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인 여배우 어머니, 박선호 찾아와 항의
- 군 병원 간호장교들도 궁정동 안가 불려가
- 김재규, 박근혜 구국여성봉사단 비리 보고했다가 박정희 핀잔 들어
- 김재규, 사관생도 박지만 비행도 뒷조사해 보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安東壹·65) 변호사의 말이다. “사반세기가 지났지만 10·26은 역사가 아닌 현실”이라고 규정한 그가 최근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김재규가 안 변호사를 통해 밝힌 박정희의 여성편력이 실려 있어 관심을 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좋지 않은 과거를 끄집어내려고 쓴 책이 아닙니다. 최근 일고 있는 박정희와 김재규의 재평가 움직임과 관련해 정확한 자료를 제공하는 게 첫째 목적이고, 둘째 목적은 우리 현대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든 대사건의 공판조서를 토대로 기록을 남겨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치적인 의도는 없습니다.”
‘궁정동을 거쳐간 박정희의 여자가 200명이 넘는다’. 김재규가 안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는 말이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한사코 밝히기를 꺼렸던 박정희의 여자 문제에 대해 변호인 접견을 통해 털어놓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자신뿐만 아니라 박선호(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사형집행)가 법정에서 박정희의 여성편력에 대해 진술하려는 것도 막았어요. 1979년 12월11일 제4차 공판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박선호가 ‘그날(10월 26일) 오후 4시경 (여자를 데리러) 프라자호텔에 간 일이 있느냐’고 묻자 ‘예’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등에 대고 ‘야, 얘기하지 마’ 하고 짧게 명령조로 말했죠. ‘호텔에 간 것은 그날 연회장에 보낼 여자를 구하러 간 것이냐’는 변호인 신문이 이어졌지만, 박선호는 김재규의 뜻에 따라 ‘상상에 맡기겠다’고만 대답했어요.”
김재규의 말 한마디가 박선호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이다. 박선호는 자신의 변호를 맡은 강신옥 변호사와의 접견에서 명색이 중앙정보부장 의전과장인 자신이 이른바 채홍사(採紅使) 노릇을 한 것에 대해 고충을 토로했다고 한다.
“저도 김재규를 접견할 때 박정희의 여자 문제에 대해 여러 번 물었는데 김재규가 ‘남자의 벨트(허리띠) 아래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이라고 합디다. 김재규뿐 아니라 검찰관과 재판부도 이 얘기가 나오는 것을 꺼렸죠. 특히 박정희 여자 문제의 ‘뇌관’을 쥔 박선호에 대한 입막음이 심했어요.”
연예계 여성이 가장 많아
-김재규에게서 언제 처음 박정희의 여성편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김재규는 항소심 재판이 끝날 때까지 ‘박정희를 두 번 죽일 수 없다’면서 그 얘길 꺼내지 않았죠. 그런데 사형선고를 받은 뒤 1980년 2월19일 접견 때 항소이유보충서에도 차마 담지 않은 얘기를 뒤늦게 털어놨어요. 박정희의 치부를 공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역사의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 어렵게 입을 뗀 거죠. 그날 그럽디다.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를 찾아오는 빈도가 높았고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고. 상대하는 여자로는 영화배우와 탤런트, 연극배우, 모델 등 연예계 종사자가 가장 많았다고 해요. 그 숫자가 200명을 넘었대요.”
궁정동 안가 술자리는 대통령 혼자 즐기는 소행사와 10·26 그날 밤처럼 경호실장, 중정부장 등 3, 4명의 최측근이 함께하는 대행사로 나눠졌다고 한다. 대행사에서 박정희가 맘에 드는 여성을 ‘뽑아’ 따로 즐기는 일을 소행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행사는 월 2회, 소행사는 월 8회 정도 치러졌다고 합디다. 박선호는 말이 의전과장이지 궁정동 안가를 관리하고 소·대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에게 쓸 만한 여자를 찾아내 바치는 게 주임무였습니다. 김재규는 ‘박선호가 자식 키우는 아버지로서 할 일이 못 된다며 몇 번이나 내게 사표를 냈는데 만류했다’고 하더라고요.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누가 맡느냐’면서.”
1심 재판에서 김재규의 제지로 입을 다물었던 박선호는 1980년 1월23일 열린 항소심 2차 공판에서 “대통령의 여자 문제에 대해 진술할 경우 일류 여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고 고인을 욕되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혼란이 야기될 것이므로 진술을 피한다”고 진술했다. 그의 진술을 통해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박정희의 은밀한 사생활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박선호는 항소심 최후 진술에서도 박정희의 여자 문제를 잠깐 언급했어요. 전날 공판에서 ‘그 집(궁정동)이 사람 죽이는 집이냐’는 검찰관의 신문에 열 받은 박선호가 박정희의 여자 이야기를 하려고 작심했는지 언성을 높였어요. ‘(궁정동을 다녀간 여배우들의) 명단을 밝히면 시끄러워지고 궁정동 안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밝히면 세상이 깜짝 놀랄 것’이라고 진술하자 재판부가 다급히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말하라’고 제지했죠.
김재규는 ‘박선호가 법정에서 한 증언이 죄다 사실’이라고 합디다. 당시 웬만한 연예인은 다 대통령에게 불려갔다는 거예요.”
화제를 돌렸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 안 변호사는 “약간의 허구가 가미되긴 했지만 대체로 사실에 근접한 영화”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대통령 살해사건에 가담하거나 휘말려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배우 윤여정과 한석규(박선호 역)의 대화로 시작된다. 다음은 유명 탤런트의 어머니 역으로 출연한 윤여정의 대사다.
“새벽에 언뜻 깨보니 (대통령이) 자기 몸을 쓰다듬고 계시더래요. ‘곱다. 정말 곱다’ 이러시면서. 한없이 계속. 온몸을. 글쎄 쟤(딸)가 배시시 웃으니까 그때서야 멋쩍게 옷을 주섬주섬 챙기시는데. 아, 지(딸)가 그냥 자빠져 있을 수 있겠어요. 어르신(대통령) 옷 먼저 입으시라고 쟤는 벗은 채로 수발을 들었대요. 벗은 채로. 그러다가 결국 어르신이 쟤를 한번 다시 품어주시고. 그 어른 참 대단하세요. 예~에. 그 연세에! 쟤를 꼭 품으신 채로 그러셨대요. ‘꼭 다시 놀러오라’고. 제가 청와대고 어디고 쫓아다닌 건 죄송합니다. (한석규가 봉투를 내밀자) 이런 거 바라고 그런 게 아닙니다. 밑에 분들 힘든 거 알아요. 아는데 어쩌겠어요. 그분 심중을 헤아려 드려야지. 그분이 원하시는데. 그분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거…. 우리 애 이렇게 따돌리는 거 큰 실수하시는 거예요.”
‘김재규 가슴속에 뭔가 있구나’
세간에 널리 알려진, 그러나 ‘헛소문’ 취급을 당했던 영화 속 ‘연예인 모녀’ 이야기에 대해 김재규는 안 변호사에게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고백했다.
“딸이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된 사실을 알게 된 모 여배우의 어머니가 박선호를 찾아와 ‘아랫사람들이 대통령과 내 딸이 만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면서 항의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우리 딸이 대통령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더랍니다. 아마도 그 여배우 어머니는 든든한 ‘빽’ 하나 생겼다고 여긴 모양이에요. 대통령의 품에 안겼으니 톱스타 되고 출세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항간에 ‘간호장교’ 이야기도 떠돌았는데요.
“군 병원의 간호장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해요. 사단과 군 병원 등에서 ‘괜찮다’ 싶은 여군이 있으면 여배우와 마찬가지로 궁정동 안가로 불러들여 대통령 수발을 들게 했다는 거죠. 그게 어디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세상에 어떤 여자가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런 자리에 불려나가는 걸 달갑게 여기겠어요. 더군다나 궁정동 안가에 도착해서야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협박성 주문도 뒤따랐고요.”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김재규와 실제 김재규의 모습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영화에서는 김재규가 유약하기도 하고 조금 냉소적인 인물로 그려졌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어요. 나도 상당히 고압적이고 강인한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만나보니 그렇게 온화하고 겸손할 수가 없더라고요. 속으로 ‘저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살해했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부장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1회 군법무관 시험을 거쳐 국방부 법무관을 마친 뒤 1978년 개업한 안동일 변호사는 원래 이기주(중정 경비원)와 유성옥(박선호의 운전기사)의 국선(國選) 변호인이었다.
그런데 1심 4차 공판(1979.12.11)에서 김재규가 대규모 사선(私選) 변호인단의 변호를 거부하고 국선 변호만 받겠다고 요청하고 재판부가 안동일 변호사를 국선변호인으로 지정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김재규의 변호를 맡게 됐다.
“이기주, 유성옥의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됐을 때만 해도 김재규가 박정희와 함께한 만찬석상에서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과 싸우다가 욱 하는 마음에 총질을 했겠거니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재판이 시작된 직후 김재규의 진술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반체제인사나 할 수 있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김재규가 변명하는 거겠지’ 하고 생각했죠. 한편으로는 김재규의 진술이 당시 반체제 인사로 구성된 사선 변호인단의 조언에 따라 각색된 것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검찰 신문 때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최고 권력을 탐해 자신을 총애한 대통령을 배은망덕하게 살해한 패륜아로 여기기엔 너무나 논리가 정연하더라고요. ‘김재규 가슴속에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박근혜, 최태민의 자리바꿈
그는 김재규가 우발범이거나 패륜아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체제 회복에 나선 확신범 내지 양심범일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김재규를 몇 번 접견하면서 우발범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지잖아요. 꾸며서 말하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어요.”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재규는 큰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 이런 일들이 ‘대통령이나 박근혜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조사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여러 가지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해요. 박정희는 영부인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다고 해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改惡)’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
김재규는 구국여성봉사단의 비리 외에도 박근혜에게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박근혜가 지방 행사에 참석하면 할머니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절을 했어요. 김재규는 ‘아무리 대통령 딸이라도 그렇지, 국모는 아니지 않습니까. 국민이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제게 되묻기도 했어요. 촌로들이 그렇게 절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그걸 말려야 하는데 오히려 부추겼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불미스러운 사생활과 자식들에 대한 맹목적 보호가 도를 넘었다’고 했어요. 그런 것들이 국정운영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김재규는 ‘대통령의 여자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면 어쩌나’ 하고 늘 고민했다고 합디다.”
당시 김재규는 육사 생도이던 박지만의 행동거지에도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고 한다.
“이번에 책을 쓰면서 딱 한 가지 사실을 왜곡한 게 있어요. 김재규가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를 제 책에 옮기면서 한 단어를 고쳤거든요. 김재규는 지만군 문제를 지적하면서 ‘육사 2학년 때부터 서울 시내에 외출해 여의도 등지에서 사관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OO’을 하고 다녔다’고 썼어요. 김재규는 ‘OO’이라고 했는데, 이걸 제 책에선 ‘행동’이라고 옮겨 적었어요. 이제 지만씨도 자식이 있고 가족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OO이라는 단어는 뺐어요. 제가 그렇게 고쳐도 하늘에 있는 김재규가 ‘잘했다’고 할 것 같아, 고민고민하다 마지막에 고친 겁니다.”
“지만군을 유학 보내십시오”
-김재규가 지만군의 행실에 대해서도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나요.
“그렇다고 합디다. 김재규는 ‘육사의 명예나 지만군의 장래를 위해 다른 학교에 전학시키거나 외국 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박정희에게 간곡히 건의했대요. 그런데 박정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통령에게 자식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물론이죠. 김재규는 ‘각하 아들과 딸의 행동이 이렇습니다. 국사에 도움이 안 되니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보고했다고 했어요. 대통령에게 욕을 먹더라도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 직언을 했다는 겁니다. 지만 군의 불량한 행동에 대해서는 구두로 보고했고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된 일은 서면으로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후에 자식들 문제를 몇 번 언급했는데 박정희가 막무가내로 감싸고돌자 ‘더 얘기해봤자 아무 소용 없겠구나’ 하고 한탄했다고 해요.”
-김재규에게서 둘째딸 근령(최근 ‘서영’에서 ‘근령’으로 개명)씨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셨습니까.
“아뇨. 둘째딸 이야기는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어요.”
-책에 박정희의 사생활과 자녀 이야기를 언급했잖아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썩 달갑지 않게 여길 것 같은데요.
“박근혜 대표가 트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좋아할 겁니다.”
-왜죠?
“숨기지 않고 깨놨잖아요. 박 대표는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해요. 박정희의 장점은 취하되 단점은 과감히 버려야지요. 그래야 나라가 발전하죠. 오히려 (박 대표가) 저에게 아주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해요.”
10·26사건 현장검증. 김재규의 저격에 박정희 대통령(앞줄 오른쪽)이 왼쪽으로 쓰러졌다. 김재규 왼쪽은 김계원 비서실장.
“사생활이라 해도 개인이 아닌 대통령의 사생활이잖아요. YS가 다 없애버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시절 궁정동에는 대통령 안가가 있었고, 그날 밤 두 명의 여자를 불러들여 벌인 술자리에서 대통령이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잖아요. 그게 우리 역사예요. (박근혜 대표는) 오히려 자신이 까발리지 못하는 것을 제가 대신 해준 셈이니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지금 ‘유신’이 좋았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10·26 직전까지만 해도 다들 유신을 치켜세웠어요. 박정희가 죽기 전날까지 유신체제가 좋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박정희가 죽고 나자 제 일성으로 한 얘기가 ‘민주절차 밟고 개헌하겠다. 긴급조치 해제하겠다’였어요. 이게 뭘 뜻하는 겁니까. 유신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끽소리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지요. 제가 책을 펴낸 취지는 박 대통령의 나쁜 점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에요. 사실 그대로, 잘못 알려진 부분을 고치자는 뜻일 뿐이에요.”
“진시황의 아방궁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박정희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고 법정에서 여러 차례 진술한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의 특별한 만찬은 절대군주나 봉건영주 시대가 아닌 20세기말 자유민주주의 국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개탄했다고 한다.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진시황의 아방궁도 아니고. 현대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당시 김재규도 요정 마담을 첩으로 뒀다는 소문이 떠돌지 않았습니까.
“김재규에게 그 얘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사실이라 해도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에 비밀 안가를 만들어놓고 질펀하게 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김재규가 법정에서와는 달리 변호인 접견을 통해 살고 싶은 욕구를 내비친 적은 없나요.
“아뇨. 없었어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어요. ‘유신 기간에 우리 사회에 쌓인 많은 쓰레기를 청소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도와주는 일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게 유감스러울 뿐이다’라고 고백했어요. 당시 김재규는 사형당하지 않았더라도 얼마 못 살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안 변호사는 “책을 펴내 26년 동안 미뤄둔 숙제를 해치운 기분이 든다”며 홀가분해했다. 법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을 쐈다”고 말한 김재규는 변호인 접견에서 살해 동기에 대해 “독재와 야당 탄압, 부산과 마산의 시민항쟁,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악화 등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그에 따른 판단력 마비가 또 다른 이유였다”고 거듭 주장했다고 한다.
10·26 이후 해마다 5월24일이 되면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공원묘지 맨 윗자락에 자리잡은 김재규 묘역을 찾는다는 안 변호사. 그는 올해도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김재규의 묘역을 찾았다.
“제가 변론한 사람이 사형을 당했는데, 그것도 우발범이 아니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그랬다는데….”
김재규의 무덤 앞에서 그는 “두 사람이 나누는 무언의 대화는 밝힐 수 없다. 10·26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며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