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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미식의 기쁨을 알려주는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의 한 장면.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친구가 보내 온 그 영화를 보게 됐다. ‘웰컴 투 사우스(welcome to south)’라는 이탈리아 영화였다. 코믹한 내용인데 보는 내내 이유 없이 울었다는 기억밖에 없다. 이듬해 아빠는 고통과 이승의 연을 끊고 우리 곁을 떠났으며, 나는 그해 겨울 영화로 만났던 남부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떠났다.
영상으로 만나는 아름다움과 낯섦
여행은 계획을 짤 때 가장 행복하다. 현실 여행은 수많은 낯선 것과 부딪히느라 상상만큼 아름답지 않다. 그럼에도 안락한 집으로 돌아온 뒤 하나하나 되돌아보면 여행의 기억이 다시 엉덩이를 들썩이게 한다. 하늘 길도 바닷길도 막힌 탓에 현실 여행 기회가 사라져버린 요즘 ‘웰컴 투 사우스’를 다시 꺼내 보며 추억을 곱씹고, 전례 없이 장대한 다음 여행 계획을 세워보는 중이다.‘웰컴 투 사우스’는 ‘남부 이탈리아는 위험하고 미개하다’고 여기는 북부 이탈리아 사람이 남부 해안 도시 ‘카스텔라바테’로 이주해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 음식과 문화에 완전히 젖어드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로 만나는 이탈리아 남부의 서쪽 바다 풍경은 숨 막히게 아름답고,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들 정서는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가보지 못한, 어쩌면 살면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수많은 아름다움과 낯섦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 경험한다.
여행의 기쁨을 선사하는 영화는 이외에도 꽤 많다. 나는 오늘 그중에서 ‘파리로 가는 길(Paris can wait)’을 열어 본다. 제목처럼 파리까지 가는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멋진 도시 파리는 영화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프랑스 칸에서 파리를 향해 같이 출발하게 된 서먹한 두 사람 ‘자크’와 ‘앤’. 이들이 자동차를 타고 가며 만나는 작은 소도시 풍경과 음식, 와인 등이 끊임없이 화면을 채운다.
이들의 첫 끼는 어색함을 풀어주는 단출한 음식 하몽과 멜론이다. 그 다음엔 로마인이 지어 놓은 고대 도시 흔적을 따라 가다 라벤더 들판을 지나 올리브 숲에 이르러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그 와중에도 자크는 길에서 자란 민들레 잎을 따먹으며 “오일과 앤초비, 소금, 후추만 있으면 이보다 더 완벽한 샐러드는 없을 것”이라고, 자연이 내주는 먹을거리를 예찬하기 바쁘다. 이들은 고급스러운 호텔 레스토랑에서 그림처럼 예쁘고 화사한 음식, 어마어마한 치즈 트레이를 만나기도 한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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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 주인공들은 풀밭 위 간식부터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정찬까지 다양한 식사를 즐긴다.
영화 중간 즈음에는 프랑스 재래시장의 맛있는 풍경과 풀밭 위 식사 장면 등도 나온다. 모네, 마네, 르누아르의 명작이 두 사람 여정 사이사이에 등장해, 이토록 소소한 여행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응원한다. 파리에 가까워지며 두 사람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픈 속내를 드러내고, 가슴 뛰는 ‘썸’도 잠깐 탄다.
여행은 그런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빵 한 조각이 가슴 설레게 다가오고, 살찔 두려움 따위 내던진 채 탄수화물 덩어리 파스타를 한 사발 먹게 만드는 것. ‘익숙한 여기’가 아니라 ‘낯선 거기’에 있음으로써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가치 있어지는 순간순간을 경험하는 것.
마침내 파리에 다다른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묻는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죠?” 그 질문에 아직 나는 답을 못하겠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행복한 순간이 너무 많았다. 단조로운 질문 하나가 내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되짚어줬다. 휴가 대신 선택할 미지의 영화가 나를 또 얼마나 뒤흔들어 놓을지 생각하니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올 여름 더위가 무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