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즉각적, 감정적 대응은 自主 아니다

‘서먹서먹’ 한미관계 어떻게 풀어야 하나

  • 글: 최호중 전 외무부 장관·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

    입력2004-06-30 16: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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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한미관계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한미관계는 지금 어디에 와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 냉전종식 직후의 격변기에 한·중, 한·러 수교의 산파역을 맡았던 최호중 전 외무부 장관이, 또 다른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는 외교정책 결정자들을 위한 조언과 경험담을 '신동아'에 보내왔다.<편집자>
    즉각적, 감정적 대응은 自主 아니다

    2002년 미군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에 항의하는 촛불시위.

    “한미관계가 불편해졌다.” 언뜻 들으면 요즘 상황에 대한 촌평 같지만, 벌써 30여년 전에 나온 말이다. 미 민주당의 카터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서 한국의 인권문제를 강하게 거론하자 한미관계가 급속히 냉각됐던 게 1970년대 후반의 일이다. 앞서의 말은 이 무렵 우리 외교의 수장이었던 박동진 전 외무장관이 한 말이었다. 외무장관이 “불편한 관계”라는 말을 쓰고 대통령이 “미군을 빼려면 빼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어떤 상황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미관계도 당시 못지않게 불편해진 듯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예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한미관계 또한 시기와 분위기에 따라 변화할 수 있으므로, 공연히 ‘위기’라고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자주를 강조하는 목소리, 약속했던 이라크 파병을 재검토하자는 주장이 계속되는 걸 보면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은 더 이상 미국을 ‘혈맹’이라 말하지 않고, 미국으로부터는 한국을 ‘신뢰할 수 없는 동맹’이라고 생각한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이유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살펴보아야 할 시기가 온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우리가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나라인가, 아니면 이제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나라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세대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이 2004년 한국이 처한 현실이다. 특히 6·25를 겪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는 미국을 보는 눈이 판이하게 달라져버렸다.

    실리와 신의

    46년 전 필자가 처음 주미 대사관에 부임했을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 시절 대미외교는 밀가루나 보리 같은 미국의 원조물자를 얼마나 많이 받아오는가가 교섭의 핵심이었다. 받아온 물자를 팔아서 마련한 예산이 없으면 나라를 지탱할 수 없었다. 그 해 미국의 군사원조 규모에 따라 외교의 성패가 평가되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러한 원조에는 공산권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는 미국의 안보전략이 담겨 있었다. 한국이 제대로 돌아가야만 미국에게 이익이 되므로 도와준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동맹국에 대한 신뢰, 6·25전쟁에서 숨진 자국 병사 5만 여명의 목숨값과 의리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요즈음의 우리 사회, 특히 젊은 세대는 철저한 실리주의에 입각해 국제관계를 바라본다. 그들에게 국가간의 신뢰와 원칙은 무가치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물론 실리추구를 안할 수는 없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 조건 없이 남을 도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쪽의 실리만 강조한다면 외교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외교란 자국의 이익과 함께 상대방의 입장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모든 나라가 자국의 실리만 추구한다면 세계는 갈등과 반목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국제질서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실리추구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리만 추구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단기 실리를 추구하다 장기적인 이익을 놓칠 가능성도 높다.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30년 전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국제적 사안에 참여하라는 기대도 그만큼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러한 요구에는 무감각하면서 변화된 지위만 누리려고 하는 것, 약삭빠르게 우리 이익만 챙기겠다는 자세는 국제적인 신뢰를 잃는 지름길이다. 신뢰와 원칙에도 실리 못지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우방이라 해도 모든 문제에 있어 항상 의견이 같을 수는 없고 또 이해(利害)가 일치할 수도 없다. 개인 사이에도 아주 친한 친구가 서운한 행동을 하면 그 섭섭함이 증폭되듯, 미국이 사소한 일일망정 우리 비위를 건드리는 행동을 하면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격렬해지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양측이 다같이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모든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한미동맹을 통해 우리가 얻는 이익이 한미동맹이 깨졌을 때 감수해야 하는 비용보다 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장의 서운함, 당장의 감정에 이끌려 동맹을 훼손하는 일은 현명치 못한 일이다. 과거를 돌아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더라도 미국과 호혜적인 우호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당장 북한 핵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미국의 협력을 기대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현실적으로 국제관계를 볼 때 어느 나라든 완전히 자주적일 수는 없다. 모두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만큼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와 동맹 가운데 택일한다는 것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자주의 정신은 견지하되, 실제에 있어서는 동맹을 존중하는 슬기로운 처신이 요구되는 시대다.

    작은 나라들이 미국에 반감을 갖는 것에는 분명 미국의 책임이 있다. 국제협상무대에 서보면 미국 대표가 ‘우리가 대국이니까’ 하는 태도를 흔히 취한다. 회의석상에서 다른 나라 대표를 얕잡아보고 자신들의 의사를 무조건 관철시키려는 태도를 필자도 외교현장에서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러나 흥분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를 다루는 노하우는 간단하다.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즉각적인 대응에는 더욱 감정적인 반응으로 나서는 특징이 있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체계적인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이 자주는 아니다.

    미국이 어떻게 나오든 ‘늘 그런 식이니까’ 하는 여유 있는 자세로 넘기는 지혜도 필요하다. 외교관은 아무리 강한 압력이 닥쳐와도 냉철한 사고와 전략을 잃지 않도록 훈련받은 사람이다. 극단의 순간에도 우리 입장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이 외교관의 역할이다. 이 훈련이 부족하면 처음에는 감정만 앞세우다가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내주고 마는 악순환에 빠진다. 처음 외교를 담당하는 이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다.

    무역쿼터 같은 경제적인 이슈를 다루는 협상에서도 테이블에 나온 사람은 쉽게 자기의사를 굽히려 들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안보관련 협상에서 국가간의 이견을 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좀더 자주, 오래 만나는 것뿐이다. 단순히 협상장에서 만난 사이가 아니라 그밖의 공간에서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문제가 훨씬 쉽게 풀려나가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한 교류가 오로지 정부의 몫이라고 생각하면 그 또한 오산이다. 외교는 외교 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라는 국민인식에는 문제가 있다. 하물며 적장끼리도 예의를 갖춘 교류가 있는 법이다. 지난날에는 한국전쟁에 참가한 한미 군장성간에, 양국 국회의원 간에, 그리고 양국 경제계, 학계, 문화계 인사들간에 우호적인 교류협력관계가 유지됐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많이 퇴색한 느낌이다. 최근 한미관계의 소원함에는 그러한 교류가 없는 세대가 주도층이 됐다는 점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한미간의 건전하고도 긴밀한 동반자관계의 유지·발전을 위해서는 양국 젊은이 사이의 교류를 포함해 그야말로 폭넓고 다원적인 우호협력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뒤엎으려 하면

    외교는 그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외교관이 아무리 특출난 재주를 갖고 있다 해도 우호적인 분위기가 없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분위기 없이 밖에서 ‘너무 숙이고 들어가는 것 아니냐’고 비판만 한다면 아무리 테크닉이 뛰어난 외교관도 좋은 결과를 얻어내기 어렵다.

    하지만 요즘에는 미국을 아는 것, 미국 사람과 친한 것을 백안시하는 분위기다. 미국에 지인이 많으면 미국의 입장에 경도됐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미국에 한번도 가지 않았다”는 말이 흡사 유행어처럼 됐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선입견 없이 임한다’는 태도로 보이는데, 모르는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한국 국민들 사이에 고조되고 있는 반미감정 이야기 또한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필자가 외무부 장관이 된 1988년 당시에도 반미 분위기는 만만치가 않았다. 학생들의 시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고, 특히 용산기지 안에 있던 미군 골프장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하늘을 찔렀다. 미군기지에 가로막혀 기능이 상당부분 타격을 입은 동작대교를 건너오다 보면 담장 안으로 새파란 골프장 잔디밭이 눈에 들어오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이 이른바 ‘4인위원회’다. 우리 외무장관과 국방장관, 주한 미 대사와 미8군사령관 네 사람이 만나는 자리였다. 이 회의를 통해 골프장을 성남으로 옮겼다. 용산기지를 오산·평택으로 옮기는 방안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풀어야 할 문제가 생기면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첫 번째 수순이라는 것, 이야기를 쉽게 풀려면 만남을 시스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교훈을 이때 얻었다.

    줄타기 외교의 시대

    바꿀 게 있으면 바꿔야 한다. 하지만 무조건 새로 시작한다고 능사는 아니다. 언제부턴가 공직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새로 누군가가 임명되면 전임자의 일을 들여다보고 못다 이룬 부분을 완성해내겠다고 하기보다는, 이전의 일은 모두 잘못된 것이니까 아예 새로운 기분으로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내겠다고 나서는 것을 참신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강해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는 5년뿐이다. 그 안에 어떻게 과거의 모든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특히 청와대 주변의 일부 인사들이 외교를 주도적으로 진행시키려 한다면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다. 그렇다면 외교통상부는 왜 존재하겠는가. 학자와 정치인은 이상을 쫓지만 관료는 결과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외교부는 껍데기이고 실제로 한국 외교를 움직이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인식이 퍼져나가면 그 외교부 장관을 어느 나라가 대접하겠으며 어느 외국정부 관계자가 책임 있는 이야기를 나누려 하겠는가.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임기 초의 청와대는 외교부를 불신하게 마련이다. 필자가 겪은 역대 대통령 중 상당수도 한동안은 외무부를 탐탁치 않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인권관련 문제제기에 외무부가 당당히 맞받아치지 못한다는 불만을 자주 토로했다. ‘우리에게는 우리식 인권과 민주주의가 있는데 왜 자꾸 당신들 것을 강요하느냐’고 대들지 못하느냐는 이야기였다. 전두환 대통령도 초기에는 ‘외교관들이란 대사관에 외국 가구나 사들이고 파티나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인식을 극복하는 방법은 실력으로 실적을 올리는 것뿐이다. 더욱이 지금 우리는 정교하고 섬세한 외교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필자가 외교무대에서 일하던 시절 한국의 외교에는 분명한 지침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북한을 제압할 것인가, 공산권과의 관계는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비동맹 친북세력을 어떻게 우리 편으로 만들 것인가 같은 명쾌한 답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제들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었고 지금 닥쳐온 문제는 전혀 새로운 도전이다. 북핵문제와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해 지지를 확보하는 것, 러시아나 중국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면서도 미국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복잡한 방정식, 바야흐로 줄타기 외교의 시대가 된 것이다. 미국이 중요하냐 중국이 중요하냐는 질문 자체가 적절치 않다. 한쪽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순간 다른 한쪽과의 관계는 다치게 되어있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러시아·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던 무렵 보수진영에서는 ‘새 친구를 사귀느라 옛 친구를 섭섭하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미국 정부 차원에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러한 의견은 오히려 미국의 학계나 언론계에서 들려왔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그러한 분위기가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곤 하는 것을 보았다.

    지금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국 정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민간부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민간채널의 외교가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가 하지 않는 외교, 보이지 않는 외교의 힘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박치는 멋진 춤을 출 수 없다

    외교는 춤이다. 외교에 나서는 사람은 춤을 추는 사람이다. 정해진 스텝과 규칙 위에서 누가 더 창의적이고 세련되게 춤을 추느냐가 관건이다. 그렇다고 주어진 박자와 리듬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어찌 보면 외교관이 외교와 춤을 춘다고 하기보다는 외교가 추는 춤에 외교관이 휘말린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흔히들 외교를 가리켜 ‘흥정을 하면서 조금 주고 많이 받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춤을 잘 추면, 리듬을 잘 타면 그 흥정에서 보다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을 필자는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러나 춤을 추는 것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참으로 힘들고 말할 수 없이 괴롭다. 왜 우리는 리듬을 만들 수 없는지, 왜 우리에게는 규칙을 만들 권한이 없는지 한스러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불만을 되씹느라 춤을 망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박자에 둔감한 사람은 결코 춤을 잘출 수 없다. 파도가 닥쳐올 때 맞서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과연 이 파도의 정체는 무엇인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는지, 거꾸로 그 힘을 이용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기로에 선 한미동맹을 바라보면서 고민해야 할 문제는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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