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충원에 영면한 두 위의 화교
화교들도 동족에게 총부리 겨눠
6·25전쟁 발발 후 反共화교 자원입대
‘서울 차이니스’ 부대 창설…특수전 임무 수행
韓정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푸대접
1971년 한국전 참전 화교 종군기장 수여식 사진. 왼쪽부터 유국화(劉國華), 김재명(金在命), 나아통(羅亞通). 원 안이 위서방(魏緖舫)이다. [국가기록원]
화교들도 동족끼리 총부리 겨눠
한민족에게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이념·체제갈등으로 분단되고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졌다. 6·25전쟁은 ‘한국의 오랜 이웃’ 화교에게도 비극이었다. 남북 분단 후 한반도 화교 사회도 분열됐고, 전쟁의 비극은 이들도 덮쳤다. 혈연상 ‘동족’이라 할 수 있는 중공군과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대한민국의 우방이던 중화민국(대만)은 대한민국 지지 의사를 밝혔다. 서울 명동 소재 주한국 중화민국대사관은 전쟁 발발 후 “한국 정부와 행동을 같이한다”는 기본 방침을 수립했다. 한국 정부의 천도에 따라 대사관도 대전, 대구, 부산으로 이동했다. 중화민국대사관은 대사관 이전 시 서울·인천 거주 화교에게 피난을 권유했다. 다수 화교는 재산 보존 등을 이유로 잔류를 택했다. 대사관 측은 대사관 건물 등 외교 자산, 화교 사회 보호를 위해 ‘임시관리위원회’를 설립했다.
북한군 점령 기간 조영덕(趙令德·자오링더)이라는 인물이 임시관리위원회를 접수했다. 1950년 7월 16일 임시관리위원회는 한성화교연합회(漢城華僑聯合會)로 재편됐다. 조영덕은 북한 평양에서 파견한 화교공산조직 책임자였다. 같은 시기 인천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투옥된 정만리(程萬里·청완리)가 석방돼 화교해방연맹(華僑解放聯盟)이라는 친공(親共) 조직을 결성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는 역전됐다. 북한군과 더불어 한국 내 친공 화교 조직 간부들도 북한으로 철수했다. 유엔군의 서울·인천 수복 후 북한군 점령기 공산주의 협력자를 대상으로 이른바 ‘부역자’ 검거가 실시됐다. ‘부역 혐의자’ 중에는 20여 명의 화교도 포함됐다. 이항련(李恒連·리헝롄) 한성자치구 구장, 장도춘(張道春·장다오춘) 무역공회 회장 등이었다.
한국 정부는 한국인 부역자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군사재판을 거쳐 처벌할 예정이었다. 샤오위린(邵毓麟·1909~1984) 초대 주한국 중화민국대사 등 중화민국대사관 측은 “공산 조직에 협조한 화교 중 일부가 북한 공작원일 수는 있으나 화교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던 점에 비춰 볼 때 생존을 위한 기회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로 한국 정부를 설득했다. 결과적으로 부역 혐의로 체포된 화교들은 석방됐다.
중공군 상대로 심리전 전개
1951년 중공군의 참전으로 6·25전쟁 전세는 재(再)역전됐다. ‘항미원조(抗美援朝·조선을 도와 미국에 대항한다)’를 명분으로 참전해 유엔군의 주적이 된 중공군에 맞서 미국 정부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중공군을 상대로 심리전을 전개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1949~1951년 주한국 중화민국 대사를 지낸 샤오위린은 회고록 ‘샤오위린 대사의 한국 외교 회고록(원제 使韓回憶錄·한국대사 회고록)’에서 “1951년 1월 30일 미국 정부로부터 대(對)중공군 심리전 제안이 들어왔다”고 밝혔다. 초기 단계 심리전은 항공기를 이용해 전단을 뿌리고, 확성기 방송을 통해 투항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화교 연구 권위자 왕언메이(王恩美) 국립대만사범대 동아시아학과 교수는 “국·공내전 패전 후 투항한 국민당 군 출신이 상당수였던 중공군에 심리전의 효과는 상당했다. 북한 인민군의 감시 때문에 집단 투항은 할 수 없었지만 개별 투항자는 속출했다”고 말했다. 대(對)중공군 심리전에는 서울·인천 소재 화교학교 교사·학생이 동원됐다. 이후 중공군 귀순자, 포로 숫자가 늘어나면서 화교학교 교사·학생들은 통역 임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심리전, 포로 심문 업무에 투입된 화교들은 전투부대로 참전하기도 했다. 주축은 월남(越南) 화교들이었다. 1949년 4월 20일, 평양에서 조선인(북한인) 520명, 재북(在北)화교 50명 등 총 570명이 참여해 한중반공애국청년단(韓中反共愛國靑年團)이 결성됐다. 초대 단장으로 화교 위서방, 부단장으로 북한인 김명국, 화교 강혜림이 취임했다. 위서방, 강혜림 모두 전쟁 경험자였다.
위서방은 1923년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에서 태어났다. 평안북도 신의주에 거주하다 1945년 안둥(安東·현 단둥)경찰학교 졸업 후 국·공내전 시기 국부군(國府軍·국민당정부군) 상위(上尉·대위 해당)로 참전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자 신의주로 돌아왔다가 평양 인근 장산탄광 노동자로 일했다. 1925년 중국 산둥(山東)성 치샤(栖霞)현에서 태어난 강혜림은 국·공내전 시기 국부군 부대원으로 공산당의 인민해방군과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었다. 국·공내전 후 평양에 정착해 중화요리점을 운영했다. 두 사람 모두 반공 의식이 투철했다.
중공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은 결성 후 북한 내 대(對)인민군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6·25전쟁 발발 후에도 게릴라전을 지속했다. 전쟁 발발 직후 단원 수는 조선인 800명, 화교 200명 등 1000명에 달했다.1950년 10월 20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위서방은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을 만나 “한국군 작전에 참여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참여를 허가 받은 위서방은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平壤華僑反共愛國保衛團)으로 재편해 정보 수집 업무를 수행했다.
12월 5일 유엔군이 평양에서 후퇴했다. 위서방과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 단원 30명도 함께했다. 위서방은 한국에 도착한 화교단원을 중국수색대로 재편했다. 유엔군과 한국군 측은 이들의 참전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계급·군번은 부여받지 못했다. 중국수색대는 중공군과 실전(實戰)을 벌이기도 했다. 화교 47명으로 편성된 부대는 1950년 12월 24일, 경기도 연천 고랑포리에서 중공군 4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중공군이 38선 이남까지 진출했다는 최초 증거였다.
1951년 1월, 국군 제1사단 정보참모 김안일 중령이 대령으로 승진해 제1사단 제15연대장을 맡았다. 중국수색대 소속·명칭도 제1사단 제15연대 중국인특별수색대로 바뀌었다. 2월 2일, 중국인특별수색대는 경기도 과천전투에 투입됐다. 상대는 중공군 정예부대였다. 수색대원들은 중공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했다. 적 진지 8곳을 격파하는 활약을 펼쳤다. 이에 힘입어 국군은 관악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부(副)대장 강혜림은 실탄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백병전을 벌이던 중 중공군의 총탄에 절명했다. 강혜림은 평양 출신으로 유골을 인수할 유가족이 없었다. 유해는 부산화교소학교 교원에 임시 안치됐다. 훗날 한국 정부가 주한국 중화민국대사관과 화교전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4년 12월 12일 국립묘지(현 국립현충원) 제24묘역으로 이장했다. 그에 앞서 1959년 은성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적진 침투해 포격 표시용 신호기 게양
1951년 4월, 중국인특별수색대는 녹번리(현 서울 은평구 녹번동)전투에 투입됐다. 인근 야산에 중공군·북한군 혼성 1개 대대 병력이 잔류하고 있었다.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에 섬멸 명령이 떨어졌다. 4월 28일, 중국인특별수색대는 적진 침투 작전에 투입됐다. 주 임무는 적진 요소요소에 포격 표시용 신호기를 게양하는 것이었다.위서방 대장과 대원들은 5개 분조(分組)로 나눠 적진에 침투했다. 신호기를 게양하고 적군 3명을 생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곧 정체가 발각돼 총격전이 벌어졌다. 적진 한가운데 고립된 수색대의 피해가 커졌다. 위서방은 중공군 박격포탄 파편에 왼쪽 가슴, 오른쪽 다리 등에 상처를 입었다. 다른 대원 6명도 중경상을 당했다. 이들은 아군에 구출돼 대구 제27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위서방은 4시간여 수술 끝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위서방은 이 같은 공로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위서방은 6·25전쟁이 끝난 후 한의사가 돼 강원도 강릉에서 활동했다. 극빈자 무료 진료, 장학사업 등 사회공헌 활동에 힘쓰다 1989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그해 12월 한국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990년 3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2묘역에 위서방의 유해를 안장했다. 2012년 5월 15일, 현충원 내 강혜림 묘소를 위서방 묘소 옆으로 이장하면서 별도 외국인 묘소로 꾸몄다. 6·25전쟁 때 생사가 엇갈린 전우가 나란히 영면(永眠)에 든 것이다.
1951년 3월, 전시 수도 부산에서 정식 화교부대가 창설됐다. 육군첩보부대(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HID) 산하 정식 중국인부대인 4863부대 SC지대가 그것이다. ‘SC’라는 명칭은 ‘서울 차이니스(Seoul Chinese·한국 화교)’에서 유래했다.
강혜림·위서방이 이끌던 중국인특별수색대가 재한(在韓)화교들이 결성한 ‘자원군’이라면, SC지대는 한국·중화민국(대만) 정부 차원에서 결성한 특수전 부대였다. 1951년 1월, 중국국민당 해외공작회는 현역 장교이던 왕스유(王世有), 류궈화(劉國華)를 한국에 파견했다. 두 사람은 한국 육군정보본부에 화교정보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박경원 육군첩보부대장은 제안을 수락했다.
퇴조해상 침투작전
한국·대만 합작으로 창설된 SC지대에 한국 측은 무기·군복·탄약·차량 등을 지원하고, 대만은 인건비와 공작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초대 대장으로 대만군 현역 장교 뤄야퉁(羅亞通), 부대장으로 한국군 이백건, 정치위원으로 류궈화가 임명됐다. 뤄야퉁은 1949년 황푸군관학교(육군사관학교) 포병과 졸업·임관 후 국·공내전에서 중공군 포로가 됐다. 6·25전쟁 발발 후 중공군 포병 교관으로 참전했던 그는 탈영을 감행해 한국군으로 귀순한 이력의 소유자였다.SC지대는 서울 종로와 경기도 파주에서 10주 기본 훈련을 받았다. 본부는 서해의 교동도에 뒀다. 초기 대원은 200명, 그중 무장대원 70명은 적 후방에 침투해 첩보 수집, 요인 납치, 적군 시설 파괴 공작 등을 수행했다. 이들은 유창한 중국어·한국어 실력을 무기로 중공군을 만나면 북한 인민군으로 행세하고, 인민군을 만나면 중공군으로 가장했다. 후방대원 130명은 중공군 포로 심문, 선무(宣撫) 방송, 심리전 임무를 수행했다.
초기 200명 선이던 SC지대원 수는 점차 늘어나 500명에 달했다. 그중 200명은 전선, 300명은 후방에 배치됐다. 진유광(秦裕光·친위광) 전 한성화교협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SC지대원들은 12명 단위로 조를 편성해 전방에 분산 배치됐다. 주 임무는 적 후방에 침투,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육·해·공 루트를 이용해 침투했다. 황해도 연백·해주, 강원도 철원·김화, 평안남도 성천·순천, 함경남도 함흥 등 적 후방 각지에 침투해 종횡무진 활약했다.”
SC지대의 최후·최대 작전은 1953년 7월 정전협정 직전의 ‘퇴조해상(退潮海上)’ 침투작전이었다. SC지대 공작대 2개 분대(分隊)를 동원해 함경남도 갑산 등 백두산 일대에서 유격·첩보 활동을 계획한 것이다. 화교대원 30명, 한국군 통신기술자 10명 총 40명이 참가했다. 뤄야퉁이 인솔한 부대는 7월 18일, 공작선으로 함경남도 함흥 부근 퇴조 포구에 상륙했다. 목적지는 함경남도 갑산이었다. 7월 23일, 백두산에 이르렀을 무렵 공작대는 북한군에 발각됐다. 중대 규모 적과 교전이 벌어졌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대원 대부분이 사살·생포됐다. 생존자는 뤄야퉁 외 오중현(吳中賢(우중셴)·전학림(傳學林·촨쉐린) 등 5명에 불과했다. SC지대의 마지막 작전은 대실패로 끝났다.
1971년에야 참전 사실 공식 인정
국립서울현충원 외국인 묘역 위서방(왼쪽), 강혜림 묘.
SC지대 해체 후 지대원 일부는 중공군 포로 귀순 설득 작업, 대북 중국어 방송 아나운서, 대북 심리전 요원으로 활동했다. 나머지는 생업으로 돌아갔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도 SC지대 화교부대원들은 참전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1952년 오중현이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것이 전부다. 20년이 지난 1971년에야 한국 정부는 SC지대의 참전 사실을 공식 인정하며 53명에게 종군기장을 수여했다. 이후 1975년 보국포장을 수여했다. ‘국가유공자’ 예우는 없었다.
SC지대가 희생해야 했던 것은 인명(人命)이 다가 아니었다. 대만이 파견한 SC지대 책임자 왕스유·류궈화는 부채까지 짊어졌다. SC지대는 모든 공작비용을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 대만 정부가 약속을 어기고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원들이 한푼 두푼 보태기는 했고 류궈화 등이 화교 사회에서 거액을 빌리기도 했다. 2년 반 남짓한 활동 기간 사용한 비용이 당시 화폐로 1억7000만 원에 달했다. 정전 후 부채 상환은 왕스유·류궈화 두 사람 몫으로 남았다. 이들은 20여 년에 걸쳐 빚을 상환했다.
이방(異邦)을 위해 막대한 인적·물적 희생을 했지만, 화교 출신 참전용사들에게 돌아온 것은 푸대접이었다. 이유는 ‘한국 국적자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SC지대원들은 국가보훈처 등 관계기관으로부터 생전에 참전용사 대접을 받지 못했다. 사후에도 국립묘지(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국립묘지에 안장되려면 국적이 대한민국이어야 하고 국가유공자 자격과 참전용사 요건을 갖춰야 한다”는 원칙론을 앞세워 “죽어서 국립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참전용사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김육안(金育安·진위안) 여한(旅韓·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장은 2001년 작고한 SC지대원 김성정(金聖亭·진성팅)의 아들이다. 김성정은 1973년 보국포장을 받았다. 김육안 회장의 당숙 김정의(金亭義·진팅이)도 SC지대원으로 적 후방에 공수 낙하하다가 실종됐다. 김 회장은 “1973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아버지에게 보국포장을 수여하면서 다른 것은 못해도 나이가 들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대한민국 정부가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의 약속은 지금껏 지켜지지 않고 있다. 화교 참전용사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국적 다르다’ 외면 옳을까
경기 파주시에서 연천군으로 이어지는 37번 국도변에 이른바 ‘적군(敵軍)묘’가 있다. 공식 명칭은 북한군·중국군 묘지다. 한국 국방부가 관리한다. 6·25전쟁 참전 북한 인민군·중공군, 남파 간첩이 잠들어 있었다. 2013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측에 중공군 유해 송환을 제의했다. 중국이 제의를 받아들여 도합 589구의 중공군 유해가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랴오닝성 선양(瀋陽)의 항미원조열사릉(抗美援朝烈士陵)에 안치됐다. 지난해 파주 적군묘에서 개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인 추모제’에 여당 지역구 의원이 참석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적군’의 묘까지 챙기고 적군 추모제까지 거행하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화교 출신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