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말뚝이다. 단단하고 강한 몸매를 지녔다. 부리부리한 눈, 굳게 다문 입술, 웃으면 순진함이 묻어나는 이빨. 그는 자신의 별명이 미친 놈이었다며 “하나만 아는 사람”이라고 못박는다. 계집의 치마폭을 들추며 낄낄대거나 산더미 같은 장작을 패거나 화나면 바로 주먹을 휘두르는 폭력적인 광기까지.
-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독특한 섹스심벌’이던 이 사내가 한때는 검은 장갑을 끼고 악당을 쳐부수며 오토바이를 타는 액션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뽕’에서 이미숙이 분(扮)한 안협은 뽕, 즉 자본을 모으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춘을 서슴지 않는 여자지만 유독 머슴인 삼돌만은 상스럽다는 이유로 배척한다. 삼돌에 대한 거부가 그녀가 자존심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다는 시각으로 살펴보면, 영화 속에서 이대근이 맡은 삼돌은 하층민, 자연, 민초 같은 계급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싱싱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고 때론 다듬어지지 않은 욕망을 그대로 분출하는 이대근의 캐릭터는, 남성성이란 원초적 욕망이 계급에 부여하는 억압을 모두 거부했을 때, 즉 전근대라는 시대로 퇴행했을 때 나타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전근대의 억압에 갇힌 여성들이 성적(性的)인 유혹과 거부 사이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쳐야 한다면, 영화 속 그는 상층부 권력이나 주변 사람들의 멸시에 찬 시선에 의해 또 다른 비극적 종말과 대면하곤 한다. ‘뽕’의 삼돌은 결국 안협을 차지하지 못하고 ‘심봤다’의 산삼지기는 아이를 잃는다. ‘변강쇠’는 결국 옹녀와 산속에 숨어 들어 사람들을 등진다. 그러한 면에서 변강쇠와 옹녀는 성적인 강자가 아니라 성적인 소수자, 일종의 타자(他者)라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대근의 순박한 심장이 유현목 같은 대가의 손에 넘어갔을 때, 전근대에 속한 그의 기호학적 이미지는 정치적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장마’에서 그가 분한 동만의 삼촌은 남과 북 어떤 이데올로기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손에 떨어진 ‘완장’이란 일시적인 권력을 탐하다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도 희생당한다. 결국 죽어서 구렁이가 되는 동만의 삼촌은 시대의 폭압에 희생당한 피해자, 분단의 희생양으로 비극성을 더한다.
‘변강쇠 콤플렉스’
분명 이대근은 김승호의 뒤를 이어 ‘큰 연기’를 하는 배우다. ‘뽕’에서 보여준, 자신의 모든 것을 여인에게 다 주고 사랑을 구하는 눈물어린 연기에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심이 서려있다. ‘감자’ ‘심봤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등 그가 출연한 작품의 화려한 수상결과가 알려주듯 1980년대 토속물에서 이대근은 울고, 웃고, 분노하고, 절규하는 표현적인 연기를 해왔다.
그러나 이대근의 이름은 ‘클레오파트라를 기절시키는 강력남’으로 인터넷을 떠돈다. 아직도 대한민국의 관객에게 그는 ‘변강쇠 콤플렉스’의 대상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대근은 배우인 동시에 일종의 사회적 존재인지도 모른다. 흡사 1950년대 미국에서 마릴린 먼로가 그랬던 것처럼.
아마도 수십 년이 지나 일군의 호기심 많은 학자들이 1980년대 한국문화를 탐구한다면, 횡행하는 사회적 억압이 성(性)으로 치환된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타난 이 남자, 이대근을 다른 시선으로 볼지도 모를 일이다.
이 인터뷰는 섹스심벌로서의 ‘대물’ 이대근이 아니라, 이대근이라는 연기자에 내재되어 있는 다양성을 만나기 위해서 기획된 것이다. 이야기 도중 엉뚱한 방향으로 튀곤 하는 이 배우는 역시 자신 속의 에너지를 끌어올려 연기하는 그런 종류의 배우로 보였다. 아직도 “남자는 여자를 ‘책임 보호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큰소리치는, 그러나 막상 딸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는 이 남자는 이제는 세상에서 거의 사라져가는 마초, 수컷의 본성을 숨기지 못한다.
필자가 약속 장소인 그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사진촬영 중이던 그는, 자신의 이미지와 흡사한 커다란 진검을 들고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여러 자세를 잡던 그가 필자에게 불쑥 칼을 내밀며 칼날을 만져보라고 했다. 그 단단하고 날카로운 칼끝의 느낌, 바로 배우 이대근에 대한 촉감적 인상이다. 결코 생계를 포기하지도, 우울한 감상에 젖어 깊이에의 강박을 스스로나 남에게 전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 쑥스러워서인지 무시하는 것인지, 인터뷰를 진행하는 필자보다는 옆에 있는 남자 배석자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당신이라면 나를 이해하겠지’라는 표정으로 쉴새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이 남자는, 이름처럼 큰 뿌리 같은 생명력과 힘으로 여전히 세상을 움켜쥐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사진 찍는 걸 싫어해요.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정말 힘들어요. 나름대로 자기 것이 있는 사람, 하나의 이미지에 평생을 걸고 가는 사람은 카메라를 어려워하죠. 내가 영화만 300편을 했어요. 내 또래에서는 신성일씨 다음이에요. 영화계에 10년 동안 인기를 유지하는 배우는 많지 않아요. 그 이름만 보고도 관객이 극장을 찾는 배우, 그게 스타예요. 그들은 스타라는 책임의식이 있기 때문에 카메라를 어려워하는 마련이죠.”
-서라벌예대를 나와서 KBS 7기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는 어떻게 데뷔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37년쯤 됐나요. 그러니까 1968년에 찍은 김기영 감독의 ‘화녀’가 데뷔작이죠. 그 다음 작품이 이상구 감독의 ‘사나이 현주소’. 그 때까지는 비중 없는 조연이었고, 세 번째 작인 최무룡 감독의 ‘제3지대’에서 정식으로 출연했어요. 그때는 탤런트는 배우가 될 수 없었어요. 황해 선생님이 추천을 해줬으니까 됐죠. 주인공으로 발탁된 첫 영화는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김두한’ 1편이었고요. 김두한 시리즈 다섯 편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거였죠.
그 때 배우 출연료가 보통 1만8000원이었죠. 신성일씨 혼자서 45만원을 받았는데 내가 40만원을 달라고 했어요. ‘연기 공부 많이 하고 왔으니까 주슈…’ 그랬죠. 신상옥 감독이 ‘저놈 봐라’는 표정으로 40만원을 주셨어요. 그렇게 김두환 시리즈 세 편 찍어서 집도 샀어요.”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우리 어릴 때는 오락거리가 악극하고 영화밖에 없었잖아요. 내가 변사에 홀딱 빠졌어요. 배우들은 또 좀 멋있어요, 황해, 장동익, 이예춘, 최봉…. ‘아리랑’ ‘상하이의 밤’ 같은 영화를 보러 가면 막간에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도 부르고 그랬어요. 그게 그렇게 좋아보여서 나도 배우가 됐으면 싶었죠.
원래는 운동을 하려했어요. 어릴 때는 기계체조를 했고 좀 자라서는 당수(唐手)를 했죠. 나중에는 아마추어 복싱하고 레슬링도 했고. 부모님이나 사범들도 운동 열심히 하라고 권했는데, 악극을 보며 배우가 하고 싶어지는 바람에 결국 영화과에 들어간 거죠. 그래도 운동을 잘했던 게 나중에 김두한 시리즈나 시라소니 시리즈 같은 액션물을 하는 데 도움이 됐죠.”
영화, 연극, TV의 차이
-기록에는 연극무대에 선 적도 있다고 돼있습니다.
“원래 학교를 졸업하면 연극부터 출발했잖아요. 연극도 꽤 잘했어요. 극단 ‘민예’의 ‘고려인 떡쇠’, ‘성좌’의 ‘노틀담의 꼽추’ 같은 작품은 모두 내가 초연이었어요. 닷새동안 공연을 하는데 국립극장이 터져나갈 정도로 인기가 좋았어요. 흥행발이 있어서 연극도 많이 했죠. 오죽하면 ‘신협’이나 ‘광장’ 등 다른 극단에서 나를 끌어가려고 애를 썼겠어요.
장민호 선생님이 국립극장에서 단원들한테 ‘이대근만한 발성 없다’고 하셨죠. 국립극장이 명동에 있을 땐데 무대에 서기가 그렇게 어려웠거든. 그때 나랑 최불암씨랑 몇몇이 계획을 하나 세웠는데, 어떻게든 우리 손으로 극장 하나 지어보겠다는 것이었죠. 나중에 그 꿈을 이룰 만한 때가 되니까 뿔뿔이 헤어져버렸더라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무척 아쉬워요.”
-김기영 감독의 ‘화녀’에 출연할 당시의 영화계 분위기나 환경이 궁금한데요.
“우리 학창시절에는 영화를 제대로 공부할 수가 없었어요. ‘제7의 예술’ 운운하며 강의는 더러 많이 들었지만, 학교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16mm 한두 편뿐이었죠. 선생님도 박종화 교수 한 분뿐이었고. 영화를 실질적으로 접할 기회가 드물었어요. 연극과는 많이 달랐죠.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연극을 주로 하고 TV에 간혹 출연했는데, TV는 영화는 또 전혀 달랐어요. 어쨌든 영화에는 상영시간 1시간45분이라는 약속이 있단 말이에요. 텔레비전에서 하던 연기를 영화 찍을 때 그대로 하니까, 감독이 ‘야, 관객이 너를 그렇게 많이 어떻게 쳐다보냐. 그 연기를 3분의 1로 줄여’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항상 그 작품에 빠져 있지 않으면 안 돼요. 늘 스스로가 영화 속 인물인 것처럼 최면을 걸어야 하고, 그 최면 속에서 살지 않으면 연기를 못해. 그러니까 세상도 가정도 가까운 친구도 잘 모르게 되죠.
영화와 연극의 차이는 이런 거예요. 가령 대본에 주먹으로 사람을 때리는 장면이 있으면, 나는 연극식으로 생각해서 직접 상대의 눈앞까지 다가가서 때려요. 나는 그게 맞다고 봤지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때리는 시늉만 해도 카메라 각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화면을 만들 수 있는 거에요. 감독이 ‘임마, 이렇게 때리면 시늉만 하면 되지 왜 자꾸 가까이 와!’ 하고 아무리 혼내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어요. 감독이 다시 하라고 하면 100번이라도 해야잖아요. 감독은 첫 번째 관객이니까.
‘화녀’에서 내 역할은 범인이었어요. 세월이 하도 많이 흘러 줄거리가 다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내가 주인공 집의 운전수였는데 나쁜 짓을 하는 역할이었어요. 그 무렵 내가 TV 연속극 ‘수사반장’에서 범인 역할을 많이 했거든요. 김기영 감독은 참 대단하신 분이었죠. 하루는 감독님이 나를 보고 영화에 왜 클로즈업이 있는 지 아냐고 묻더라고. 그리고 우물쭈물하는 내게 ‘영화관 맨 뒤에서 보는 사람도 생각해야 된다. 연기를 할 때도 적절한 과장이 있어야 되는 거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배운 게 많았어요.”
1981년작 ‘김두한과 서대문1번지’(좌). 1987년작 ‘연산군’(우).
“‘거지왕 김춘삼’을 찍을 때 보니까 박노식 선생이 젊을 적에 복싱을 하셔서 그런지 주먹 액션이 아주 좋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쭉 밀어 치니까 볼품이 없는데, 박노식 선생님은 사람 앞에서 끊어 치는 폼이 일품이었거든요. 가히 세계적인 주먹이죠. 내가 처음 영화계에 들어갈 무렵에는 박노식 선생만큼 액션을 제대로 하는 배우가 없었어요. 사정이 그러니까 그나마 권투라도 배운 적 있는 나를 자꾸 쓸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많이 출연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나름대로 고충이 있는 게, 상대방은 내 스타일을 못 따라오거든. 내가 주먹을 휘두르고 나면 상대배우가 나한테 주먹을 뻗을 때까지 한참 걸리는 거야. 액션물을 자주 하다 보니까 아예 ‘액션배우’라 불리게 됐는데, 그 때부터 지방에만 내려가면 동네 건달들이 진짜 잘 하느냐, 한번 붙자면서 찾아오곤 했죠. 그러면 그들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고 ‘내가 배우만 아니면 한번 해 보겠소’ 그렇게 답해주었어요.
액션배우라는 말만 듣다 보니 지겹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러면 예술배우는 누구냐’고 주위에 물어보니까, ‘예술배우는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에 출연해서 상을 타는 배우’라는 거야. 그 무렵에는 향토물이라고, 예전 한국문학작품을 영화화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뽕’ ‘감자’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심봤다’ 같은 영화로 바꾸게 됐죠.”
1979년작 ‘시라소니’
“박노식 선생이랑은 그 영화 딱 한 작품만 했죠. 그 영화를 어떻게 해서 찍게 되었냐 하면, 미국 LA에서 비행기를 탔는데 보니까 박 선생님이 있어요. 이민을 가셨다고 하시더라고. 그때는 내가 한참 날릴 때인데, 나를 보더니 이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전라도놈이다. 처음에 서울에 와서 얼마나 설움을 많이 당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고향 사람들이 나를 찾을 때는 최소한 곰탕 한 그릇에 여관비는 꼭 쥐어보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 그러면서 ‘대근아, 너 내 주먹에 한 번 맞아다오’ 하시더라고. ‘네가 내 영화에 조연으로 한번 출연해달라’는 뜻이었어요. 단번에 오케이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한국영화 액션물의 계보에서 박노식은 첫 손에 꼽히는 거목이다. 그는 ‘마도로스 박’ ‘의리의 사나이 돌쇠’로, 또한 ‘남대문 용팔이’ 시리즈의 용팔이로 평생을 살았다. 한국 액션영화의 시작이라 불리는 ‘사나이 시리즈’의 원조 김효천 감독이 1969년에 만든 ‘팔도 사나이’ 역시 박노식이 주인공이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학창시절 배웠다는 권투에서 나오는 남다른 액션은 선이 굵은 박노식의 매력을 결정지었다.
1986년작 ‘변강쇠’
반면 이대근의 김두한 캐릭터는 박노식이 갖고 있던 고독한 음지의 이미지보다는 사나이의 육체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기 방장한 액션이 특징이다. 지금이야 김두한의 이미지가 TV드라마 ‘야인시대’나 영화 ‘장군의 아들’의 매력남으로 격상되었지만, ‘협객 김두한’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대중에게 ‘오물투척사건’의 이미지가 깊이 각인되어 있는 터였다.
‘협객 김두한’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한편 때론 희화화된 인간 김두한의 소박한 양면적인 모습을 그렸다. 특히 김두한을 맡은 이대근이 수하의 부하 단 두 명만을 데리고 안개 낀 장충단공원에서 벌이는 3대30의 싸움은 장쾌하다 할 정도다. 이후 이대근은 박노식, 장동휘라는 선배 액션영웅과 일종의 세대교체를 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엽까지 액션영화의 명맥을 이어 나가게 되었다.
-그 무렵 액션장면을 촬영하는 방식은 어땠습니까.
“내가 액션영화를 할 때는 대역배우가 없었어요. 무술감독하고 감독, 배우 셋이 의논을 해서 미리 어떻게 어떻게 한다고 짜는 거죠. 무술감독이라고 해야 특별히 그것을 작업으로 가진 사람도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다치기 일쑤라 코뼈도 여러 번 부러졌죠. 적당히 동작만 취하면 되는데 그냥 막 얼굴로 주먹이 들어오고. 그때는 영화 장면이라고 해서 가짜가 아니었어요. 맥주병이고 유리창이고 다 진짜를 썼어요.
김효천 감독의 영화를 찍을 땐데, 나보고 문짝만한 유리창을 뚫고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액션영화하는 선배들한테 슬쩍 ‘이걸 어떻게 뚫어요?’ 하고 물어보니까 ‘임마, 그거 안 뚫어본 사람이 어디 있어?’ 하고 무안을 주는 거예요. 형님들이 뚫었으면 나도 못할 것 없지 싶어서 그냥 몸으로 부딪혔더니만 깨진 유리 조각이 엄청나게 커서 카메라맨이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지는 바람에 NG가 났어요. 그래서 피가 줄줄 나는 걸 대충 수습하고 다시 하려고 하니, 야, 그때는 정말 좀 그렇더라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선배들 중에 유리창을 몸으로 뚫어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거예요.
강대진 감독의 ‘무정의 40계단’을 찍을 때는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는 장면이 있었어요. 스피드를 잘못 잡았는지 유리가 깨지지 않고 동그랗게 구멍이 났어요. 동시에 ‘뿍’ 하는 소리가 나는데 주먹이 시큰해요. 보니까 살이 쫙 벌어지는 거예요. 결국 일곱 바늘을 꿰맸죠. 그러고 나서는 또 감독하고 앉아서 한참동안 고민을 했어요. 이걸 어떻게 해야 와장창 하고 제대로 깨지나. 이것저것 시도해보는데 가죽장갑 속에 돌멩이를 집어넣고 끊어 치니까 됩디다. 지금 생각하면 영화를 참 무지막지하게 찍은 거예요.
그때는 액션장면이 보통 10초에 13합이었어요. 한 번 때리면 한 번 맞는 걸 1합이라고 하니, 10초에 13번 주먹이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빨라요. 그걸 또 21콤마로 돌려서 더 빨라보이도록 만들어요. 그에 비하면 멜로드라마나 텔레비전물 액션은 그냥 장난하는 거예요. 액션영화만큼 힘든 게 없어요.”
빨리 찍기의 달인, 고영남
-이 무렵에는 고영남 감독과 김효천 감독의 영화에 주로 출연하셨죠. 고영남 감독은 지금도 충무로에서 여러 가지 ‘전설’이 회자되는 분인데요.
“‘김두한 시리즈’의 감독이 세 사람이었어요. 처음에 김효천 감독이 1, 2편을 만들고 다음에 고영남 감독이 3, 4편을, 이혁수 감독이 5편을 만들었어요. 당시에는 연간 한국영화 의무제작편수가 정해져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연말에 영화를 몰아 찍곤 했죠. 그 바쁘고 정신 없는 와중에 고영남 감독은 빨리 찍기의 달인이었어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면 카메라가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얘기하는 거 죽 찍고 상대방이 얘기하는 거 죽 찍어서 나중에 편집으로 이어 붙이는 식이었어요. 그게 다 편집에 강하니까 가능했던 거죠.
하여튼 당시 감독 중에서 영화를 가장 빨리 찍는 감독이었어요. 아주 훌륭한 솜씨였죠. 김효천 감독은 액션영화만 찍었죠. 이혁수 감독하고는 ‘시라소니’ ‘거지왕 김춘삼’ ‘제3부두 고슴도치’ 등등 스물다섯 작품을 했어요. 이 감독은 경상도 분이라 그런지 힘이 있었어요. 사실감도 있고.”
-힘이 있다는 말은 에너지가 넘쳤다는 뜻인가요.
“영화 속에 힘있는 남성상이 들어 있다는 뜻이에요. 진짜 남자를 보여줬죠. 남자라는 건 여자를 책임, 보호, 관리할 수 있어야 진짜 남자 아니겠어요. 이혁수 감독 영화엔 사나이의 그런 면이 아주 많이 나타나요. 때리는 것도 원투 스트레이트로 때리고 정정당당한 사나이, 비겁을 떨지 않는 그런 거죠. 나한테 굉장히 많은 걸 가르쳐 주셨어요. 제대로 했죠. 그래서 다른 감독하고 영화를 할 때는 재미가 없었어요.”
“에로물 아니라 토속물”
-이대근씨의 두 번째 이미지는 섹스심벌이죠. 협객 이미지가 무협물에서 온 것이라면 이 이미지는 토속 에로물에서 나온 것일 텐데요.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할말이 많아요. 요즘에는 대개 나를 그런 이미지로 떠올리는데, 변명은 아니지만 사실을 설명할 필요가 좀 있어요. 당시 한 십여 년 동안 액션물이 흥행이 잘 됐어요. 그 다음에는 사회 비판물, 고교물, 그리고 향토물이라고 해서 소위 문학작품을 영화로 만든 게 흥행이 잘 됐죠. ‘뽕’도 ‘감자’도 모두 그렇게 해서 나온 향토물이에요. 그런데 그걸 에로물인 것처럼 얘기하더라고.
나는 솔직히 그거 못마땅합니다. ‘감자’와 ‘뽕’은 훌륭한 단편문학 작품입니다. 그걸 어떻게 에로물로 몰아붙일 수 있습니까. 그런 영화에서 나는 벗은 일도 없어요. 내가 섹스 하는 장면도 안 나와요. (웃음) 최소한 영화를 보고 얘기해야 될 거 아니냐고요. 옷 다 입은 채로, 상대 여배우였던 이미숙씨 위에 올라갔다가 그냥 내려오는 장면이 전부예요.”
-잘 알겠습니다. 에로물이라는 표현은 정정하죠. ‘뽕’에서는 이미숙씨가 여주인공인 안협을 맡았고 이대근씨는 머슴 삼돌이로 나왔죠. 안협이 끝까지 몸을 주기를 거부하는.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심봤다’ 역시 토속물로 봐야겠군요.
“‘심봤다’는 정말 예술 작품이에요. 소설가 이은성씨가 각본을 썼어요. 오히려 감독은 중요하지 않아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심봤다’는 정반대의 욕망을 지닌 주인공이 나와요. ‘심봤다’는 자연주의 작품으로, 세상에서 제일 좋은 빌딩, 제일 좋은 냉장고가 있다 해도 나는 싫다, 나는 내 고향에서 처자식과 숯 굽고 농사 지으면서 살겠노라, 그런 얘기예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는 반대로 어떻게든 도시에 나가 살고 싶어하는 숯장이이고. 내가 그 정반대 색깔의 영화에 모두 출연해서 상을 탔어요. ‘심봤다’로 백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탔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탔죠.
모두 진지한 주제가 있는 작품이에요. 일제에 대한 무저항 정신을 연기로 표현한 거라고요. 그 때문에 내가 정진우 감독하고 싸우기도 했어요. ‘심봤다’는 부성(父性)이 핵심이에요. 산삼 캔 걸 팔아서 자식들, 가족들과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역할이잖아요. 그러다가 딸이 죽게 되니까 마지막에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원래 시나리오엔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가 딸을 살리려고 제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먹이는 설정이었죠.
그런데 감독이 손가락 자르는 라스트장면을 엄마 역의 유지인씨가 하는 걸로 바꾸자는 거예요. 내가 안 된다고 우겼어요. ‘유지인에게 주는 건 좋은데, 그렇게 되면 부성이라는 주제가 흔들리지 않느냐. 마지막에 모성을 강조하면 어쩌자는 말이냐’고 했지. 그래서 승강이를 하느라 두 시간 동안 촬영을 못했어요. 감독이 ‘야, 너 그 장면 없어도 이 영화로 틀림없이 대종상 타’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 안 타도 좋은데, 이 장면이 바뀌면 당신은 감독상 못 타. 주제를 바꿔버리면 어떻게 해’ 하면서 대본을 집어 던졌어요.
결국 나중에 내가 양보해서 그 장면을 유지인이 하기로 했어요. 대신 그 옆에서 아버지가 코피를 뚝뚝 흘리는 장면을 넣자고 제안했죠. 그래서 소품담당에게 가짜 피를 갖고 오라고 해서 콧구멍에 부었는데 이게 주르륵 흐르지 뚝뚝 떨어지는 그림이 안 나오는 거야. 그거 때문에 많이 속상했어요.” (웃음)
‘변강쇠’ 감독이 정보부 끌려간 까닭
-그 다음에 엄종선 감독의 ‘변강쇠’가 나왔습니다. ‘연산군’이나 ‘장마’ 같은 작가주의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아무래도 이대근씨의 결정적인 이미지, 관객이 환상을 갖게 된 것은 섹스심벌, ‘강한 남자’로서의 이미지가 아닐까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정말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대근이라는 이름은 본명인가요. 본인의 역할과 이미지에 딱 맞는 이름인데요.
“큰어머니가 지어주신 본명이에요. 내가 일제시대 때 태어났는데, 일본식 이름이 무다이꽁이었어요. 장작개비라는 뜻이지. 영화판에서는 연기를 제일 못하는 배우를 다이꽁이라고 하거든요. 그 또한 일제 잔재죠. 게다가 내 이름이 큰 대자 뿌리 근자 아니에요? 이름 자체가 워낙 무겁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데뷔하고 나서 이름을 이장현이라고 고쳐봤는데, 사람들이 헷갈리는 거예요. 이장현은 누구고 이대근은 누구냐는 거지. 그래서 그냥 이대근으로 지금까지 왔어요.
‘변강쇠’ 얘기를 하자면, 그 영화에 출연한 사연을 먼저 얘기해야 할 거예요. 그때는 내가 김승호씨 다음이었어. 내 마음에 안 들면 감독이고 촬영기사고 다 상대하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엄종선 감독은 국내 감독 중 베니스영화제에서 제일 먼저 상을 탄 강대진 감독의 조감독이었어요. 이 친구가 충청도 출신인데 고생을 많이 했어요. 늘 머리는 산발을 하고 매일 영화사에서 자면서 감독 한번 데뷔해보겠다고 매달려 있었죠. 영화를 향한 열정이 대단해 내가 아꼈거든요.
그런데 어느날 이 친구가 한번 봐달라면서 시나리오를 갖고 왔어요. 보니까 변강쇠야. 읽어보지도 않고 ‘임마, 배운 게 이것밖에 없냐. 내가 너를 그렇게 안 봤는데 왜 이러는 거냐’고 혼냈거든요.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요. 살려달라는 거지. 그래서 속는 셈치고 원작 ‘변강쇠’를 읽었어요.
그런데 읽다 보니까 이게 해학작품이에요. 거기서 내가 놀랐지. 종선이한테 오히려 미안하다고, 우리나라에 이런 명작이 있는 줄 몰랐다고 사과까지 했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일주일 동안 책을 보면서 연구를 했어요.
변강쇠전의 테마가 뭔지 모르시죠? 변강쇠는 서자로 태어난 상놈의 자식이에요. 아랫도리를 그렇게 크게 만든 건 ‘병신’의 상징이죠. 옹녀는 아침에 눈떠 보니 남편이 죽어버린 여자거든. 변강쇠에는 유교에 대한 저항이나 인권의 의미가 담겨 있어요.
영화에서 보면 아이가 태어날 무렵에 변강쇠가 미역 같은 걸 싸 들고 가는데 그 앞에 사또가 딱 서있어요. 사또는 제도의 상징이지. 그 사또하고 싸움이 붙어서 밤새도록 씨름을 하고 아침에 보니까 그게 장승이거든. 그래서 그걸 뽑아 갖고는 도끼로 패서 옹녀와 아이가 누워있는 방에 장작으로 때버리거든. 제도가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거죠. 엄종선 감독이 이 장면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가 사흘 만에 나왔어요. 삭제하라는 거지. 결국 대부분 들어내고 조금만 붙였어요.”
-그렇지만 이후에 출연한 ‘됴화’ ‘호걸춘풍’ ‘가루지기’ ‘고금소총’은 어떻게 된 겁니까. 엄종선 감독과는 ‘클라이막스 원’도 작업했고요.
“‘사노’는 양반과 상놈의 문제, 빈부의 문제라는 주제의식이 괜찮다 싶어서 엄 감독과 다시 손잡고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변강쇠 2’를 하자는 거예요. 그건 절대로 안 된다고, 돈을 두 배로 줘도 안 한다고 돌려보냈어요. 그렇지만 감독하고 원수가 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클라이막스 원’을 들고 왔을 때 모질게 거절하지 못했어요. 엄 감독과는 그걸로 끝났죠. 조감독 시절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았고…. 어쨌든 나는 지금도 에로영화가 아니라 해학작품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대근씨를 바라보는 대중적 이미지 속에서 어떤 사회심리학적인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건 한마디로 1980년대 관객의 성적인 판타지를 대변하는 남자입니다. 당시 팽배했던 과잉 남성성, 강한 남자에 대한 콤플렉스, 그런 것을 해결해주는 남자배우라는 말이죠. 특히 남자 관객들에게 열등감과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요즘도 인터넷을 뒤져보면 이대근씨에 관한 유머가 많아요, ‘클레오파트라를 100번 만족시켜준 남자’ 따위의. 아직까지 이대근씨의 페르소나는 강하고 정력적인 남자로 모아지는 거죠.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나요 아니면 그걸 즐겼나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장면에서는 원색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여배우들한테도 그렇게 말했어요. 성은 기본적으로 동물적인 관계예요. 그걸 형식적으로 하면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지루해지죠. 여배우가 그렇게 많아도 처녀역할을 제대로 표현하는 배우를 못 봤어요. 처녀는 사랑하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못 봅니다. ‘아프리카 여왕’이라는 영화를 보면 캐서린 헵번이 나이 마흔다섯에 처녀역할을 제대로 표현합니다.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은 거예요.
나는 나대로 총각 역할을 제대로 표현하려고 굉장히 애를 썼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저 당황하고 긴장해서 땀만 흘리는 그런 모습 말이에요. ‘연산군’ 때도 그랬고 ‘감자’ 때도 그랬어요. 나는 러브신에서 상대 여배우의 얼굴이 아니라 아래쪽을 봤어요. 보통 그런 장면에서는 바스트밖에 안 잡지만, 내 시선은 말하자면 ‘어디 있는가’ 하고 찾고 있는 그런 느낌을 주는 거죠.
관객 입장에서는 그게 굉장히 강하게 보였던가 봐요. 지금도 후배들에게 말합니다. ‘너만이 가지고 있는 섹스를 표현해야 될 거 아니냐’라고요. 내 연기는 어떤지 몰라도, 진실이 있으니까 관객이 끌렸던 것 같아요. 열심히 했어요, 작품만 생각하면서. 원래 내 성격이 다른 건 생각 안 하거든. 인터뷰를 할 때는 딴생각 없이 오로지 인터뷰 하나만 생각하는 거예요.”
“베드신 제대로 하는 배우가 없다”
-좀 짓궂은 질문입니다만, 독자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건 이걸 겁니다. 이대근씨가 실제로도 정력이 좋으냐는 거죠.
“(웃음) 정력요? 좋죠. 내 딴에는 좋다고 생각하는데 나보다 좋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 하나 알려 드릴게요. 세상에서 정력이 제일 강한 남자 여자가 누구냐 하면 마음이 착한 남자와 여잡니다. 어린애같이 착한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하고싶은 대로 다 한다고.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죠. 나는 지금도 처한테는 어린아이처럼 굽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정력제나 먹는 사람들 보면 정말 웃기잖아요.”
-지금도 나이에 비하면 정말 젊어보이는 데요. 비결이 따로 있습니까.
“먹는 건 가리지 않아요. 보통 하루에 두 끼를 먹지만 한밤중에도 먹고 싶으면 마음껏 먹어요. 대신 하루에 한두시간 동안 내 양껏, 죽을 만큼 운동을 하죠. 또 한 가지 비결은 잠이에요. 10시간이든 8시간이든 내 몸이 더 안 자도 되겠다 싶을 만큼 충분히 자요. 그래야 상대방을 만나 얘기를 해도 편하게 집중할 수 있죠.”
-이대근씨가 가진 마지막 이미지는 코믹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코믹 연기를 많이 했죠. ‘말띠 며느리’에서부터 ‘해적 디스코왕 되다’ 같은 최근 작품까지.
“아마 내가 TV에서 코미디 연기를 한 두 번째 배우일 거예요. 지금은 돌아가신 김순철 형님이 TBC에서 처음 시작했고, 그 다음에 MBC가 개국할 때 ‘이상한 아이’라는 드라마에서 순철이형하고 나하고 같이 시도했죠. 스튜디오에 프로레슬링 무대를 지어놓고 놀기도 했죠. 초등학교 애들이 나를 친구로 아는 설정이었어요. 모자 쓰고 걸음걸이도 이상하게 걷고. 아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어마어마했어요. 김두한 시리즈에서도 코믹한 요소가 가미됐죠. 홍콩배우 성룡(成龍)이 유명해지기 전에 우리 촬영장에 와서 구경도 했어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팔도 사투리 중에서 코미디 하기에 가장 좋은 건 전라도 사투립니다. 그것도 전라북도는 안 되고 남도가 딱 맞습니다. 말이 거칠게 들리지만 사실 그게 욕이 아니거든요.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 같은 연기라도 감칠맛이 납니다. 연기 자체가 코믹해지죠. 그래서 나도 코미디를 할 때는 전라도 사투리를 썼죠. 내가 전라도 사람인 줄 아는 사람도 많았어요. 사실은 서울 토박이인데 6·25 때 전라도로 피난가서 한 3년 살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전라도에 가면 고향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요즘 젊은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끔 그런 코믹한 캐릭터로 출연해달라고 요청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가 대표적인 경우겠죠. 오로지 그런 이미지만 찾는 것 같아 서운하다거나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보다는 젊은 사람들과 작업하는 과정에 기분 나쁜 게 많죠. 우리 때는 필름을 3만2000자 쓸 수 있으면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감독들은 17만자, 20만자를 써요. 필름은 다 수입품이라고요. 차라리 지나가는 거지를 도와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죠. 또 간혹 감독이 연기자 앞에 있는 게 아니라 멀찌감치 떨어져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어요. 몇 번 불만을 얘기하기도 했어요. ‘눈 앞에 감독이 없는데 나보고 연기를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혼냈죠.
감독, 조감독, 카메라맨은 배우의 첫번째 관객이에요. 서로 기를 주고받으며 영화를 찍어야죠. 남들은 뭐하러 역정을 내냐고도 하지만, 내 성격이 본래 그래요. 젊었을 때부터 그런 사람이야. 평생 연기를 했으니까 비슷한 틀 속에서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타협을 안 합니다. 그게 내 개성이에요.
‘스타’는 시대가 쥐어준 이름이고 한 시대가 불러준 이름이에요. 자신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형편이 있든 없든 할 수 없어요. 그 시절에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 역할을 하게 된 거죠.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내 마음대로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그래서 모노드라마를 하고 싶어요. 그건 하나의 실험극이니까.”
-개성 있는 악역도 했고 예술영화에 출연한 적도 많습니다. 유현목 감독의 ‘장마’나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 사랑’에서 아내 패는 남편 역할이 기억납니다.
“‘장마’는 내가 이제까지 한 작품 중에서 제일 어려웠어요.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영화는 가족을 통해서 남북문제를 아주 심도 있게 다룬 작품이에요. 뭐가 가장 어려웠냐 하면, 내가 맡은 역할이 공산주의가 뭔지 자본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6·25가 나니까 완장차고 다니다 사람을 찔러 죽이는 역이었거든요. 수박 겉핥기로 연기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은 아저씨를 죽이고 나서 토하는 걸로 표현했죠. 다음 장면에서는 배가 고파서 자기 집에 내려와서는 어머니를 만나 울어요. 차마 말로 할 수 없으니까 부여안고 흔들죠. 한참을 흔들다 ‘어머니, 내가 사람을 많이 죽였어요’ 하고 말하는데, 그걸 보고 유현목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울었어요. 감독과 배우 사이에는 그런 맛이 있어야 해요. 그 영화 마지막에 보면 내가 죽어서 뱀이 되는데, 그 뱀도 내가 연기하고 싶더라니까.” (웃음)
“배우는 노동자이자 스포츠맨”
-명작으로 남은 작품을 찍을 때와 범작으로 판명된 영화를 찍을 때 느낌의 차이가 있나요.
“작품을 처음 만날 때 작가가 고민한 것만큼 연기자도 어렵습니다. 한참 하다 보면 시나리오만 봐도 보여요. 아, 여기서는 이 작가가 안 풀렸구나, 여기서 쉬웠구나, 여기서는 며칠 쉬다가 다시 썼구나, 그런 게 느껴져요. 그런 고민이 많이 배어있는 작품은 아무래도 오래 남죠.”
-제일 마음에 남는 영화나 감독이 있다면요.
“영화는 정말 원 없이 찍었어요. 액션물에서는 이혁수 감독이 제일이에요. 영화로는 신성일씨하고 같이 찍은 ‘제3부두 고슴도치’를 아주 자신 있게 했어요. 그게 실화거든요. ‘시라소니1’도 기억에 남고. 향토물로는 ‘심봤다’와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가 남아요, 상을 타서가 아니라 좋은 기억으로. 사극으로는 ‘연산군’, 해학작품에서는 ‘변강쇠’를 열심히 했죠.
배우는 시대를 타고 넘어갈 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오래 버티고 돈도 벌고 작품도 많이 하죠. 자기 스타일이 하나밖에 없다면 좋은 배우는 아니죠. 사극이면 사극, 액션이면 액션, 코믹이면 코믹. 배우는 그 모든 걸 다 할 줄 알아야 된다고 봐요.”
-영화에서 받은 느낌이 이야기를 죽 듣다 보니 더 강해졌는데요, 이대근씨는 자연과 가깝다는 느낌이 듭니다. 힘 자체, 욕망 자체의 이미지 말입니다. 이름처럼 말뚝의 이미지라고 할까요. 물론 개인이 아니라 배우로서죠.
“좋게 봐주셨네요. 후배들에게 늘 그래요. 남자는 분명히 남자다운 맛이 있어야 된다, 중성이 돼서는 안 된다고요. 사람들이 이대근이 평생 출연한 영화 중에 단 한 작품만 기억해준다면 나는 그걸로 행복해요. 배우는 노동자이자 스포츠맨이에요. 그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뒹굴면서 가는 거죠.”
-개인적인 질문을 몇 개 하겠습니다. 부인 최용옥씨가 대단한 집안의 따님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셨어요.
“농림부 장관을 지내신 김도현 박사의 손녀예요.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학 박사고 야당 총재도 하셨죠. 아내는 내 친구의 셋째여동생이었어요. 어렸을 때 한동네에서 자랐고요.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아마 재벌가에 시집갔을 거예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까지 2등을 몰랐대요. 우리 큰애, 둘째애가 엄마를 닮았어요, 공부에 대해서는. 그냥 책을 통째로 외워버리죠.
그러니 결혼할 때는 처가에서 반대가 심했죠. 장인·장모는 안 계셔서 언니하고 고모들이 반대를 많이 했는데, 집사람이 끝내 고집을 피웠어요. 그게 벌써 38년 전 얘기네요. 우리 집안도 원래는 괜찮은 편이었거든요. 서울에 네 채밖에 없는 99칸 부잣집이었어요. 내가 자랄 때는 형편없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처가 보기에는 내가 꽤 괜찮았던 모양이에요. 연기하고 운동하느라고 공부를 잘 못했는 데도 인간성이 하얗더래나. 가진 것은 없지만 착해보이고. 착한 남자랑 살고 싶었대요.”
-딸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둘 다 약학박사예요. 지금 미국에 있는데, 한 명은 식약청에서 일하고 다른 한명은 선생님이에요. 지독하게 공부를 많이 하데요. 하루에 4시간 반 이상 자면 박사 못된데요. 처가 워낙 특이하게 가르쳤어요. 텔레비전도 하루에 한 시간 이상 못 보게 하고 학교랑 교회 외에는 한 시간 이상 나가지도 못하게 했어요. 큰애 말로는 정말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지긋지긋했대요.
내가 보기에도 딱하더라고요. 그래서 큰소리 한번 못 쳤어요. 어디 아빠가 딸한테 소릴 지르겠어요, 지금도 꼼짝 못하는데. 그래도 학위 받는 날 엄마 손 붙잡고 울데요, 고맙다고. 서울에 오면 내가 다 큰 애들 데리고 명동에 나가서 떡볶이랑 김밥 사 먹이고 돌아다녀요. 그게 그렇게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