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호

곽재식의 괴물여지도

거인 : 동해안, 전남 강진·흑산도, 제주 등

“외눈박이 거인과 결혼한 조선 여인이 탈출 도와” 〈18세기 기문〉

  • 곽재식 소설가

    gerecter@gmail.com

    입력2019-07-1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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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와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하는 거인 이야기는 생각보다 꽤 많다. 배경은 주로 드넓은 바다다. 우리 선조들은 대양을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고, 때로는 식인 거인 등 각종 괴물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지만, 끝내 살아 돌아와 모험담을 남겼다. 과거 자료를 보면 고대 중국인은 신라인을 바다를 돌아다니는 모험가의 상징처럼 여기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옛 기록에 실린 한국 거인 이야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뭘까. 나는 고구려에 대한 중국 기록 한 토막을 떠올리게 된다. 한국에서도 친숙한 중국 역사책 ‘삼국지’에 있는 이야기다. 

    조조(曹操)의 손자 대에 활약한 위나라 관구검(丘儉)과 그의 군사가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관구검의 군사를 막고자 싸웠으나 결국 패해 도망쳤다. 관구검은 고구려 여러 성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한 옥저(沃沮) 지방까지 도달했다. 지금의 함경도와 동해안 인근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위나라 군사가 남긴 유물이 현대에 발견되기도 했으니, 나는 여기까지는 사실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삼국지’ 이 대목에 신기한 이야기가 한 자락 덧붙어 있다. 관구검 일행이 옥저 사람에게 저 바다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는 내용이다. 그들은 동쪽으로 행군한 끝에 바다에까지 이르자 아마 땅끝에 도착했다고 여긴 듯하다. 그래서 그 너머를 물은 것이다. 옥저 사람은 “바다 저편에 여자들만 사는 나라가 있다고 들었다”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이런 말도 곁들인다.

    바다 건너 거인

    “바다에서 옷을 하나 건졌는데, 그 옷의 소매 길이가 세 길이나 됐다.” 

    당시 단위 ‘길’이 정확히 어느 정도 길이인지는 분명치 않다. ‘길’은 사람 키 정도의 길이를 뜻하기도 하고, 때로는 2.4m 또는 3m를 의미한다. 어쨌든 ‘세 길’은 상당히 길다고 할 수 있다. 소매가 그 정도면 옷은 전체적으로 매우 컸을 것이다. 바다 건너에 그렇게 큰 옷을 입을 만큼 몸집이 아주 큰 거인들이 있었던 게 아닐까. 



    ‘삼국지’와 비슷한 시기 간행된 중국책 ‘박물지’에도 고구려 동쪽 바다에서 발견된 큰 옷 이야기가 실려 있다. ‘박물지’는 세상 곳곳의 기이한 사물에 대한 짧은 기록을 모아놓은 책이다. 여기에는 거인 이야기가 적잖이 실려 있다. 

    중국 기록을 살펴보면 이후에도 한반도와 관련된 거인 이야기가 몇 개 더 보인다. 당나라 시기 전후 만들어진 자료에는 “신라 사람들은 신기하고 이상한 바다 건너 다른 세상을 알고 있다”는 투의 말이 제법 나온다. 

    당나라 사람이 보기에 신라 사람은 바다 건너에서 나타난 낯설고 특이한 풍습을 가진 존재였을 것이다. 마침 이 시기 중국 문학의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 결과 “신라 사람을 따라갔다가 바다 저편에서 이상한 괴물을 봤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영표록이’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어떤 중국인이 신라 사람을 따라 배를 타고 아주 먼 나라들을 다녔다. 그러다 어떤 이상한 나라에 도착하자 신라 사람이 그곳을 ‘구국(狗國)’, 곧 개의 나라라고 소개했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신라인과 함께 거인들이 사는 ‘대인국(大人國)’, 소인들이 사는 ‘소인국(小人國)’에도 가봤다고 기록했다. 

    이런 이야기 중 널리 퍼진 것은 ‘기문’에 실린 ‘장인국(長人國)’에 대한 전설이다. ‘장인국’은 이름 그대로 ‘키 큰 사람’이 사는 나라다. ‘기문’에 따르면 장인은 신라 동쪽의 먼 나라에 산다. 키가 보통 사람의 네다섯 배 정도 되고 온몸이 검은 털로 뒤덮여 있으며, 이빨은 톱니처럼 생겼다. 손톱도 갈고리처럼 생긴 사나운 괴물이다. 이들은 옷을 입지 않고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않으며 사람과 동물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기문’에서 신라인들은 이 장인들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튼튼한 관문, 즉 철관(鐵關)을 건설했다. 거기에 화살을 발사하는 기계도 설치했다고 돼 있다. 

    신라 동쪽 장인국 얘기는 중국 역사책 ‘신당서’에 실려 고려, 조선 학자들에게 역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삼국사기’ 같은 고려 역사책에 그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하다. 단 삼국사기 저자는 “신라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헛소문일 뿐”이라는 태도를 취했다. 

    그래도 거인 이야기는 한반도에서 널리 퍼져나갔던 듯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국내 문헌에서 비슷한 거인을 직접 봤다거나 직접 본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식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비교적 시기가 앞서는 것은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에 얽힌 이야기다. 그의 책 ‘지봉유설’에는 거인을 연상케 하는 구전이 담겨 있다. 이수광이 어느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다. 이 사람은 우연히 외딴섬에 갔다가 좋은 가구로 장식된 커다랗고 훌륭한 집을 봤다. 그 앞에는 거대한 크기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그 신발을 보고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어 도망쳤다는 얘기다. 

    비슷한 시기 출간된 책 ‘어우야담’에는 이수광이 지금의 강원도 안변에서 살 때 그 고장 사람에게 들었다는 모험담이 기록돼 있다. 주인공은 7일 동안 바다를 표류하다 거인을 목격했다. 그는 자신이 본 거인의 키가 사람의 수십 배를 가뿐히 넘을 정도로 컸다고 전한다. 또 허리 윗부분을 물 밖에 내놓은 이 거인이 손으로 배를 뒤집으려고 공격해 와 도끼를 들고 맞섰다고 밝혔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도끼로 거인의 팔을 잘라낸 뒤 겨우겨우 도망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금의 전남 강진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어우야담’의 주인공은 거인 신발만 보고 달아난 게 아니라 직접 거인을 만나 싸우기까지 한 것이다. 거인의 속성도 좋은 집과 아름다운 가구를 장만해두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물속에 우뚝 서서 맨손으로 배를 공격하는 괴물이다.

    ‘식인 거인’으로 가득한 공포의 섬

    우리나라와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하는 거인 이야기는 이외에도 꽤 많다. 조선 인조 때 발간된 책 ‘용주유고’에 실린 ‘통천해척표풍설’이라는 글에는 색다른 거인이 등장한다. 강원도 통천의 어느 뱃사람이 폭풍에 휘말려 표류하다 거인이 사는 이상한 곳에 다녀왔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녀 거인은 매우 사납다. 두려움에 떨며 외양간에 숨어 있던 뱃사람은 거인이 말과 소를 방목할 때 그 무리에 섞여 탈출에 성공한다. 이런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고전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Κu′κλωψ) 이야기와 닮아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바다 건너편에서 외눈박이 거인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8세기 작가 유만주가 남긴 ‘통원고’라는 책에 실린 ‘기문’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번엔 전남 흑산도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표류한 사람의 목격담이다. 이 사람은 눈이 하나밖에 없는 흉포한 거인이 사는 바다 먼 곳의 땅을 ‘대인국(大人國)’이라고 불렀다. 대인국 사람들은 다른 데서 온 사람을 불에 구워 먹으며 화로를 쇠꼬챙이로 뒤적거리면서 사람을 요리한다고 전했다. 이들은 사람을 잡으면 굴 같은 데 가둬두고 살이 찐 사람부터 차례로 구워 먹는다고 한다. 

    눈에 띄는 것은 대인국 외눈박이 거인의 아내가 과거 조선에서 우연히 그 나라에 가게 된 사람이라는 구절이다. 이 조선 여성은 대인국에 붙잡힌 채 외눈박이 거인과의 사이에 자식을 12명 낳았다고 한다. 이 여성이 주인공 일행도 조선 사람인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도망치는 방법을 알려준다. 도망치는 수법이란 게 재미있다. 달아나면서 물건을 이리저리 어지럽히라는 것. 그러면 거인이 그것을 정리하느라 재빨리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선 여성은 주인공에게 “서두르지 않으면 외눈박이 거인이 다른 동료들에게 연락할 것”이라고 귀띔한다. 즉 섬에 거인이 한 명만 사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외눈박이 거인으로 가득한 섬이라니, 읽는 이를 더욱 오싹하게 만드는 설정이다. 


    아르놀트 뵈클린의 ‘오디세우스와 폴리페무스’(1896, 왼쪽)와 존 플랙스먼의 ‘폴리페무스에게 와인을 따라주는 오디세우스’(1805). [보스톤미술관 소장]

    아르놀트 뵈클린의 ‘오디세우스와 폴리페무스’(1896, 왼쪽)와 존 플랙스먼의 ‘폴리페무스에게 와인을 따라주는 오디세우스’(1805). [보스톤미술관 소장]

    19세기 출간된 이야기책 ‘청구야담’에는 더욱 극적인 거인 이야기도 실려 있다. 제주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어떤 사람은 결국 항로에서 벗어나 바다를 헤매다 눈과 머리카락이 붉은 거인을 마주친다. 이 거인도 식인 괴물이다. 주인공은 거인의 눈을 찔러 공격한 뒤 그가 키우는 양과 돼지를 풀어준다. 거인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가축 무리에 섞여 도망친다. 이 줄거리는 ‘오디세이아’의 키클롭스 이야기와 거의 동일하다. 신라 때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 거인 이야기가 저 멀리 유럽의 거인 이야기와 선명히 맞닿는 것이다. 

    제주도에는 헨드릭 하멜 등 네덜란드 선원이 풍랑에 떠밀려와 한동안 살았다. 그들과 말이 통하게 된 지역 사람들이 ‘재밌는 이야기’를 청하고, 고대 그리스 키클롭스 이야기를 들은 뒤 원래부터 전해오던 우리 바다괴물 이야기와 섞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신라인은 바다 누비는 모험가

    [테이트미술관 소장]

    [테이트미술관 소장]

    그러고 보면 세계 각지에는 고대 그리스 신화, 북유럽 신화, 중세 유럽 아서왕 전설 등 여러 형태로 거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오디세이아’를 닮은 조선 후기 거인 이야기도 비슷한 틀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우리나라의 판타지 모험담은 저승이나 귀신 이야기에 과하게 치우친 면이 있다. ‘조선시대 쇄국정책’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인지 다른 소재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는 듯해 아쉽다. 과거 자료를 보면 고대 중국인은 신라인을 바다를 누비는 모험가의 상징처럼 여겼다. 장인국의 거인 괴물이 경주 등 신라 시가지에 나타나 난동을 부리고 그것을 막아내고자 화랑과 신라 장수들이 애쓰는 식의 이야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한국 전통에서 결코 멀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곽재식 | 1982년 부산 출생. 대학에서 양자공학, 대학원에서 화학과 기술정책을 공부했다.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교양서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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