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도쿄에서 납치된 지 5일 만인 1973년 8월13일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김대중씨가 기자들에게 피랍경위를 설명하면서 울고 있다. 입술이 부르튼 모습이다.
납치사건의 실행과정이나 일본에서 공작을 진행한 사람들의 신상 등은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당부분 공개됐다.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를 받은 이철희 정보차장보와 하태준 해외공작국장이 수뇌를 이뤘고, 윤진원 단장을 비롯한 해외공작단원들이 실행을 담당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1998년 2월 ‘동아일보’가 보도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내부문서 ‘KT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는 사건 실무자들과 중정 지휘라인의 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남아 있는 사실상 유일한 물음표는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지시 혹은 사전인지 여부다. ‘KT…’ 문서는 박 대통령이 최소한 사후에는 인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납치를 지시했는지는 규명하지 못했다.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은 대통령의 직접지시가 있었는지에 대한 공식 증언을 피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전 부장에게 사람을 보내 증언을 요청했으나 성과가 없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후락 부장이 동향 출신인 최영근 의원에게 ‘박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김대중이 해치워버려’라는 말을 듣고, 한 달이 지난 뒤 다시 ‘왜 하라는데 안 하느냐’고 다그쳤다’며 당시 상황을 털어놓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후락 전 부장은 같은 해 역시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하늘에 맹세코 박 대통령의 직접 지시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천학범씨는 1949년 미국공보원(USIS) 근무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1960년 NHK 서울지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29년간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국내 언론인에 비해 활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그는 박정희 정권의 핵심 실세들이나, 김대중 김영삼 등 주요 정치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취재활동을 벌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보도와 관련해 당시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92년 ‘아사히신문’ 서울지국 상담역을 끝으로 언론계를 떠난 그는, 이후 고향 등지에서 칩거해왔다. 심장수술과 반신마비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간 마음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며 ‘신동아’에 취재를 요청했다. 특히 1973년 8월 벌어진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해 ‘확인은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발설할 수 없었던 내용’을 공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건 발생 후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 간에 벌어진 막후협상에 관여했던 까닭에, 단순한 취재를 넘어서서 사건 진행의 내막에 깊숙이 접근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지난 1월 말과 2월 초순 몇 차례에 걸쳐 인터뷰에 나선 천씨는 건강 악화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힘겨워 보였지만, 상대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고 요점을 파악해 답하는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다음은 그 가운데 사건관련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