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미스코리아 선으로 뽑히며 연예계에 데뷔한 염정아는 ‘야망’ ‘태조왕건’ 등 여러 편의 드라마에 출연하고, 영화 ‘재즈바 히로시마’ ‘H’의 주연을 맡았지만 배우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런 그를 다시 보게 만든 건, 2003년 개봉한 ‘장화, 홍련’이다. 두 얼굴의 계모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낸 염정아는 이어 ‘범죄의 재구성’으로 팜 파탈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몇 년 전 예쁜 ‘종이인형’ 같다는 말을 듣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내게서 사람 냄새가 덜 나거나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가짜 연기처럼 보인다는 말로 여겨져 생각을 많이 했다.”
과연 무엇이 염정아를 변하게 했을까. 염정아는 “주변의 기대가 나를 키운 것 같다”고 말한다. 20대 초반부터 10여 년 동안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지만 단 한 번도 ‘연기파 배우’로 불리지 못했던 그는 30대에 이르러서야 배우로서 제 색깔을 내게 되었다. 본인으로서는 인내와 고통의 산물이겠지만 ‘이제라도’ 배우로서 사랑을 받게 된 것은 큰 행운이다.
박중훈 보며 배우 꿈꿔
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 역시 염정아의 팜 파탈 이미지가 그대로 드러난 작품. 극중 영화사 대표인 조이나(염정아)는 자신의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연하남 김병수(김래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포용보다는 집착에 가깝다. 조이나는 병수에게 피붙이 같은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쟁취하려는 이기적인 여자다. 당당하고 능력 있지만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지고,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다른 이의 사랑을 짓밟는 악녀를, 염정아는 훌륭하게 소화했다.
염정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어 ‘여선생 vs 여제자’에 출연하며 또 한 번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를 인상 깊게 본 좋은영화사 김미희 대표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출연하게 된 ‘여선생 vs 여제자’는 염정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한 작품이다.
하지만 처음엔 선뜻 출연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코미디 장르인 데다 원톱 여주인공이라는 점이 적잖이 부담됐던 것. 지인들로부터 “너라면 할 수 있다”는 격려를 수차례 받고서야 시나리오를 읽어본 그는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고, 장규성 감독을 직접 만난 다음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여선생 vs 여제자’에서 염정아가 연기한 ‘여미옥’은 흔히 ‘여자 김봉두’라고 표현되는 인물이다. ‘선생 김봉두’도 장규성 감독의 작품이다. 염정아에겐 ‘선생 김봉두’의 흥행 성적도 부담스러웠을 터. 더욱이 코미디 연기의 수위조절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다. 크랭크인 장면을 하루 종일 찍었을 만큼 염정아는 촬영 초기에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장규성 감독은 장면마다 넘치거나 혹은 모자란다고 지적했고, 이런 감독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염정아는 조바심을 내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굳이 애쓰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연기에 킥킥대며 웃음을 참는 스태프들과 웃기는 연기를 즐기고 있는 자신을 말이다.
30대에 들어서야 인기를 얻은 염정아는 데뷔 이후 10년 가까이 단 한 번도 정상에 서지 못했다. 영화 ‘텔미 썸딩’‘테러리스트’ 같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고, 1992년의 데뷔작 ‘재즈바 히로시마’ 이후 10년 만에 ‘H’에서 여주인공을 맡았지만 흥행성적은 형편없었다. 드라마 ‘태조왕건’에 출연했을 때도 그저 여러 조연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한때 EBS ‘장학퀴즈’와 케이블 TV의 영화프로그램 MC를 맡았던 것도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염정아가 거쳐온 길이다.
중학교 시절 당시 최고 스타이던 박중훈을 보며 영화배우를 꿈꾼 염정아는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충무로에서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여배우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나이가 들며 더욱 아름다워지는 여배우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염정아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정말 흐뭇하다. 20대 시절, 하고 싶은 연기를 맘껏 해보지 못한 염정아의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 것도 그래서다. 이젠 아무도 못 말린다. 그가 어떤 변신을 하건 냉정하게 평가하고, 충분히 사랑해주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