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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100년 맞는 중앙고등학교

민족 자긍 드높인 과거 100년 첨단·전통 어우러질 미래 100년

개교 100년 맞는 중앙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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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촌(仁村)의 중앙학교 재건

개교 100년 맞는 중앙고등학교

초가집과 일본식 집들이 뒤섞여 있는 계동 끝에 우뚝 솟은 신식 교사. 1917년 12월 준공했으나 1934년 12월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됐다.

학교는 설립됐지만 교실 부족으로 많은 학생을 수용하기 어려웠고, 교직원 봉급조차 제때에 지급하지 못하는 형편이 계속됐다. 그러나 어려운 사정에도 학교를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강했다. 중앙학회는 1913년 11월 총회를 열어 중앙학교를 인계할 대상을 물색하기로 결정했다.

1915년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구원자로 떠올랐다. 당시 인촌은 6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24세의 젊은이였다. 인촌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유학할 때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일본이 짧은 기간 내에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교육에 있으며, 그런 만큼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 독립을 이루어내려면 교육사업에 힘써야 한다는 자각(自覺)이 있었다.

애당초 인촌이 설립하려고 했던 학교의 교명(校名)은 ‘백산(白山)학교’였다. 그러나 학교를 직접 세우려던 인촌의 꿈은 일제 총독부의 불허로 좌절될 수밖에 없었고, 대신 1915년 4월 중앙학교를 인수하게 된다. 인촌은 이를 위해 양부(養父)인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 공과 생부(生父)인 지산(芝山) 김경중(金暻中) 공을 설득해 허락을 얻어냈다.

중앙학교는 비로소 반석 위에 놓이게 되었다. 1917년 3월 교장에 취임한 인촌은 그해 6월에 현 위치인 종로구 계동 1번지에 학교부지 4311평을 매입했다. 11월에는 건평 120여 평의 2층 건물을 낙성해 12월에 학교를 이전했다.



# 중앙학교와 3·1운동

초창기 중앙학교의 교장 사택은 새로 지은 교사 앞 운동장의 동남편 구석에 있었다. 조그만 기와집으로 오늘날에는 화강암 석조 대강당이 있는 터였다. 지금은 다른 곳에 옮겨서 옛날의 교장 사택을 복원했고, 원래 자리에는 ‘3·1운동 책원지(策源址)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1918년 12월 인촌과 일본 유학시절부터 평생지기이자 중앙학교 교장인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그리고 중앙학교 교사였던 기당(幾堂) 현상윤(玄相允), 세 사람은 거의 매일 교장 사택에 모였다. 이 해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 원칙인 14개 조항의 하나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제창했다. 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 원칙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의 식민지에 국한된 것이었으나 일제 압박에 신음하던 조선민족에게도 일대 서광이었다.

이해 워싱턴과 상하이, 도쿄 등지에서 독립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인촌과 고하, 기당 세 사람은 교장 사택에서 국내에서 벌일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했다. 세 사람은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천도교와 기독교계의 합작(合作)을 주선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듬해인 1919년 3월1일, 3·1독립운동이 폭발했다. 중앙학교의 조그만 교장 사택이 거대한 민족운동의 산실이 된 것이다.

물론 인촌과 고하, 기당 세 사람이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린 것은 아니다. 이들은 사전계획에 따라 2선에서 운동을 지원하고 1선에서 희생되는 인사들의 뒷바라지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특히 고하와 기당은 중앙학교가 폐교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교주(校主)인 인촌이 전면에 노출되는 것을 적극 만류했다. 1910년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해 조선의 우국인사 및 독립운동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됐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설립한 대성(大成)학교도 폐교됐다. 고하와 기당이 3·1운동의 배후인물로 지목돼 옥고를 치르면서도 끝내 인촌을 보호한 것은 이처럼 민족교육기관인 중앙학교가 문을 닫는 비극을 막기 위함이었다.

중앙학교 학생들은 3·1운동에 적극 참가했다.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물론 3월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시작된 서울의 제2차 시위에도 전교생이 참가했다. 그 후 서울과 지방에서 몇 달 동안 계속된 시위에서 검거된 중앙학교 학생들은 확인된 수만도 30여 명에 달했다. 결국 3월 중에 열려야 할 이해 졸업식도 치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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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홍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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