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날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후송된 피해자(당시 75세)는 결국 숨졌다. 남편과 단둘이 살면서 폐지를 주워 근근이 생활을 꾸렸던 할머니의 시신 부검 결과는 참혹했다. 광대뼈가 부러지고 위턱이 산산조각 났으며 귀와 입에도 멍이 들어 있었다. 사인은 두부손상이었다. 사건 발생 후 한 달여가 지난 뒤인 지난 2월, 서울남부지법은 범인에 대해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분노나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 늘면서 사회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술 마시고 들어왔다고 잔소리하는 아내를 홧김에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 내 쓰레기통에 버린 60대 남자가 최근 경찰에 체포됐는가 하면, 인터넷에서는 택시기사가 길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갖은 욕설을 퍼부은 ‘택시막말녀’가 화제를 모았다. 경찰청 내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적으로 검거된 폭력범(폭행·상해·협박·공갈·약취와 유인·체포와 감금·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포함)은 39만6156명. 이 중 ‘우발적’으로 범행한 사람이 45.8%에 달했다. 양천경찰서 폭력계 이상훈 경위는 “조사하다 보면 홧김에 살인이나 폭행을 저지른 범죄자가 ‘그냥 위협만 좀 하려 했는데’라며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며 “화를 조금만 참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범죄가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폭력 범죄와 방화 범죄는 ‘표출적 범죄’로 분류된다. 표출적 범죄는 말 그대로 범죄를 통해 분노와 같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 우발적 살인도 여기 포함된다.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KIC) 박사는 “이런 범죄는 상대를 때리거나 해친다고 해서 자신에게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단지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지 않으면 못 참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우발적 살인’ 혐의자는 2000년 306명에서 2005년 319명, 2010년 465명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우발적 방화’도 2000년 347명, 2005년 427명, 2010년 583명으로 증가해왔다.
분노 범죄의 악화
전문가들은 최근의 분노 범죄가 과거보다 흉포화, 잔인화로 치닫는 데 우려를 나타낸다. 강덕지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범죄심리과장은 “예전에는 범죄 동기가 단순했다. 배가 고파 물건을 훔치는 식이다. 요즘은 자신의 분노를 불특정 다수에게 표출하는 ‘묻지마 범죄’가 늘었다. 때와 장소,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흉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많아졌다. 한 대 치고 말 일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예전에는 열 번 자극을 받을 때 살인했다면 지금은 세 번 만에 살인할 정도로 사람들의 역치(외부 자극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정도) 수준이 현저히 낮아졌다”고 했다. 박형민 박사도 “우발적 범죄 후 처리과정이 과거와 달라지고 있는 게 좋지 않다”고 했다. “우발적 범죄의 특징은 보통 잔인하지 않다는 점이다. 의도 없이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면 두렵고 당황스러워 현장에서 자수하거나 그대로 도망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똑같은 상황에서 도망치거나 자수하는 대신 범행 은폐를 시도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시체를 토막 낸다거나 암매장하고, 방화를 한다.”
범행에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갑작스레 치미는 분노 때문에 정신과를 찾는 이도 늘고 있다. 자수성가로 기업을 일군 50대 남성 A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지나가는 여성을 강간하고 싶은 성적 충동에 사로잡혔다. 평소 알지도 못하던 욕설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주위에서 건실한 사업가로 평가받는 그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두렵다”며 정신과를 찾았다.
독실한 종교인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온 40대 중반의 주부 B 씨. 그도 어느 날 주방에서 일하다 갑자기 입에서 험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경험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칼을 들고 아무나 찔러 죽이고 싶은 충동에도 사로잡혔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화는 보통 안 좋은 일을 겪어야 생긴다고 생각하는데, 직접적인 자극이 없어도 화가 치미는 것이 가능하다. 경쟁사회에서 모범적으로 살면서 누적된 스트레스 때문에 화병에 걸릴 수도 있다. 그게 지나칠 때 A 씨나 B 씨 같은 상황이 된다. 일종의 스트레스성 뇌 피로증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데, 최근 병원을 찾는 환자의 전반적인 증상이 그렇다. 이럴 때 화를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면 심각한 범죄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분노조절장애
화를 제때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풀지 못하고 가슴에 쌓아두면 생기는 화병은 과거 시집살이를 오래한 중년 주부가 걸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5년 사이 중년 남성의 발병이 크게 늘고 있다. 별것 아닌 일에 갑자기 화가 폭발해 부하 직원에게 서류를 집어던지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대기업 임원, 아이와 아내에게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벌컥벌컥 내서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중소기업 사장 등도 적지 않다. 분노 조절 문제로 병원을 찾은 중년 남성 환자는 한결같이 “순간적으로 화가 폭발한다. 참으려 해도 조절이 안 된다. 돌아서면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한다. 화를 너무 자주 내서 주변 사람들과 관계도 안 좋아졌다”고 하소연한다. 이에 대해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문제는 조절인데, 그게 잘 안 돼 병원을 찾는 40~50대 남자가 몇 년 사이 굉장히 많아졌다. 실제로 환자 수가 늘어나기도 했겠지만, 정신과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것도 한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눈에 띄는 현상은 부인이 남편을 ‘전보다 화나 짜증을 자주 낸다’는 이유로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최근 정신과를 찾는 환자 중 절반 이상은 정신분열증이나 조울증 같은 심각한 정신질환이 아니라 화, 적개심 같은 문제를 호소한다”고 했다. 그는 “중년 남자는 분노 조절이 안 돼 오는 경우가 많은 반면 여성은 화를 너무 억압해 생긴 문제로 오는 경우가 많다. 만성적인 짜증과 신경질적인 반응 때문에 오는 이들도 있는데, 이들의 문제도 근본적으로는 분노나 적개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