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과 한국의 딜레마

‘줄서기’ 요구하는 미국, 부릅뜨고 노려보는 중국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shamora@donga.com

    입력2004-06-30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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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한미군 감축을 둘러싼 논의가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안보공백과 대북억제력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한미동맹의 성격 변화와 이에 반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의 자세다. 일본 같은 ‘확실한 줄서기’를 요구하는 미국과 한반도를 향해 미사일을 조준하는 중국.
    • 과연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와 시간은 있는가.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과 한국의 딜레마

    6월7일 열린 9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 주한미군 감축문제를 심도 깊게 논의한 자리였다.

    “일본이 미일동맹 강화를 거부하면 동남아는 중국의 안마당이 됩니다. 일본이 역할 분담을 거부하면 미 의회와 여론은 안보무임승차를 고수하는 일본과의 동맹을 파기하라고 요구할 것이고요. 미국이 동아시아 개입정책을 포기하면 힘의 공백상태가 초래되어 일본은 홀로 중국과 맞서야 합니다.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1996년 초 일본은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걸프전 당시 파병 대신 재정지원만으로 버틴 일본에 대해 미국은 “계속 무임승차 전략을 선택하면 안보우산을 거두겠다”고 암시했고, 국내에서는 미일동맹 강화와 대중국 압박이 불러올 긴장상황을 경고하며 미·중·일 다자안보체제만이 대안이라는 목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해 3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ASEM(아시아유럽정상회담)에서 싱가포르의 고촉통(吳作棟) 총리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일본 총리에게 앞서의 말로 미일동맹 강화를 ‘권고’했다. 이 말은 결국 하시모토 총리가 최종결정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곧 이어 4월 일본은 미군의 역내 안보활동을 지원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맡는다는 내용의 ‘신미일안보공동선언’을 미국과 함께 발표하기에 이른다.

    2004년 한국에 밀려오고 있는 고민은 8년 전 일본이 처했던 것과 흡사하다. 주한미군 2사단 보병여단 3600명의 이라크 차출 소식, 뒤이은 한미양국의 해외미군재배치검토(GPR) 협상, 2005년 말까지 1만2500명의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는 미국측의 제안 등으로 안보관련 당국자들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대북억제력 약화와 안보공백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고, 이른바 ‘협력적 자주국방’을 위한 천문학적 예산규모도 중구난방으로 흘러나온다.

    주한미군의 재편이 단순히 한국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재배치 작업의 일환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을 일본, 괌과 연결하는 하나의 기지로 형성해 역내 분쟁개입과 대중국 압박용으로 사용하겠다는 군사전략을 갖고 있다. 단순한 병력규모 변화를 넘어 한반도 안보환경의 근본적 재편을 불러오는 이러한 구상은 중국의 반응을 염려할 수 밖에 없는 한국에게는 ‘운명을 가르는 딜레마’나 다름없다.



    과연 미국이 향후 동아시아에서 그리려 하는 그림은 무엇이고, 이는 한국에게 어떤 선택을 요구하는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며 이후 한국군의 전력은 어떻게 재편되는가. 반세기 동안 유지되어온 한미동맹의 성격과 연합작전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현재 상황을 하나하나 정리해보기로 하자.

    한국, 일본, 괌이 ‘한 세트’

    1990년대 초반 걸프전과 1차 북핵위기를 겪은 클린턴 행정부는 주요한 두개의 전장에서 동시에 승리를 거둔다는 ‘win-win’ 전략을 채택한다. 더 많은 군사력이 필요하게 된 미국은 이전 정부의 미군 감축 방침을 철회하고 아시아와 유럽에 각각 10만의 미군을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부시행정부는 이러한 전략을 더욱 공세적으로 발전시켰다.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영토점령이나 정권교체 등의 적극적인 목표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듬해인 2002년 5월 발표된 ‘방어계획지침(Defense Planning Guidance)’을 통해 미국은 미국 본토(1)를 안전하게 방어하고, 4개 지역에서 분쟁을 억제하고, 2개 전장에서 ‘신속히’ 승리하며, 그 중 1개 전장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한다는 1-4-2-1 개념을 공식화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전략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미군이 첨단군사기술을 통해 군대를 경량화·신속화해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군사변환(Military Transformation)을 추진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력구조 재편작업과 함께 미국의 주요 전략연구기관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는 군대를 양대전쟁 전략에 부합하도록 재편하기 위한 검토에 착수했다. 그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대규모 미 지상군이 대북억제력을 위해 고정배치 돼 있어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동성, 즉 ‘전략적 유연성’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를 위해 주한미군을 현재의 임무와 구도에서 탈피시켜 괌이나 일본의 미군 전력과 보다 강하게 융합시킬 필요성이 대두됐다. 즉 북한과의 전면전을 위해 무겁고 둔중하게 설계된 미2사단 대신 보다 빠르고 가벼우면서도 적은 수로 구성된 신속기동부대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태평양사령부의 작전범위에 포함되지만 독자적으로 의회에 보고하는 한미연합사의 독특한 지위 역시 주일미군 등 다른 해외주둔 미군과 동일한 체계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 안보정책 결정자들의 결론이었다.

    미국이 서태평양 지역에 구축하고 있는 전략거점은 한국, 일본, 괌 세 곳이다. 이 가운데 보병은 북한과의 전면전을 염두에 두었던 한국에만 배치했고, 서태평양 주요 해상수송로의 길목인 오키나와와 아시아 전체에 대한 전략폭격이 가능한 괌에는 해·공군을 배치해 두고 있다. 미국의 전략가들에게 이들은 별개의 지역이 아니다. 세 거점이 서로 엮어져 동아시아 전체전력의 ‘풀 세트’가 되는 것이다.

    미국이 최근 추구하고 있는 그림은 이 세 지역을 보다 긴밀하게 엮는 것으로 요약된다. 결과적으로 서태평양 전체의 미군전력은 늘어난다는 것이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의 설명이고 보면, 주한미군의 감축이 주일미군과 괌 주둔 미군의 증가로 연결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기동성’을 강조하는 군사변환의 개념상 전략적 중요성이 증가하는 해·공군은 병력이 소폭 늘어나는 대신, 육군 위주의 주한미군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종합하면 1000명 내외가 증가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모든 군대는 잠재적인 ‘위협’을 상정하고 그 위협의 크기를 예측해 전력을 배치하게 마련이다. 재편되는 동아시아 미군에도 몇 가지 위협이 설정되어 있다. 첫째는 역내에 존재하는 국가들에 대한 견제다. 미국이 잠재적 적국으로 설정하고 있는 중국과 중국에 기대어 ‘불량국가’화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들이 여기에 속한다. 북한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이슬람권 국가들이 포함된다.

    기지 주둔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중동지역 또한 고려대상이다. 중동은 미국의 사활이 걸린 지역이지만 이라크전에서도 확인됐듯 역내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안정적인 기지를 확보하기가 어려워졌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사적 기능을 대러시아 견제로 한정짓고 나면, 언제든 병력을 차출해 중동에 투입할 수 있는 기동군은 동아시아에 둘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세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GPR의 핵심은 동아시아이며, 그 가운데서도 ‘주한미군의 지역적 역할’ 혹은 ‘전략적 유연성’은 가장 중요한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한강 이북에 있는 미군부대를 통합하는 오산·평택기지는 지리적 위치상 중국에 대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지닌다. 언제든 한반도를 떠나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려면 대북억제 임무는 한국군에게 맡겨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주한미군이 수행하고 있던 10대 특정임무를 한국군에 인계하기로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이 그리는 동아시아의 그림

    장기적으로 주한미군은 어떤 모습을 갖게 될까. 지난 6월7일 GPR 협상을 통해서 미국측은 “2005년 말까지 1만2500명을 감축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상당수 전문가들은 이것이 최종숫자가 아니라는 데 의견을 모은다. 눈여겨볼 것은 5월19일 미 의회예산국(CBO)이 공개한 ‘해외주둔 육군기지 변경방안’ 보고서다. 여기서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 방안은 ‘대안3’으로 제시된 주한미군 전면철수와 1개 전투여단 순환배치다. 주한미군 육군 2만8000명 가운데 2만7000명을 본토로 철수하고 1000명이 남는 대신 1개 신속기동군(BCT) 전투여단(3600명)을 순환배치하는 이 방안에 따르면 전체 주한미군 3만7000명 가운데 1만3600명 가량만이 잔류한다.

    국방부 관계자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이 아이디어를 수정한 수준에서 주한미군 규모가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1개 전투여단을 순환배치하는 경우 한반도 전장환경에 적응이 안돼 작전능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안내’할 수 있는 1개 대대 병력(1000명)은 남을 공산이 크다는 것. 여기에 이들을 지원할 병력(1000명)까지 CBO에서 제시된 방안보다 2000명 정도가 ‘붙박이’로 남고, 순환배치병력까지 더하면 장차 주한미군 육군 수는 6600명이 된다.

    해·공군은 약간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육군의 상당수가 본토로 빠진다는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만큼 많은 전력이 전개해와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전시에 증원될 해병대와 항모전단 등을 ‘접수’할 병력이 필요해진다. 종합해보면 주한미군은 절반 가량(1만6000~1만7000명) 남게 된다.

    미군이 바뀌면 연합작전체계와 작전계획5027도 손질할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 주전력이 한반도 ‘붙박이’가 아니므로 데프콘2가 발령되면 한국군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로 이양되는 현재의 전시작전통제 구조도 바꿔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연합사를 해체하고 일본과 같은 병렬형 지휘체계로 가야겠지만, 당분간은 ‘한미기획사’ 정도의 상설협의체를 신설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앞서 설명했듯 최근 주한미군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동아시아 주둔 미군 전체 변화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른 지역, 특히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움직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996년의 안보선언 이후 갈수록 긴밀해지고 있는 미일 군사협력은 동아시아 미군 재편에 따라 더욱 강화될 공산이 크다. 이를 반영한 것이 최근 주일미군의 움직임이다. 미군은 현재 워싱턴주에 있는 육군1군단 사령부를 가나가와(神柰川)에 있는 자마(座間) 기지로 이전하려고 계획 중이다. 그동안 해군, 해병, 공군 중심으로 구성돼 있던 주일미군에 지상군이 합세하는 것이다.

    미1군단은 주한미2사단을 휘하에 두고 있으며 유사시 한반도에 증원되는 핵심부대다. 주한·주일미군과의 통합운용 가능성은 커지고 주한 미 지상군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장차 미사일방어(MD)시스템과의 연계운용을 고려해 일본 항공자위대사령부와 주일미5공군사령부가 통합운영될 계획임도 확인됐다. 역내로 전력을 날려보낼 능력을 강화하는 한편 주일미군과 자위대의 전력을 네트워크화 하겠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주아시아미군 예하 한국주둔병력’

    한편 군 일각에는 미1군단 사령부의 캠프 자마 이동이 한미연합작전체계의 해체와 관련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전시작전통제권 회수에 즈음해 한국에 있는 미8군사령부와 일본에 있는 1군단사령부 위치를 맞교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편제상 1군단은 8군의 예하부대다. 주한미군 감축과 주일미군 증강이라는 흐름을 놓고 볼 때 상급부대가 요충지에 있는 것이 효율적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는 한미연합사령관이 정전협정을 관리해야 하는 유엔사령관을 자동겸직하기 때문에 4성이 부임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지만, 연합작전체계가 해체되면 권역 내의 모든 부대는 태평양사령부의 통제를 받게 되므로 이런 필요성이 사라진다. 서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군 장성 TO상 한 사람밖에 올 수 없는 4성을 한국에 둘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3성인 8군사령관은 1군단사령관과 위치를 바꾸면서 4성으로 승급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위상변화는 GPR내의 기지종류와 관계가 깊다. 일본은 대규모 병력과 장비가 주둔하는 ‘전력투사 근거지(Power Projection Hub)’가 될 가능성이 크고 한국은 PPH와 ‘주요작전기지(Main Operating Base)’의 중간성격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어느 기지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개념은 아니지만, 장차 주일미군 기지는 동아시아 미군 전체의 병참기지 역할을 맡고 주한미군 기지는 기동군 병력이 훈련을 받는 주둔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주한미군은 주일미군의 하위개념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동이나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서 분쟁이 생길 경우 주일미군과 자위대를 중심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주한미군 병력은 아태지역에 남아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는 ‘예비군’ 기능을 맡는 그림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운용에 있어서 한미동맹은 미일동맹의 보조적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혹은 일본은 전략비축물자를 보유하는 군수담당 축으로, 한국은 전력발진을 담당하는 축으로 임무를 분담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주일미군 기지는 핵심적으로 방어해야 할 시설이 되어 MD의 중심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든 미국에게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동맹’의 두 하위파트가 된다. 주한미군은 ‘괌과 일본, 한국으로 구성되고 MD로 연결되는 주아시아미군 예하의 한국주둔 병력’으로 성격이 바뀌는 셈이다.

    문제는 전시증원능력

    현재 논의되고 있는 GPR상의 주한미군 상시주둔병력의 감축은 이러한 동맹개념의 변화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전시증원병력의 규모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유사시에 증파되는 병력의 규모는 이제까지 상시주둔 미군보다 더 큰 대북억제력으로 작용해왔다.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이 가시화되면 미군은 데프콘3부터 크게 3단계로 나뉘는 증원작전을 펼친다. 해·공군의 감시전력이 한반도로 이동해오는 신속억제방안(FDO· Flexible Deterrence Option), 7함대와 3함대의 다섯 개 항모전투단과 공군전투사령부 산하 10여개 비행단이 배치되는 전투력 증강(FMP·Force Module Package) 조치, 끝으로 모든 증원전력을 실어보내는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TPFDD·Time Phased Forces Deployment Data)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한반도로 전개해오는 육군의 총 증원병력은 69만명에 이른다는 것이 그동안 한미 양국의 공식 설명이었다. 그러나 상시 규모가 줄어들면 이러한 기존의 전시증원 규모 또한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일부 전문가들이 “주한미군 감축관련 협상의 본론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고 경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개 전투여단의 순환배치가 결정되고 나면 유사시의 증원방안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미 육군 가용병력 100만 가운데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대비전력은 60만~70만 정도다. 이들을 3교대로 순환배치한다고 가정하면 전시증원군은 최대 20만, 경우에 따라 10만 정도로 감소한다. 사실 1990년대 이전에도 69만이라는 숫자는 립서비스에 가까웠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다른 지역에 위기상황이 없다고 가정하고 가용인원을 모두 쓸어모아 단순 합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순환배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적용하면 증원병력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물론 증원병력의 감소가 그대로 증원 ‘군사력’의 감소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1개 스트라이커 전투여단(SBCT)의 전투력은 기존 1개 사단병력에 맞먹는다는 평가다. 그러나 병력이 감소할 경우 지상전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기존의 전선 중심 전쟁에서 포인트 중심의 전쟁이 되는 것이다.

    이를 한반도 환경에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까지는 전쟁이 개시되면 한미연합군 부대가 휴전선 이남 수십km 이내에서 전선을 틀어막고, 여기에 본토에서 시차별로 증원돼오는 병력을 투입해 전선 자체를 밀고 올라가는 개념이었다. 6·25 당시의 상황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그러나 변화한 부대, 줄어든 증원병력으로는 이 같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전쟁의 최종목표 역시 수정될 수밖에 없다. 평양-원산 이북의 ‘멸공선’, 압록강-두만강 인근의 ‘통일선’까지 밀고 올라간다는 기존 목표 대신, 최악의 경우 실지(失地)만 회복하고 전쟁을 끝내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이는 한국으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변화다. 상당한 피해만 입고 휴전상태로 되돌아가야하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군 증원병력이 전선을 맡아주지 않으면 예비군 등을 동원해 힘을 추스릴 기회가 사라지므로 한국군 7군단 기계화부대 등 독자적으로 북진할 수도 없다. 작전계획5027의 ‘공세적 방어전략’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상시주둔병력의 감축보다 전시증원규모의 변화가 대북억제력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군사행동을 일으켰다가 실패할 경우 북한이 입게 될 타격에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잘못했다가는 평양이 점령당하는 경우와 부수적인 피해만 입고 끝날 수 있는 경우에 북한이 느끼는 심리적 위협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군 전면개편 불가피

    상황이 이렇게 변하면 기존의 전선전을 대체할 새로운 한반도 전쟁개념이 수립되어야 할 뿐 아니라 작전계획도 완전히 재구성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해·공군 화력으로 상대전력을 상당부분 무력화시켜놓고 주요 거점에 공중강습부대를 투입해 전쟁지휘부를 제거함으로써 승리를 노리는 전략이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한국군도 전력을 재편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단순히 기존 사단의 작전지역을 조정해 미2사단이 맡고 있던 서부전선 일대를 감당하게 한다든지 10개 특정임무를 이양받을 준비를 하는 것 외에도 추가적인 전력재편이 불가피해진다. 주한미군의 재편이 국방개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쟁개념이 전선전에서 포인트전으로 바뀌면 한국군 역시 경량화·기동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10명으로 구성된 1개 분대를 미국처럼 8명으로 줄이고 대신 자동화기를 보강하는 방식이다. 전선을 감당하는 보병 대신 공중강습이 가능한 특전부대나 해안상륙이 가능한 해병대의 전략적 활용도도 증가한다. 특전사와 해병대, 전방의 특공여단 등을 기존의 육군 편제에서 떼어내 15만 규모의 ‘전략군’으로 새로 창설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육군이 40만 이하로 줄어들게 돼 그동안 지나친 불균형으로 불만이 많았던 해·공군을 다독이는 효과도 있다.

    장차 연합작전체계가 해체되면 원칙적으로 한국군과 미군의 지휘체계는 분리되지만, 이들 해병대와 특전사 전력의 경우는 미 본토에서 오는 증원전력과의 공동작전을 위해 미군에 배속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개념적으로 정리하면 전쟁 초반 전선방어는 한국군 지상전력이 맡고, 상륙이나 공중강습은 미군이 책임지는 식이다. 고속수송선(HSV)을 타고 오키나와에서 달려온 증원군이 경북 왜관기지와 남해의 사전집적선에서 장비를 꺼내기 위해 들르는 시점부터 배속된 해병대·특전사 전력이 함께 움직이는 방식이다.

    전방사단의 경우도 기동성 있는 형태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현재 육군이 진행하고 있는 개선방안은 전방의 2~3개 보병사단을 기계화사단으로 개편하는 방안과 미2사단의 훈련 및 전력운용 수준을 따라잡겠다는 목표로 올해 시작한 ‘미래형 보병사단 개편 연구’ 정도다. 그러나 상황변화와 발맞춰 보다 근본적인 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이 국방부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국방부 내부에서는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동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미 지상군 전력이 여단단위로 재편되는 것과 궤를 같이해 한국군 전방 지상군도 여단단위로 재편하는 작업이다. 1950년대 만들어져 내려온 현재의 사단단위는 현대전 환경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 근거다. 서부전선의 미2사단 빈자리를 기존 한국군 사단의 책임지역을 변경해 메우는 대신 아예 전방 주요전력의 배치 자체를 바꾸는 작업으로 요약된다.

    사단단위를 해체해 여단단위로 개편하면 늘어난 여단의 일부를 서부전선의 공백으로 옮길 수 있다. 여기에 ‘사단-군단-군-합참’의 편제를 줄이기 위해 ‘통합 군관구’ 개념을 도입하는 방안이 덧붙을 수도 있다. 기존의 군단과 군 체계를 없애고 ‘여단-군관구-합참’ 순으로 명령체계를 간소화하는 것이다. 동·서해안 등 필요한 경우에는 해·공군과 공동으로 군관구를 구성할 수도 있다. 서부해안, 서부종심, 동부해안, 동부종심 등 전선 전체를 8개 군관구로 나누는 방식이다.

    주한미군의 재편을 전제한 전쟁개념과 전략의 수정, 그에 따른 지상군체계 재편방안을 그려보면 이처럼 자연스레 지상군 감축 등 군 구조 개편의 규모를 산정할 수 있게 돼 국방개혁의 청사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상황에 맞는 재편작업이 이뤄지지 못할 경우 한국군은 더욱더 미 지상군의 전시증원규모 변동에 목을 맬 수밖에 없게 된다. 미군 재배치로 오히려 대미의존심리가 증가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청와대와 국방부가 군 구조 개편을 자주국방의 핵심과제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있는 것에는 이러한 사정이 숨어 있다.

    전력재편작업의 최대 적은 시간이다. NSC나 국방부 어느 쪽도 미국측이 ‘2005년 말까지 1만2500명 감축’이라는 급격한 변화안을 제시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간의 한미미래동맹회의(FOTA)에서도 구체적인 규모 및 일정은 거론되지 않았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설명이다. 때문에 올해 국방예산이나 NSC 안보정책구상에는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적용되지 못했다.

    서두르는 미국, 갈길 먼 한국

    당장 미군으로부터 이양받기로 한 10대 특정임무를 준비하는 작업만 해도 2005년까지 완성하기는 시간이 빠듯하다. 핵심으로 꼽히는 미2사단의 북한 장사정포 진지 파괴(Counter Fire HQ) 임무는 2006년부터 인수하기로 한 상태지만, 연동실험 등의 일정을 감안하면 제때 이뤄지기 쉽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여기에 앞서 설명한 군 구조 개편이나 작전계획 수정에 이르면 정확한 소요기간을 산정하기 어려울 정도다.

    미군 재배치를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던 남북한간 운용적 군비통제의 가능성도 급격한 감축으로 인해 상당부분 색이 바랬다. 둘을 연동시키려면 남북한간의 군사회담이 먼저 일정 수위에 올라 군비통제 방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 상태에서 미군 감축문제를 카드로 꺼낼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렇듯 빠른 시간표가 제시된 상황에서 이를 북한과의 협상에 활용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한편 짧은 시간 내에 다양한 전력증강 방안을 추진하게 되면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필요한 전력소요를 산정하기보다는, 각 군에서 올라온 전력증강 및 무기도입 사업이 충분한 검토 없이 채택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최근 작성·발표된 일부 자주국방 소요경비 추산자료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장 향후 10년간 투입할 수 있는 국방비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각 군의 ‘숙원사업’이 대부분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측은 6월7일 열린 FOTA의 GPR 협상 등 최근까지도 전체적인 청사진을 우리측에 제시하지 않았다. 일단 2005년 1만2500명이라는 첫 번째 카드를 던졌을 뿐 이후의 진행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인지, 전시증원능력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갈 길이 바쁜 한국 입장에서는 속타는 일이다.

    한미동맹의 성격을 재조정하는 작업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보다는 일본의 예와 같이 안보선언이나 협력지침 같은 문서를 별도로 만들어 공동으로 발표하는 형식이 될 공산이 크다. 실제로 최근 정부는 NSC와 국방부, 외교부를 중심으로 이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이 안보선언을 통해 공식화되는 한미동맹 성격 재조정에 대해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부분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아시아 군사전략에 대중국 견제라는 목적이 있음을 중국 역시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1996년 미일 안보공동선언이 임박할 당시 중국은 대만해협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극도로 높이는 등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직까지 한미동맹 재조정 문제와 관련해서 중국의 공식적인 견해가 나온 적은 없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가 참석한 세미나 등 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상당히 깊은 우려가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 중국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아직까지는 예의 주시할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 경우 중국이 주목하게 될 것은 새로 만들어질 안보선언의 수위와 내용이다.

    특히 대만해협에서의 긴장이 격화되어 동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개입하게 된다면 상황은 극도로 악화된다. 최악의 경우 중국은 자신을 공격하러 올 것이 뻔한 미국을 막기 위해 오산의 미7공군기지를 미사일로 선제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

    “기지 제공은 적대행위” 91%

    물론 중국의 대응은 한국이 주한미군의 지역군 역할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경우는 한국군이 대만해협을 포함해 역내의 모든 분쟁에 미군과 함께 참여하는 시나리오다. 그밖에는 평화유지군(PKO) 자격으로 중국의 영향권을 제외한 지역에 미군과 동행하는 경우, 병력은 참가하지 않되 주한미군 기지를 발진기지로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경우, 발진기지 사용은 동의하지 않고 병참지원만 맡는 경우 등이 있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한국군의 대만해협 참전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미국도 요구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외의 지역에 평화유지군 자격으로 함께 파견되는 상황도 용납하기 어렵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찰스 캠벨 미8군사령관(중장)이 지난 5월25일 “한미연합군의 역할이 동북아 평화유지군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발언한 데 대해 정부가 유감을 표시한 것은 이러한 함의를 담고 있다.

    반면 병참지원 문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한미 양국은 지난 2월24일 ‘한미상호군수지원협정’을 개정해, 한반도와 북미지역에 한정돼 있던 상호군수지원 대상지역을 전세계 모든 국가로 확대한 바 있다. ‘이라크전에 파견될 자이툰 부대에 대한 미국의 군수지원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개정된 이 협정은 미군이 대만해협 등의 역내분쟁에 개입하는 경우 한국이 이를 도울 수밖에 없는 근거로 남게 됐다.

    마지막으로 최근 FOTA회의의 핵심쟁점이 되고 있는 기지사용문제를 살펴보자. 서울대 외교학과 정재호 교수(중국정치)가 올해 초 중국 내 안보전문가 30여명을 만나 진행한 면접설문조사 결과는 기지를 제공하는 수준도 상당한 위험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만해협에서 미·중간에 군사분쟁이 발발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68%가 ‘그렇다’고 응답한 이들은, 이 경우 미국이 한국에 지원을 요청할 가능성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는 65%가 ‘있다’고 답했다. 다양한 협력방안 가운데 한국이 미군의 기지사용을 허가할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많은 81%였는데, 놀라운 것은 그 가운데 91%가 ‘중국은 이를 자신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대응할 것’이라고 답했다는 점이다.

    결국 오산·평택기지가 주한미군의 대만해협 분쟁 개입의 발진기지가 된다면, 중국측은 한국을 적대국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선양군구 등 상하이 이북에 있는 중국의 미사일전력 상당수는 한국내 미군기지를 겨누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우선은 경제적인 수단으로 압박을 가하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무력사용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SCM 공동발표문의 립서비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한국이 기지 제공을 거절하면 어떨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주한미군의 전면철수다. 이미 동맹의 목표를 대북억제가 아닌 동아시아의 패권유지로 전환한 미국 입장에서 우리가 전략적 유연성 개념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동맹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는 데 한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는 아니다. 중국 동부 해안지대와 맞대고 있는 오산·평택기지가 없다면 다소 불편하긴 하겠지만 일본만으로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언제든지 한국을 버릴 수 있는 이유다. 기지 제공 거절이 아니어도 미국이 원하는 수준의 협조를 얻어내지 못할 경우 전시증원병력의 재조정을 얼마든지 카드로 사용할 수 있다.

    중국과의 충돌을 각오하고 미군기지로 갈 것인가, 아니면 한미동맹의 붕괴와 대북제어력 소멸을 감수할 것인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감한 딜레마다. 한 전문가는 “미국이 ‘확실한 줄서기’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정리했다. 냉전종식 이후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한국을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넣어 충실한 조력자로 만들려는 뜻 아니겠느냐는 분석이다.

    한미 국방장관이 만나는 ‘연례안보협의회(SCM)’ 공동발표문에 ‘동북아 지역’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이 1993년이었다. 2000년 SCM에서는 “한반도 내 위협이 감소돼도 동맹관계는 동북아 및 아태지역에서의 평화와 안정유지에 기여할 것”이라며 사실상 ‘전략적 유연성’ 개념을 승인해주는 우를 범했다.

    한국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는 이 이슈를 정부 당국자들끼리의 결정사항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공론장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의미에서 설득력이 있다. 1990년대 중반 일본이 그러했듯, 전국가적 차원의 전략토론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가깝게는 미국이 제시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수용할 것인지, 구체적으로는 한미 공동안보선언을 과연 작성해야 하는지, 작성한다면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가 그 첫 번째 질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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