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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대제의 여름별궁 상수시

‘哲人王’ 손길로 빚어낸 로코코 건축미의 극치

프리드리히 대제의 여름별궁 상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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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과 학문을 사랑한 프리드리히 대제가 손수 스케치해 지었다는 상수시 궁전. ‘상수시(sans souci)’는 프랑스어로 ‘번민이 없다’는 의미다. 왕은 세상의 모든 번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지성들을 베를린 교외의 상수시 궁으로 불러들여 격조 높은 ‘테이블 대화’를 즐겼다. 미(美)와 지성이 살아 숨쉬던 공간답게 상수시 궁은 몽환 같은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프리드리히 대제의 여름별궁 상수시

프리드리히 대제가 음악을 감상하고 악상을 떠올리고 식사를 끝낸 다음 따끈한 커피를 마시곤 했다는 음악감상실. 화려한 장식이 인상적이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권력자건 아니건 간에 인간은 누구나 제 나름의 번민을 안고 산다. 차이가 있다면 번민의 내용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번민은 인간의 숙명이라 하겠는데, 정말 우리네 인간은 번민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같은 것은 불가능할까.

서양에선 ‘상수시(sans souci)’란 말이 오래 전부터 사용돼왔다. 프랑스어로 ‘번민이 없다’는 뜻이니 ‘해탈’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상수시는 고유명사로도 쓰인다.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 자리잡은 ‘상수시 궁전’이 그것이다.

프로이센(영어로는 프러시아) 제국을 일으킨 호헨촐레른 왕가가 애지중지한, 아름답기 그지없는 포츠담에 상수시 궁전을 지은 인물은 ‘프리드리히 대제’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2세(1712∼86)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5년째 되던 1745년에 궁전을 짓기 시작해 3년 만에 완공했다. 공사를 맡은 건축가 크노벨스도르프가 대왕이 몸소 그린 스케치에 따라 지었다고 전해질 만큼 대왕은 궁전 건축에 깊이 관여했고, 거기에 자신의 철학을 심으려 했다.

군인과 철인의 격세유전

오늘날 독일이야 유럽의 중추적 국가지만, 19세기 말 프로이센 제국에 의해 통일되기 전까지만 해도 독일은 바이에른, 하노버, 작센 등 300여개의 영방(領邦)으로 나누어져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시인 횔덜린이 ‘히페리온’에서 “독일인만큼 갈기갈기 찢긴 국민은 없다. 쟁이는 있으나 인간은 없다. 사상가는 있으나 인간은 없다. 주인과 하인, 미성년자와 분별 있는 사람은 있으나 인간은 없다”고 했고, 역사학자 메링이 ‘독일사’에서 “농민은 무서운 억압 밑에서, 인간으로 살고 있다기보다는 식물적인 존재로 근근이 유지하고 있다”고 했을 만큼 당시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 프로이센이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는데, 재미있게도 한 왕이 군사력 증강에 힘쓰는 ‘군인왕(Soldier-King)’의 길을 걸으면, 그 다음 왕은 병력 증강은 등한시한 채 문화와 예술에 빠져드는 ‘철인왕(Philosopher-King)’의 길을 걸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조부 프리드리히 1세(1657∼1713)는 할레(Halle)대학과 베를린 미술학교에 이어 과학아카데미를 설립했고,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베르사유 궁전을 부러워한 나머지 왕비 소피 샤를로텐을 위한 여름별궁으로 베를린에 호화롭고 장대한 샤를로텐부르크(Charllotenburg) 궁전을 건립했다.

그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88∼1740)는 부왕과는 반대로 자신의 제국이 이웃 열강으로부터 멸시받지 않고 독일 내에서 최강의 영방국가로 발전하려면 군사력 증강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며 상비군을 강화하고 관료제를 확립하는 데 국력을 온통 다 바쳤다. 이런 전통이 후일 군국주의로 흐르게 됐고, 일본도 이를 모방해 군국주의로 나아가 급기야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이와쿠라 도시미치가 이끄는 시찰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했는데, 그들이 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1872년이다. 그들이 당시 프로이센 제국의 수뇌들을 만나 앞으로 일본이 나아가야 할 국가형태와 방향에 대해 자문하는 자리에서 프로이센측은 “일본은 우리처럼 군왕제를 택하고 있는 데다 힘이 약하니 군사력을 더 키워야 한다”면서 “프로이센 체제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일본은 이를 받아들였다. 역시 프로이센으로부터 행정학을 배운 미국이 곧 대통령제와 삼권분립을 기본 골격으로 하는 자국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미국식 행정학을 새로이 정립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런 부왕 슬하에서 자란 프리드리히 2세는 군대라면 진저리가 났는지 어릴 때부터 철학 서적과 문학서를 끼고 살았다. 그러고도 시간이 나면 플루트를 연주했다. 아들을 엄격한 무인(武人)으로 키우려 했던 부왕은 보다 못해 아들에게 ‘계집의 찌꺼기 같은 놈’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고, 그런 분위기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던 어린 프리드리히는 영국으로 탈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붙잡혀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겨우 풀려났다. 그런데도 그는 원래의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 호헨촐레른 왕가에는 이렇듯 격세유전(隔世遺傳)의 기운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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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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