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어낚시통신’ ‘사슴벌레 여자’ 등 시적 감수성이 뚝뚝 묻어나는 소설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윤대녕(尹大寧·45). 문학청년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의 부채감에 시달리던 그는 ‘신화’라는 거대한 우주에 빠짐으로써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작품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해마다 첫눈이 오면 집을 나가서는 몇 주를 떠돌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를 둔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니 그 두 남자를 둔 어머니와 문희라는 여자의 이야기이도 하다.
소설에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한다. 여자는 다 예쁜 거라고, 그러나 여자는 영원의 나라를 왕래하는 철새와 같은 존재라고…. 참으로 무섭고도 무서운 말이다. 집 나가는 아내에게 지친 아버지가 잠시 마음을 둔 여인이 문희다. 술집여자인데 어린 시절 주인공에겐 마음속 화인(火印)처럼 남은 여인이다. 세월이 흘러 사십대가 된 사내는 강화도의 ‘문희’라는 술집에 있는 문희를 찾아간다. 할머니가 된 문희를 만나고 사내는 무너진다.
뒤미처 참고 참았던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급기야 나는 늙은 문희의 품에 쓰러져 소리내 울고 있었다. 희번덕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늙은 문희가 이윽고 가슴에 나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고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그러다 함께 통곡이라도 하듯 이렇게 내뱉었다. “아이고, 내 새끼! 그동안 가슴에 뭔 일이 있었던 게구나. 틀림없이 그렇구나. 불쌍한 내 새끼, 이걸 어떡하나.” |
읽고 나니, 인간은 영원의 나라를 왕래하는 철새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다가 오랜만에 같이 울었다. 내가 울어서 내가 기뻤다.
작품과 상품의 경계선
소설가 윤대녕은 그동안 자주 만나던 사이라, 정색을 하고 인터뷰를 한다는 게 어색했다. 그래도 일은 일이다 싶어, 마주 앉아서는 ‘자 이제 시작합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도 나도 픽 웃음이 나왔다. 뭘 물어보지? 그는 나의 비밀 하나 둘 정도는 알고 있고, 나 역시 남에게는 말하기 싫은 윤대녕의 에피소드 하나 둘 정도는 갖고 있는 사이다. 책이 나왔다는 소식은 언제나 반가웠고, 그의 독자가 좀더 많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나도 어쩌면 윤대녕의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다.
그의 소설에서 나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보았을까. 문득 반짝거리면서 떠오르는 것이 은어다. ‘은어’와 ‘은어낚시통신’은 비록 초기 작품이지만 윤대녕이라는 작가의 가운데 있다. 그는 여기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또한 벗어나 있지 않다. 벗어난 것은 작가인데, 독자는 아직도 윤대녕의 ‘은어’를 가까이 하기 때문이다.
우리 문단의 원로인 ‘인연’의 피천득 선생은 이제 100세가 가까워진다. 수년 전 어떤 이가 선생의 글을 받고 싶어 백지수표를 들고 찾아갔다. 선생의 어떤 글이라도 괜찮으니 한 편만 써달라고 간곡히 원고청탁을 했다. 그때 선생은 나지막이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글을 씁니다. 첫째는 돈을 벌기 위해, 둘째는 명예를 얻기 위해, 셋째는 전작보다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쓰기 위해. 저는 이제 이 세 가지가 다 필요 없어서 글을 쓰지 않습니다.”
물론 선생의 초기작인 ‘인연’보다 다음 작품들이 더 좋은지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마음은 작품의 평가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지금 쓰는 작품이 항상 전작보다는 더 좋은 작품이라고 마음에 품고 가는 존재다. 마치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것처럼.
작가는 속 깊은 나무다. 나이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 몸통이 커져야 사람은 그 나무의 나이를 짐작한다. 세상에서 속으로 숨어 있는 것들의 속성이 그러하다. 작가의 변화도 그와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거대한 나무는 우뚝 선다. 예술작품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독자는 늘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작품과 상품의 경계선이 선명해진다.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상품을 생산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건 다른 전문가들의 몫이다. 윤대녕의 소설세계는 작품이고, 그것은 예술작품으로서 존재한다. 그는 예술가다. 이번에 나온 소설집인 ‘제비를 기르다’에서 나는 한 작가의 지고지순한 세계를 보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의 변하지 않는 사랑이었다.
고흐는 평생 한두 편의 작품을 싼 값에 팔았다. 슈베르트는 한겨울에 난로에 땔 연료가 없어 덜덜 떨면서 오선지에 엎드려 있었다. 물론 괴테나 바그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광을 누린 작가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작가의 생몰(生沒)이나 부귀영화보다 그 작품만을 사랑하고 또 기억한다.
고독한 아이
이제 윤대녕은 40대 중반을 넘어섰다. 나이테가 많이 늘어나 삶과 문학도 넓고 깊어졌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지금은 작가 생활의 한 가운데쯤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오십, 육십이라는 나이가 보이는 나이다. 인간으로서도 인생의 후반이 보이는 지점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이다.
사십 중반은 참 많은 생각이 들면서도 단순해지는 나이이기도 하다. 열정은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침착하게 사물을 응시한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젊은 시절, 윤대녕은 우리 역사의 전환점인 1980년이라는 이정표를 돌아서 참으로 멀리도 왔다.
우리는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나누기로 했다. 모든 존재는 자궁에서 시작한다. 그의 문학적 자궁은 어린 시절이다. 윤대녕의 유소년 시절은 그리 평범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열쇠인지도 모른다. 그는 집안사정으로 부모가 모두 도회지로 가고, 조부와 삼촌들의 품에서 성장한다.
“조부는 제 문학의 아버지예요. 그 큰 집에 손자가 나 하나였어요. 늘 머리 쓰다듬고 품에 안아주시면서 제게 넌 크게 될 것이라고 암시해주었지요.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세상은 아주 아주 넓단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단다.’ 기가 막힌 말씀이지요. … 항상 말이 없었던 조부와 삼촌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었지요. 참으로 속 깊은 분들이었고, 내면에 대한 궁금증이 일종의 창작동기라고 하면 과장일까요?”
할아버지의 품속에서 아주 어린 나이에 한글을 깨우치고, 네 살 때부터는 한자를 배운 고독한 소년이었다. 시골집에서 오직 책밖에 읽을 것이 없었다. 침묵과 독서, 조용한 공기의 흐름은 한참 뛰어놀아야 할 아이를 과묵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하늘을 보고, 물을 보고, 할아버지를 보고, 삼촌들을 보았다. 그 넓은 할아버지의 집과 마을에는 놀이동산도 없었고, 장난감도 없었다. 아이가 가지고 노는 것은 고독이었고, 침묵이었다.
“조용한 어른들과 사는 아이였죠. 그런데 그것이 어떤 심리적인 압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좀 내성적인 연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아홉 살 되어서야 부모와 같이 살게 된다.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대학에 가고 독립할 때까지 계속 힘겨운 나날이었어요. 아버지를 생각하면 슬프고, 고독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제 마음의 고향은 늘 할아버지가 계시는 시골집이었으니까요.”
습작품을 불태우다
그가 소설가가 된 이유는 의외로 선명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로 자신의 고독을 품었던 한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기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학교에서 주는 독서상을 받았다. 학교도서관의 도서대출증에 기록된 한 해 빌려 읽은 책이 300권을 넘어선 것이다. 읽으면 쓰고 싶은 것이다. 윤대녕은 중 3때 처음으로 원고지 50매가량의 단편을 쓴다. 유치환의 시 ‘깃발’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동명의 작은 소설을 쓴 것이다.
이런 아이는 항상 ‘따’를 당한다. 수업시간에 교과서 대신 ‘책’을 읽다가 선생님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시 쓰다가 ‘폼 잡지 말라’는 친구들의 비웃음 사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과 친구들은 지금의 윤대녕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상당량의 작품을 쓴다. 작가의 어린 시절 작품은 어떠했을까? 혹시나 싶어 중·고교 시절에 쓴 작품을 찾아볼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라면 박스로 4개 정도 되는 원고를 불태워버렸습니다.”
필자 역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쓴 소설들을 모조리 앞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린 적이 있다. 직접적인 이유는 졸업 때 거의 모든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응모한 소설이 다 떨어져버린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소주를 마시면서 원고지를 불태우다가 나는 무서운 광경을 목격했다. 다 타버린 원고지는 타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만년필, 볼펜의 글씨 자국이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그것은 바람이 불어 다 흩어버릴 때까지 내 눈앞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그도 아마 불타버린 원고지의 펜 자국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을 윤대녕은 고등학교 때 했고, 나는 대학 때 했다. 시인이나 소설가에게 이런 과정은 통과의례 같은 것이리라.
작가의 성장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시간들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벌처럼 한 마디를 쏘았다. 몸과 마음이 따가왔다.
“오직 글 쓰고 책 읽는 동안만 행복했어요.”
한 줄기 빛 ‘신화’
윤대녕은 서로 다른 세 개의 세계를 품고 살아간다. 인간으로도 작가로서도 그 세계는 그의 우주이기도 하다.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이 세 개의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물과 나무처럼, 별과 어둠처럼, 혹은 여자와 남자처럼 말이다. 그것은 신화와 불교와 한문학 혹은 동양고전이다.
문학의 원형은 신화의 상징 속에 들어 있다. 소설은 이야기이고, 신화는 인간이 문명 이전에 자연에 대한 외경심으로 만들어낸, 결국 인간의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세계는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윤대녕의 신화 상징성은 여러 비평가의 상찬과 혹평으로 어지럽다. 소위 운동권들의 윤대녕 비판은 그 어지러운 시절에 무슨 ‘은어’냐는 것이다. 그들에게 은어는 잡아먹는 고기일 뿐이다. 같이 배가 고파도 어떤 사람은 은어를 잡아먹고, 어떤 사람은 은어를 작품으로 남긴다. 이것은 시대의 분위기가 빚어낸 비극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민중시가 판을 치던 시기에도 시운동 동인들은 신화의 상징성이 가득한 개성적인 시를 썼다. 윤대녕에게도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돌부리처럼 걸려 있다.
“재수하던 시절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어요. 이것은 일종의 부채감이었어요. 동기들은 감옥 가고,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시대의 아픔을 나누고 있었는데 저는 멀리 떨어져 있었죠. 고의는 아니었지만 저는 친구들과 같은 버스를 타지 못하고 다음 차를 타는 후발주자로서 부채감이 있었어요.”
이 부채감은 군에 갈 때까지 이어진다.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운동권의 역사관 역시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폭력이다. 윤대녕은 괴로웠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한 줄기 빛처럼 발견한 것이 바로 오래된 이야기, ‘신화’다.
인간의 역사나 종교는 모조리 신화로 채색되어 있다. 윤대녕 작품의 시원(始原)은 신화의 상징성이다. 그것은 태초가 침묵과 어둠으로 가득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한 인간은 한 우주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감성, 바다와 같은 넓고 유장한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거대한 우주에 빠짐으로써 비로소 저는 숨을 쉴 수 있었어요.”
신화학자 김열규 선생의 책을 탐독하고 불문학을 전공했으니 롤랑 바르트나 바슐라르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바슐라르는 한때 내 문학의 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미학적인 문장은 역시 조부와 삼촌들에게서 물려받아 피와 살처럼 생래적인 것이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대학 강의실은 언제나 텅텅 비어 있었다. 학생들은 거리로만 나돌아다녔다. 화염병과 최루탄 가스는 도서관의 책 냄새처럼 교정에 가득했다. 강원도 화천에 있는 7사단에 입대한다. 군대에서도 밖에서 우편으로 부쳐온 시집을 성경처럼 읽었다고 한다. 그때 군복을 입고 읽은 100권의 시집은 어쩌면 지금의 그의 문장에 그림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제대 후엔 신춘문예에 응모한 작품이 탈락하고, 현실은 너무 비감했다.복학하기 싫어 절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두 번째 윤대녕의 상징세계가 탄생한다. 바로 불교다. 절간 마루에서 굴러 다니던 불교 잡지나 불경을 읽다가 어느 순간 그 세계에 ‘쑥’ 빠져버렸다. 그리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육조 혜능(慧能)이, 스승인 오조 홍인(弘忍)선사가 설법하는 금강경의 이 구절을 듣고 깨우침을 얻었다는 일화를 떠올리게 했다.
“마땅히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이 마음을 써야 한다(應無所住 而生其心).”
마음이라는 것이 어느 곳에 머무는 순간 인간의 고통이 시작된다는 뜻일까. 어디에도 집착이 없다면 고통도 없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마땅히 어디에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욕심을 불러일으킨다. 윤대녕은 이 머무름이 없는 마음을 찾아 헤맨 것은 아닐까. 절에서 절로 돌아다니다 출가하려고 청하자 스님이 이렇게 그의 마음을 거절했다.
“당신은 언젠가 세상으로 다시 내려갈 사람이다.”
그때는 이 세상의 지독한 윤회가 거듭되지 않는 삶을 꿈꾸었다. 절에서 받아주지 않자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듯이 공주 시내에 내려가 술로 세월을 보낸다. 스님이 말한 ‘언젠가는 내려갈 사람’이라는 예언이 적중한 것일까. 공주의 한 찻집에서 그해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이제하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라는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데 왜 나는 절에서 머물려고 하는가. 제목을 보는 순간부터 확 끌리는 작품이었다. 알에서 깨어남이었다.
“왜 그렇게 그 소설이 좋았는지,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내면의 소리를 들었어요. 소름이 돋더군요. 그 길로 절에서 내려와 문학을 하게 됐습니다.”
시적 상상력, 회화적 감수성
어린 시절, 그의 성격을 형성한 것은 침묵과 고독이었다. 청년시절 역시 고독한 공간인 절을 순례하게 된다. 이렇게 그를 둘러싼 것들은 차갑고 말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8년에 그는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원(圓)’이라는 소설로 등단한다.
그것이 작은 시작이었다. 그리고 공채를 통해 기업체에 신입사원으로 넥타이를 매고 출근한다. 낮에는 샐러리맨으로 일하고 밤에는 문학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전통적인 리얼리즘 기법으로 쓴 소설 ‘어머니의 숲’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았다. 1990년의 일이다. 배다른 자식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로, 당시 편집장이던 소설가 구효서씨에게서 당선 전화를 받았다. 그 인연으로 구효서씨와 만났다.
1994년 단편집 ‘은어낚시통신’을 독자에게 선보이면서 전업작가의 지난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로서 한순간도 게을렀던 적이 없다. 장편소설 ‘미란’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외에 단편집 ‘남쪽 계단을 보라’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 산문집 ‘어머니의 수저’ 등을 낸다. 그는 부지런했고 열심이었다. 이렇게 살아온 그가 가끔 “넥타이 매고 출퇴근하는 생활이 그립기도 하다”고 한다. 왜일까?
1989년은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개인과 내면의 문학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윤대녕의 문학은 은어처럼 단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인간 존재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막연하지만 저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변혁기 우리 문학에서 아직 시도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이 있어요. 작가는 시대 속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시원(始原)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윤대녕에 대해 다소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평론가 한 사람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학생들에게 1990년대 개인적인 삶의 모양은 윤대녕의 소설을 읽으면 된다고 했다. 소설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도 그의 작품, 즉 ‘은어낚시통신’을 읽어보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윤대녕의 세계가 너무나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했던 그 평론가 역시 이번 작품집 ‘제비를 기르다’를 읽고서는 내 말에 동의했다. “내가 잠깐 잘못 본 것 같다”며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인들은 작품으로 대화하기도 한다.
그의 문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런 언어를 사용한다. ‘내성적 문체’ ‘진지한 시선’ ‘시적 상상력과 회화적인 감수성’ ‘치밀한 이미지의 구성으로 우리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 반대 이야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예술은 선택하고 옹호하는 것이니까.
윤대녕에게 감동을 준 이들은 1970년대의 작가들이다. 지금까지도 이들의 문학은 거대한 산맥처럼 우리 문학의 등뼈가 되고 있다. 소설의 이제하 황석영 오정희 최인호 윤흥길 조세희, 시의 이성복 황지우 김지하 고은 등등 1970년대의 우리 문학은 황금시대가 아니었을까.
작가생활의 전환기
“그런 우리 문학이 저를 키웠을 겁니다. 우리 근현대 문학의 영향은 어느 작가에게나 뿌리처럼 닿아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영원한 자산이지요. 이번 작품집을 통해 저는 어느 정도 전환기에 선 것 같아요. 한 작가로서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일방적으로 변신하라는 주문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작가란 게 기획사에서 기획하고 조정하는 가수도 아니고, 어떻게 하루아침에 작품세계를 바꿉니까? 내 문학의 뿌리를 깊게 내리면서 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갈 겁니다.”
그는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할 세계가 있다고 말했다. 위에 언급한 인물들은 우리 역사의 가장 암흑기에 활동한 작가들이다. 박정희 정권, 유신시대, 긴급조치, 산업화 정책, 전태일 분신…. 참으로 어둠 속에 별은 빛나는 것인가. 그러한 전통을 안고 윤대녕은 소설을 쓴다. 나는 그가 연애소설을 잘 쓰는 작가라고 믿는다. 세계적인 고전들에서 연애소설의 목록을 빼버린다면 겨울나무처럼 앙상할 것이다.
그는 정말 맘먹고 쓴 연애소설로 장편소설 ‘미란’을 들었다. 사람들의 평가가 어떻든 나는 그 소설을 우리 문학에 흔치 않은 소설로 기억한다. 그의 소설에는 여자가 중요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1980년대 문학에서 여성이 부재했다. 그래서 그는 여성과 남성의 중요성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대의 폭력 앞에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상실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문단에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바람처럼 불어와 스치고 지나갔다.
그에게 작가생활의 큰 전환기는 아마도 만 2년에 걸친 제주도 생활일 것이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제주도로 떠났다. 아내와 아이는 비행기로 먼저 보내고 자신은 자동차를 타고 배를 타고 하면서 제주도로 갔다. 보니 참으로 가관이었다고 한다. 마침 비가 내렸는데, 불친절한 이삿짐 직원들의 횡포로 짐이 비에 젖어 있고, 아내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풍경에 그는 비감했다.
일주일에 걸쳐 짐을 정리하고 자리잡은 제주도. 하지만 그는 행복했다. 문을 열고 나서자 마침 유채꽃이 만발했다. 노란 현기증이 하늘거렸다. 10분만 걸어나가면 바다가 있었다. 마침 북서풍에서 남동풍으로 바람이 기류를 바꾸던 때였다. 봄이 온다. 몸이 약했던 작가에게는 공기가 좋아 치유의 땅이기도 했다. 가족도 의외로 잘 적응했다. 아이는 제주도에서 말을 배우기 시작해 지금도 가끔 제주도 사투리를 쓴다고 웃었다. 윤대녕의 아들은 아빠를 닮아 부처 같다.
“제가 제주도로 내려간 것은 일종의 위기감에 대한 반동이었어요. 몸과 건강이 피폐했고, 문학적으로도 위기를 느끼고 있었어요. 일단 가족과 나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이들이 없으면 나 역시 없다는 비장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멀리 내려가 회복하고 싶었어요. 그 모든 걸 말이지요.”
그리움과 기다림
서서히 제주도 생활에 적응했다. 적응은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장편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와 단편 ‘찔레꽃 기념관’ ‘탱자’ ‘고래등’을 썼다. ‘찔레꽃 기념관’으로 오랜만에 문학상을 받았다. 1998년 현대문학상 수상 이후 5년 만인 2003년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을 때 마침 시골 노인들이 마을을 나오셨는지 내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연히 두 노인의 대화를 들었다. 옆에 소설가 김훈이 있었다. 한 노인이 말했다.
“상금이 얼마래?”
“천만원이라던데.”
“이런, 우리가 일년 농사지은 것보다 많구만.”
“그러게 말이야. 끄적끄적 글 쓴 것 가지고 뭐 그리 돈을 많이 주나.”
김훈과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웃었다. 사실 ‘저 작가는 2년 농사지은 것’이라고 하려다 어른들께 결례인 것 같아 말았다. 하긴 그분들은 윤대녕의 소설을 모를 것이다. 소설가 김훈은 그 노인의 말이 맞다며 웃었다.
윤대녕은 제주도에서 문학은 뒷전이라고 했지만, 그에게 문학이 뒷전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여행하고, 낚시하는 것 역시 문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위다. 비즈니스맨이 해외로 출장을 가는 게 일인 것처럼, 작가가 여행을 하는 것은 일하는 것이다. 비즈니스맨은 출장을 가면 회사에서 돈이 나오지만, 작가는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가야 한다.
이른바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한 순수 제작비는 만만치 않다. 글은 골방에 앉아 원고지와 연필만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결과일 뿐이다. 그 과정은 그 어떤 사업보다도 파란만장하다. 그 시골노인의 시각이 단순히 한 늙은 촌부의 시각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결과만 중시하는 지독한 자본주의에서 과연 인간과 문학이 가능한 것일까. 아마도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제주도에서 윤대녕은 건강을 회복했다.
“바다의 생명력이 저를 건강하게 한 것 같아요.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면 먼 우주에서 내게 시간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어요. 가슴이 설레었어요. 오랜만에 연인을 만난 것처럼 두근거리는 거예요. 그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면 뭐라 할까요?”
최근에 그의 글에는 바다와 낚시가 많이 나온다. 산문집 ‘어머니의 수저’에도 제주도 생활은 잘 녹아 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올라와서도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에 수록된 작품을 집중적으로 썼다. 그는 바다에서 무엇인가를 배웠다.
“바다에서 저는 그리움과 기다림을 배웠습니다. 이중섭의 그림 중에 벌거벗은 아이들이 물고기를 가지고 노는 광경을 담배 은박지에 그린 그림이 있잖아요. 정말 아이가 내가 잡아온 물고기와 놀아요. 이중섭도 제주도 생활을 했는데, 그는 혼자였고 그 외로움을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알아요. 저는 다행스럽게도 가족이 있었어요. 행복한 시절이었죠.”
사진작가 김영갑
제주도에서 사진작가 김영갑을 만났다. 그와의 만남은 각별한 것이었다. 김영갑은 몇 해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윤대녕은 김영갑을 만나면서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노래를 부르는 인간의 영혼을 본 것일까. 한 발만 디디면 생이요, 한 발만 디디면 저승인 그 경계선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본 것일까.
“병으로 힘들어하는 김영갑씨를 만나면서 저는 오히려 삶의 황홀, 삶의 고마움을 배웠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어요. 온몸에서 살이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팠지만, 그의 영혼은 저에게 삶에 대한 소중한 성찰을 할 계기를 내줬습니다. 지금도 그리운 분입니다.”
그가 제주도에서 올라오던 해 김영갑은 이승을 떠났다.
제주도에서 일산으로 올라오기 전에 윤대녕 부부는 경주에 들렀다. 신라시대 경주 남산에는 1000개가 넘는 절이 있었다. 2005년 2월에 경주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살 집도 알아보았지만 생활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일산으로 올라왔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윤대녕은 확실히 변화했다. 문학의 영욕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그는 생각한다. 문학에 무슨 영욕이 있을까. 어쩌면 이것은 이전 세계와의 결별일 수도 있다. 이 페이지에서 저 페이지로 넘어가는 것 같은 시기랄까. 새로운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제주도는 조선시대 때 유배지였잖아요. 저는 어쩌면 자발적인 유배를 떠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주도에서 추사(秋史) 선생을 다시 봤고요. 시간이 자연스럽게 가져다주는 변화를 겪은 것 같습니다.”
그가 제주도에서 쓴 장편 ‘눈의 여행자’에는 주인공이 썩은 이를 뽑아서 눈 속에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제까지의 슬픈 일들아, 이제는 안녕.’ 다시 일산으로 올라와서는 한동안 몸이 아팠다. 그래, 제주도와 달리 공기가 탁해 힘들어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자 이제는 괜찮다고 했다. 지난해에도 작가는 많은 일을 했다. 우선 전작으로 쓴 산문집 ‘어머니의 수저’가 있다. 장편소설을 쓰듯이 공력을 들인 작품이다. 연재를 한 것도 아니고, 혼신을 다해 몇 개월간 집중적으로 집필한 책이다. 작가의 어머니에게 드리는 책이다. 책의 후기에 어머니와 만나는 풍경을 그린다. 한두 가지의 허름한 찬으로 초라한 식사를 하는 어머니, 나이 든 아들이 그 모습이 애처로워 ‘어찌 그리 식사를 하시냐’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 뭘 차려서 먹겠냐고, 나이 든 여자의 식사란 이런 것이라고 보살 같은 말씀을 하신다. 그 책에 윤대녕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마음을 적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바치는 책이 된다.
예술의 원천
그 후 5편의 중단편을 써서 ‘제비를 기르다’를 최근에 냈다. 책을 낸 출판사 창비와의 일이 즐거웠다고 했다. 편집자가 대단히 겸손하면서 뛰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에 대해, 사랑의 이야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엔 작가답게 산 것 같아요. 첫 작품집을 내고 나서 이듬해 열정적으로 쓴 것과 같은 분량을 써냈죠. 그건 아마 소설이 내게로 와준 것이 아닌가 해요.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슴이 뛰어야 서사가 나오는 겁니다. 가슴 뜀은 에너지이고 모든 예술의 원천이죠. 연애감정이 대표적인데,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가슴 뛰는 그 무엇이 없다면 작가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 황홀함을 겪은 뒤에 작품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제는 시선이 좀 객관화한 것 같아요. 전에는 불안했던 타인에 대한 시선도 조금은 안정적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이런 말 어떨지 모르겠는데, 아마 다음 작품부터는 상당한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가 있어요.”
한문학 혹은 동양고전이 그의 마지막 꼭짓점이다. 그는 조부의 영향으로 동양고전에 대한 교양이 풍부하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에 ‘신독(愼獨)’과 ‘진퇴(進退)’란 말이 나온다.
신독. 선비는 홀로 있을 때도 삼가야 할 것이 많다. 혼자 있을 때 잘해야 사람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진퇴.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 이것은 어쩌면 성리학자의 생활방식이기도 했다. 그래서 퇴계(退溪)도 정치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학문을 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호다.
그는 다음 작품에서 ‘불교’ ‘유학’ ‘신화’를 아우르는 한 인물을 그리려는 것이 아닐까. 짐작은 짐작일 뿐이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윤대녕 문학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다음 소설에 대한 구상을 묻자 웃으면서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대충 짐작은 가는데 얘기하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
술집에서 우리는 왕가위의 영화 ‘화양연화’의 오리지널 사운드를 들으면서 남자의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영화에서 배우 양조위가 국수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골목길에 있는 어두운 국숫집에서 양조위가 목울대를 꿀꺽이면서 국수를 삼킨다. 간절하게 보고 싶은 여인을 그리워하면서 국수를 먹는 장면에서 왕가위의 앵글은 배우의 목울대를 클로즈업한다. 멋진 장면이다. 우리는 양주와 맥주를 번갈아 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공식 인터뷰에서보다 술집에서 더 많은 말을 했다. 그 말은 그냥 가슴에 담는다. 그러다 그가 술을 먹다 문득 한 말을 술집에 있던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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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세히 보면 다 기막힌 서사가 있어요.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죠. 정말 애정을 가지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자세히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게 사랑인가도 싶고.’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확실한 미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삶을 이야기하지요. 그것이 바로 오늘입니다. 나는 이 오늘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