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화점에 전시된 명품 도자기.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이른바 ‘명품시장’ 규모는 5조원 대에 달한다. 지방의 중소도시에도 ‘명품매장 아웃렛’이 생겨나 성업 중이고, 중저가 명품을 다루는 백화점이 따로 생길 정도가 됐다. 프랑스 사람들이 바캉스를 떠난 뒤 동양인들의 긴 행렬이 파리 시내를 가득 메운 지는 꽤 오래됐다. 루이뷔통이니 구찌와 같은 세계적 명품 매장 앞이나 샹젤리제 거리의 화장품 백화점 앞에 북적이는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의 행렬 말이다. 이런 현상들은 ‘명품’이라는 단어를 오늘날의 상징어로 꼽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런데 막상 ‘명품이란 무엇인가’를 따지고 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에서 명품의 정의를 찾아보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는 수준 높은 품질을 꼽고, 또 어떤 사람은 ‘명품은 곧 브랜드다’라며 그 상표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이는 ‘비싼 게 명품’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어쩌면 명품이란 말 자체가 어떤 특정한 의미가 아닌, 그야말로 오늘날 소비자의 세속적 욕망을 두루 합산한 복합적 개념인지도 모른다.
즉 요즘 우리 귀에 익은 명품이란 ‘진품, 명품’과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명칭에서 연상되듯, 장인이 오랜 시간 솜씨와 공력을 들여 만든 수제품(품격)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 욕망의 대명사, 곧 사치품을 의미할 따름이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치품이라는 명칭에서 연상되는 천박함 또는 윤리적, 도덕적 사시(斜視)를 회피하면서도 고급품에 대한 선망을 드러내려는 대용언어로서 ‘명품’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셈이다.
공자가 본 ‘명품의 조건’
그렇다면 우리가 쓰는 명품이라는 말은 그 본래 뜻에 어긋난 것이다. 실제는 사치품에 불과한 것을 ‘명품’으로 잘못 호명하는 틈에 사기와 거짓이 끼어드는 것이리라. ‘짝퉁’이라는 말이 명품이라는 말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까닭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몇 년 전 가짜 명품 시계사건으로 떠들썩했던 일이라든지, 짝퉁 명품 가방들을 모아 불태우는 장면이 툭하면 TV 뉴스에 나오는 것은 오늘날 명품이란 말이 품고 있는 거짓과 허망함을 상징한다. 사치품을 명품이라고 잘못 이름 붙이고 또 이를 추종하다보면 가짜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면 참된 명품이란 어떤 것일까. 아니, 이 땅 전래의 명품이란 무엇일까. 혹 ‘논어’에서 공자가 생각하는 명품의 조건들을 추출해볼 수는 없을까. 2500년 전 춘추시대에 어찌 오늘날과 똑같은 의미로서의 명품=사치품이 존재했으랴마는, 인간 욕망의 보편성에 기대어 따지자면 명품에 대한 공자의 인식도 헤아려볼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맹자’는 지금으로부터 근 2300년 전의 것이지만, 이 책에서 최고의 음식으로 꼽힌 곰발바닥(熊掌) 요리는 지금도 중국의 진귀한 음식으로 대접받는다. 또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駟)’는 오늘날의 최고급 자동차에 비유할 만하다. 즉 맛난 것 먹고 싶고, 편하고 빠른 차 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명품에 대한 욕망도 있을 법하다. ‘논어’를 읽으면서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말이 나오는 다음 문장을 볼 적마다 나는 ‘명품의 조건’을 떠올리곤 한다.
공자 말씀하시다. “문(文·디자인)보다 질(質·품질)이 나으면 촌스럽게 되고, ‘문’이 ‘질’에 비해 튀면 부박하다. 디자인과 바탕 품질이 서로 조화롭게 빛날 적에야 명품이라 할 수 있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논어, 6:18)
나는 ‘문질빈빈’에서 문(文)을 요즘 식으로 ‘디자인’이라고, 질(質)은 ‘품질’(quality)로 해석하고자 한다. 문질빈빈이란 구절을 디자인과 품질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적에야(‘빈빈’은 ‘빛나다’는 뜻이다) 명품의 세계가 열린다는 뜻으로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