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론’<br>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전 5권
피고인: 프롤레타리아다.
판사: 그건 직업이 아니지 않은가?
피고인: 뭐? 직업이 아니라고? 그것은 노동으로 살아가며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3000만 프랑스인의 직업이다.
1832년 1월 프랑스 법정에서 나눈 판사와 피고인의 첫머리 심문 문답이다. 피고인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지하며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급진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였다. 프롤레타리아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던 블랑키는 1830년 7월 혁명 이래 거의 모든 혁명과 시위에 가담해 생애의 절반에 가까운 30여 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훗날 블랑키의 사상에 공감하고 그와 깊이 교유하던 카를 마르크스라는 20대 유대계 독일 청년은 프랑스에서도 기피인물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고 만다.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인 노동자를 위한 걸작 ‘자본론’(원제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conomie) 1권을 1867년에 출간한다. 15년간 뼈를 깎는 각고의 산물이었다. 그 사이 여섯 아이 가운데 셋이 죽었고, 부인과 큰딸은 병에 걸려 신음했으나 마르크스는 자본론 저작을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하게 생활하는데도 돈 벌 생각은 않고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했다. 오죽하면 그의 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겠는가. “얘야, 그저 자본에 대해 쓰지만 말고 자본을 조금이라도 모으면 안 되겠니?”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책의 원고를 써나갔다. 하지만 1권 출간 뒤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펴내지 못한 2, 3권은 절친이자 동료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원고를 모으고 편집해 출판했다.(전 3권인 ‘자본론’은 한국에서 번역 후 5권으로 출간됐다 - 편집자 주)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스스로 공언한다. ‘자본론’이 노동자 계급의 ‘성경’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론’은 노동자가 읽어내기 쉽지 않은 책이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서로 속해 있고 제약하는 불가분의 두 계기지만 동시에 동일한 가치표현의 상호배타적이고 대립적인 극단이다’처럼 난해한 문장과 도식, 추상적인 개념과 복잡한 숫자 계산으로 점철돼 웬만한 지식인이 아니면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게다가 분량도 만만찮다. 처음에 나오는 ‘상품과 화폐’ 부분에서 좌절하고 책을 덮는 경우가 숱하다.
노동의 소외와 착취
‘자본론’은 흔히 오해하듯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인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다룬 책이 아니다. 자본주의 원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전망한 책이다. 특히 변증법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구조와 변동법칙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노동자 계급이 언제나 자본가 계급에 의해 억압되는 까닭과 자본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전환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현재까지만 보면 그의 전망이 빗나갔지만, 자본주의 멸망의 필연성도 설파한다.
‘자본론’의 핵심은 잉여가치론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받는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생산한 생산물의 가치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의 차액을 뜻한다. 1만 원짜리 빵 8개를 만드는 노동자가 3만 원을 받는다면 잉여가치는 5만 원인 셈이다. 이 경우 빵을 만드는 노동자의 하루 8시간 노동 가운데 3시간만 자신을 위한 노동이며, 5시간은 자본가를 위한 노동이라는 사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잉여노동’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라고 마르크스는 구분 짓는다.
마르크스는 노동시간의 연장을 통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방식을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이라고 불렀다. 생산력의 발달은 노동생산성을 높여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을 가능하게 한다. 필요노동을 단축하는 대신 잉여노동을 연장하는 방식이다.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것이 바로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이다. 그는 자본가가 부를 많이 축적할수록 노동자는 더욱 가난해진다는 착취의 고리로 자본주의를 바라본다. 생산력을 높이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노동자는 더 많은 착취를 당한다는 논리다.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라는 하나의 파이를 두고 서로 다툰다. 자본의 속성상 착한 자본은 없다는 게 마르크스의 생각이다.
‘자본론’의 출발점은 상품이다. 첫 문장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집적’으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은 그러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두 가지 가치를 지닌다. 교환가치는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을 말한다. 사용가치는 상품이 지닌 유용한 성질, 상품의 쓰임새다. 이를테면 공기는 사용가치만 있을 뿐 교환가치는 없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상품의 실체는 노동이다. 가치의 본질은 곧 노동이다. 본질적으로 상품은 노동생산물이어서 가치를 지닌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상대적으로 줄어들며, 잉여 노동인구는 이른바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해 생산과정에서 추방당한다고 마르크스는 설명한다. 자본가는 더욱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새로운 과학기술을 끊임없이 도입해 실업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로 말미암아 노동자 계급의 세력을 약화시켜 자본과 노동 사이의 착취관계를 유지하고 재생산한다. 경제공황은 특정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는 게 마르크스의 견해다. 마르크스는 분업과 기계의 등장이 어떻게 노동의 소외와 착취를 가중시키는지도 자세하게 묘파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태어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자본론’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