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7위 기업의 추락… ‘호남 최대 재벌’ 타이틀은 하림으로
택시 두 대로 시작, 지속적 확장으로 종합기업화
‘지략가’ 박성용 6900억 → 4조 원 매출 확장
‘불도저’ 박정구, 과감한 통폐합으로 내실 다져
박삼구, ‘규모의 경제’ 노렸지만 무리수에 그쳐
부채비율 600%… 아시아나항공 매각에 중견기업 추락
사실상 그룹 해체 상태, 오너 리스크 대표 사례
![서울 종로구 공평동 금호아시아나그룹 본사. [뉴스1]](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91/d1/dc/6791d1dc0e23d2738276.jpg)
서울 종로구 공평동 금호아시아나그룹 본사. [뉴스1]
미국 법무부(DOJ)의 승인이 남아 있지만 별다른 이의 제기가 없는 상태로, 업계는 사실상 기업결합이 완료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인수 작업이 마무리되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이라는 이름은 재계 상위 리스트에서 사라지게 됐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자산 규모는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2024년 5월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발표한 대기업집단 순위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자산 규모 17조3929억 원으로 30대 그룹 내인 28위에 이름을 유지했다. 그러나 9월 말 기준 아시아나항공의 연결 기준 총자산은 전체의 75.6%인 13조1554억 원이다. 이를 고려하면 아시아나항공을 잃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자산 총액은 5조 원 미만이 된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자산 10조 원 이상)은 물론 공시대상기업집단(자산 5조 원 이상)에서도 제외돼 대기업에서 중견기업(자산규모 5000억 원 이상 5조 원 미만)으로 떨어진다.

재계에서는 금호아시아나그룹 몰락의 주요 원인으로 총수의 독단에 그룹이 좌지우지되는 ‘제왕적 경영’을 지목한다. 박 전 회장이 외형 확장을 위해 무리한 인수전을 벌이며 그룹 전체가 부실화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그를 견제하지 못했다. 박 전 회장은 3대 회장이던 박정구 회장이 2002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4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2004년 그룹 명칭을 기존의 ‘금호’에서 ‘금호아시아나’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외형 불리기에 나섰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과유불급(過猶不及)’, 그에 따른 몰락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박인천, 중고 택시 두 대로 기업 일궈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창업한 사람은 박인천 초대 회장이다. 그는 1901년 전남 나주시 빈농 집안에서 4남 2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1917년 4월 나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6월 일본인 교장 배척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고(故)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초대 회장. [금호아시아나그룹]](https://dimg.donga.com/ugc/CDB/SHINDONGA/Article/67/91/d2/80/6791d280239fd2738276.jpg)
고(故)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초대 회장. [금호아시아나그룹]
광복 이후 당시 광주 시민들은 1941년 태평양전쟁을 빌미로 일제가 대다수 자동차를 징발한 탓에 열악한 교통 여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박 회장은 경찰직 사퇴 이후 약품 배달로 돈을 모아 택시운수업을 시작했다.
우선 경찰 재직 시절 친분이 있던 전남 강진의 갑부 유재의에게 10만 원을 빌려 중고 택시 2대를 16만 원에 구입했다. 이후 광주시 황금동 87번지의 건물 40평, 창고지 30평을 임차하고 운전기사까지 확보했다. 1946년 4월 7일 건물 입구에 ‘광주택시’라는 나무 간판을 달고 영업을 개시했다. 택시 사업은 성공을 거뒀고, 박 회장은 이로부터 2년 후인 1948년 광주~장성, 광주~화순 왕복 노선을 운행하는 ‘광주여객’을 설립하며 버스 운수업에도 진출했다. 광주여객의 첫 운행은 1948년 11월 5일 광주~장성 노선으로 시작했다.
![1946년 4월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초대 회장이 ‘광주택시’를 설립할 때 있었던 택시 두 대.
[금호아시아나그룹]](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91/d3/b4/6791d3b40599d2738276.jpg)
1946년 4월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초대 회장이 ‘광주택시’를 설립할 때 있었던 택시 두 대. [금호아시아나그룹]
박 회장은 운수업과 동시에 타이어 사업도 발전시켰다. 1960년 9월 광주에서 삼양타이어공업주식회사(현 금호타이어)를 설립했다. 회사 설립 목적은 전국적으로 자동차 수가 늘어남에 따른 타이어 수요 증가 충족이었다. 당시 운수업자들이 불법 유출된 외국산 군용 타이어를 시장에서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일 만큼 타이어 수요가 늘고 있었다.
이 무렵 국내에는 1958년 10월부터 가동한 조선다이야(현 한국타이어)를 비롯해 1952년 1월에 설립된 흥아(興亞)타이어와 1954년 1월에 설립된 동신화학(東信化學) 등 5개사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변변치 못한 품질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었다.
삼양타이어공업주식회사는 1961년 4월부터 타이어 생산을 시작했지만 초창기 기술 부족으로 광주여객에서 벌어들인 돈을 지속적으로 투자받아야 했다. 그러다 1965년 KS마크를 획득하고, 이와 함께 군납품으로 지정되며 활로를 뚫게 됐다. 1973년 미국 유니로얄로부터 레디알 타이어 개발 기술을 제공받는 데 성공했고, 1974년 국내 최대 타이어 메이커로 부상했다.
한편 광주여객의 다각화 작업은 1970년 광주여객이 1970년 고속버스 사업에 참여하며 본격화했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탄생하면서 본격적으로 고속버스 사업은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광주여객이 ‘그룹’이라는, 대기업집단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던 데엔 1970년대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편승한 것이 주효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3년 자주국방·자립경제 건설을 목표로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직후 철강·조선·전자·자동차·석유화학·요업 6개 업종에 집중 투자했다.
박 회장도 1972년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편승하기 위해 금호실업을 설립했다. ‘금호’는 박 회장의 아호(雅號)다. 장남 박성용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을 비롯한 아들들이 아버지의 아호를 회사 이름으로 쓰자고 했고, 이때부터 금호가 그룹 이름이 됐다.
금호실업 설립은 금호그룹 2세 경영의 시작이기도 했다. 박 회장의 장남인 박성용 회장이 경영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박성용 회장은 1950년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1955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인재였다. 그는 일리노이주립대 경제학 석사에 이어 1965년 미국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 귀국한 그는 대통령비서관을 거쳐 1971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72년 10월 금호실업 부사장으로 입사하면서 그룹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974년 박성용 회장은 금호실업 사장이 됐고, 금호실업을 그룹의 주력 기업으로 자리매김시켰다. 동시에 적극적으로 종합그룹으로 다각화하는 작업에도 착수하며 그룹의 확장을 꾀했다.
이때 박인천 회장은 그룹 체제 출범과 함께 계열사별로 경영관리 체제를 정비했다. 금호실업은 장남인 성용, 광주고속은 2남인 정구, 금호타이어는 3남인 삼구, 삼화교통은 첫째 사위인 배영환에게 경영을 책임지도록 했다.
1973년 4월엔 모빌코리아윤활유공업을 설립했으며, 6월 곡성제사(삶지 않은 실인 생사(生絲) 생산 공장)를 인수했다. 12월엔 금호전자를 설립했고, 1974년 6월에는 광주투자금융을 설립했다. 1976년엔 삼양타이어가 유니로얄판매를, 금호실업이 극동철강, 마포산업을 각각 인수하며 그해 12월 금호실업은 국내 11번째로 종합무역상사에 지정됐다. 금호석유화학도 이 시기에 설립됐다. 1977년 8월엔 제일토건을 인수하면서 건설업에 진출했으며, 1978년에는 ‘금호건설’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때 금호실업은 지주회사 역할을 했다. 지속적 확장 끝에 그룹은 출범 4년 만인 1977년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국내 10위권의 대기업집단으로 급부상했다.
‘지략가’ 박성용이 다지고, ‘불도저’ 박정구가 키우고
![고(故)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 [금호아시아나그룹]](https://dimg.donga.com/ugc/CDB/SHINDONGA/Article/67/91/d4/9c/6791d49c1663d2738276.jpg)
고(故)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성용 회장은 경제이론의 대가로서 현실 경영인으로서는 결심하기 힘든 단안을 내렸다. 한보철강의 전신인 극동철강과 금호섬유를 매각하고, 삼양타이어와 금호실업을 통합해 상호를 ㈜금호로 바꿨다. 흑자 기업인 광주고속이 금호건설을 합병했고, 금호화학과 한국합성고무를 합쳐 금호석유화학으로 재탄생시켰다. 취임 당시 9개사인 계열사를 4개로 줄이고, 비주력 부문을 과감히 매각하는 등 경영 내실화에 박차를 가했다. 또 석유화학 분야를 그룹 주력 업종으로 성장시켰다. 취임 당시 6900억 원이던 그룹 매출을 퇴임하는 1995년엔 4조 원 규모로 끌어올리는 등 그룹을 성장시켰다.
그의 더 큰 업적은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기반을 닦아놓았다는 것이다. 전두환 정부에서 제2민항사 설립을 추진하자 박 회장은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선정되는 데 성공, 1988년 12월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했다.
1996년 박성용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동생 박정구 회장이 그룹을 물려받았다. 박성용 회장의 모범 경영 사례로 회자되는 것은 형제간의 공동경영과 원칙을 합의서로 만들고 실천한 것이다. 합의서에는 △회장직 65세를 넘기지 않을 것 △4가계의 합의로 추대 △10년을 넘기지 않을 것 △4형제가 지분을 동일하게 보유할 것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실제 그가 동생에게 회장직을 넘겼을 때의 나이가 65세였다.
![고(故) 박정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금호아시아나그룹]](https://dimg.donga.com/ugc/CDB/SHINDONGA/Article/67/91/d4/df/6791d4df05a6d2738276.jpg)
고(故) 박정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정구 회장은 박성용 회장과는 사뭇 다른 경영 스타일을 보였다. 경제 이론을 중요시했던 형과 달리 본능적 감각과 불도저식 추진력을 발휘하는 현장 중심의 경영 방식을 택했다. 연세대 법대를 졸업하자마자 22세에 광주여객 영업과장으로 회사에 취직, 현장에서 뛰었기에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아주생명을 인수, 금호생명으로 변경해 보험업에 진출했다. 강원 설악과 전남 화순, 제주 남원에 잇달아 콘도를 개장하며 관광·레저사업 부문도 확대했다.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중국 진출이었다. 항공·타이어·고속버스 분야를 중심으로 중국 시장을 개척했다.
그의 불도저식 경영은 1997년 이후 외환위기 때도 발휘됐다. 계열사 간 합병·지분매각·청산 등을 통해 한계사업과 비주력사업 부문을 과감히 접었다. 1997년 32개이던 계열사를 2001년 15개로 축소했다. 자본 유치, 부동산 및 유가증권 매각, 유상증자 등을 통해 그룹 부채비율도 966%에서 360%로 낮추는 등 재무구조를 개선했다.
‘모래 위의 성’ 되고 만 박삼구의 무리수
박정구 회장은 65세이던 2002년 폐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자연스레 형제 공동 합의서를 지키게 됐고, 그보다 8살 아래인 동생 박삼구 회장이 회장직을 물려받았다. 그는 박인천 회장의 자녀 가운데 박인천 회장을 가장 닮은 아들로 꼽혔다. 박인천 회장처럼 수리에 밝고 매사에 적극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룹 총수이면서도 재무·관리·세무회계 등에 정통해 그룹의 세세한 재무 상태까지도 훤히 꿰고 있었다.
둘째 형인 박정구 회장이 그룹을 한창 경영할 때 박삼구 회장도 회사에 입사했다. ‘형제 경영의 원칙’에 따라 그는 둘째 형보다 한발 뒤에 있었다. 하지만 형이 전혀 발을 담그지 않은 그의 몫이 있었으니, 바로 아시아나항공이다.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금호아시아나그룹]](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91/d4/45/6791d4451bced2738276.jpg)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은 사세를 확장하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서는 회사를 새롭게 재편하는 사업 구조조정을 통해 재무 상태를 개선하는 게 첫 번째였다. 박 회장은 2003년 6월 금호산업의 타이어사업부를 분사해 금호타이어로 독립시키며 사업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금호타이어의 중국 톈진 공장을 일본 브릿지스톤에 1조1000억 원에 팔아 모그룹으로 넘겼다. 금호타이어 지분의 50%도 군인공제회에 넘겼다. 아시아나항공의 일부 서비스 부문도 매각했다.
2002년 9월 2일에 회장에 오른 박삼구 회장은 2004년까지 4조 9961억 원의 구조조정 실적을 이뤄내는 자구 노력으로 기업을 회생시켰다. 정확히는 금호그룹의 재무 상태를 ‘보기 좋게’ 만들었다. 이 작업을 마무리한 뒤 박 회장은 2004년 그룹 명칭을 기존의 ‘금호’에서 ‘금호아시아나’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외형 불리기에 나섰다. 그는 외형 성장으로 그룹을 이끌어가려 했고, 이는 부메랑이 돼 그룹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박정구 회장에 비해 더 신중·세심한 성격으로 평가받던 박삼구 회장이 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외형 성장에 집착했을까. 두 사람은 스타일이 판이했고, 이에 재계에선 둘을 종종 비교했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두 회장을 모두 경험한 한 전문경영인은 이렇게 말했다.
“박정구 회장은 보스 기질이 강했습니다. 회사 임원들과 술자리에서 한 명 한 명 일일이 술잔을 주고받곤 했습니다. 1994년 광주공장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났을 때엔 광주에 상주하셨죠. 다음 날 노조와 회의를 하는데, 끝까지 노조를 설득하셨습니다. 보스 기질 내면에 세심함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박삼구 회장은 시스템 관리 능력이 탁월합니다. 금호그룹의 대차대조표, 현금흐름표는 다른 기업보다 훨씬 세분화돼 있습니다. 우리 그룹의 관리 회계는 박삼구 회장이 독창적으로 개발해서 정리한 포맷입니다.”
박삼구 회장은 형을 이기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경영학을 전공한 관리 회계의 전문가였다. 자산이 늘어나 부채비율이 떨어지면 유동성이 확보돼 은행에서 추가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그룹의 위기를 구조조정이 아니라, 그룹의 몸집을 부풀려서 ‘규모의 경제’로 돌파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는 결국 모래 위의 성을 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배력 강화 위해 대규모 차입·형제간 다툼 불사
여기에 박삼구 회장이 2005년 박성용 2대 회장이 사망한 후 형제 공동경영 합의서를 수정, 형제간 합의를 깨면서 그룹의 몰락을 더했다. 회장으로 65세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과 최장 10년까지만 회장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을 삭제했고, 의견이 상이하면 다수결 원칙과 연장자 의견을 따른다는 내용을 추가적으로 신설했다. 동생인 박찬구 회장을 의식했는지 2006년엔 그룹 분할 해체 금지 조항을, 2008년엔 합의서를 위반한 경우 소유 주식의 50% 금액을 다른 가계에 보상한다는 내용까지 추가했다.
이는 박삼구 회장이 자신의 아들 박세창 금호건설 부회장에게 그룹을 물려주고 싶었으나 ‘형제 공동경영 합의서’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형제·조카들과 완전히 결별해야만 자신의 ‘직계 경영’ 구조를 만들 수 있었다고 판단한 셈이다.
박삼구 회장은 먼저 2006년 건설업을 주력사업으로 키울 생각으로 계열사 자금을 총동원하고 투자금융 자본까지 끌어들여 총 6조4255억 원을 주고 대우건설을 인수(자산관리공사 소유의 대우건설 지분 72%)했다. 당시 업계에서 예상한 대우건설의 인수 가치는 3조 원. 2배가 넘는 인수 금액에 재계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이 나왔다.
문제는 6조 원이 넘는 금액의 조달 방법이었다. 3조 원가량은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통해 차입했고, 3조50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은 사모펀드 등을 통해 끌어모았다. 사모펀드를 통해 조달한 금액은 주식 의결권을 위임받는 대신 3년 후 1주당 3만4000원에 되사는 풋백옵션을 체결하는 위험까지 감수했다. 2006년 당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자본 총액은 약 3조 원이었다.
박 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8년 4조1000억 원을 투입해 대한통운을 인수했다. 이를 통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재계 7위에 입성했다. 당시 동생인 박찬구 회장이 차입에 의존한 외형 확장은 그룹의 유동성 위기를 부를 수 있다는 이유로 인수를 반대했지만 박삼구 회장은 멈추지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며 주가는 폭락했고, 대우건설도 이를 버텨낼 순 없었다. 인수 당시 1만3000원이던 주가는 1만 원까지 하락했고, 풋백옵션 날짜는 다가오고 있었다. ‘과유불급’의 말로였다.
결국 2009년 12월 재매입해야 할 주가를 감당할 수 없었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우건설을 한국산업은행에 매각했다. 이어 금호생명, 금호렌터카, 대한통운도 매각했다. 이것만으로도 부족해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옥도 팔았고, 박 회장 개인 재산까지 담보로 제공하며 상황을 모면했다.
부실 경영으로 그룹 전체가 휘청하자 책임을 놓고 박삼구·박찬구 회장은 갈등을 빚었다. 형제가 다툼을 시작하는 와중인 2009년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워크아웃(기업회생작업)에 들어갔다. 금호석유화학을 놓고도 경영권 분쟁이 일어났다. 결국 박찬구 회장은 금호산업 지분 전량을 팔고,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늘려 형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이에 박삼구 회장은 건설과 항공 부문을, 박찬구 회장은 석유화학 부문을 각자 나눠 맡아 분리 경영을 시작했다. 박찬구 회장은 2011년 3월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금호그룹에서 제외해 줄 것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청했다. 적자 경영으로 몰락하는 금호아시아나 그룹에서 ‘알짜’ 계열사를 분리해 살려 놓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삼구 회장은 박찬구 회장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에 그해 4월 박찬구 회장은 비자금 조성 의혹 등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고, 배임 혐의로 2018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형을 확정받았다.
과유불급이 불러온 쓸쓸한 말로
한편 박삼구 회장은 2009년 박찬구 회장과 갈등을 빚자 함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는 65세. 형제 공동경영 합의서를 스스로 파기했지만 반강제로 본래 합의안을 지키게 된 셈이다. 박 회장은 그룹 정상화를 목표로 2010년 10월 회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2014년 금호산업 워크아웃 종료를 계기로 그룹 재건을 위한 총력전에 나섰다. 지주회사였던 금호산업에 대한 채권단 지분을 모두 사들이면 아시아나항공과 금호터미널 등의 경영권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박 회장은 채권단을 설득한 끝에 2015년 9월 7288억 원을 지급하고 금호산업 지분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2017년 1월엔 금호타이어 인수까지 선언한다. 그룹이 항공·타이어·건설을 3대 축으로 삼고 있었던 만큼 금호타이어 인수가 그룹 재건의 마침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또 한 번의 과유불급이 됐다.
당시 금호타이어 인수에는 약 1조 원의 자금이 필요했다. 금호산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직후여서 그만한 돈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박 회장은 금호타이어 인수를 고집했다. 결국 그는 11월 금호타이어 인수 포기를 선언해야 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2018년 아시아나항공의 ‘기내식 사태’도 초래했다. 2018년 7월 1일 아시아나항공 국제선 가운데 51편이 예정 시각보다 늦게 이륙했다. 비행기 내에 기내식을 싣지 못해서였다. 반면 같은 날 박삼구 회장이 탄 비행기는 기내식을 잔뜩 실은 채로 제 시각에 공항을 떠나 빈축을 샀다.
기내식 사태는 표면적으로는 아시아나항공에 기내식을 납품하기로 한 업체인 게이트고메코리아(GGK)의 인천 영종도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한 게 원인이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박 회장이 금호타이어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내식 납품업체를 GGK로 갑자기 바꾸며 빚어진 일이었다.
아시아나항공은 2003년부터 독일 기업 LSG로부터 기내식을 납품받았다. 아시아나항공은 뛰어난 기내식 서비스를 인정받아 수차례 기내식 부문 상도 받은 바 있다. 기내식 사태 당시 LSG는 “아시아나항공에 기내식을 납품하면서 어떤 중대한 품질 문제도 제기되지 않았다. 아시아나와의 계약 조건을 준수해 왔고, 계약에 명시된 사항을 적용해 왔다”며 “아시아나항공의 1600억 원 규모 투자 제의를 거절하자 기내식 공급이 해지됐다”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금호아시아나와 새로 계약을 맺은 GGK는 이 조건을 수용했다. 정확히 말하면 GGK의 모기업인 하이난 그룹이 2017년 3월에 아시아나항공의 지주회사인 금호홀딩스에 1600억 원을 투자했다. 그 때문에 업계에서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투자 유치를 위해 기내식 업체를 바꿨다고 봤다.
이렇듯 추락한 그룹 이미지에 더해 2019년 3월 삼일회계법인으로부터 받은 감사 ‘한정’ 의견이 결정타를 가했다. 아시아나항공은 본래 재무구조가 튼실한 기업이었는데, 박 회장이 금호타이어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해 아시아나항공의 알짜 계열사인 금호터미널을 자신의 지분이 높은 금호기업에 헐값으로 넘기면서 재무구조가 악화한 것이다. 2018년 12월 기준 아시아나항공의 자산 약 8조 원 가운데 7조 원이 부채로, 부채비율이 600%가 넘어갔다. 이에 박삼구 회장은 2019년 3월 사퇴하고 경영권을 포기했고, 4월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결정됐다.
HDC그룹이 아시아나항공 인수 의사를 밝혔지만 2020년 4월 HDC그룹이 인수를 연기한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모태 격인 금호고속마저 유동성 위기에 빠지며 채권단이 관리하게 됐다. 이후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겠다고 밝혀 아시아나항공은 대한항공을 소유한 한진그룹에 넘어가게 됐다.
아시아나항공이 빠지게 되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고속·금호산업만 남아 중견기업이 된다. 실제 2020년 12월 8일 금호그룹은 전략경영실을 해체하기로 밝혔고, 사실상 그룹 해체 수순을 밟았다. 박삼구 회장은 자택을 매각한 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다. 과유불급이 불러온 쓸쓸한 말로다.
1946년 박인천 회장이 택시 2대로 시작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몰락은 오너의 독단·과욕에 의한, 기업의 본원적 가치에 기반을 두지 않은 무분별한 사업 확장이 회사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이는 대표 사례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