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기와 본차이나에 담아 차려낸 전주 비빔밥상.
내 질문에 수강생들은 매우 당황하면서 답하기를 주저했다. 이천 도자기를 식기로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천’ 하면 도자기로 유명한 곳인데, 시민들이 자기 고장 생산물을 이렇게 홀대해도 될까. 그때 마침 제4회 세계도자비엔날레가 이천시를 비롯해 인근의 여주시와 광주시에서 열렸다. 더욱이 이천시에서는 무려 21회째 ‘이천도자축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고려 말기 학자 목은 이색(穆隱 李穡·1328~1396) 선생이 지은 ‘두죽(豆粥)’이란 시 한 수를 수강생들에게 들려줬다.
우리나라 풍속에 동지가 되면 팥죽 냄새가 집집마다 풍겨온다네 / 가득 담긴 푸른 그릇 그 색깔이 허공에 떠 있네 / 꿀로 맛을 맞추어 입에 흘려 넣으면 사악한 기운이 씻겨 사라져 뱃속을 적시는구나 / 마을 하늘은 고요하여 새벽빛이 여전히 짙은데 / 어린 계집은 머리 빗어 붉게 화장을 하고 / 집집마다 팥죽을 나르는 아름다운 풍속을 만들어내니 / 백발의 늙은이 마음속에서 즐거움이 가득하네 / 문 닫고 깊이 감추어 두면 그 맛이 더욱 깊어져 / 백 가지 자줏빛과 천 가지 붉은 빛을 품어내네 / 다만 평소에 하는 대로 쫓아 무자맥질을 한다면 / 천지는 다시 원래대로 고요해지네 |
시에도 나와 있듯이 ‘두죽’은 다름 아니라 팥죽을 일컫는다. 붉은빛이 사악한 것을 물리치듯 날리는 모습, 새벽녘에 시중을 드는 처녀가 동네를 돌며 그 향을 전하는 풍경, 그리고 이미 늙은 몸이 사악함을 물리치는 팥죽을 먹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자탄(自嘆)을 금치 못하는 목은 선생의 심정이 이 시에 가득 담겨 있다.
허공에 떠 있는 색깔
그런데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러한 팥죽이 그 유명한 고려청자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팥죽이 가득 담긴 푸른 그릇에서 뿜어내는 절묘한 색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그 색깔이 허공에 떠 있다고 했겠는가.
몇 해 전에 식품회사를 운영하는 분들에게 이 시를 소개하면서 이제 한국 음식도 제대로 된 식기에 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어떻게 비싼 고려청자에 팥죽을 담아서 팔겠느냐”고 항변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될 것은 분명하다. 고려시대 때의 청자는 예술품인 것도 있고, 식기인 것도 있다. 어떤 도자기는 단지 미학적 감상을 위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또 어떤 도자기는 생활 속에서 실제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마에서 구워졌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도자기’ 하면 무언가 대단한 예술품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조선 도자기의 슬픔’이라고 부른다.
‘도자기 만들기를 즐기자’
지난 2월 말 일본의 기술평론사(技術評論社)란 출판사에서는 제목부터 색다른 시리즈물을 내놓았다. 시리즈 제목은 ‘정년 전에 시작하는 남자의 자유시간’이다. 일본 성인들이 즐기는 각종 취미 중에서 직접 만들 수 있는 주제를 대상으로 삼았다. 철도모형, 진공관 앰프, 정원,불상 조각, 낚시도구 등. 도자기도 그중 하나다. 도자기 편의 책 제목은 ‘도자기 만들기를 즐기자-그릇을 만들어 맛있는 술과 음식을 맛보자’이다. 일본 사람들은 무언가 손으로 직접 만드는 일을 매우 즐긴다. 사회적으로 그것을 적극 권장하는 분위기다. 손으로 직접 만드는 일이 개인적인 취미를 넘어 전문가 못지않은 솜씨를 가진 일명 ‘오타쿠(おたく)’들이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