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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 김문수 경기도지사

“인간적 매력으로 이어온 끈끈한 유대… ‘우회전’ 했기에 더 열심히 살아야”

  • 권주리애 전기작가, 크리에이티브 이브 대표 evejurie@hanmail.net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 김문수 경기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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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그와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남다른 인연은 잘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서울대 강사와 학생으로 처음 만나 학생운동의 거대한 흐름을 주도하다, 1980년대 후반 들어 극적으로 우회전한 것. 두 사람이 한 자리에서 서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 김문수 경기도지사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오른쪽).

지난 6월30일, 김문수(金文洙·56) 경기도지사 공관에서 특별한 만찬이 열렸다. 김 지사의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안병직(安秉直·71) 서울대 명예교수와, 젊은 시절에 노동운동을 함께 한 선후배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것. 캠퍼스 잔디보다 더 푸르르던 젊음은 가고, 스승과 제자 모두 머리가 허옇게 세었지만 그 시절 끈끈했던 인연은 여전한 듯 보였다.

김문수 지사는 서울대 경영학과 70학번이다. 신입생 김문수는 신입회원을 모집하러 다니는 심재권(전 국회의원)의 모습에 반해 ‘후진국사회연구연(이하 후사연)’에 가입한다. 당시 학내 서클들은 사회운동이론보다 인간적 유대를 중시하는 ‘행동적 민족주의’ 성격이 짙었는데, 후사연도 마찬가지였다. 후사연에는 법대, 상대 학생보다 문리대 학생들이 주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으나 김문수는 상대생이면서도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터라 안병직 교수도 그를 기억했다.

“당시 김근태를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이 유명했지요. 신입생 중에선 김문수가 눈에 띄었어요. 상대생이면서도 후사연에 열심이던,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맑고 순수한 학생이었죠.”

당시 젊은 강사이던 안 교수는 지하 서클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념적 리더였다.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학내 서클들이 안 교수의 지도하에 마르크스, 엥겔스, 마오쩌둥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했다. 안 교수는 학생들의 사회주의 운동과 진로에 대한 상담역으로도 분주했다.

대학생 김문수는 후사연 선배들과 용두동 판잣집에 살면서, 비로소 가난에 대한 열등감을 사회의식으로 승화시켰다. 교육공무원이던 부친이 빚보증을 잘못 선 뒤로 줄곧 경북 영천의 판잣집에서 밥상 하나를 놓고 7남매가 둘러앉아 공부해야 했던 그에게 판잣집은 그 자체로 열등감을 자극했다. 그런데 선배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있고, 사회운동으로 이 비참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는 신념이 생긴 것. 그가 열성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내가 자네라면 노동운동 하겠네”

안 교수는 당시 노동운동을 가장 앞선 사회운동이라 여겼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노동현장에 뛰어들라고 권유했다. 1971년 여름방학 때 후사연은 상대생 4명을 뽑아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시켰는데, 4명 중 한 명이 김문수였다. 그는 드레스 미싱공장(대우중공업 구로동 공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몇 달 지나지 않은 9월, 김문수는 장티푸스에 걸렸다가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증상이 심해진 탓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 대학에선 부정부패 규탄 시위가 심해져, 정부가 위수령을 발동하고, 후사연을 비롯한 서클을 강제 해산했다. 그 와중에 전국 각 대학에서 100여 명이 제적됐는데, 김문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병이 낫자, 학교에 갈 수도 없는 처지라 4H활동과 야학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하고 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올라갔다.

“스물한 살의 제가 봉건적인 고향에서 할 수 있는 큰 일이 뭐가 있겠어요. 공장 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 터라, 농민운동은 진도가 느리고 답답했어요. 그래서 서울에 올라가, 함께 제적된 경북고·서울대 동기 이영훈(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과 함께 안병직 교수님 댁을 찾아갔어요. 그 시절 운동권 학생들이 자주 교수님 댁을 드나들었죠. 학교에서도 제적됐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여쭤보았죠. 교수님은, 학벌이 뭐 중요하냐, 공부말고도 할 일이 많다며 위로하셨어요. 그러면서 노동 현장에 들어가는 것은 어떠냐고 물으셨어요. ‘내가 자네들 같으면 노동운동을 하겠네’ 그러셨죠.”

그 뒤로 김문수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안 교수를 만났다. 사회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삶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노동자로 살아가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웠다. 그런데 갑자기 복교조치가 내려졌다. 다시 ‘문중의 별’로 떠오른 그를 위해 어머니와 형이 고향에서 등록금을 마련해왔다. 그는 복학한 뒤에도 자동차 기술을 배우러 다녔다.

1973년 겨울방학 동안, 대학생들은 1974년을 ‘민권쟁취·민주승리의 해’로 정하고, 학생운동을 질적으로 심화할 방법과 조직적인 운동을 모색했다. 그 결과가 1974년, 각 대학 및 고등학교의 성토대회, 수강 거부, 유인물 배포, 농성 등으로 나타났다.

“복학해서 유인태(현 열린우리당 의원) 선배와 지방 대학에 운동 조직을 만들러 다녔어요. 그러던 중 안 교수님을 뵈었는데, ‘네가 유인태와 지방에 학생 조직하러 다닌다던데, 그러다 잡혀가기 십상이다. 학생운동은 부르주아 운동이니 노동운동을 해라. 그것이 노동자 이익실현을 대변하는 길이다’라고 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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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리애 전기작가, 크리에이티브 이브 대표 evejuri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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