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극의 쉐프’는 평균기온 영하 54도인 남극에서 살아가는 여덟 남자의 ‘먹방’ 영화다.
사는 게 참 복잡하다. 편리함은 늘어났는데 그와 함께 가져야 할 것, 해야 할 것, 봐야 할 것, 알아야 할 것은 몇 배나 더 늘어났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저녁 밥상을 찍어 올리면서 사람들이 내 삶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 싫다. 휴대전화를 내 몸처럼 소중히 여기지만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에 가면 야릇한 안도감이 생긴다.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다. 이렇게 마음이 들쭉날쭉 뾰족해질 때는 익숙한 모든 것과 잠시 떨어져 고립된 시간을 가져 보면 좋다. 그림에서 본 천국 같은 타히티나, 하늘과 땅과 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오지에서 딱 두 밤만 쉬면 좋겠다.
하루 정도 혼자 있고 싶은 당신을 위한 영화
영화 ‘남극의 쉐프’에는 냉동 및 건조식품, 통조림만으로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내는 요리사가 등장한다.
나 스스로를 가두고 싶은 남극에 1년 동안 갇혀버린 남자들의 먹방 영화가 있다. 영화 ‘남극의 쉐프’ 배경은 해발 3810m, 평균기온 영하 54도로 펭귄 같은 귀여운 동물은커녕 바이러스조차 살 수 없는 곳이다. 일 년 중 반은 하루 종일 해가 떠 있고, 나머지 반은 하루 종일 컴컴한 밤뿐이다. 물은 늘 부족해 상쾌하게 씻기도 힘든 곳이라 점점 볼품없고 너저분해지는 아저씨만 8명 등장한다. 기압이 낮아 물이 100도로 팔팔 끓어오르지도 않는다. 도무지 입맛이라고는 돌 일이 없는 설정이다. 그럼에도 빙하학자, 대기학자, 기상학자, 의사, 요리사 등으로 꾸려진 8명의 고립된 삶, 그 중심에는 언제나 식탁이 있다. 냉동 및 건조식품, 통조림만으로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내는 요리사의 생생한 조리 과정과 정갈하게 차려낸 음식으로 가득한 식탁 풍경은 2시간 내내 남극의 시간처럼 천천히 흘러간다.
도톰하게 썬 참치회와 말랑말랑 부드러움이 보이는 도미회 한 접시, 달콤한 간장양념을 성의껏 끼얹으며 조린 생선 한 토막, 해산물과 채소를 바삭하게 튀겨낸 모둠 한 접시, 데치고 볶아 간간하게 익힌 두어 가지 채소 반찬, 따뜻한 된장국에 흰 밥. 한 끼 메뉴만 읊었는데도 오만 가지 맛과 향이 머릿속에서 피어나며 군침이 돈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허허벌판 눈밭으로 외근을 나간 날의 점심은 주먹밥이다. 나들이라고 표현하기는 뭐하지만 썩 잘 어울리는 메뉴다. 쌀밥 안에는 연어살, 연어알, 장조림, 우메보시를 넣고 빳빳하고 도톰한 김으로 꼼꼼히 감싼다. 흰 밥은 씹을수록 다디단 맛이 난다, 여기에 배릿하고 짭짤한 재료가 더해지니 ‘단짠’의 완벽한 조화인데 고소한 김까지 풍미를 더한다. 남극 아저씨들은 양손에 하나씩 움켜쥐고 어린아이처럼 마구 밥을 먹는다. 새콤하고 아삭한 단무지 한쪽이 그리울 법한데 멀건 된장국이 반찬 몫을 죄다하는 식사 모습이 우습고도 애처롭다.
라면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낮도 밤도 주어지지 않는 땅에서 절기 행사도 챙긴다. 동짓날에는 근사한 프랑스 요리가 식탁에 오른다. 거위 간으로 만든 푸아그라 테린에 무화과 퓌레를 얹었다. 오랜만에 머리도 빗고, 슈트까지 차려입은 아저씨들은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포크와 나이프로 크림 같은 테린을 잘게 잘라 새콤달콤한 퓌레를 야무지게도 얹어 먹는다. 바삭한 껍질이 붙어 있는 희고 통통한 살집의 농어구이는 톡 쏘는 발사믹 식초를 조려 만든 소스와 곁들인다. 평화로운 이들의 식탁에도 위기는 찾아온다. 인스턴트 라면의 고갈이다. 밤마다 너도나도 라면을 끓여 먹은 대가다. 내가 생각해도 라면을 대신할 것은 없다. 사랑, 정성, 건강, 영양이 결핍된 식품이라 할지라도 라면은 분명한 소울푸드(soul food)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내 몸은 라면으로 이루어져 있어’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불면을 호소하는 대장 아저씨의 간절함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소한 부재의 존재감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영화 속엔 별별 맛있는 음식에 외롭고, 우습고, 미안하고, 아픈 아저씨들 이야기가 양념처럼 계속 더해진다. 아름답진 않지만 시원한 눈밭 풍경까지 실컷 볼 수 있는 것도 이 계절엔 덤이다. 사람이 1년 동안 먹는 양은 대략 1톤 즉, 1000kg 정도라고 한다. 그걸 먹어치우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나는 ‘남극의 셰프’에서 먹는 동안 주어진 음식과 시간의 소중함을 엿보았다. 익숙한 것일수록 사라지는 순간 하나같이 거대한 존재감을 갖는다는 것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