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호

이승만 장기집권의 뼈대, 한미동맹과 북진통일론

  • 정일준 아주대교수·사회학 ijchung@ajou.ac.kr

    입력2006-11-07 18: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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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년, 6·25전쟁의 전후복구가 일단락됐다. 같은 해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승계위기에 봉착했다. 새로운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고집했다. 1950년대 후반, 야당의 도전과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자 자유당 강경파는 국가보안법 개정, 조봉암 처형, 경향신문 폐간 등의 강압조치를 통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 총체적인 선거부정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이승만 장기집권의 뼈대, 한미동맹과 북진통일론

    6·25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후보로 나선 아이젠하워 장군(왼쪽)이 1952년 12월2일 한국을 방문해 일선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휴전 이후 한국정치는 6·25전쟁의 연속에 불과했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전선의 총성은 멎었지만 전쟁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고, 전쟁 위협은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6·25전쟁은 이후 한국사회의 진행경로를 규정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권과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각기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추구했다. 이는 남북분단이 고정되는 것을 뜻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이승만은 남북관계의 현상변경, 즉 북진통일을 추구했다. 이는 또 한 번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미국의 큰 골칫거리였다. 1953년 휴전과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을 전후해 미국은 이승만의 북침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국은 휴전 이후 공산진영의 전쟁 재개뿐 아니라 한국의 전쟁 개시 가능성에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비롯하여 다각적인 비상대책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이중봉쇄’ 정책을 수립했다. 미국은 남북관계에서는 현상유지를 추구하면서도 한국 국내정치에 대해서는 현상변경을 요구했다. 한국군 병력감축과 경제건설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라고 압박했다. 한국의 국내정치 안정을 위해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가진 정당을 선호했다.

    이승만은 국내상황과 관련해서는 반공과 반일(反日)을 두 축으로 삼아 현상유지를 추구했다. 한일관계 정상화도 거부했다. 야당을 타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적대시했다. 6·25전쟁과 한미동맹을 통해 맺어진 혈맹이건만 남북관계와 국내정치를 둘러싸고 1950년대 내내 한미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이승만과 아이젠하워의 시각차

    휴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은 봉쇄와 롤백(rollback) 사이를 오갔다. 1953년 초부터 1960년 말까지 미국은 뉴룩(New Look)전략에 따라 대한정책을 재조정했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가장 염려한 것은 6·25전쟁을 계기로 한 미국의 군비팽창이었다. 건전한 경제가 국가 안전보장의 기반이라는 신념을 지닌 그는 미국이 직면한 위기를 ‘이중적인 위기’로 파악했다. 즉 세계 공산주의라는 외부의 도전과, 미국경제의 약화라는 내부의 위험이 그것이다. 군사비 과잉지출과 민간경제 파탄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냉전에서 미국이 지켜야 할 가치가 개인의 자유, 민주정부, 사기업 주도의 자유시장경제 등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적 생활양식 그 자체라고 보았다.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군사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결과적으로 병영국가가 출현하게 되고, 국가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이젠하워 정권의 특징은 건전한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국가 안전보장의 기본으로 삼아 ‘지속가능한 국가안보’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6·25전쟁을 계기로 동북아에서 확고한 냉전 전초기지로 자리매김한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아이젠하워 정권과 상이한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분단을 ‘적색(赤色) 제국주의(帝國主義)’가 북한을 강점해 생긴 문제로 보고, 북한 해방 차원에서 북진통일론을 내세웠다. 양 진영의 공존은 불가능하고 궁극적으로 전면전쟁이 불가피하므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예방전쟁(preventive war)’을 치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북진통일론의 핵심이다.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 무력 북진통일을 호소했다. 이승만은 양 진영 간의 제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나의 견해 차이는 제3차 세계대전을 지금 하느냐, 아니면 앞으로 미루느냐 하는 점에 국한되고 있다”고 했다. 7월28일 미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통해 이승만은 극동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격전을 전개하자고 주장하면서 미국이 해군력과 공군력만 지원한다면 아시아 지역의 군대만으로 북한을 회복하고, 나아가 중국 본토를 회복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 정치인과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승만의 이미지는 ‘반공투사’에서 ‘전쟁광(狂)’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휴전이 기정사실화하고, 국제정세가 양 진영 사이의 평화공존이 정착되는 방향으로 흐르자 북진통일론은 안팎에서 도전받게 된다.

    “가장 시급한 요구는 휴전 백지화”

    북진통일론은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 내부에서 야당과 지식인에 의해 도전받기 시작했다. 1956년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진보당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민주당도 같은 시기 화전양양론(和戰兩樣論)을 주장함으로써 휴전기에 구축된 북진통일론 일색의 통일 논의는 시험에 들게 되었다. 이승만은 1956년 말 헝가리 사태를 계기로 다시 북진통일론을 강조했다. 1957년 1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어떤 사전계획이나 특별한 조직도 없이 정말로 자발적으로 일어난 헝가리 봉기는 소련의 통제 아래 놓인 인민들이 얼마나 결사적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소련의 위성국가들은 해방을 얻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바랐지만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가 살아남기 위해 미국이 지켜 나가야 할 기준은 평화가 아니라 정의라는 점을 강조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끼는 바입니다. …현재 우리의 가장 긴박한 문제는 조국통일입니다. 38선으로 분단된 이후 거의 12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국가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막는 두려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제3차 세계대전입니다.

    …쟁점은 자유세계가 추구해야 할 더 나은 길이 해방이냐, 또는 봉쇄냐 하는 점입니다. 내 견해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봉쇄정책은 자유세계를 지키는 데 부적절합니다. 첫째, 봉쇄정책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해방에 반대하여 봉쇄를 지지하는 주장은 봉쇄선 그 자체로부터도 끊임없는 후퇴를 낳게 됩니다. …둘째, 봉쇄정책은 이미 공산주의자에 의해 노예가 된 세계인구의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헝가리인은 노예가 된 인민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봉쇄정책의 실패는 날이 갈수록 점차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유감스럽게도 또 다른 세계대전이 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득세했습니다. 우리 처지에서는 이런 주장에 마지못해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동맹국들과 협력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방국들에게 공산주의 문제를 푸는 데 가능한 모든 평화적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기회를 주고자 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휴전에 반대했으며 우리 우방국들의 바람에 반하여 최소한 한 번 이상 북진하려 결정했었습니다. 그러나 탄약과 기름 공급이 3, 4일분으로 줄어들거나 하루분으로 줄어드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조국의 분단 상황을 내버려두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소위 휴전을 백지화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시급한 요구사항입니다. (“Aide Memoire”, 24 January 1957. 이승만 대통령이 주한 미국대사 다울링을 통해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외교각서)


    중국 봉쇄와 일본 중심 경제 통합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히려 1957년 말부터 미국은 한국의 경제개발을 이유로 감군(減軍)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1958년 신년사를 통해 단독 북진통일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엔군이 우리에게 허락해 우리 국군이 나가서 싸울 기회를 주고 자기들은 뒤에 앉아서 물자와 도의상 원조만 해주면 우리나라의 통일은 머지않아 성취된다는 것입니다.”(공보실, ‘대통령 리승만 박사 담화집’ 제3집, 1959, 55쪽).


    1958년에는 북한 주둔 중공군이 전면 철수하였다. 이는 휴전체제가 사실상 안정기에 들어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휴전 무렵부터 중공군을 통일의 장애물로 규정하고, 중공군만 철수하면 당장이라도 북진해서 통일할 수 있을 것처럼 선전해왔다. 더욱이 같은 해에 미국은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점차 껍데기만 남게 됐다.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선거 공약에서 통일정책 부분을 빼버렸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 이르러 집권 자유당에 의해 북진통일론이 자체 청산의 길에 접어들었음을 뜻한다.

    이승만 장기집권의 뼈대, 한미동맹과 북진통일론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고교생 김주열의 시신.

    이러한 상황은 북진통일론이 국가 프로젝트로서 효과를 상실했음을 뜻한다. 이승만은 분단 문제를 철저하게 냉전체제와 직결해 파악했다. 국제적인 반공 진영 결속과 적극적인 대공정책만이 한국의 분단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 보았다. 195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한국, 대만, 남베트남이 결속해 공산주의에 대항함으로써 한반도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철저히 자유 진영을 결속하고 미국의 적극 개입을 촉구함으로써 남북통일을 달성하고자 했다.

    휴전 이후 한국군의 병력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따라서 한국군의 병력 문제는 휴전 후 한미관계에서 최대 쟁점이였다. 한국에서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 군사력이 유지된 주 원인은 북진통일을 내건 이승만 대통령의 군비확대정책이었다. 중공군의 북한 주둔과 미군 감축도 무시 못할 요인이었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지역적 위협으로 대두한 중국을 봉쇄할 필요를 느끼고 일본의 재군비(再軍備)가 지지부진한 상황전개에 위기감을 가진 미국 군부의 후원도 있었다. 6·25전쟁을 통해 경제력을 훨씬 넘어서는 군사력을 떠안게 된 한국은 중국 견제와 더불어 일본의 통상병력 방위부담까지 짊어진 셈이었다.

    아이젠하워 정권은 아시아정책의 기조로 중국 봉쇄와 더불어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적 경제통합을 추구했다. 6·25전쟁 후의 대한부흥 원조가 일본의 ‘부흥특수’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 대해 이승만은 격렬히 항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보기에 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시하는 미국의 정책은 한국을 다시 일본의 경제세력권에 집어넣으려는 수작이었다. 더욱이 6·25전쟁으로 미국의 군사공약이 확정되고, 경제원조도 기대할 수 있게 된 마당에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다.

    “1956년 선거는 ‘정치적 전복’의 계기”

    그렇지만 미국의 대한정책의 무게중심은 점차 군사 분야보다 경제 분야로 옮겨졌다. 한국경제의 전후복구 방향은 1956년을 기점으로 구호와 재건에서 발전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한국에 근무하는 미국 관리들은 미 정부에 군사 중심의 대한경제정책을 바꿀 것을 건의했다. 1956년 7월 주한 미대사와 경제조정관이 모두 교체되었다.

    새로 부임한 다울링(Walter C Dowling) 대사와 원(William Warne) 조정관은 군사안보와 더불어 경제발전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1956년 10월25일 다울링 대사는 다음과 같은 장문의 보고서를 미 국무부에 보내 대한정책에도 ‘뉴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최근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새롭고 복잡한 문제가 떠오르고 있는데, 특히 경제발전 및 군비지출 수준과 관련해 그렇다. 군사 분야에서 우리는 침략에 대항하여 한국의 방위력을 증강한다는 목표를 달성한 반면 구호와 복구 분야에서는, 비록 그것이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한국의 필수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기초를 닦은 데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공산주의자의 군사위협에 대항하여 강력한 방위력을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정치 분야와 경제 분야 양쪽에서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는 내적인 어려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정치, 군사, 그리고 경제 분야에서 우리의 노력을 조정할 것을 요구하며, 이제까지보다 더욱 더 한국측의 협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한국인의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프로그램을 수립할 수만 있다면 한국측의 협력을 얻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최근 몇 달 동안 한국지도자들이 국가목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1956년 5월에 실시된 전국적인 선거 결과는 한국민이 현 상황에 만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시기적절하게 경고해준 것이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그들이 민주적인 과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징조다.

    만일 앞으로 필요한 행동을 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이 승인한다면, 당분간 그는 우리의 소중한 동맹자일 것이다. 비록 이승만의 정책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크긴 하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한국민에 대해 지도력을 가지고 있으며, 달리는 불가능할 일을 그의 협조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많다(“Broad Evaluation of U.S. Program in Korea,” October 25, 1956, RG 469, Office of Far Eastern Operations, Korea Division, Korea Program Files, 1953-57, box 1, WNRC).


    또한 주한 미대사관 참사관으로 있던 스트롬(Carl Strom)은 한국을 떠나기 전에 작성해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이승만 정권은 “1948년 이래 질서유지라는 단기 목표는 성취했지만 지속가능한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건설적인 지도력을 제공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승만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그를 계속해서 도와야 하겠지만” 그에게 “건설적인 국가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1956년의 선거는 대중의 실망이 드러난 것이라 인식하고, 야당이 정권을 물려받을 수도 있는 ‘중요한 정치적 전복’의 계기가 된다고 평가하면서 한국군대를 국내정세의 안정세력으로 보고 계속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Memorandum From the Officer in Charge of Korean Affairs(Nes) to the Deputy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Parsons),” Washington, July 12, 1956, FRUS, 1955-1957, Vol. XXIII, p. 291).

    군사 대결에서 경제 경쟁으로

    6·25전쟁 이래 미국이 한국에 관여하는 일차적 목적은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하고 반공 정권을 지탱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의 냉전전략이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냉전의 전개에 따라 반공의 방법과 내용이 변했으며, 미국의 관여 내용도 바뀌었다.

    뉴룩정책에 따라 지속가능한 안보를 추구하는 아이젠하워 정권에 군사 중심의 구형 냉전대립구조에 기반을 두는 이승만 정권은 차츰 부담으로 변했다.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로 한국에 드는 비용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다. 특히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한국, 대만, 남베트남을 전초기지로 아시아 대륙 연안의 도서를 방위선으로 하는 중국 봉쇄정책의 기본 틀을 파괴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경제체제 경쟁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신형 냉전 아래 국내 정치경제개혁에 소극적인 이승만 정권의 태도를 미국은 불만스러워했다. 미국 처지에서는 군사적 대치에서 정치경제전쟁으로 변모된 냉전을 효율적,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새로운 협력자가 필요했다.

    이기붕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 관료 출신이 한국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1954년 5월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이기붕계가 다수 당선되었다. 이기붕은 선거에서 압승한 후 국회의장에 취임하고, 당과 정부의 전권을 사실상 장악했다. 이승만 정권은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1954년 11월18일 국회에 상정했다. 한미합의의사록과 상호방위조약 발효가 이루어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개헌안은 11월27일 표결에서 가(可) 135, 부(否) 60표로 부결되었다. 단 한 표 차이로 희비가 엇갈린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당은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억지 논리를 내세워 이를 번복하고, 가결을 선포했다. 북진통일운동을 통해 강화된 이승만 정권의 권력은 사사오입개헌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 3선 제한조항의 폐지와 함께 부통령의 대통령 지위 계승권을 신설하여 이기붕이 이승만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한편 반(反)이승만 세력은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결성하여 이에 대항했다. 총선거에서 참패하고, 개헌 저지에 실패하면서 위기를 느낀 야당은 오랜 분열을 일단 극복하고 1955년 9월 민주당을 결성했다. 모든 야당세력의 결집을 기치로 내건 민주당이었지만, 조봉암 등 진보세력은 배제한 채 보수야당으로 출범했다. 조병옥이 이끄는 구파와 장면을 지도자로 하는 신파가 양대 파벌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래 미국은 일관되게 이기붕 체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승만 후계체제에 대비했다. 1956년 5월의 정·부통령선거는 휴전 후 한국정치사의 기로였다. 1956년의 선거는 이승만 이후 체제를 가름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이 나이가 많고 건강악화가 두드러진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이기붕 후계체제를 확립하는 선거였다.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후보로 내세웠으나 선거 결과 뜻밖에도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의 법적 계승자 지위에 야당지도자가 선출됨으로써 집권 자유당은 승계위기에 봉착했다.

    자유당 내부의 강경파는 야당 부통령 탄생에 반발했다. 장면 부통령 암살시도도 있었다. 장면의 민주당 신파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강화해갔다. 이후 미국은 자유당, 민주당 양당의 강경파를 억누르는 한편 온건파를 중심으로 양당제를 확립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미국은 보수양당제를 통해 한국 내부의 정치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미국은 1956년 한국 대통령선거에서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선전(善戰)한 데 대해 우려했다.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돌연한 죽음으로 이승만과 대통령직을 겨루게 된 진보당의 조봉암은 도시지역에서 이승만을 능가하는 득표력을 보였다. 미국은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대두라는 불길한 정치변동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정권이 새로운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발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경제발전을 목표로 하는 정책쇄신과 민주적인 절차의 성장을 장려하는 것이 미국의 긴급과제로 대두한 것이다.

    이승만 장기집권의 뼈대, 한미동맹과 북진통일론

    1960년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 당시 고교생들의 서울시청 앞 시위 광경.

    미국은 이기붕 체제하의 자유당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재정 안정계획, 장기 경제개발계획 수립 등 정책전환을 진행했다. 또한 여야의 공존관계를 촉구했다. 1957년 12월의 국회의원선거법 개정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이 법개정은 자유당의 이기붕과 민주당 구파의 조병옥이 주도했다. 그래서 ‘협상선거법’이라고 불렸다. 공탁금제도 도입 등으로 무소속과 군소정당의 진출을 억제한 점이 특징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보수체제 안정 조치와 더불어 보수 정치질서의 최대 위협인 진보당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조봉암 당수를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간첩혐의로 체포한 것이다. 1959년 1월 이기붕과 조병옥 사이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둘러싼 비밀교섭이 있었다. 국회에서의 수적 우위를 배경으로 정권 연장을 도모하는 자유당 온건파와, 당내에서 장면 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신파에게 밀리던 민주당 구파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생긴 대연립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새어 나가자 자유당 강경파와 민주당 신파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협상은 무산되었다. 이후의 역사경로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다. 야당과 언론의 압살을 노린 1958년 12월의 국가보안법 개정, 1959년 4월의 경향신문 폐간, 7월의 조봉암 사형집행 등 자유당 강경파가 주도하는 이승만 정권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1960년 3월1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는 광범위하고도 공공연한 부정이 저질러졌다. 그리하여 대통령후보 이승만과 부통령후보 이기붕이 상식을 초월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폭발했다. 마산을 비롯한 도시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져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군이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 몰락 : 4·19혁명과 미국

    4월12일 고교생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항구 앞바다에 떠올랐다.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 자유당, 이승만 정권에 대해 점차 공격적으로 변했다.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발포했다. 다시 한국군이 유엔군사령관의 허락을 얻어 투입되었다. 이승만은 모든 반정부 행동은 엄단할 것이라고 반응했다. 그는 시위가 공산주의자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 여겼다.

    유엔군사령부가 김정렬 국방부 장관과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경무대에서 요청한 한국군의 병력이동을 승인하는 사이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서울과 여러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4월19일 10여만 학생과 시민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수백명의 학생과 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군이 질서회복을 위해 투입되었지만 학생과 시위군중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4월19일 밤 주한 미대사 매카나기(Walter P McConaughy)가 이승만을 방문했을 때, 김정렬 국방장관과 홍진기 내무장관이 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문제를 장면 부통령을 포함한 민주당원과 익명의 정부 전복분자 탓으로 돌렸다. 그는 전국적인 시위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 것은 며칠이 지나서다. 4월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했다. 4월25일 200여 명의 대학교수가 이승만 정권 퇴진과 재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했다. 저녁 때 수만명의 시위대가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했다가 이기붕의 집으로 가서 그의 집을 부쉈다.

    마침내 4월26일 수만명의 시위대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진출했다. 이승만은 학생대표 두 명을 포함한 시민대표 다섯 명을 접견했다. 약 한 시간 후 매카나기가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 사령관과 함께 경무대로 갔을 때,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4개 조항을 발표했다. 첫째, 사임할 수도 있음. 둘째, 재선거 실시. 셋째, 이기붕이 모든 공직으로부터 사임함. 넷째, 내각제 개헌 착수.

    북진통일론에 대한 재평가 필요

    한국의 휴전체제는 세계 냉전체제의 하위질서였다. 남한과 북한이 마주한 휴전선은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자본주의 진영 대 사회주의 진영의 분할선, 동아시아적인 차원에서는 공산 진영 중국과 자유 진영 일본의 대치선이었다. 미국이 유지하고 지휘하는 한국군 또한 한국 방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진영 방어부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처한 이러한 구조적 위치를 십분 활용하면서 정치를 해나갔다. 비록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은 낮을지라도 북진통일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수립할 때부터 갖고 있던, 결코 버릴 수 없는 국가목표였다.

    그가 휴전협정 과정에서 독자 행동을 불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나,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휴전체제를 곧 무너뜨릴 것 같은 언행을 보인 것은 미국에 대한 협상용 또는 시위용만이 아니었다. 또 후대에서 비판하듯이 단순한 정권안보용만도 아니었다.

    어쩌면 6·25전쟁이 휴전으로 봉합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1950년대 내내 북진통일은 무시 못할 정치적 동원력과 이데올로기적 통합력을 가졌을 수 있다. 민족분단과 항상적인 전시동원체제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조속한 북진통일이야말로 모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묘책으로 보였을 수 있다.

    휴전 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쟁은 재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통일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의 남침으로 붕괴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지도자를 교체한 것도 아니다. 바로 한국 국민의 봉기로 무너졌다.

    이승만이 마지막까지 국가 프로젝트로 추구한 북진통일론은 그의 퇴장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통일정책에서 사라졌다. 평화통일이 대세를 넘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오늘날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시대착오로 보인다.

    이승만 장기집권의 뼈대, 한미동맹과 북진통일론
    정일준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사회학)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연구원, 워싱턴대 방문교수 겸 강사

    現 아주대 국제학부 교수, 한국사회학회 상임이사, 한국역사연구회 회원

    저서 및 논문 :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공저), ‘지구시대 한미관계와 한국민족주의: 성찰적 민족주의를 위하여’ ‘유신체제의 모순과 한미갈등: 민주주의 없는 국가안보’


    그렇지만 냉전시대에 열전을 치렀고, 탈냉전시대에도 통일은커녕 여전히 군사적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간의 지혜에 기대어서가 아니라, 당시의 국내외 상황에 비추어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재평가할 여지는 충분하다.

    비록 그가 추진한 북진통일이 명시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반공체제를 단단하게 다지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가치판단을 잠시 접어두고 사실의 인과관계에 주목하면서 북진통일이라는 현실주의적 국가 프로젝트가 대한민국의 진로에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진지하게 성찰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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