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 ‘남부인의 聖戰’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6-07-07 16: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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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옥한 토지와 풍성한 농작물, 경제번영 위에 꽃핀 세련된 문화. 미국 남부의 이런 배경 속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탄생했다. 남부인은 다르다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 치러낸 남북전쟁. 그것은 미국이 민주주의 체제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시험은 가혹했고 상처는 깊었다.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멀리서 본 섬터 요새

    크리스마스 다음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부터 대서양 해안을 따라 달리는 국도 17번을 타고 찰스턴을 향해 차를 몰았다. 겨울인데도 햇살이 화사하고 따뜻하다.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머틀 비치를 지나자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변 나무숲 너머 하늘은 한층 더 푸른 느낌을 준다. 남부인 것이다. 남부의 하늘은 언제 보아도 맑고 푸르다. 그렇지만 우리 가을 하늘처럼 공활하고 드높다기보다는 낮게 드리운 궁륭(穹?·아치) 같은 느낌을 준다. 하늘이 대지와 더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남부에서 하늘은 대지의 지붕이 아니다. 오히려 대지가 하늘의 마루인 것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상징하는 작달만한 종려나무가 눈에 많이 띄는 듯하더니 차는 어느새 쿠퍼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철제 다리를 지난다. 왼편으로 항구가 내려다보이고 ‘성스러운 도시(Holy City)’라는 별칭답게 여기저기 산재한 교회당의 첨탑과 함께 단아한 고도(古都) 찰스턴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부사회의 특이성은 근본적으로 도시중심의 북부 문명과 다른 ‘전원 문명’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 재건시대에 북부의 선도에 따라 산업화하면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기반으로 한 남부의 전통적인 문화는 대부분 멸실되고 말았다. 찰스턴은 남부 본래의 전원 문명의 잔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고도다.

    찰스턴은 1670년 당시 국왕 찰스 2세의 이름을 따서 영국의 식민자들이 개척한 도시다. 쿠퍼 강과 애쉴리 강 사이에 대서양을 향해 혓바닥처럼 내민 지형 위에 식민자들은 아담한 도시를 건설하고 바다 건너 종주국의 화려한 궁정 문화를 앞서서 도입했다. 그리하여 버지니아나 뉴잉글랜드에 비해 늦게 출발했지만, 신대륙이 자치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영국 왕실의 직할 식민지로 개편된 18세기 초엽부터 찰스턴은 남부의 새로운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들의 경제력이었다.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찰스턴의 식민자들은 일찍부터 사이프러스 나무가 무성하던 인근의 늪지를 개간해 쌀농사를 짓고 값비싼 염료를 추출할 수 있는 인디고 나무를 재배했다. 농사는 물론 흑인 노예들의 몫이었다.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벼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는 노예들의 도움이 컸다. 노예의 수요가 많았던 탓에 찰스턴은 뉴올리언스, 미시시피의 내처즈와 함께 남부에서 가장 큰 노예시장이 서던 곳이기도 하다.

    식민자들은 이렇게 거둔 농산물을 모두 영국으로 수출해 재산을 모았다. 이들은 이렇게 축적한 부를 대서양 너머의 세련된 유럽문명을 도입하는 데 썼다. 식민자들은 희랍식 주랑과 층마다 ‘피아짜(piazza)’라고 부른 넓은 베란다를 갖춘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맨션을 바닷가에 지었다. 이들은 식민지 최초의 극장 ‘Doc Street Theatre’를 세우고(1736), 최초의 공공 도서관을 설립하고(1743), 또한 식민지 최초의 미술관을 지었다(1773).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이처럼 세련된 문화를 향유하던 찰스턴의 귀족들은 그래서 자긍심 또한 남달랐다. 그들은 북부는 물론 여타 남부 사회에 대해서도 굽히기를 거부했다. 이 자존심이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정치사에서 찰스턴을 제퍼슨, 메디슨 그리고 먼로 대통령에 이르는 남부 공화파를 낳은 버지니아를 제치고 이른바 남부주의의 중심에 서게 만든 것이다. 조지아 주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딸 스칼렛 오하라의 드높은 콧대를 꺾고 그녀와 결혼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드 버틀러가 찰스턴 출신임은 우연이 아니다.

    남부의 자긍심 찰스턴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옛 귀족들이 살던 찰스턴 거리.

    남부 자긍심의 상징이던 찰스턴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남북전쟁 때다. 링컨이 연방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인 1860년 12월20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의회는 찰스턴에서 특별회의를 소집해 만장일치로 연방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남부 분리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북부가 도피노예송환법(Fugitive Slave Law)을 준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反)노예제 운동을 방치하고, 게다가 북부 여러 주가 일치단결해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헌법이 보장하는 주(州)의 독자적 권익을 지킬 수 없게 됐다는 것이 탈퇴의 주요 이유였다. 남북전쟁의 불씨는 노예제 문제였지만, 분쟁의 핵심에는 이처럼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의 권력배분이라는 건국 초부터 논란거리였던 해묵은 문제가 자리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 정부에 맞서기는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1832년 연방정부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고관세 정책을 취했다. 이로 인해 많은 것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남부가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됐다. 국방장관과 부통령을 지낸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상원의원 존 캘훈은 주의 권익을 침해하는 연방의 법률은 주에서 무효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의회는 캘훈의 주장을 행동으로 옮겨 고관세법을 무효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연방정부에 정면으로 맞섰다. 관세를 낮추고 그 대신 법 집행을 위해 연방정부는 연방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는 법을 제정하자는 북부의 원로 정치가 헨리 클레이의 중재안으로 이 ‘무효화 위기(Nullification Crisis)’는 수습됐지만, 이로 인해 연방정부의 권위는 상처를 입게 됐다. 역사가들은 그래서 고관세 무효화 분쟁을 남북전쟁의 서곡으로 보기도 한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연방 탈퇴는 남부 전체를 동요하게 만들었고, 이윽고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여섯 주가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동조해 잇따라 연방을 탈퇴한다. 이어 이들 각 주의 대표자들은 링컨의 대통령 취임을 한 달여 앞둔 1861년 2월, 앨라배마의 몽고메리에 모여 미국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하고 미시시피 출신의 정치가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일부 정치가들이 나서서 화합의 길을 모색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3월4일 링컨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연방이 헌법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어떤 주도 연방을 탈퇴할 수 없다는 것과 따라서 연방분리를 획책하는 행위는 반란이라고 선언하는데, 이로써 남북의 갈등은 더더욱 봉합할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하고 만다. 남북의 분리가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가운데 남북 쌍방의 주권 행사가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남북전쟁의 기폭제가 된 곳이 찰스턴 항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뱃길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섬터 요새다.

    섬터로 가는 뱃길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붐볐다. 정년을 넘긴 듯한 노부부,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눈에 띈다. 이따금 긴 부리의 펠리컨들이 내려앉으며 흰 포말이 이는 것을 제외하면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여기저기 떠 있는 부표에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앉아 지나는 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유람선 위에서 찰스턴 항을 되돌아보니 이곳이 뛰어난 입지조건을 갖춘 양항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우측으로는 제임스 섬이, 좌측으로는 에드거 앨런 포의 유명한 ‘황금충’의 무대이기도 한 설리번 섬이 마치 입 벌린 뱀의 형상처럼 항구를 옹위하여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막아준다.

    남북전쟁의 시발지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섬터 요새 내부.

    이런 천혜의 지리적 조건으로 오늘날 찰스턴은 대서양 연안에서 뉴욕 다음으로, 그리고 미국 전체로는 네 번째로 하역 량이 많은 큰 항구다. 섬터 요새는 이처럼 중요한 남부의 관문인 찰스턴 항을 방위하기 위해 만 입구의 한가운데에 축조된 인공의 섬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독립전쟁 영웅 토머스 섬터의 이름을 딴 이 인공의 성채가 착공된 것은 1829년이다. 1812년 영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대서양 연안 항구들의 방위를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한 연방정부가 기획한 일련의 요새지 건설 사업의 하나였다. 1861년 남북전쟁 발발 시까지 성채에는 7만여 t의 암석과 멀리 북부의 메인 주에서 실어온 1만여 t의 화강암이 투입됐으나 아직 계획된 공정의 90%밖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실로 50여 년에 걸친 대공사였다. 높이 지상 50피트, 두께 5피트, 사면이 약 190피트에 이르는 방벽으로 설계된 성채는 3면에 3층으로 모두 135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650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에서 탈퇴한 일주일 뒤인 1860년 12월26일, 연방군 수비대장인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80명의 수비대를 설리번 섬의 모울트리 요새에서 섬터 요새로 이동시켰다.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민병대가 요새를 접수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자신 남부 켄터키 출신으로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앤더슨은 연방의 군인으로서 책무를 맡은 이상 남부연합에 투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앤더슨은 섬터 요새가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전략적 가치가 크고, 또한 소수의 병력으로 방어하는 데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한 끝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앤더슨의 예상대로 남부연합군은 곧 주변의 중요한 군사시설과 요새지를 접수하고 장악했다. 그러나 투항을 거부하는 섬터 요새에 대해서 그들도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할 무렵, 섬터 요새는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 항의 피큰스 요새와 더불어 남부연합의 영토 내에 여전히 연방의 깃발이 휘날리는 군사시설로 남게 된다.

    1861년 4월이 되면서 섬터 요새의 생활필수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앤더슨은 연방정부에 보급을 요청한다. 이에 링컨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구호품을 보내는 원정대를 파견할 것이라고 통고한다. 연방의 고수를 선언한 링컨은 섬터 요새에 구호품을 보냄으로써 연방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링컨의 통고를 받은 남부연합 정부는 딜레마에 빠진다. 만약 북부 원정대가 섬터 요새에 상륙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스스로 주권을 포기하고 연방정부에 굴복하는 것이 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여 전쟁이 발발한다면 연방을 와해시킨 책임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제퍼슨 데이비스의 남부연합 정부는 논란 끝에 결국 물러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남부연합군 찰스턴 지역 사령관인 피엘 보리가드 장군에게 필요하면 무력을 사용해 섬터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그리하여 4월11일 보리가드는 앤더슨에게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앤더슨이 이에 불응하자 보리가드는 4월12일 새벽 마침내 인근 커밍스포인트 진지의 포격을 시작으로 섬터 요새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해서 남북전쟁이 시작됐다.

    전체 인구 2% 사망

    찰스턴 항을 떠난 유람선은 약 40분 만에 섬터 요새에 당도했다. 배가 정박하자 카키색 제복을 입은 여성 둘이 계류장과 요새를 잇는 다리로 달려나와 승강대를 댄다. 군인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국립공원관리소의 직원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배에서 내린 일행은 다리를 건너서 요새의 입구에 모여 관리인에게 요새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섬터 요새는 남북전쟁 이후 내내 군사시설로 남아 있다가 1948년 이후부터는 국립공원관리소에 이관되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누군가 오늘이 바로 앤더슨 소령이 모울트리 요새에서 섬터 요새로 수비대를 이동한 날이었음을 환기시킨다.

    앤더슨 소령은 남부연합군의 사면공격을 처음에는 잘 견뎌냈다. 그러나 포대의 다수가 파괴되어 응전 능력을 상실하고, 병사용 숙사가 잿더미로 변하자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남부연합군에 항복할 뜻을 전했다. 공격이 시작된 지 34시간 만의 일이었다. 1861년 4월14일 일요일, 앤더슨은 섬터 요새를 남부연합군에 내주고, 웨스트포인트에서 한때 자신의 휘하에서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남부연합 사령관 보리가드의 관대한 조치 덕분에 무기를 든 채 수비대원을 이끌고 북부로 철수할 수 있었다.

    섬터 요새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북부 전역은 남부에 대한 분노의 함성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링컨은 이튿날 즉시 국가 변란을 선언하고 이를 진압할 7만5000명의 지원병 모병을 시작했다. 남부 연합 대통령 데이비스도 이에 대응해 10만명의 민병대 모병을 선언했다. 전쟁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버지니아,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가 잇따라 연방 탈퇴를 선언하여 남부연합은 11개 주로 늘어났다. 남부연합 정부는 5월에 그 상징성을 고려해 수도를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로 옮겼다. 노예주 가운데, 메릴랜드, 델라웨어, 켄터키, 미주리가 우여곡절 끝에 연방에 남아 있게 된 것은 북부에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본격적인 남북 접전의 첫 전투인 버지니아 주 마나사스의 불런 전이 시작된 것은 섬터 요새가 함락된 지 3개월 뒤인 6월21일이었다.

    남북전쟁은 상대의 군사력은 물론 사람들의 전쟁 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전 영토를 대상으로 삼은 총력전이었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피해가 커진 이유의 일부도 이에 연유한다. 사실 개전 당시에는 남북전쟁이 4년이나 끌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섬터 요새를 뺏긴 다음 링컨이 7만5000명의 모병을 하면서 징집 기간을 불과 3개월로 한정한 것이나, 이에 대응한 남부연합군 민병대 모병의 경우 그 기간이 1년이었음이 그 증거다. 북부는 북부대로 남부는 남부 나름으로 각각 단기간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객관적 전력에서는 북부가 단연 앞섰다. 우선 인구 면에서 북부가 2200만인 데 비해 남부는 900만에 불과했고, 그 가운데 350만이 흑인 노예였다. 산업에서도 남부는 북부에 비해 현저히 열세였다. 북부는 섬유, 화약, 철강, 석탄, 곡물, 조선 등 국민총생산의 90%를 차지했으나, 남부는 미국 전체 생산량의 96%를 차지하는 목화 생산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산업기반이 없었다. 기간산업시설이나 수송 체계 또한 남부는 북부에 비해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제반 여건의 우세로 북부인 대다수는 전쟁이 단기간에 북부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인적·물적 자원에서 남부연합군은 북부에 비해 뒤졌으나, 전쟁이 자신의 땅과 재산, 가정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남부의 전쟁 의지나 병사들의 사기는 북부보다 훨씬 높았다. 또한 전통적으로 공동체 중심으로 생활해온 남부인들은 결집력이나 지역협력 면에서 북부보다 상대적으로 뛰어났고, 지방마다 민병대 조직도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전쟁터가 남부지역이었기 때문에 남부는 또한 현지 사정에 밝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이처럼 전반적인 전쟁수행 능력이 호각지세(互角之勢)였기에 남북은 개전 후 처음 1년간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4년간 지속된 남북전쟁의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남북 합쳐 모두 210만명의 병력이 동원된 전쟁에서 사망자만도 북군 36만, 남부연합군 26만, 도합 62만명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미군 사망자 11만5000명, 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 31만8000명보다 훨씬 많은 수치다. 더 구체적으로 이는 당시 미국 전체 인구의 2%에 해당하는 숫자요, 베트남전쟁을 포함해 미국이 치른 각종 전쟁의 사망자 총합계보다 많은 숫자다. 남북전쟁은 나폴레옹이 첫선을 보인 대량 징집, 최신 기술 공학을 응용한 각종 전술 무기의 동원,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활용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전이었다. 그러나 남북 양 진영의 군사 지도부가 이 같은 전쟁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전쟁이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각료들과 노예해방 선언을 협의하는 링컨(왼쪽에서 세 번째).

    남북전쟁은 내전(內戰)이다. 한 세기 이상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를 함께 일구어온 형제간의 싸움이다. 그런데 왜 그토록 오래 싸워야 했던가. 남북전쟁은 분명 노예제 존폐에 대한 남북의 첨예한 이견 대립으로 촉발됐다. 그러나 적어도 개전 초에는 노예제 폐지나 노예 해방이 궁극적인 이슈는 아니었다. 1858년 일리노이 상원 의석을 놓고 당시의 저명한 정치가인 스티븐 더글러스와 겨루게 된 링컨은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서 개최된 일리노이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부가 분열되어 있는 집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주로 반은 자유주로 영구히 나뉜 채 오래 존속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연방이 와해되리라고-집이 무너지리라고-예상하지 않는다. 나는 이 분열이 종식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미국은 모두 하나가 되든지 그 반대가 될 것이다.”

    비록 선거에는 졌지만 서부의 한 무명 변호사를 전국적인 인물로 만든 선거전의 포문을 연 이 연설은 향후 7년간 남북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미국이 나아갈 방향을 정확히 예고하고 있었다.

    문제의 초점은 링컨이 시사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라는 이상적 정치이념의 성공적 실험의 소산인 미합중국의 와해 위기에 있었다. 노예제는 남부 분리주의자들이 분리의 구실로 삼았기 때문에 문제가 됐을 뿐이다. 링컨은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제도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노예제 폐지론자는 아니었다. 그는 흑인은 백인과 더불어 하나의 정치공동체를 이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대다수 북부 백인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즉각 노예제 폐지를 선언하라는 공화당 내 급진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노예제 문제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전쟁이 지속되며 엄청난 피해가 나고 어떠한 명분으로도 그 막대한 희생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면서 비로소 노예해방은 전쟁의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됐다. 전쟁이 햇수로 3년째에 접어드는 1863년 1월1일에야 비로소 노예해방령이 선포된 것은 이런 사정의 반영인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남북전쟁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체제가 유지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시도된 공화주의의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식민전쟁 승리의 결과로 건국된 미국만이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19세기 미국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구체제의 개혁과 민주화의 모델이요 영감의 원천이었다. 따라서 구세계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미국은 불온한 과격주의의 온상으로서 질시의 대상이 되어왔다. 남부 정치지도자들이 전쟁이 발발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귀족주의 체제에 가까운 남부를 지원할 것이라고 생각한 근거도 여기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남북전쟁은 세계사적 관심사였다.

    링컨 대통령 또한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개전 직후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미국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국민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입증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고, 또 다른 교서에서는 연방의 유지는 ‘지상 최상의 것에 대한 마지막 희망(the last best hope of earth)’ 이라고 규정했다. 이처럼 전쟁의 근본 목적이 연방의 복원에 있었기 때문에 남북전쟁은 남부연합이 와해될 때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영토 분쟁이나 경제적 이해에서 촉발된 전쟁이 아니기에 휴전이나 적당한 타협이 용납될 수 없었다.

    ‘미국 이전에 남부인’

    미증유의 희생을 초래한 남북전쟁을 피할 길은 없었는가. 남북전쟁 중 링컨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시워드(William H. Seward)는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이미 남북의 갈등은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것이어서 두 진영간의 전쟁은 필연적이라는 전쟁 불가피론을 언급한 적이 있다.

    남북전쟁에 대한 역사적 논의에서 관점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시워드가 말한 전쟁 불가피론이 대세를 이루어온 것이 사실이다. 남북전쟁 직후부터 대략 제1차 세계대전 종식 무렵까지 대부분의 사가(史家)들은 국민일체 의식이 강조되던 시대적 분위기에 부응해 노예제도와 건국이념에 대한 남북의 견해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전쟁은 피할 길이 없었고, 전쟁을 통해 노예제도라는 악을 제거하고 연방을 명실상부한 하나의 국가로 통합한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도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1830년 초에 남북 양쪽을 두루 여행했던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증언하듯이 노예제가 폐지된 북부에서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더 극심했다는 점과, 전쟁의 결과 흑인들이 제도적으로는 노예제의 사슬에서 풀려났지만 재건시대 이후 날이 갈수록 억압이 심화되어 온 사정은 민족주의적 사가들의 그러한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 경제적 이해의 대립을 강조한 비어드 부자(Charles · May Beard)의 목소리다. 이들은 남부의 연방 탈퇴를 북부의 산업화가 몰고 온 역동적인 변화에 대한 남부 보수주의의 저항으로 읽었던 마르크스의 시각을 이어받았다. 그래서 남부 농장주와 북부 제조업자의 상충적인 이해관계가 결국 남북전쟁을 일으킨 동인(動因)이라고 주장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전쟁 불가피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정주의론도 등장했다. 이들은 전쟁이 시작될 무렵 노예제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고 따라서 남북이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전쟁은 지역감정을 정치적 영달의 도구로 삼은 일부 극단주의자들과 이들의 선동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정치적 지도력의 부족으로 타협책을 발견하지 못한 결과임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이들 수정주의자들에게 남북전쟁은 피할 수 있었던 비극으로 비쳐졌다.

    박물관을 구경하고 계단을 오르니 곧바로 1899년 스페인과의 전쟁 때 새로 지었다는 휴거 포대(Battery Issac Huger) 옥상이다. 전면의 바다 쪽을 바라보니 푸른 하늘에 깃발이 가득하다. 놀랍게도 서로 다른 여섯 개의 깃발이 게양대에서 펄럭이고 있다. 중앙에 제일 높이 걸려 있는 것은 미합중국기다. 그 앞쪽으로 종려나무 문양이 새겨진 사우스캐롤라이나 기가 펄럭인다. 그 좌우에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이 사용하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데, 왼쪽 것은 1861년에 사용된 1차 남부연합기, 오른쪽 것은 1863년부터 사용된 2차 남부연합기다. 그 바깥 왼편에는 별이 33개인 1861년 당시의 북부 연방기가, 그리고 맨 오른편에는 별이 35개 (남북전쟁 기간 중에 캔자스와 서버지니아가 연방에 편입됐다)인 1865년의 연방기가 각각 펄럭이고 있다.

    남부에 와 있음을 다시 실감한다. 남부인들, 특히 남부의 백인들은 미국인이기에 앞서 남부인임을 강조해왔고, 자긍심의 표현으로 최근까지 남북전쟁시 남부연합군이 사용하던 남십자성기를 미합중국기와 함께 게양해왔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고양된 애국심으로 집집마다 기를 내걸면서 남부인 다수가 이 남십자성기도 함께 게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억압과 인종차별주의의 표상으로서 흑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남부의 남부연합 기장(旗章)에 대한 이 같은 집착의 밑바닥에는 ‘상실한 명분(Lost Cause)’의 심리학이 자리잡고 있다. 남북전쟁은 단순히 노예제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합중국의 근본 강령의 하나로 제시한 주권(州權)의 수호를 위한 성전이었고, 따라서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그것은 건국의 이념을 재확인한 의로운 패배였으며 이런 점에서 자신들이 독립혁명의 분명한 계승자라는 것이 그 심리의 주 내용이다.

    1942년에 제정된 ‘국기 예규(Flag Code)’의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미합중국 국기인 성조기는 ‘모두에게 자유와 정의를 보장해주고 신의 가호하에 있는 분리될 수 없는 한 나라’(US Code, 쪮172)의 표상이라고 적고 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8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데도 예규 제정자들은 여전히 ‘분리될 수 없는(indivisible)’ 이란 군더더기 형용사를 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전쟁의 상처는 그만큼 깊은 것이었다.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남부연합군 전몰장병 추모비.

    1960년대, 남부는 물론 미국 전역에 흑인 민권운동이 일면서 이 남십자성기가 새로운 상징적 의미를 띠며 다시 등장했다. 1954년 연방 대법원은 유명한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 Board of Education)’ 사건에서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 Ferguson)’ 판결을 통해 합헌적으로 인정한 ‘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 이라는 시책을 60여 년 만에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인종분리를 고수해온 남부에 인종 통합의 물꼬를 튼 이 판결로 흑인 민권운동의 열기는 한층 고조됐으나, 남부의 백인사회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이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했다. KKK단을 비롯한 많은 백인 우월주의 단체는 잊혀진 남십자성기의 문양을 단체의 상징 일부로 넣어 사용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조지아 주 의회는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이 나온 2년 뒤인 1956년에 강요된 인종 통합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남십자성 문양을 넣은 새로운 조지아 주 기(旗)의 제정을 의결했다.

    남십자성 문양을 주기에 넣어 사용한 것이 조지아 주가 처음은 아니다. 미시시피 주는 이미 짐 크로 법(Jim Crow)의 제정으로 흑인에 대한 억압 정책이 절정에 이른 1894년에 주기에 미시시피 주의 상징화인 매그놀리아 문양을 남십자성 문양으로 대체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그것은 너무나 당연시돼 별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며 조지아 주의 뒤를 이어 앨라배마, 플로리다 등 남부의 여러 주가 남십자성 문양을 주기에 새로 삽입하거나 아니면 남십자성기를 주정부 청사에 미연방기와 나란히 게양하면서 남십자성기는 남부의 전통적인 백인우월주의를 재확인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1963년 백인우월주의의 대변인임을 자임한 덕에 선출된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 주지사가 흑인 여학생 2명의 입학 신청을 불허한 계기로 불거진 앨라배마 대학의 인종통합 반대 시위에 앞장선 사건이 전국적인 뉴스로 부상하면서 남십자성기의 상징성은 새삼 주목을 받았다. 그는 연방군이 앨라배마 대학에 투입되자 물러섰으나, 갈등을 무마하기 위해 당시의 법무장관이던 로버트 케네디가 몽고메리를 방문했을 때 남십자성기를 미합중국기보다 더 높게 주청사에 게양한 것이다.

    1965년 흑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투표권법 제정과 더불어 상당수의 흑인이 정치 일선에 진출하고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누그러지면서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를 비롯한 흑인민권단체들은 남부의 공공기관에서 남십자성기의 게양을 금지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남십자성기는 이념의 수호를 위해 결연히 일어선 남부의 자랑스러운 전통의 상징임을 내세워 이에 맞섰으나, 흑인들은 그것이 노예제와 백인우월주의의 표상임을 지적하면서 금지운동을 계속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들의 노력은 조지아 주에서는 주기에서 남십자성 문양을 없애고 새로운 주기를 제정하는 결정을 끌어내고, 앨라배마 주에서는 남십자성기를 더는 게양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얻어냈다.

    그러나 남부분리주의의 온상이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경우 남십자성기의 게양 금지안은 백인 의원들의 완강한 반대로 번번이 부결됐다. 급기야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사우스캐롤라이나로 관광 여행을 가지 말자는 경제 보이콧 운동을 전개했다. 그와 함께 2000년 1월17일, 마틴 루터 킹 휴일(사우스캐롤라이나는 50개 주 가운데 마틴 루터 킹 기념일을 휴일로 지정하지 않은 유일한 주다)에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 주동으로 민권운동가 약 5만명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 콜롬비아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 해 7월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마침내 남십자성기를 미합중국기와 함께 나란히 내걸지 않고 남부연합군 전몰장병 추모비 앞에만 걸기로 결정했다. ‘심남부(Deep South)’를 대표하는 미시시피 주의 경우, 2001년 남십자성 문양을 주기에서 제거하고 새로운 주기를 제정하자는 안건을 주민 투표에 부쳤으나 부결되고 말았다. 당시 남부연합기를 둘러싼 흑백의 갈등을 다룬 한 신문 사설이 쓰고 있듯이, 남북전쟁은 15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도 아직 ‘미완의 전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남부연합 기장 논쟁이 상기시키듯이 남북전쟁은 복잡한 이해관계가 이념과 명분으로 포장돼 각축을 벌인 싸움이었다. 이념과 명분의 갈등은 공적 표현을 위한 상징을 구하게 마련이다. 남북전쟁의 진전과 더불어 섬터 요새도 그런 상징의 하나가 됐다. 남부연합군은 남부 독립의 상징으로서 섬터 요새를 사수하고자 했고, 북군은 그 상징성 때문에 끈질기게 재점령을 시도했다. 그 결과 남북전쟁 기간 이 작은 인공 섬에 무려 4만6000여 발의 포탄이 퍼부어졌다.

    전쟁이 끝났을 때, 요새지는 폐허로 변했다. 새까만 휴거 포대 건물과 주위 방벽의 부조화가 오늘날 그 파괴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환기시켜줄 뿐이다. 미국인들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미국은 전쟁을 통해서 태어났고, 전쟁이 남긴 전설 속에서 성숙해졌다고 쓴 어느 남북전쟁사가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하지만 전쟁이 분열을 치유하고 자기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길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회항한 유람선은 우리 일행을 다시 리버티 스퀘어에 내려놓는다. 우리는 구시가지 중심의 해안가에 자리잡은 워터프런트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합의 중요성을 일깨우듯 가장자리에서 중앙으로 모아 떨어지는 아름다운 분수가 공원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해안가의 산책로를 따라 계속 걸으니 화이트 포인트 가든으로 부르는 또 다른 아담한 공원이 나온다. 산책로 건너편에는 구남부 시절의 희랍식 주랑을 세운 화려한 맨션들이 이어지고 있다. 인적 없는 넓은 피아짜가 사라진 옛 영광을 추념하는 듯이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멀리 수평선이 기울어가는 석양빛을 받아 아스라하다. 화이트 포인트 가든의 입구에 거대한 남부연합군 전몰장병 추모비가 바다를 향해 우뚝 서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나는 남부의 시인 앨런 테이트(Allen Tate)가 쓴 ‘남부군 전몰자 송가(Ode to the Confederate Dead)’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가을의 넓은 묘역은 황량하다그러나 여기에서 기억들은 자란다죽지 않고 풀들을 줄줄이 무성하게 자라게 하는소진되지 않는 육신을 자양 삼아오고 간 무수한 가을들을 생각해 보라!...바람에, 오직 바람에 현혹된잎들이 날리며 떨어진다.

    어느 가을날 테이트는 남부의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몰장병 묘역을 찾았으리라. 석양 무렵, 패배의 오욕 속에 파묻힌 전몰장병들의 묘역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묘지를 뒤덮고 있는 무성한 풀만이 그 황량함을 다소나마 덜어주고 있다. 그러나 시인에게 그 풀은 사자(死者)들을 편안하게 잠들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살아남은 자들의 끝없는 기억의 자양으로 그처럼 무성한 것으로 비쳤다.

    테이트의 이 송가는 남부의 대의를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 죽은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의 시가 결코 아니다. 시인은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전쟁을 낭만화하거나, 남북전쟁 전의 구남부를 향수에 젖어 추상하느라 현재의 삶을 낭비하는 남부인의 퇴영적인 심리를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평의 전도사요 남부 농본주의자 그룹의 일원이기도 했던 테이트는 다른 에세이에서도 남부인들은 내적 성찰을 별로 즐기지 않는, 에머슨이 말하는 ‘생각하는 인간(man thinking)’이라기보다는 ‘이야기하는 인간(man talking)’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申文秀

    1952년 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저서: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남부를 대표하는 또 다른 작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주인공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이야기하는 인간들이다. 그의 걸출한 소설의 하나인 ‘압살롬, 압살롬!’은 과거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망령으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의 끝없는 넋두리의 기록이다. 그러기에 테이트는 이 시의 다른 대목에서 삶의 정열을 창조적인 일에 쏟지 못하고 과거의 상흔에 사로잡혀 그것을 불러내고,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데 골몰하는 남부인들을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눈먼 게에 비유하기도 한다.

    역사는 영광의 찬가이든 오욕의 기록이든 현재 삶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기에 더 나은 현재를 만들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삶을 무(無)로 만드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부연합기를 둘러싼 흑백간의 오랜 소모적 갈등은 그런 자기파괴적 집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북전쟁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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