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호

사바나

엄마 없이 먹는 ‘청년의 집밥’ HMR

‘급식 세대’ 밀레니얼의 슬기로운 만찬생활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0-06-2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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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인 가구 청년, 주 3~4회는 HMR로 집밥

    • 고등어구이, 밀푀유나베…골라 먹는 재미

    • 건강 걱정? ‘잡곡밥’에 닭 가슴살 먹는다

    • 인스턴트 아닌 나를 위한 소소한 만찬

    • 같이 먹어야만 집밥? ‘혼자서 근사하게’

    • 급식과 편의점 일상이던 밀레니얼, HMR 친화적

    • 코로나에도 주요 식품기업 줄줄이 호실적

    *사바나 초원처럼 탁 트인 2030 놀이터, 밀레니얼 플레이풀 플랫폼

    국내 주요 식품기업의 
대표 HMR(가정간편식) 브랜드. [각사 제공]

    국내 주요 식품기업의 대표 HMR(가정간편식) 브랜드. [각사 제공]

    1인 가구 직장인 최형균(30) 씨는 1주일에 3~4끼를 HMR(Home Meal Replacement·가정간편식)로 해결한다. 집 근처 기업형 슈퍼마켓(SSM)에 HMR 코너가 구비돼 있어 그날그날 마음에 드는 메뉴를 골라온단다. 최씨는 “냉장고가 작아 반찬 여럿을 보관하기 어려운데 HMR은 필요할 때마다 사올 수 있고, 그때그때 메뉴를 바꿔가며 먹는 재미도 있다”고 했다. 

    그가 가장 선호하는 한 끼 조합은 ‘햇반 잡곡밥’ 210g, ‘비비고 배추김치’ ‘고메 함박스테이크’다. 왜 하필 잡곡밥이냐 물으니 “건강을 생각한 결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틀에 한 번꼴로 운동을 한 뒤에는 HMR 형태로 출시된 닭 가슴살을 먹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HMR은 ‘불량식품’ ‘방부제 덩어리’라는 편견에 휩싸여왔다. 정작 ‘90년생 직장인’은 건강을 생각해 HMR을 먹는다. 

    마찬가지로 1인 가구 직장인인 김미나(32) 씨는 HMR을 두고 “몸에 안 좋은 인스턴트가 아닌 나를 위한 소소한 만찬”이라고 표현했다. 김씨 역시 1주일에 3끼를 HMR로 해결한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온라인으로 HMR 제품을 대량 구매한다. 야근이 잦아 장을 보거나 반찬을 조리해 두는 게 여의치 않아서다. 근래 꽂힌 제품은 ‘비비고 고소한 고등어구이’다. 그는 “생선구이는 손질이 힘들고 요리할 때 냄새가 진동해 혼자 먹기 어렵다. HMR 생선은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끝이다. 편리하다고 맛이 떨어지는 것도 절대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이사한 김씨는 집들이 음식으로 밀키트 제품인 CJ쿡킷 ‘밀푀유나베’를 택했다. 밀키트는 HMR의 일종으로 손질된 재료와 양념이 함께 담겨 배달되는 제품이다. 밀키트 형태의 밀푀유나베에는 소고기와 가쓰오육수, 단호박, 칼국수, 야채, 소스 등이 포함돼 있다. 김씨는 “육수를 낼 필요도 없이 냄비에 예쁘게 담아 끓이기만 했다”며 흡족해했다.



    집밥이란 무엇인가

    삼계탕에서 미역국, 꼬막무침, 불닭발에 이르기까지 HMR 종류도 다양해졌다. [뉴스1]

    삼계탕에서 미역국, 꼬막무침, 불닭발에 이르기까지 HMR 종류도 다양해졌다. [뉴스1]

    밀레니얼 세대는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 금액을 들여 남의 간섭 없이 양질의 한 끼를 오롯이 즐길 수 있길 원한다. 최씨는 “20~30분간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HMR로 혼자 편히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김씨는 “1인 가구다 보니 혼자 먹을 식재료 양을 정하는 게 너무 어려운데, HMR은 1인용으로 출시된 제품이 많아 선호한다”고 했다. 혼자 사는 밀레니얼 세대에 HMR은 과거와는 다른 의미에서 어엿한 집밥이다. 

    집밥이 낭만과 추억의 대상이라는 건 만들어진 판타지다. 직장인 김아영(35) 씨는 “집밥이 마치 노스탤지어처럼 머물러 있지만, 사실 엄마의 끊임없는 가사노동을 통해 아빠와 자녀들이 얻은 일종의 수혜였다”고 꼬집었다. 그 밑바탕에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다. 부모와 두어 명의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 형태의 가족으로 규정해 온 거다. ‘정상가족’의 범주에 들지 않는 가족은 모두 소수자의 처지로 내몰렸다. 

    ‘정상가족’에서 엄마는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자녀들에게 직접 요리해 주는 걸 ‘좋아하는’ 이타적 존재로 표상된다.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강박은 늘 엄마들을 지배했다. 식단은 밥과 국, 최소 3찬이 갖춰진 형태여야 했다. 반조리된 음식을 식탁에 올리는 건 엄마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자아냈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단어가 ‘손맛’이다. ‘엄마 손맛이 담긴 집밥은 내 유년의 추억’이라는 서사는 이런 식으로 탄생했다. 

    집밥 판타지는 산업화 세대(1940~1954년생)와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 86세대(1960년대생), X세대(1970년대생)를 관통하는 마법의 낱말로 자리매김했다. 공장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려 일하는 산업 역군도, 빳빳이 펴진 흰 셔츠를 입은 채 밥벌이를 하던 넥타이 부대도, 최루탄을 던지고 독재 타도를 외치던 민주화 투사도, 압구정동에서 날밤을 지새우던 오렌지족도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갈구했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1981~1996년생)의 삶에는 중요한 단절선이 등장했다. 급식이다. 초등학교 급식은 1993년부터 확대돼 1998년 전국 모든 초등학교에서 실시됐다. 중학교 급식은 1999년 전국 중학교의 30.3%에서 실시됐고, 2000년 이후 해마다 크게 확대됐다. 고등학교 급식은 1998년부터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결국 2003년을 기점으로 전국 초·중·고 학교급식이 전면 실시됐다.(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중) 1989년 등장한 프랜차이즈 편의점이 1997년 2000개, 2001년 3000개를 돌파하는 등 초고속 성장하고 있었다는 점도 언급해야겠다. 

    먹거리 담론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쓴 강보라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은 “밀레니얼은 급식 세대”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밀레니얼은 급식 세대”

    “윗세대는 학교에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잖아요. 자연히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죠. 누가 어떤 도시락 반찬을 싸왔을까 살펴보는 분위기마저 있었습니다. 반면 밀레니얼 세대는 엄마의 집밥을 먹을 기회가 1주일에 손에 꼽을 만큼 적었을 거예요. 학교에서는 급식 먹고, 학원 갈 때는 편의점에서 끼니를 해결했잖아요. PC방에서 놀면서 간단히 배를 채우기도 했을 테고요. 즉 밀레니얼 세대는 집 밖에서 먹는 밥에 대한 거부감이 작았기 때문에 HMR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겁니다.” 

    즉 밀레니얼 세대의 생애에서 HMR은 접근성이 도드라지게 높은, 말하자면 지금의 유튜브와 같은 대상이었다. 김미나 씨는 “고등학교 때는 매점용 햄버거가, 대학교 때는 삼각김밥이 나의 삶에서 떼놓을 수 없는 식품이었을 만큼 HMR이 익숙했다”고 회고했다. 3분카레, 양반죽, 크림스프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제품들도 밀레니얼 세대의 삶을 부지기수로 파고들곤 했다. 

    따라서 밀레니얼 세대가 HMR을 집밥으로 여기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김아영 씨는 “어릴 적부터 유튜브를 통해 콘텐츠를 보고 자라면 유튜브 콘서트와 공연장 콘서트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유년 시절부터 HMR을 일상에서 접할 경험이 많았던 밀레니얼 세대가 HMR을 근사한 한 끼 집밥으로 여기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형식에 얽매이는 대신 내용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 특유의 실용주의도 이런 분위기를 돋운다. 최형균 씨는 “HMR은 집밥이나 마찬가지”라면서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집밥 하면 국과 김치가 있어야 하는 등 나름의 형식이 있었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형식과 규격에 구애하지 않고 간편하면서도 맛있게 한 끼 먹는 걸 선호한다”고 했다. 

    그러니 반드시 ‘함께하는 식사’일 필요는 없다. 김미나 씨는 “같이 사는 식구가 없다 보니 다 같이 모여서 먹는 집밥이 정석(定石)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신 혼자 먹어도 ‘근사하고 맛있게 먹자’는 주의를 자연히 갖게 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1인 가구다 보니 혼자 먹을 식재료 양을 가늠하는 게 늘 어려운데, HMR은 1인 가구에 맞춰 나온 제품이 대부분이라 먹고 남은 걸 버릴 일이 많지 않은 점이 좋다”고도 덧붙였다.

    코로나19에도 줄줄이 호실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비대면 소비가 증가하면서 HMR 수요가 늘었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HMR 제품을 고르는 모습. [뉴스1]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비대면 소비가 증가하면서 HMR 수요가 늘었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HMR 제품을 고르는 모습. [뉴스1]

    덕분에 관련 시장은 확장 일로에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2019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농촌경제연구원은 2018년 국내 HMR 시장 규모(출하액 기준)를 3조2164억 원으로 추정했다. 2022년에는 그 규모가 5조 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HMR 제품 중 최근 들어 즉석국, 국·탕·찌개류, 가공밥, 즉석죽 등이 돋보이는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반면 냉동만두 시장 성장세는 주춤한 모양새다. 간식보다 식사에 방점이 찍힌 최근의 HMR 활용법을 반영한 결과로 풀이된다. 

    KDB미래전략연구소 산업기술리서치센터는 ‘국내 HMR 시장의 성장과정과 업계 대응방안’에서 “1980년대 당시 편의성을 추구하는 3분요리, 즉석밥 위주의 시장에서 현재는 다양한 프리미엄 일상식이 등장하며 시장이 진화했다. 1인 가구 증가, 고령화, 제품의 다양화, 식품의 온라인 판매 비중 상승으로 성장세는 지속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주요 HMR 브랜드를 갖추고 있는 식품기업들도 근래 들어 줄줄이 호실적을 기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집에서 간편하게 먹는 식사 수요가 더 늘어난 덕분이다. 

    ‘비비고’ ‘햇반’ ‘고메’ 브랜드 등을 고루 보유한 CJ제일제당의 식품사업부문은 올해 1분기 매출액 2조2606억 원을 기록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1.4% 늘어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15.3% 증가한 1163억 원으로 집계됐다. 해외시장에서 가공식품 매출이 126%나 증가한 게 주효했다. 국내에서는 비비고 죽, 국·탕·찌개 제품 판매가 늘어 관련 매출이 전년 대비 16% 늘었다. 

    ‘청정원’ ‘종가집’ 브랜드로 유명한 대상그룹도 1분기에 498억 원의 영업이익을 벌어들였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30.8%나 증가한 수치다. 특히 식품부문 영업이익은 256억 원으로 같은 기간 72.9% 급증했다. ‘3분 요리’ ‘오뚜기밥’ 브랜드를 보유한 오뚜기도 1분기에 매출액 6455억 원, 영업이익 572억 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각각 8.2%, 8.3% 늘었다. 이 중 건조식품(카레 등) 매출은 925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120억 원 증가했다. ‘양반’ 브랜드로 잘 알려진 동원F&B도 1분기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2019년 1분기에 비해 각각 4.73%, 4.49% 늘어난 7836억 원, 365억 원을 기록했다.

    물고 물리는 영토 싸움

    각 기업 간 영토 싸움의 움직임마저 보이는 형국이다. CJ제일제당은 최근 ‘제일안주’라는 이름으로 상온 안주 HMR 시장에 진출했다. 대상그룹도 기존 냉동안주 HMR 브랜드 ‘안주야(夜)’의 영역을 확대해 상온 안주 제품을 출시했다. 동원F&B는 간편 파우치 형태로 ‘양반 국·탕·찌개’ 14종을 내놓으며 CJ제일제당에 도전장을 냈다. 이를 위해 동원F&B는 광주공장 3000평 부지에 400억 원 규모로 신규 설비 투자를 진행한 바 있다. 

    강보라 연세대 연구원은 “과거에는 소수의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가 HMR 시장을 이끌었다. 이에 제품 개발이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이뤄졌다”면서 “최근에는 유튜브 등 소비자가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고, 기업도 소비자 취향과 구미를 반영하면서 보텀업(Bottom-up) 방식으로 제품 개발에 착수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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