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21일 제112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열린 미국 보스턴 교외 홉킨턴 마을. 스타트 라인에 선 참가자들은 메카를 찾은 순례자처럼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산티아고 순례 도로에 선 성직자의 얼굴도 이렇지 않을까. 인도를 향해 구도에 나서던 현장법사도 이날 아침의 마라토너들처럼 결연한 심경이었으리라. 니르바나를 향한 동경(憧憬)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마라톤이 아니고 무엇이랴.
필자는 ‘8634’ 번호표를 가슴에 달고 출발지역에 들어갔다. 2만5000여 명의 참가자는 기록 순으로 매겨진 번호표를 보스턴 마라톤조직위원회로부터 받았다. 1번은 2007년 우승자인 케냐의 로버트 체루이요트(30) 선수다. 전문 선수인 ‘엘리트’들은 스타트라인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일반인 참가자인 ‘마스터스’들은 엘리트 선수 뒤편에 기록 순서대로 마련된 구역에 섰다. 42.195㎞의 풀코스를 3시간 이내에 달리는 ‘서브(sub) 3’ 러너들의 번호표 숫자는 대체로 1200번 이하다. 필자는 2007년 3월18일 서울에서 열린 동아마라톤 참가 기록증(3시간20분25초)을 조직위에 제출해 번호를 받았다. 필자처럼 8000번대 번호 참가자들은 대체로 3시간20분 안팎의 기록을 가졌다. 번호만으로 주위 참가자들의 기량을 판별할 수 있다.
번호표대로 1000명씩 출발구역을 정했다. 8000번대 참가자들은 7000번대 뒤에, 9000번대 앞에 배치됐다. 구역마다 로프를 쳐서 다른 구역 번호표 참가자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비슷한 실력의 참가자들끼리 출발함으로써 혼란을 막기 위한 조처다. 기량이 앞선 러너들이 먼저 출발해야 전체 흐름이 원활해진다. 속도가 빠른 달림이가 느린 사람들을 앞지르려 하면 충돌할 우려가 있어서다. 구역을 구분하는 로프는 출발 직전에 치워진다.
40세 남자 기준기록 3시간20분
보스턴 대회에 참가하려면 풀코스 기록이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꽤 잘 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스터스들은 보스턴 대회 참가 기준기록에 도달한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낀다. 물론 나이별, 남녀별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40~44세 남자 3시간20분, 여자 3시간50분 △45~49세 남자 3시간30분, 여자 4시간 △50~54세 남자 3시간35분, 여자 4시간5분 등이다.
오전 10시 정각에 엘리트 선수들이 출발한다. 출발에 앞서 간단한 의식이 진행됐다. 이날은 ‘애국의 날’이다. 보스턴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영국 청교도가 신대륙인 아메리카로 건너와 건설했다. 1775년 4월19일 영국군이 보스턴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보스턴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결연히 맞섰다.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날을 기념해 매사추세츠 주와 메인 주는 매년 4월 셋째 월요일을 ‘애국의 날’로 선포, 공휴일로 삼는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도 기념행사의 하나로 열린다.
사회자가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 발언을 했다. “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애국 군인들을 추모한다”고 말한 데 이어 여자 가수가 미국 국가를 불렀다. 미국 국가의 가사는 1814년 프랜시스 스콧 키 변호사가 영국군과 전투가 치러진 매킨리 요새를 바라보며 지은 ‘매킨리 요새의 방어’라는 시에서 비롯됐다. “오 그대는 보이는가 말하라(Oh say can you see), 새벽 여명의 빛을…. 오 말하라 성조기는 아직 저기 휘날리는구나”라고 시작하는 이 자작시를 키 변호사는 처남에게 건네줬다. 그 처남이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천국의 아나크레온(Anacreon in Heaven)’이라는 대중가요 멜로디에 이 노랫말을 붙여 전파했다. 이 대중가요는 원래 아나크레온이라는 친목단체가 파티에서 술을 마실 때 부르던 권주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