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관상으로 엄연히 어른인 네모는 부자에게 ‘어른답게’ 맘껏 추파를 던진다.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안 붙잡는’ 성격의 부자는 이런 네모가 싫지 않다. 물론 네모가 가진 엄청난 비밀을 부자는 알 길이 없다. 염정아는 판타지 멜로 장르를 표방한 ‘소년, 천국에 가다’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바로 출연을 결정했다.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이건 내 영화다 싶었어요. 그날 밤을 새워 3번을 반복해 읽으면서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감정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하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다니까요.”
영화 ‘여선생 vs 여제자’를 끝낸 뒤 다음 작품을 고르고 있던 염정아에게 ‘소년, 천국에 가다’는 운명처럼 다가온 영화였다. 낮에는 만화방을 운영하고 밤에는 부업으로 카바레에서 노래하는 미혼모 부자는 평범한 캐릭터가 아님에도 염정아는 주저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 그의 표현대로 ‘필이 꽂힌’ 작품이다. 그는 “카바레 가수라는 설정이 무척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염정아는 ‘소년, 천국에 가다’와 불과 며칠 차이로 먼저 개봉한 ‘새드무비’에도 출연했다. 장르는 다르지만 이 영화에서도 그는 ‘엄마’를 연기했다. 서로 다른 커플 네 쌍의 이별과 사랑이야기를 다룬 ‘새드무비’에서 염정아는 아이를 남겨두고 죽어야 하는, 암에 걸린 엄마를 연기했다.
본의든 아니든 다작을 하지 않던 염정아가 거의 동시에 영화 두 편에 출연하자 주위에서 “좀 쉬어가라”는 얘기를 건넸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며 일 욕심을 부렸다. 뒤늦게 사랑받고 있으니 일욕심을 낼 만도 하다.
염정아는 1991년 미스코리아 선으로 뽑힌 뒤 여러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지만 큰 인기를 얻진 못했다. 연기자보다 미스코리아의 이미지가 강했다. 대중이 비로소 염정아를 배우로 평가하기 시작한 건 2003년 영화 ‘장화, 홍련’을 통해서다.
염정아가 ‘장화, 홍련’에 출연하게 된 과정이 재미있다. 김지운 감독의 팬이던 그는 김 감독이 새 영화를 시작한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 내가 할 역할 있어요?”하고 물어봤다고 한다. 김 감독은 염정아에게 두 주인공 임수정과 문근영의 계모 역을 맡겼다. ‘장화, 홍련’ 개봉 당시 염정아는 “내 인생에 다시 안 올 역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염정아의 매서운 말투와 앙칼진 목소리는 그 자체로 공포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전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었다. ‘스멀스멀 스며드는’ 공포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김지운 감독의 의도에 염정아의 연기는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그전까지는 왜 염정아에게서 그런 면모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장화, 홍련’을 계기로 염정아는 본격적인 연기인생을 시작한 거나 다름없다.
‘장화, 홍련’ 이후 염정아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는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보여준 연기도 호평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염정아의 비중은 사실 높지 않았다. 박신양, 백윤식과 함께 주연급이었지만 출연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로 염정아는 확실한 색깔을 가진 배우임을 보여줬다.
선머슴에서 요부로
염정아는 팜 파탈의 이미지를 지닌, 국내에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사람이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서인경’은 염정아를 통해 매력 넘치는 인물로 그려질 수 있었다. 긴 머리를 쓸어올리며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는 거울 속 여자, 그가 바로 서인경이자 염정아다. 뇌쇄적인 눈빛과 몸짓으로 남자들의 시선을 담배연기처럼 빨아들이던 그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요부의 이미지를 그려냈다. 당시 ‘범죄의 재구성’을 보고 염정아를 흠모하던 남자가 어디 한둘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