에 들어와 행패냐”
발할라, Emil Doepler, 1905
흐릉그니르는 우선 이 자리를 피하려는 생각에 손가락으로 오딘을 가리키며 자신을 발할라의 연회에 초대한 것은 바로 오딘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토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망치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발할라에 들어올 때는 자유롭게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그렇게는 안 될 거다”고 대답했다. 흐릉그니르는 바로 그 순간 기지를 발휘했다. 대담하게 토르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만약 무기도 없는 나를 공격해 해를 입힌다면, 두고두고 아홉 세상 전체의 놀림감이 될 것이니, 차라리 시간과 장소를 정해 나와 일대일 대결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막 망치를 날리려고 하던 토르는 ‘놀림감’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천하의 토르가 거인뿐 아니라 난장이들의 놀림감이 돼서야 되겠는가.
토르는 생각이 이에 미치자 얼른 망치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흐릉그니르에게 다가가 일대일 대결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시간은 일주일 후, 장소는 미드가르드와 요툰헤임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강가에 있는 넓은 공터였다. 토르는 지금까지 한 번도 거인의 결투 신청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거인을 보면 그냥 달려들어 망치를 날려 때려잡았을 뿐이다. 그만큼 그는 거인들을 믿지 못할 종족이자 타도 대상으로만 여겼다. 따라서 토르는 흐릉그니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돼 몇 번이나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그를 보내줬다. 흐릉그니르는 발할라에서 나와 자신의 애마인 굴팍시에 올라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려 요툰헤임으로 갔다.
키 16km의 ‘진흙 인간’ 목쿠르칼피
흐릉그니르와 싸우는 토르, Lorenz Frølich, 1895
거인들은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진흙을 이겨 키는 10마일(약 16km), 폭은 3마일(약 4.8km)이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거인을 만들었다. 숨을 쉴 수 있도록 가슴 속에 암말의 심장을 이식하고 목쿠르칼피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윽고 결전의 날이 되자 흐릉그니르는 결투 장소로 갔다. 흐릉그니르의 가슴과 머리가 돌로 돼 있어서 그랬을까. 흐릉그니르의 무기도 숫돌이었고, 왼손에 든 방패도 돌로 만든 것이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마침내 토르가 마차를 타고 시종인 티알피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흐릉그니르는 진흙 인간 목쿠르칼피와 나란히 서서 토르 일행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흐릉그니르는 돌 방패를 너무 높게 들고 있는 바람에 시야가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흐릉그니르는 그 사실을 깨닫자 얼른 방패의 볼록한 앞부분이 위로 올라오도록 땅에 던져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오른손에 숫돌을 들고 토르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토르의 선제공격에 두 조각난 두개골
하지만 선제공격을 한 것은 토르였다. 그는 흐릉그니르를 발견한 순간 한 발 앞서 얼른 그를 향해 힘껏 망치를 날렸다. 흐릉그니르도 뒤늦게 쏜살같이 날아오는 토르의 망치를 향해 숫돌을 날렸다. 한 궤도에서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서로를 향해 날아가던 망치와 맷돌은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쳤다. 맷돌은 수백 조각으로 부서진 채 사방으로 흩어졌고, 망치는 그 사이를 뚫고 과녁인 흐릉그니르의 앞이마에 박혀 그의 두개골을 정확하게 두 조각으로 갈라놓았다. 흐릉그니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시종인 목쿠르칼피가 놀라 오줌을 질질 싸기 시작했다. 그는 몸집에 비해 심장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가뜩이나 소심하고 겁이 많았던 것이다.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토르의 시종 티알피가 그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바로 그 순간 전속력으로 목쿠르칼피에게 달려가 진흙으로 된 그의 왼쪽 발을 도끼로 마구 후려쳤다. 피할 틈도 없이 습격을 받은 목쿠르칼피는 아픈 발을 들어 올리려다 그만 균형을 잃고 천둥소리보다도 더 큰소리를 내며 허무하게 땅바닥으로 꼬꾸라졌다. 그 바람에 티알피와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우트가르드 성채에서 흐릉그니르의 승리 소식을 기다리던 거인들은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자 자신들의 기대가 헛된 희망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토르의 망치에 산산이 부서진 흐릉그니르의 맷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맷돌 파편 중 하나가 토르 쪽으로 날아가 하필이면 그의 머리에 깊숙이 박혀버렸기 때문이다.
토르는 비명을 지르며 피가 철철 흐르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면서 넘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교롭게도 바로 그 순간 이마에 망치를 맞고 쓰러지던 흐릉그니르의 육중한 다리 하나가 토르의 목을 내리눌렀다. 토르의 비명을 듣고 그의 시종 티알피가 달려가 우선 그의 머리에 박힌 맷돌 파편을 살펴보았으나 너무 깊이 박힌 터라 뽑아낼 수 없었다. 이어 그의 목에서 흐릉그니르의 다리를 치워보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토르가 티알피에게 고통에 겨운 목소리로 얼른 자신의 아들 마그니를 불러오라고 했다. 마그니는 거인족 여인인 야른삭사가 낳은 아들로 ‘강한 자’라는 이름의 뜻처럼 천하장사였다. 티알피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마그니는 아버지의 목을 누르던 거인의 다리를 단숨에 들어 올려 치워버렸다.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이 거인도 해치워 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렸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로아는 마법의 주문을 잊어버리고…
그로아 W. G. Collingwood, 1908
토르는 언젠가 요툰헤임을 떠나 북쪽 태고의 니플헤임 부근을 방랑하다가 엘리바가르라는 얼음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우르반딜을 구해 바구니에 넣어 등에 멘 채 미드가르드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우연히 바구니 밖으로 삐져나온 아우르반딜의 발가락 하나를 만져보고 꽁꽁 얼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것을 잘라내어 하늘에 던져 별자리로 박아주었다. 토르는 그로아에게 이런 말을 해주며 그녀를 밖까지 배웅하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별 하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저게 바로 내가 만들어준 아우르반딜의 별”이라고 알려줬다.
토르는 또한 그로아에게 “머지않아 남편이 방랑을 끝내고 집에 돌아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그로아의 머릿속은 온통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차올랐고, 그동안 외우고 있던 주문이란 주문은 모조리 잊고 말았다. 그로아는 이후 토르를 찾아가 치료를 마무리하려고 했건만 남편이 곧 돌아온다는 기대에 흥분한 나머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주문이 아니라 오직 남편 이름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흐릉그니르의 맷돌 파편은 토르의 머릿속에 영영 남아 있게 됐다.
김원익
● 1961년 전북 김제 출생
● 연세대 독문학과 졸업(문학박사), 독일 마부르크대 수학
● 신화연구가, (사)세계신화연구소 소장
● 저서 : ‘신화, 인간을 말하다’ ‘그림이 있는 북유럽 신화’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