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에게 지분 몰아주자, 장녀도 14만 주 사들여
재계에서는 경영권 다툼 가능성 낮다고 분석
저평가된 주식 시세차익 노렸나?
“논란 일으킬 방식으로 경영권 승계하지 않는다”
한영재 노루그룹 회장. [뉴스1]
한 회장의 장녀인 한경원(38) 노루디자인스튜디오(NSDS) 실장은 6월부터 대거 노루홀딩스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 한 실장은 6월 10일부터 시작해 7월 27일까지 13만6920주를 사들였다. 이를 두고 노루그룹에서 경영권 경쟁이 본격화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회삿돈으로 장자 승계 시작?
노루그룹 농생명 계열 자회사 더기반의 경기 안성시 연구소. [뉴스1]
이 지분 구조만 보면 한 전무는 노루의 후계자로 가는 길을 밟는 것으로 보인다. 계열사 겸직 현황만 봐도 알 수 있다. 노루그룹의 미래 먹거리 사업 중 하나인 농생명 계열 자회사 더기반과 노루알앤씨, ㈜디아이티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며 노루페인트, 노루코일코팅, 두꺼비선생 상근이사와 노루오토코팅, 노루로지넷 비상근이사를 맡고 있다.
한 전무는 미국 센터너리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28세 때인 2014년 노루홀딩스에 입사해 사업전략본부장(상무보)을 맡았다. 2017년 전무로 승진했다. 현재는 노루홀딩스 업무부총괄을 맡고 있다.
일각에서는 ㈜디아이티가 노루홀딩스 지분을 사들인 자금의 출처가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디아이티는 노루홀딩스의 계열사로 1994년 노루그룹 전산팀이 분사해 생긴 곳이다. 회사 홈페이지의 거래처에는 노루그룹 계열사가 대거 포함돼 있다. 사실상 노루그룹이 회삿돈으로 승계 작업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까닭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노루홀딩스는 지난해 재고 매입 명분으로 ㈜디아이티에 1억2000만 원가량을 지급했다. 수수료 명분의 ‘기타 지출’도 48억7000만 원에 달했다. 지난해 ㈜디아이티의 매출액 86억 원 중 50억 원가량이 노루홀딩스에서 나왔다. 노루그룹 관계자도 “내부에서 이 같은 방식의 지분 인수를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일부 나왔다”고 밝혔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33조에 따르면 대규모기업집단 내부에서 이뤄지는 50억 원 이상의 거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게 된다. 그룹 전체 자산 규모가 5조 원 이상이면 대기업기업집단이 된다. 노루그룹은 자산규모가 5조 원 미만이라 관련 규제를 받지 않는다.
남매 간 경쟁 붙였다?
노루그룹의 승계 구도가 확정되나 싶었지만 한 실장의 돌발 행동이 시작됐다. 갑자기 노루홀딩스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6월 10일부터 거의 매일 적게는 300주, 많게는 1만 주 이상을 취득했다. 소요 비용만 14억 원가량에 달한다. 지분 구입 비용은 전부 한 실장의 개인 자금인 것으로 알려졌다.한 실장은 한 전무의 손위 누이다. 그룹 내에서는 경영보다는 디자인 등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인사다. 그룹 내 계열사 요직을 맡고 있는 동생 한 전무와는 달리 노루디자인스튜디오 실장직만 맡고 있다. 이사로 이름을 올린 계열사도 없다.
한 실장이 한창 주식을 사들이던 7월 18일 노루그룹은 갑작스레 노루홀딩스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5만9066주가 신주로 발행됐다. 신주 발행가액은 1만6930원. 약 10억 원 규모의 증자다. 노루홀딩스 측은 운영자금 확보를 위한 유상증자라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노루그룹이 승계를 쉽게 하려고 증자를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승계 과정에서 주식을 사고팔아야 하는데, 주식 가격이 낮을수록 유리하기 때문. 일각에서는 한 회장이 승계를 두고 자녀들 간 경쟁을 붙인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유상증자를 통해 승계 구도에 변수를 만든 게 아니냐는 관측이 그것이다.
노루그룹 측은 “승계 구도에 대해 아직 이야기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 회장이 경영 일선에 있는 데다, 승계 구도를 급히 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 노루그룹 관계자는 “승계 구도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며 “경영권 승계 외에도 전문경영인 도입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라고 밝혔다.
노루그룹, 장자 승계가 전통
한 실장의 지분 매입이 경영권과 무관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있다. 세무업계 관계자는 “한 회장이 한 실장의 지분율을 높여줄 의도가 있었다면 한 전무 때처럼, 회사를 이용했을 것”이라며 “(한 실장이) 자비로 지분을 매입한 만큼 경영권 다툼이 있을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도 “한 실장은 원래 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디자인 등 자신의 관심 분야에 몰두하는 편”이라며 “승계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현재 주가가 낮은 상태이니 투자 목적으로 지분을 사들였을 확률도 있다”고 말했다. 노루그룹 측은 “승계가 이뤄지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의도적으로 주가를 낮춘 일도 없다”고 강조했다.노루홀딩스가 줄곧 장자 승계를 해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노루그룹의 창업주 고(故) 한정대 전 회장은 장남인 한 회장에게 회사를 물려줬다. 한 회장의 손위 누이인 한현숙(72) 씨에게는 계열사를 하나 맡겼다. 한씨가 맡았던 회사가 바로 ㈜디아이티다. 2019년 4월 한씨는 조카인 한 전무에게 ㈜디아이티를 넘겼다.
노루그룹 관계자는 “노루그룹은 최근 기업 소유 구조 개편 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논란을 일으킬 방식으로 경영권을 승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1989년 서울 출생. 2016년부터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4년 간 주간동아팀에서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노동, 환경, IT, 스타트업, 블록체인 등 다양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20년 7월부터는 신동아팀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생은 아니지만, 그들에 가장 가까운 80년대 생으로 청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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