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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맞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인맥과 파워

‘國富 축적의 주역’ 자부하는 ‘국가대표 秀才집단’

전성기 맞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인맥과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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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한국을 먹여살렸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들의 한결같은 자부심이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황무지에서 적수공권으로 고도 산업화의 터를 닦아 국가경제를 견인했다는 뿌듯함이 배어난다. 그들은 미래 디지털 시대에도 성장의 활로를 열어갈 선봉을 자임한다. 업계와 학계를 중심으로 폭넓게 포진한 서울대 전자공학과 인맥 탐구.
전성기 맞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인맥과 파워
1975년 봄 서울 성북구 공릉동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캠퍼스. 며칠 전 중간고사를 치른 전자공학과 2학년 학생들은 느닷없는 ‘전원 재시험’ 통보에 의아해했다. 문제의 과목은 ‘공학수학’. 당시 공대 학생들에겐 필수과목이었는데, 수학이라면 난다 긴다 하는 공대생들도 치를 떨 만큼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다(요즘 서울대에 들어오는 학생 중에선 30% 정도만이 이 과목 수학능력을 갖췄다는 게 교수들의 귀띔이다).

그런데 전자공학과 학생들에게 ‘공학수학’을 가르치던 수학과 교수는 첫 중간고사를 치른 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 50명 중 무려 30여 명이 만점을 받은 것이다. 공부깨나 하는 학생들이라 꽤 까다롭게 문제를 냈는 데도 그렇듯 ‘참담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변별력이 없는 시험은 무용지물. 고민 끝에 교수는 재시험을 보기로 결정했다. 점수가 너무 좋아서 재시험을 치르게 된 초유의 ‘사태’였다.

그럴 만도 했다. 1960년대 말부터 국내 전자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전자공학과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이 대목에서 한국의 공과대학 ‘인기 변천사’를 잠깐 살펴보자.

광업이 주요 산업이던 해방 무렵까지는 광산과의 인기가 높았다. 그러다 1950년 전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화학공학과가 ‘물 만난 고기’였다. 치약, 비누 같은 생필품이 귀하던 시절인데, 이런 제품을 생산하는 데는 대형 설비가 필요치 않아 산업화 초기에 각광을 받을 만했다. 그래서 화공과 졸업생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에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뒤따라 화공과의 주가 상승을 부추겼다.

하지만 1965년 IC(집적회로) 시대가 열리면서 1960년대 말부터는 전자공학과가 정상에 등극했다. 그후 발전소 건설 붐이 일었을 때는 원자핵공학과가, 선박 수주 열기가 뜨거웠을 때는 조선공학과가 반짝 특수를 누리긴 했어도 전자공학과는 최근까지 30여년간 최고 인기학과로 장기 집권했다.



전자공학과 중에서도 서울대 전자공학과는 인문계, 자연계를 막론하고 수재 중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전국 최고의 인기학과였다. 지금의 수능시험 격인 대입 예비고사에서 못해도 전국 순위 200위 안에는 들어야 합격을 기대할 수 있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자회사에 취직해 생산라인으로 파견을 나가면 여공들이 요즘 영화배우 장동건, 권상우를 대하듯 몰려와서 “손이나 한번 잡아보자”며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아래 위를 훑어보곤 했다.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서울대에 다닌다고 다 같은 서울대생이 아니다’는 특유의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 여느 서울대 학생이 ‘평민’이라면 공대 학생은 ‘진골’, 전자공학과 학생은 ‘성골’로 쳤다. 요즘은 어느 대학에서나 의예과가 톱을 달리고 있으나,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서울대 자연계열 19개 학과 중 전자공학과가 단연 수위였고 의예과 커트라인은 7∼8위, 치의예과는 공대 최하위 학과보다 커트라인이 낮았다.

“당시 서울대는 계열별로 신입생을 선발, 1학년을 마친 뒤 성적순으로 학과를 배정했는데, 정원이 50명인 전자공학과에 들어가려면 공대·자연대·사범대 이과 신입생 1120명 가운데 상위 5% 이내에 들어야 했다. 그러니 전자공학과에 맨 꼴찌로 붙은 학생의 학점도 4.3점 만점에 3.8점이 넘을 정도였다.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2학년 1학기까지는 대부분 4.0대 학점을 유지하지만, 우등생들끼리 경쟁하다 보니 2학기에는 난생 처음 2.0대의 충격적인 학점을 받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학생들이 하도 어이없어 하니까 교수님이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해라. 여기에서 꼴찌해도 다른 데 가면 1등이다’며 격려해주던 기억이 난다.”

전자공학과 74학번인 서울대 이범희 교수(전기공학부)의 회고다. 내로라하는 공부벌레들 사이의 경쟁이라 한 순간만 방심해도 성적이 뚝뚝 떨어지기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 엎치락뒤치락 예측불허의 ‘공부전쟁’을 거듭했다. 시험 전날이면 통금(通禁) 직전까지 함께 술을 퍼마시는 등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눈치작전도 치열했다. 선의의 경쟁은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다. 이 교수의 입학 동기생 중 절반에 가까운 20여명이 현직 대학교수이며, 나머지 동기생들도 대기업 임원이나 중소기업 대표 등 굵직굵직한 포스트에서 활약하고 있다.

동문 장관 3인 동시 재임

서울대 공과대학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미군정 법령에 근거해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대 이공학부 이학계를 모체로 출범했다. 당시 공과대 9개 학과 중의 하나로 전기공학과를 뒀는데, 전기공학과에는 강전(발전설비·산업용 전기기기) 전공과 약전(전자·통신기기) 전공이 있었다. 1947년에는 약전 전공을 전기통신학과로, 강전 전공은 전기공학과로 분리했으며, 전기통신학과는 1948년 통신공학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59년에는 다시 전자공학과로 개칭됐다. 그러다 1995년에 이르러 전자공학과, 전기공학과, 제어계측공학과가 전기공학부로 통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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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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