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문에 나가보았다. 로터리에는 군가를 부르며 트럭을 몰고 인공기를 휘둘러대는 인민군이 신바람 난 무당처럼 소리를 내질러대면서 시민들에게 동참하라고 악을 쓰고 있다. 어린 인민군의 얼굴에서는 평화로움마저 느껴진다.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차에 올라탄 한성중학교 학생 30여 명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면서 동조했다. 담벼락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영용한 인민해방군 만세!’ 라는 벽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아직 풀이 마르지도 않았다. 누구의 소행일까. 인민군 병사들은 대부분 10대 소년들이고 온몸에 풀잎, 참나무를 꺾어 위장한 채 시가지를 누빈다. 인민군 7개 사단과 탱크부대가 서울을 빼앗았다고 한다.
유엔 안보리가 북의 수중에 들어간 한국을 위해 무력사용을 여러 나라에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유엔이 우리나라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미국 등 16개국 친구의 나라가 한국을 도우러 온다고 한다. 감사한다. 큰길가에 국군의 시체가 덩그러니 누워 있으나 누가 나서서 치울 생각도 않는다.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살벌하다. 이게 전쟁인가 싶다.
전예용 부시장 집은 인민군 정보원인 듯한 남녀 5~6명이 서성대며 주위를 살피고 뭔가 정리하는 것 같다. 그 집을 빼앗아 본부로 쓰는 듯하다. 호신용 권총만 찬 채 아래 위를 살핀다. 눈매가 매섭다. 우리집 뒷산으로부터 서대문형무소를 나온 죄수 10여 명이 떼지어 오고 있다. 서대문형무소가 폭파되면서 탈출해 뒷산을 넘어 북아현동으로 온 것 같다. 그들은 거칠게 주민들은 나오라고 소리 질렀다. “다 같이 김일성 장군 만세와 인민공화국 만세를 힘차게 부릅시다”라며 눈을 부릅뜨고 위협한다. 주민이 우물우물하고 망설이자 소리를 지르며 “이 간나새끼들 왜 안 따라 부르느냐. 지상낙원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왜 가만히 보고만 있나. 뭐가 불만인가!” 하면서 죽일 것 같은 몸짓으로 만세를 강요하고 인공기를 흔들어댄다.
주민들은 마지못해 가늘게 만세를 외치고 인공기를 흔들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았다. 자치대원이란 자들이 집집마다 문을 박차고 “쌀 있느냐, 얼마나 있는지 조사하겠다. 숨기다가는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르니 정직하게 신고하길 바란다”라고 위협한다. 조사해 가더니 저녁에 와서 그 쌀을 다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개밥을 먹다
▼ 6월 30일 금요일, 의용군 지원 강요
학교로 나오라고 해서 학교에 나갔더니 완장 찬 상급생 10여 명이 강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200명 정도가 긴급히 모였다. 선배인 듯도 한 건장한 학생이 나서서 큰소리친다. 모두 인민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해 이승만 파쇼 집단을 섬멸해버리자는 것이다. “와와” 하고 동조하는 무리도 있다. 나도 할 수 없이 지원서에 기입했다. 내일 약속한 장소로 꼭 오라는 당부를 받고 집에 왔다. 부모님에게 말하니 깜짝 놀란다. 왜 그런 서류에 이름을 적어 넣었느냐고 야단을 친다.
집으로 오는 도중에도 벽보에는 ‘역적괴수 이승만 체포 처형, 남조선군 전멸’이라는 섬뜩한 내용이 가득하다. 종로거리에 보니 전차에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 영웅이신 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화신백화점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나란히 내걸렸다. 오른쪽에는 ‘조선인민의 경애하는 수령이시며 승리와 고무하시는 조선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문구가, 왼쪽에는 ‘소련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조선 인민의 친근한 벗이며 해방의 구원이신 스탈린 대원수 만세!’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 7월 1일 토요일, 의용군 수속 중 줄행랑치다
나는 순진하게도 의용군에 입대하겠다며 약속한 장소로 갔다. 종로 수송초등학교에는 10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줄을 서다가 꾀가 생겼다. 대기하고 있던 친구 권태목이도 나를 보자마자 귀에 대고 도망치자며 뒤로 빠졌다. 팔에 완장을 찬 키 작은 감시원에게 먹을 것을 사가지고 곧 돌아오겠다고 했더니 순순히 허락해 준다. 우리는 그길로 줄행랑을 쳐 북아현동 집으로 왔고, 의용군 징발에서 자유로워졌다. 어떻게 왔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감시가 소홀한 덕을 본 것이다. 어떻게든 청소년들을 전선으로 데리고 가서 총알받이로 써먹겠다는 행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