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신들의 정원

  • 입력2005-12-15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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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들의 정원
    여행은 우리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순간적이지만 자유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축복의 시간임에 틀림없다.

    거미줄에 묶여 있는 듯한 일상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면, 자신도 모르게 닫힌 마음의 문이 열리고 삶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고 그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답답한 공간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에 부딪히다가도 밖으로 나가 길을 걸으면 문득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것도 여행의 역할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다. 실제로 여행을 하면 일상과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있기에, 생활에 묻혀 잊었던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는 귀중한 순간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여행이 얼마간 지속되면, 일상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분명 이것은 모순이지만 현실 속에서 여러 사람과 칡덩굴처럼 얽혀 함께 살아야 하는 것도, 구속받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역설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인간의 운명이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이 “인간적인 모든 것은 슬픈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는 슬픔의 숨은 근원이 되는 유머가 없다”고 말했던 걸까.

    이런 부조리함 때문인지 어느 해인가 나는 하와이 여행에서 아주 기이한 경험을 했다. 서울처럼 사람이 북적대는 복잡한 도시에 사는 내게 하와이는 마치 낙원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곳보다 어딘가 더 환상적인 곳으로 떠나고 싶은 욕망이 계속 샘솟았다. 그래서 나는 이곳저곳을 배회하다 하와이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외딴 섬으로 여행을 나섰다.



    파인애플을 재배했다던 섬, 라나이는 주민이 몇 되지 않는 아주 조용한 휴양지였다. 참빗으로 빗어내린 듯 가지런히 반짝이는 야자수 잎, 바닷가 한켠에 조성한 나지막한 호텔과 멋진 정원, 잎이 무성한 나무마다 가득 피어난 원색의 정열적인 꽃, 방안까지 호르르 날아드는 새들, 나무그늘에서 얼굴을 내밀곤 하는 새끼손가락만한 도마뱀까지 그곳은 듣던 대로 파라다이스였다. 방문객들은 낙원 속에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골프장을 찾았지만 나는 골프도 수영도 할 줄 몰라 관광 길에 나섰다.

    섬 가운데 자리잡은 얼마 안 되는 인가를 벗어나니 꽃이 핀 나무나 숲을 전혀 볼 수 없는 불모지가 나왔다. 사방을 둘러봐도 바람에 흔들거리는 잡초덩굴뿐, 황야엔 끝간 데 없는 적막이 짙게 깔려 있어 선뜻 들어서기가 망설여졌다. 오랜 가뭄에 시달려 누렇게 마른 잡초수풀 사이로 붉은 흙길이 시작됐다.

    그런데 차가 가야 하는 흙바닥에 무수한 검은 나비가 내려앉아 너풀거리는 게 아닌가.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그건 땅에 박아놓은 까만색의 비닐조각들이었다.

    찾는 이가 길을 잃을까 염려해 표시해놓았을, 수천 개의 비닐조각이 검은 나비떼처럼 바닥 가득 너울대는 그 길은 마치 날 음침한 지하세계로 인도할 것만 같아 오싹 무섬증이 일었다. 누군가 재료비를 안 들이고 눈에 확실히 뜨이는 걸 추구해 세상에서 가장 으스스한 길을 창작했나 보다. 그냥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왕 나선 걸음이라 ‘신들의 정원’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신들의 정원은 이렇게 먼 길목에서부터 두려움이 찾아들게 했다. 그들의 휴식터를 인간이 들여다본다는 게 불경스러운 일이어서일까. 드디어 팻말이 보였다.

    ‘그 정원은 어떤 형상일까…. 이 황무지 끝에 문득 신기루처럼 환상적인 에덴동산이 나타나겠지…. 거기에서 콜라나 커피를 팔고 있을 찻집주인은 사람구경을 못해서 얼마나 심심할까.’

    그때까지의 두려움이 일시에 사라지며 눈앞에 펼쳐질 경이로운 풍경을 빨리 보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신들의 정원’이라 씌어 있는 낡은 나무 팻말을 지났는데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의아해하는데 한순간 잡초가 사라지며 불쑥 돌무더기들이 나타났다. 길은 이제 끝나서 짙푸른 바다를 향한 낭떠러지가 있을 뿐이었다. 구릉을 이룬 붉은 땅에 가득 들어선 거무스름한 둥근 바위떼. 그런데 그들은 특이하게도 겨울에 만드는 눈사람과 똑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른키만한 것, 어린애 같은 것….

    즐비하게 서 있는 그들이 눈에 들어온 순간 돌인데도 마치 숨쉬지 않는 사람들을 보는 듯 섬짓한 한기가 들었다. 생명체의 그림자조차 안 보이는 괴괴한 고요가 그런 공포심을 일으킨 걸까. 에덴동산을 기대했기에 너무나 삭막한 그 장면이 더욱 기괴했던 걸까. 무작정 도망치고 싶었다. 참고 있으려니 가슴에 통증이 왔다.

    동행은 거기까지 왔는데 기념사진이라도 찍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나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빨리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신들의 정원을 급히 빠져나오며 느닷없이 로빈슨 크루소가 떠올랐다. 그가 떠내려간 무인도에서 겪었을 두려움과 막막함을, 그 섬을 절망도라 이름지은 심정을 그 순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라나이 신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들은 왜 그렇게 황량한 곳을 정원으로 삼았을까. 그리스의 신들은 위대한 능력과 눈부신 아름다움을 뽐내며 서로 사랑하고 질투하느라 고독할 틈이 없었을 텐데, 그곳의 신들은 얼마나 외로웠기에 인간의 형상을 한 돌무더기들을 세워놓고 그 곁을 거닐었을까. 신들도 인간을 그리워하는가.

    그러고 보니 나를 내내 휩싸던 두려움의 정체는 사람들과 멀리멀리 떨어진 데 대한 불안감이었다. 생명체에 대한 맹목적인 그리움이었다. 아니 좀더 좁혀 말한다면 내가 벗어나고 싶어 하던 내 나라 내 이웃 속에 섞이고 싶은 갈망이었다.

    나는 낙원의 섬이라고 생각하던 하와이에 있는 ‘신들의 정원’을 벗어나면서 인간의 환상과 현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체가 얼마나 다른지를 처음으로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것만이 아니다. 환상의 세계가 결코 이상의 세계가 아니라 죽음의 세계라는 사실과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됐다.

    그런데 나는 왜 ‘신들의 정원’에 머물렀을 때처럼 홀로 있으면 사람들이 그립지만, 군중 속에서는 왜 때로 고독을 느끼는 걸까. 아마 군중 속의 고독은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그들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죽음과 같은 세계에서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하와이를 낙원으로 생각하고 서울을 떠나게 된 것은 휴식의 목적도 있겠지만 내가 서 있는 땅, 아니 내가 지금까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고 살아온 서울의 고마움을 모르고, 그곳에서 도피하려는 잠재의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 때문에 그날 밤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서 움직이는 현실세계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이 고마워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나는 그동안 정말 등잔 밑이 어두운 줄 모르고 살아왔다. 수차례 해외여행을 하며, 이국의 정취와 설렘에 취해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내 나라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던가.



    이렇게 여행이라는 비현실적인 안락의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서울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서울은 복잡해도 넘치는 생명력 때문에 내일이 있지만, 정적만 머무는 신들의 정원에는 내일이 없다는 것을 가슴이 뻐근하도록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매연에 찌든 공기, 거리의 부산함,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피해 섬을 찾았던 나는 ‘심심한 천국, 재미있는 지옥’이란 책제목처럼 온갖 공해와 소란이 가득한 서울이 몹시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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