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2년 중부 베트남 전장에 스콜(열대지방 특유의 세찬 소낙비)이 내렸다.점심때가 지나자마자 하늘이 어두워졌다. 뜨거운 햇살이 검은 뭉게구름에 가리더니 천둥이 울렸다. 여진처럼 작은 천둥소리가 꼬리를 물었다. 망고샤워라 부르는 소나기가 쏟아졌다.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온몸에 비누질을 하고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연병장에는 커다란 기포가 둥실 생겨났다. 황톳물을 따라 노점을 하는 마마상들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비릿한 물 냄새가 퍼지자 기진하여 처져 있던 야자수 잎들이 다시 살아나 너풀거렸다.
12중대 기지를 보호하는 작전을 나갔다. 내게는 두 번째 실전이었다. 적의 보급로에서 야간 매복을 섰다. 앞서 얼굴에 번득이는 개기름을 감추려고 까만색 로션을 발랐다. 목덜미와 손등에도 발랐다. 종이를 태워 나온 재로 로션을 대신하기도 했다. 위장을 끝냈다. 마주 보면 이빨만 하얗게 보였다.
교대로 밤을 새웠다. 전장에 항상 목덜미를 지나는 써늘한 긴장만이 감도는 것은 아니었다. 작전 마지막 날, 수상한 기척에 사격 명령이 내려졌다. 배를 땅바닥에 끌고 다니는 돼지들의 비명이 들렸다.
“꾀에 꽥! 꾀에 꽥!”
연이은 툭툭 소리와 동시에 무엇인가 참호 안으로 떨어졌다.
“수류탄! 엎드려엇!”
절박한 외침이 터졌다. 나는 철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납작 엎드렸다. 한참이 지났다.
‘불발탄인가?’
철모를 살며시 쳐들고 내 몸 가까이를 더듬어보았다. 크고 둥근 딱딱한 물체가 손에 잡혔다. 야자열매였다. 바로 옆 참호의 신참이 겁에 질려 바짝 엎드려 총구가 들린 채 쏘아대는 바람에 야자나무 꼭대기를 맞힌 것이었다. 그것도 얼떨결에 연발로 불을 뿜어 M-16소총의 30발들이 탄창 하나가 순식간에 날아가 야자열매에 박혔던 것이다.
병아리 한 마리
그러던 중 적을 한 명 생포했다. 가까이 숨어 있던 적이 그쪽으로 떨어진 야자열매를 아군이 던진 수류탄으로 오인하고 얼떨결에 용수철처럼 튀어 나온 것이었다. 그는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했다. 중대장은 굴러들어온 전과에 고무됐다. 특히 포로의 몸에서 나온 빨강 표시가 여럿인 지도는 모두를 흥분시키고도 남았다.
“놈들의 아지트나 침투 루트를 알게 될지도 몰라.”
누군가 나지막하게 소리를 냈다. 무공훈장이 눈앞에 가까이 왔다고 계산하고 있을 터였다.
날이 밝아왔다. 참호 둔덕에서 뻣뻣한 몸뚱이를 일으켰다. 밤새 엎드려 거총 자세를 하고 있은 탓에 흙 바닥에는 내 몸에 눌린 자국이 그대로 거푸집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서둘러 헬기를 불렀다.
“여기는 080, 060 나와라. 오버.”
“여기는 060, 귀소는 송신하라. 오버.”
“독수리들은 병아리를 한 마리 낚아채 둥지로 간다. 오버.”
우리 중대는 해지고 남루한 검정 파자마 차림의 깡마른 포로를 앞세우고 부대로 돌아왔다.
포로가 연병장 팔각정 기둥에 묶여 널브러져 있었다. 3일째였다. 중대장은 민사병을 통해 포로를 취조했다. 정보를 캐내려 온갖 방법을 동원했으나 쉽지 않아 보였다. 포로는 보기 드물게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의 앙다문 입술은 여간 고집스러워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