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의 투자 부진이 한국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기업들은 막대한 현금을 쌓아두고도 돈을 쓰지 않는다. 관망의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들은 왜 투자하지 않는가. 왜 불안해하는가. 뭔가 꿍꿍이셈이 있는 것일까.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다. ‘신동아’가 창의적이고 의욕적인 젊은 기업인 모임의 멤버들을 대상으로 좌담회를 기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참석자 명단 비공개를 전제로 신동아 좌담회에 참석한 EO 멤버들.
‘감 놔라, 배 놔라’
1월16일 서울 강남의 벤처소사이어티 사무실. 저녁 7시가 되자 30대 초반부터 40대 중반까지 비교적 젊은 CEO들이 속속 들어왔다. 젊은 사업가들의 커뮤니티, ‘EO 코리아’의 정기모임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날은 특별히 ‘신동아’가 제안한 좌담회가 예정돼 있었다.
EO는 ‘Entrepreneurs Organization’의 약자로 미국 버지니아 주에 본부를 둔 국제적인 CEO 조직이다. 연간 1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 오너, 공동설립자, 지배주주이면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조동혁 한솔그룹 명예회장이 이 모임을 한국에 들여왔고, 서로 경험을 나누면서 성공의 열정을 공유하자는 취지에 동감한 기업인 2∼3세, 젊은 창업자들이 매달 이 모임에 참가하고 있다.
이 모임에는 현재 59명의 기업인이 등록돼 있다. 한솔그룹 조동혁 명예회장, 구자두 LG벤처투자 회장의 차남 구본완 상무, 넥센타이어 강병중 회장의 차남 강호찬 상무, 광동제약 최수부 회장의 장남 최성원 사장, KCC정보통신 이주용 회장의 차남 이상훈 시스원 상무, 이화공영 최종찬 전무 등 기업인 2∼3세가 절반 정도 된다. 그리고 신용한 맥스창업투자 사장, 백승택 네오싸이언 사장, 인크루트 이광석 사장, 오재철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 사장, 이강덕 비즈엠알오 사장 등 창업가들이 또 절반을 차지한다.
‘신동아’가 제안한 좌담회에는 이들 가운데 20여 명의 기업인이 참석했지만, 참석자의 이름과 발언자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야 속내를 제대로 털어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좌담회 패널로 참가한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정승일 박사는 “참석자들이 기업인의 처지만 두둔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솔직한 반성과 경영 현장의 생생한 고충을 들을 수 있어 유익했다”며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해 정부나 국민이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 오늘 패널로 참석한 정승일 박사는 ‘신동아’ 1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기업인의 모험심을 가로막는 요인은 주주자본주의라고 지목한 적이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투자가 위축된 것은 국내외 투자자의 권한이 막강해지면서 이들이 기업의 장기적 투자보다는 단기적 성과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투자자의 간섭이 도를 넘었다는 얘긴데요.
“저는 연 10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정보통신(IT)기업을 운영합니다. 6년 전에 외국계 금융기관으로부터 300억원을 투자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는 IT 바람이 불 때여서 주당 16만5000원으로 평가하더군요. 코스닥 예비심사를 통과해 기업공개 일정만 남기고 있는데, 버블이 꺼지면서 결국 공개하지 못했죠.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그 금융회사가 우리에게 시시콜콜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기 시작했어요.
한번은 70억원을 주고 어느 회사를 인수하려 했어요. 영업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꼭 필요한 회사였는데, 그 금융회사에서 인수하면 얼마나 이익이 되냐고 물어요. 그래서 인수한 뒤 1년차엔 적자고, 다음해엔 수지를 맞춰서 3년차에 이익을 낼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단기적으로 이익이 안 된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어요. 결국 인수하지 못했죠. 그 회사는 지금 코스닥에 등록해서 돈 잘 벌고 있어요. 그때부터 금융회사 무서운 줄 알게 됐죠. 결국 예금이자 6%를 주고 투자받은 돈을 전부 되돌려줬습니다.”
‘양아치’ 같은 헤지펀드
“그래도 그 금융회사는 양반이에요. 저는 나스닥에 상장한 회사의 임원을 맡고 있는데, 미국 월가엔 양아치 같은 헤지펀드도 많아요. 그들은 이상한 정보를 갖고 우리를 괴롭혀요. ‘너희 회사 대주주와 관계있는 기업과 내부거래를 하는 것은 아니냐’ ‘왜 시장에서 3위 하는 기업과 거래하느냐, 특정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며 따집니다. 그러면서 은밀히 사업적인 제의를 해요. 이런 펀드들 때문에 영업할 때 은근히 신경이 쓰입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일본 업체 중에 우리와 뜻이 맞는 기업과 영업 관계를 맺었어요. 예전엔 사업상 옳다고 판단하면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는데, 이젠 펀드들이 일일이 간섭하니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해야 해요. 이들과 계약하기 전에 왜 이 회사와 거래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느라 고생만 하죠. 사장이 사업엔 신경 쓰지 못하고 주주들이나 금융회사 눈치를 보게 돼요.”
▼ 금융기관의 브레이크가 때로는 이득이 될 때도 있지 않습니까.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주기도 하고요.
“그런 점보다는 단기적 경영성과를 내도록 종용하는 게 더 큰 문제죠. 투자를 받아본 경영자라면 공감할 겁니다. 분기에 한 번씩 사업 설명회를 개최할 때, 장기적인 계획을 발표하면 듣지도 않아요.”
“심지어 인사권에도 관여합니다. 우리 회사의 강점은 저렴한 인건비 구조였어요. 이 때문에 재벌그룹의 계열사와 싸워도 단가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금융기관이 직원의 인건비를 높이라고 해요. 그렇게 낮은 임금으로는 경쟁력 있는 서비스를 할 수 없다는 이유였어요. 돈을 빌린 처지에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의 연봉을 30% 올려줬어요. 임금이란 게 올리기는 쉬워도 일단 올린 뒤에는 내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불합리한 게 그것뿐인가요? 은행에서 ‘꺾기’ 관행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물론 꺾기 했냐고 물어보면 안 했다고 하죠. 서약서에도 그렇게 써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에요.”
▼ 펀드를 운용하는 경영자께선 이런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단기적인 성과를 내라고 압박하는 펀드도 있고, 그렇지 않은 펀드도 있어요. 물론 모든 투자자가 이익을 내려고 하는 마음만은 똑같죠. 그런데 펀드를 조성한지 얼마 안 된 곳은 실적 때문에 경영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펀드는 피해야죠.”
가족이라도 살리려면…
▼ 소액주주운동이나 ‘장하성 펀드’ 같은 것이 기업 경영에 걸림돌이 된다고 봅니까.
“제 경험으로는 소액주주의 권리를 강화하는 것이 기업인의 의욕을 저하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기업주의 부실경영을 감시하고 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데 일조합니다. 그러나 소액주주 관련법이 회사의 장기적인 이익과 관계없는 소모적인 송사(訟事)에 악용된다면 문제가 될 겁니다. 직접 목격한 바로는 주주총회에 출석하는 소액주주들이 ‘총회꾼’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요. 외국에서 경영학 공부를 해서 해외 사례에 대해서는 좀 압니다. 대표이사와 대주주가 금융기관 대출 입보를 서야 한다는 것은 선진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제도예요. 얻는 수익과 비교해 오너가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위험이 너무 큽니다. 예를 들면 회사 지분의 일부를 소유한 대주주 또는 지분을 소유하지 않은 전문경영인에게 회사 부채 상환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우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납득이 가질 않아요.”
▼ 돈을 빌릴 때 연대보증을 서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말씀인가요.
“전문경영인은 대부분 연대보증을 서지 않으려고 하지만, 오너는 무조건 보증을 서야 합니다. 사업을 하다 망하면 나는 물론이고 가족과 처가까지 고통을 받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져요. 만일 회사 주주들에게도 연대보증을 서라고 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안 설 겁니다. 오너는 책임은 다 지면서도 권리는 여타 주주와 똑같아요. 책임을 많이 지는 대주주 오너에겐 의결권 행사를 많이 할 수 있는 황금주를 줘야 합니다.”
“저는 사업을 10년 넘게 했는데, 요즘엔 좀 불안합니다. 2∼3년 전부터 투자도 줄이고 있어요. 망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죠.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기 프로그램’이 없거든요.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엄청난 인맥과 자본, 그리고 시간을 쏟아부었는데, 실패한다면 도저히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아요. 외환위기 전엔 사업의 위험을 기업가와 은행, 정부가 나눴는데, 지금은 온전히 기업가의 책임으로만 남아요. 중소기업주들이 사업에 실패하면 목숨을 끊지 않습니까. 재기할 길이 막혀 있어서 그래요. 가족이라도 살리자면 자신이 죽는 수밖에 없어요.”
부도난 회사의 사무실. 한국에선 사업하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기가 힘들다.
“사업에 실패하면 기업가와 투자한 벤처캐피털들이 분담해서 책임져요. 물론 우리도 벤처캐피털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지만, 있는 밑천 없는 밑천 다 드러내야 합니다. 부모님, 장모님 돈도 다 나와야 하고요. 망하면 ‘세컨드 찬스’가 없는 거죠. 사회도 기업가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아요. ‘너 한 번 말아먹었지? 그럼 끝이야’라며 폐기처분합니다.”
거짓말 하는 국민
▼ 증권시장에 기업을 공개하면 주주들로부터 경영성과를 내라는 압력을 받을 텐데. 이 과정에서 경영자가 장기적인 성장을 도외시하고 무리해서 실적을 올리는 경우는 없습니까.
“언젠가 코스닥 등록 기업 사장이 내게 30억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어요. 코스닥에 공시를 했는데, 매출이 30억원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 돈을 빌려주면 다음해에 원금과 컨설팅 비즈니스 명목으로 3000만원을 주겠다고 제안해요. 그 회사는 연매출 250억원을 올리는 곳이어서 굳이 30억원쯤의 매출은 더 잡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빌려서 한다면 우리에게 주는 돈뿐 아니라 부가세도 더 내야 하죠. 회사로선 뻔히 손해 보는 장사인데도 주주들 압력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걸 보고 안타까웠어요.”
▼ 주제를 좀 돌려보죠. 한국에서만 겪는 문화적 요인 때문에 투자를 주저한 적은 없습니까.
“저는 종종 한국의 국민성이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안 그런 분이 더 많지만,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요. 우리 사회가 거짓말에 관용을 베푸는 게 문젭니다. 반칙이나 편법이 횡행하는 나라예요. 이게 기업인의 모험심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합니다. 회사를 인수하거나 새로운 설비를 사들일 때 늘 망설이는 것은 상대를 신뢰할 수 없어섭니다. 진실하지 않은 정보를 주는 예가 빈번해요. 이 때문에 투자가 중간에 좌절된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도 나를 믿지 않는 것 같아요. 서로 신뢰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 신뢰라는 게 원래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외국 사람과 비즈니스를 하면 그렇지 않아요. 기본적인 검증이 끝나면 내 말을 믿어줘요. 한국은 달라요. 사기당할 뻔한 사례가 너무 많아요. 대기업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 사인한 계약서라도 오늘 휴지조각이 됩니다. 실제 3년 계약을 맺고도 1년 만에 계약해지 통보를 받아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대답도 없어요.
알고보니 퇴직하는 회사 임원에게 그 계약건을 맡긴 겁니다. 회사 오너가 별다른 생각 없이 은퇴 임원에게 한몫 떼어준 게 우리로선 막대한 손해가 되는 거죠. 한두 번이 아닙니다. 계약관계에 신뢰가 생기지 않으면 회사로선 마음놓고 새로운 투자를 할 수 없어요. 내일을 모르는데 어떻게 투자하겠습니까.”
▼ 열심히 사업하는 분들도 있지만 부동산 투자에 더 신경 쓰는 기업가도 많지 않습니까.
“사업으로 버는 것보다 재테크로 버는 게 더 많다는 걸 기업가라면 다 압니다. 인쇄소를 경영하는 분을 아는데, 지난 30년 동안 일해서 20억원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주출판단지가 생겨 땅을 샀더니 시세차익만 40억원에 달한다고 해요. 30년 동안 번 돈이 1년 동안 부동산값 오른 것만 못하죠. 주변에 이런 사람 숱하게 있어요. 힘들게 기술개발을 왜 합니까. 부동산 광풍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도 이렇게 돈 번 사람이 많아서예요.”
“제 경우에도 그랬어요. 수입자동차를 판매하는 회사도 경영하고 있는데, 지난해 1억5000만원 적자를 봤어요. 그런데 경기도 일산에 세운 서비스센터 땅값이 올라 장부상으로는 30억원을 벌게 됐어요. 순간, 비즈니스를 해야 하나, 땅을 사야 하나 고민했어요(웃음). 기업가라면 이런 유혹을 많이 받을 거예요.”
공정경쟁 시장은 없다?
▼ 잘못된 상거래 관행 때문에 투자를 망설이는 경우도 있을 텐데요.
“그것은 제가 얘기하면 좋을 것 같네요. 투자를 늘리는 목적은 우리가 생산한 제품의 품질을 높여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섭니다. 좀더 합리적인 소비자에게 제품이 팔려 그 이익으로 직원과 연구원에게 월급을 줄 수 있죠. 그렇게 되면 이들은 이 돈으로 소비하고, 나라 경제가 돌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장이 공정하지 않다는 데 있어요. 대기업에 납품하려는데 계열사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어요. 고객을 만날 수 없는데 어떻게 투자하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해도 대기업 연줄을 잡지 못하면 무용지물입니다. 삼성 애니콜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액세서리? 이 분야도 공정경쟁 시장이 아니에요. 백화점 쇼핑백? 여기도 공정한 시장이 아닙니다. 판매 루트를 찾을 수가 없어요. 이 때문에 그나마 공정입찰이 진행된다는 공공시장에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는 거죠.”
“저는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요. 기술혁신을 하려면 좋은 인력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직원들에게 로열티를 기대하면 바보예요. 다른 회사에서 월급 좀 더 준다고 하면 당장 그 회사로 옮겨가죠. 대기업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1년마다 옮기는 엔지니어도 부지기수예요. 수시로 움직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투자하기가 겁납니다.”
“얼마 전에 들은 얘긴데요. ‘기업활동을 통해 명예를 얻고자 하는 자는 망할 것이고, 돈을 얻고자 하는 자 먹고 튀어라(웃음)’고 합니다. 한국에선 기업가가 명예를 얻기 힘들어요. 외환위기 이후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은 숨어 지냅니다. 조그마한 흠집이라도 알려지면 한마디로 ‘아작’이 납니다. 사회가 매장시키는 분위기예요.”
▼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한국은 ‘유전무죄(有錢無罪)’라고, 기업가에 대해선 처벌이 덜 하다는 비판이 있어요. 미국의 엔론 사태를 보세요. 기업가에게 수백년의 구형을 내리지 않습니까.
“엔론 사태를 계기로 미국 사회가 엄청난 폭탄을 맞았는데, 뒤집어서 보면 미국 사회는 그만큼 기업인이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엔론 사장에게 엄청난 죄를 물은 거죠. 우리는 반대예요. 기업인이 부정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요. 제 처지를 두둔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기업가들을 만나보면 사회적 성취욕이나 명예욕이 돈 욕심보다 더 많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기업가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우면서도 평가는 좋지 않게 해요. 이중적인 태도죠. 이 같은 분위기에서 기업가는 모험을 통해 얻는 성공보다 현재를 지키는 것에 만족하고 있어요.”
“현실은 상식 밖”
▼ 기업인의 기를 살리는 데 필요한 제도나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씀해주시죠.
“아무래도 세금 제도가 문제인 것 같아요. 상속세의 경우 30억원까지는 가업(家業)상속 명목으로 공제를 받습니다. 이 같은 한도를 확대해서, 성실하게 신고하면 세금을 줄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것 참 좋은 아이디어네요. 제 경우엔 법인세를 줄여줬으면 하는데…. 우리 회사는 인건비로 연간 80억원이 나갑니다. 그런데 영업이익은 20억원도 안 돼요. 은행거래를 하자면 신용도가 높아야 하는데, 결국 무형자산을 많이 쌓아 이익규모를 늘렸어요. 그 때문에 법인세를 더 냈습니다. 신용도 때문에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한 달 동안 끙끙 앓았죠. 법인세를 줄여주면 이걸 인건비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고용을 많이 창출하는 기업에 법인세를 감면해줬으면 합니다.”
“세금 얘기가 나왔으니 저도 할 말이 있어요. 한국의 세무회계는 일본식 체계를 들여왔고, 재무회계는 미국식 체계를 들여왔어요. 세법은 일본식이고 상법은 미국식이니 잘 맞지 않아요. 재무회계는 발생주의에 근거하고 세무회계는 현금 베이스로 매깁니다. 예를 들어 미수금이 생겼는데 그 회사가 부도가 났다면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합니다. 세무회계에선 돈을 받지도 않았다는 점을 인정해주지 않아요. 미수금으로 이익이 줄었는데도 세금은 줄지 않아요. 불합리합니다.”
“이거, 우리 얘기가 밖으로 나가면 좋지 않을 것 같은데(웃음)…. 한마디로 현실은 상식 밖입니다. 회사에서 이익을 많이 내면 회사 세무 담당자들이 ‘이익을 줄여야 한다’고 건의해요. 이익이 매출의 5%를 넘으면 세무조사 대상이 된다고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돈으로 지원하면 샌다’
▼ A기업 대표께선 오늘 너무 조용하신 것 같습니다.
“아는 게 없어서요(웃음)…. 글쎄요. 제 생각엔 5대 재벌그룹을 제외하면 웬만큼 투자해봐야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험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예전엔 정부가 기업의 손해를 보전해 줬지만, 외환위기 이후로 이런 관행이 사라졌어요. 기업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요. 수천억원이 들어가는 투자를 해야 하는데 5대 그룹이 아니라면 주저할 수밖에 없죠.”
▼ 투자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도태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50년 이상 생존한 기업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웃음).”
▼ 중견기업은 그렇다 치고, 중소기업이 투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투자할 게 없어요. 1990년대 얘기를 잠깐 하면, 우리나라 통신시장이 열리면서 거기에 매달린 중소기업이 엄청나게 늘어났어요. 1999년 코스닥에 등록했던 대부분의 기업이 통신산업 관련 업체였죠. 그때는 통신산업이라는 거대 투자처가 있었고, 거기에 따라 중소기업이 쫙 도열했어요. 지금은 그런 거대 투자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기업이 수십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그렇다면 정부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도록 대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도 방법일 겁니다.”
“그 제안에는 반대합니다. 만일 대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면 새로운 중소기업이 생기기는커녕 위장 계열사가 생길 겁니다. 지원금액이 이쪽으로 샐 수 있어요. 실제로 그런 경우를 많이 봤어요.”
▼ 아까 말씀하신 대표께선 다른 의미로 상생을 주장한 듯한데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면 어떨까요? 현재 국민은 기업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어요. 이걸 긍정적인 쪽으로 돌려야 합니다. 재벌기업이 욕먹는 것은 과거의 잘못이 누적된 결과로 봐야 해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젠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야죠. 이를 위해 기업가가 먼저 반성하고, 그 뒤에 정당한 사회적 평가와 보상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업가 정신이 살아나고, 투자가 활성화할 겁니다.
지금까지 숱한 기업가가 실패했지만, 다시 일어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아까도 거론했듯 기업가가 유한책임으로 경영할 수 있다면 좀더 모험심이 발동할 것 같아요. 계속 기업가의 무한책임이 강조되면 기업인은 실패에 대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를 빼돌리고, 보장책으로 쿠션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할 겁니다. 기업가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에 이르러야 합니다.”
“회사 문 닫고 퇴근해라”
▼ 이번엔 서비스업종 기업인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아직 초보 사업자라 쓸 말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소비자 처지에서 보면 요즘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돈은 많은데 투자는 하지 않아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엔 정부와 언론매체가 대립하면서 발생하는 불안감도 한몫하는 듯해요. 우리는 언론을 통해 세상을 파악할 수밖에 없어요. 언론이 불안하다고 하면 불안한 거죠. 정부가 언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언론도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여기서 불안감이 파생되고, 세상은 진짜 불안해집니다. 그러니 소비를 줄이게 되죠.”
▼ 이번엔 좀 껄끄러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한국의 1세대 경영인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분들이고 적극적이며 열성적이었죠. 그러나 기업인 2∼3세는 대개 소극적입니다. 외국에서 공부도 많이 했지만, 오히려 이게 도전정신을 막는 것 같아요. 모험을 감행하기보다는 현상을 유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은 아닌지요.
“제가 2세인데요. 회사에 첫 출근할 때 아버지께서 ‘꼭 회사 문 닫고 나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회사를 나올 때 찜찜한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죠. 2세 경영인을 나쁘게 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책임감이 더 큽니다. 아버지의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니까요.”
“저는 3세 경영인인데 경영자의 능력이 천차만별이라 일률적으로 2∼3세의 능력을 일반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도 2세 경영인이잖아요. 가족기업 경영과 전문경영인체제의 장단점 적용 여부는 시장에 맡겨야 합니다. 공시제도와 감사제도의 공정성을 확보해 주식시장에서 주주들이 심판할 수 있을 겁니다.”
▼ 2∼3세들이 ‘관리형’이라는 의견에 동의하는 분은 없습니까.
“저는 원래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어쩌다가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는데, 사실 제가 사업을 망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은 분명 있어요. 책임을 더 느끼기 때문에 소극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분야인 IT 산업은 변화의 속도가 빨라 앞을 예측하기가 힘들어요. 과감한 투자가 어렵죠. 웬만큼 투자해선 눈에 띄지도 않고요. 아버지 세대의 사업과 우리가 벌이는 사업의 성격이 달라요.”
정치권력 콤플렉스
▼ 기업인 2세 중에 회사 임원들을 장악하지 못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30대 초반에 회사에 들어와보니 임원 평균 연령이 48세예요. 변화하자고 하니 저항이 컸어요. 변화 방향에는 공감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자리와 조직에 미치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계에 이른 사업부를 없애자고 했더니 하도 반발이 심해서 없던 일로 한 적도 있습니다.
더욱이 임원마다 각기 사조직이 있다보니 사내(社內) 정치를 정교하게 해야 합니다. 한 번은 모 차장을 일 때문에 나무랐더니 즉각 모 임원이 올라와 항의를 해요. 리더십이 있는 2∼3세는 ‘사내 정치’ 하는 법을 알고 있을 겁니다. 정치를 못하면 회사 안팎에서 독불장군이라는 소릴 들어야 합니다. 저도 사업하면서 때 많이 묻었어요. 누구를 움직여야 할지 늘 고민이에요. 숱한 비용을 치르면서 깨닫는 중이죠.”
▼ 정치권력과의 관계가 왜곡돼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습니까.
“저는 대학 때 좌파 서클에서 활동했는데, 재벌기업 사장을 6년 하니까 시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정치권력, 행정권력, 기업권력은 서로 끊임없는 전쟁을 벌입니다. 가장 짧은 권력이 정치권력이고, 그 다음이 행정권력, 제일 긴 권력은 기업권력이에요. 물론 불변의 명제는 ‘모든 기업은 다 망한다’는 것이죠. 우리 회사도 궁극적으로 망하겠죠. 망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뿐입니다.
가장 짧은 권력은 콤플렉스가 있게 마련이에요. 그 때문인지 정치인은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있어요. 나는 정치인을 만나면 ‘처자식 밥이나 먹여봤냐’고 물어봅니다. 그럼 격론이 벌어지죠. 조만간 삼성의 에버랜드 편법 증여에 대한 판결이 나올 텐데, 그게 왜 편법입니까? 당시엔 합법이었어요. 저는 삼성을 옹호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상속은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주제입니다. 기업인은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해요. 삼성은 수많은 법 테두리 안에서 절세(節稅)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거죠. 이걸 보고 정치권이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더 많이 토해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어요.”
한국의 존망이 달렸는데…
▼ 현대자동차그룹도 상속 문제로 정몽구 회장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현대차그룹의 오너가 자식에게 대주주 지위를 물려주려면 최소한 1조원 이상은 있어야 합니다. 불가능할지 몰라요. SK와 소버린 사태의 비추어 보면 2조1000억원이면 현대차그룹을 인수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어요. 적대적 인수합병이 될지도 모르죠. 2대주주와 3대주주인 외국계 주주의 지분을 합하면 정씨일가 지분보다 많아요.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회적 파장을 고려하면 정말 걱정스러워요.
다임러의 현대차 지분이 10%대였는데, 캐피탈그룹과 붙으면 현대차를 인수할 수 있어요. 물론 약정서에 얼마 동안은 경영권을 침해하지 않겠다고 썼죠. 그러나 그건 종잇장에 불과해요. 주주총회에서 회장 선출하면 끝입니다. 소송은 그 다음 문제지요. 주주총회를 열면 저라도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임러가 인수했으니 주가는 더 올라갈 것으로 보지 않겠어요? 과연 누가 정씨 일가를 지지할까요?
자, 그렇게 정씨 일가를 끄집어 내리는 데 성공했다고 쳐요.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겁니까. 기업의 존망(存亡)이 갈립니다. 업종 특성에 따라 자동차산업은 패밀리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게다가 현대차엔 수백만명의 협력업체 직원이 있죠. 한국 경제의 존망이 달린 문제인데도 답이 안 나와요.
제가 현대차 오너라면 미국이나 중국으로 본사를 옮기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못할 것도 없죠. 기업인 출신의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한국의 기업인 천시(賤視)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