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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다큐 |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비상한 시대 특별한 재주 아쉬운 죽음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비상한 시대 특별한 재주 아쉬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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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난 회 이야기
  • 1920년 봄, 조선인에 의해 창간된 신문에는 1년 전 장례를 치른 고종 황제의 이야기가 뒤늦게 실려 있다. 고종의 죽음과 국장 당시 조선인은 그 소식을 오로지 총독부신문 매일신보를 통해 들었다. 그때 국장행사에는 조선과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총집결했다. 장의행렬의 군병력은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타로가 지휘했다. 놀랍게도 그는 3·1독립선언이 있기 이틀 전에 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인 권동진과 만났다. 그는 조선인 재일망명객들과도 가까이 지냈다.
(제10장)

비상한 시대 특별한 재주 아쉬운 죽음

김옥균.

김옥균(金玉均)은 10주기를 맞아 비로소 무덤에 비(碑) 하나를 얻었다. 1904년 3월에 세워진 그 비의 후면을 가득 채운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비상한 재주를 가졌으나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없이 비상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글은 박영효(朴泳孝)가 지었다고 말미에 새겨 있다. 1000자에 가까운 비명(碑銘)의 끝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와 생사를 같이한 정리가 있다 하여 내게 글을 청하였다. 눈물로 먹물을 삼아 후세인들에게 고해 그가 비상한 사람이었음을 알린다.’

글씨는 이준용(李埈鎔)이 썼다고 되어 있다. 박영효의 이름 앞에는 정1품 금릉위(錦陵尉)라는 칭호가 붙어 있다. 박영효 다음에 새겨진 이준용의 이름에는 종2품이라는 감투가 씌워 있다. 대원군의 장손자인 이준용의 품계에 대비하면 박영효의 지위의 높음이 절로 실감된다. 이준용은 고종의 장조카이지만 박영효는 고종의 선대 임금인 철종의 사위다. 그것도 무남독녀 외동딸과 혼인한 부마도위(駙馬都尉). 13세의 옹주는 비록 3개월도 채 못 지내고 11세의 신랑과 사별했지만 금릉위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의 눈부신 직함은 평생의 동반으로 박영효의 곁에 살아 있다.

비가 선 곳은 도쿄(東京) 도심의 공원묘지 내 외국인묘역이다. 33세 때부터 나라 밖으로 나가 살던 김옥균은 죽어서도 제 나라에 묻히지 못했다. 죽어 귀국한 몸의 사지는 절단되어 땅바닥에 나뒹굴며 뭇 동포의 구경거리가 되다가 형체도 없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 유해의 일부를 일본인 추종자가 몰래 수습해 일본으로 날라다 무덤을 만들고 절에도 안치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 마침내 동족에 의해 비명을 새긴 비석을 갖게 된 것이다.

너비 1m의 비석은 자연석의 거친 질감을 살려 위로 가며 약간 좁아지다 3m가 되는 끝 높이에서 예각을 이루며 마감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거기서 하늘을 향해 뻗은 묵직한 칼을 연상한다. 칼날은 부러진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심지어 광개토대왕비의 축소판을 떠올리는 이도 있다. 두께가 얇아서 그렇지 앞뒷면만 보면 가로 세로 길이나 거기 쓰인 글자 수는 반도의 북쪽 광개토대왕비의 절반가량 된다. 흐린 날에 멀리서 보면 야윈 승려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시각도 있다. 그것은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몸매로 알려진 김옥균의 실루엣을 닮았다는 것이다. 상하이에서 그의 사체를 검시한 보고서는 그의 신장을 155㎝로 적고 있다. 비석은 그의 키 두 길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는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불교 대하기를 비 맞은 중 보듯 하는 조선 지배층의 유교 근본주의 풍토에서 보면 김옥균은 이 점에서도 이례적이었다.

조선에선 무덤도 불가

광개토왕비가 압록강 너머 간도에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김옥균의 무덤과 비는 왜 바다 건너 도쿄에 있는가. 조선 땅에는 그의 무덤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하이 객잔에서 동족의 총을 맞고 청나라 기선에 실려 서해를 건너 월미도에 기착하고, 다시 조선의 배로 옮겨져 인천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만선의 조기 배처럼 환호 받으며 경강으로 들어와 양화진에 부리어 능지처참된 그의 흩어진 몸을 내려다보며 장대 위에 걸린 그의 머리에는 대역적임을 알리는 팻말이 봄날의 강바람에 한참을 흔들렸다. 그의 죽음에 기뻐하는 사람은 많아도 슬퍼하는 사람은 적었다. 슬퍼할 사람은 이미 죽거나 숨거나 도피해 보이지 않았다.

갑신년에 정변을 일으킨 그는 갑오년에 주검으로 귀환했다. 그 사이 10년 세월을 그는 일본에서 살았다. “나는 인천으로 절대 안 간다”는 임금을 달래고 달래다가 나르는 총탄 속에서 마침내 갈라져 서울을 빠져나가 인천에 정박 중인 일본 기선을 타고 배 밑창에서 며칠 밤낮을 뒹굴며 혼미해진 심신으로 일본에 상륙해 시작한 망명 생활은 실의와 낙담의 연속이었다. 다시 말해 상갓집 개 신세라고 하는 것이 어떤 처지인지를 몸소 체험하는 세월이었다.

도쿄에서 장차 그의 무덤이 되는 곳 가까이에 살던 그는 도쿄 남방 1000㎞ 떨어진 최남단 절해고도로 유배돼 태평양의 아열대 원시림 속에 생존하게 된다. 겨울에도 눈 볼 일 없고 1년 내내 습기 속에 류머티즘을 앓으며 돌고래를 길손처럼 보며 지냈다. 오가사와라(小笠原)-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그 섬에는 주민 38명이 살고 있었다. 조선이 일본에 개항을 하던 1876년에 일본령이 되어 본토민의 이주가 막 시작된 곳이었다.

정변을 일으키기 전해에 김옥균은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가 되어 동해 바다 고래잡이 업무를 관장한 경력이 있다. 조선 건국 이래 처음 생긴 이 직책을 수행하면서 그는 울릉도에 불법 체류해 벌목을 일삼던 일본인 255명을 철수시키고 본토인의 울릉도 이민을 추진했다. 2차에 걸쳐 16가구의 조선주민 54명이 그때에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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