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지방선거 당시 구로구청장 선거에 나선 한 후보는 “구로구의 이름을 바꾸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비록 낙선했지만 지역구의 칙칙한 이미지를 개명(改名)으로 단번에 바꿔보겠다는 발상이 유권자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산업화시대 산업역군의 꿈과 땀이 서린 구로공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지만,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된 구로의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구로는 거듭 대변신을 꾀하고 있다. 최근 세계 여러 도시의 시장들이 서울에 모여 ‘전자정부’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구로선언’을 채택해 눈길을 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옛 구로공단 터는 지속적으로 개발되어, 과거 작업복 입은 여공들이 소박한 꿈을 키우던 그곳에 현재는 크고 작은 벤처기업이 밀집한 대형 건물이 단지를 이루고 있다. 구로구는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능가하는 첨단산업의 메카로 거듭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아시아 최초의 GCD 행사
2월7일부터 사흘간 구로구가 주관한 ‘2007 국제 전자 시민참여 포럼’은 이렇듯 강한 환골탈태 의지의 결정체다. ‘민주주의 증진과 지역발전’이라는 주제로 신라호텔에서 열린 이번 국제포럼은 아시아 지역에서 열린 최초의 GCD(The Global Cities Dialogue·세계도시연합) 행사로 한국, 미국, 프랑스, 중국 등 세계 16개국 25개 도시 시장(帳)이 참석했다. GCD는 1999년 유럽 20여 개 도시가 핀란드 헬싱키에 모여 ‘정보화시대에 인종, 계층, 성별, 종교에 구애하지 않고 전세계 시민이 고르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도시간 대화와 협력을 다짐한 ‘헬싱키 선언’에서 비롯됐다. 현재는 회원 도시가 200여 곳에 이른다.
구로구는 이번 행사에서 구로가 기술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세계 정보 격차 해소에 앞장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려고 애썼다. 행사장에 ‘IT홍보전시관’을 만들고 구로구에 근거지를 둔 IT업체들의 우수한 기술과 제품을 선보이는가 하면, ‘전자정부관’을 만들어 이 같은 한국의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구(區) 행정에 속속 도입되고 있는 전자정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소개했다. 전자결재시스템, 무인민원발급기, 휴대전화 여론조사 시스템, 맞춤형 입찰정보시스템, 사이버 문화센터, 모바일 행정관리시스템 등이 외국 관료들로부터 호평을 얻었다. 행사 첫날엔 전자정부 시스템이 민주주의 실현과 지역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세계적인 이론가들을 초청해 발표를 듣고 토론을 진행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윌리엄 더튼 인터넷 연구소장은 개막식 기조연설에서 ‘거버넌스와 공공정책에서의 시민 참여의 재구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튼 교수는 “지난 수십년 동안 비전을 가진 사람들, 주로 지방정부가 공공정책에 대한 시민 참여를 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인터넷 등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하려 노력했다”며 “그 결과 국정운영 혹은 지방자치행정 및 공공정책 참여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넷 非사용자를 설득하라
그는 그렇게 바뀐 판도를 “‘온라인’ 상태가 아닌 시민은 정부와 정치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설명했는데, 다소 극단적이지만 정보화시대의 현실을 직시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정보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더튼 교수는 “인터넷 비(非)사용자들이 인터넷을 이용해보고 그 가치를 직접 경험하게 해야 한다”고 답한다. 인터넷은 사용해봐야 가치를 알 수 있는 경험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더튼 교수는 또 “공공 정보에 대한 시민의 접근 방법을 개선하고, 시민과 시민, 시민과 정부간 협의를 지원하기 위해 정부와 정치가들이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을 창조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로구가 주관한 이번 국제포럼엔 ‘전자정부’ 관련 이론가들과 세계 여러 도시 대표들이 참석해 정보를 교환했다.
행사 둘째 날엔 GCD 회원 도시의 대표들이 모여 ‘전자정부와 시장의 리더십’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구로선언’을 채택했는데, “전자정부와 전자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전세계 도시가 디지털 네트워크를 구축, 국제적 협력을 강화한다”는 내용의 3가지 실천 방안이 담겨 있다.
‘구로선언’ 채택에 앞서 앙드레 상티니 GCD의장(프랑스 이시레물리노시장)은 “GCD 회원도시는 ‘헬싱키 선언’에서 채택한 ‘브레멘 헌법’을 준수하며 정보 공유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구로선언’은 그 효력이 ‘브레멘 헌법’에 우선한다”고 밝혔다. 정보화시대의 도시간, 계층간 정보 격차를 국제적 협력으로 극복하자는 ‘헬싱키 선언’을 실천하기 위해 만들어진 GCD가 정보 격차 해소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전자정부를 지향하기로 뜻을 모으고,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한 국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디지털 도시화에 청신호
‘헬싱키 선언’의 업그레이드이자 구체화라고 볼 수 있는 선언이 구로에서 채택된 것에 양대웅 구로구청장은 큰 자부심을 내비쳤다. 그는 특히 1968년 세계산업박람회를 개최하고 산업화시대 고도성장을 견인했던 구로가 40여 년 만에 아시아지역 최초로 ‘국제 전자 시민참여 포럼’을 주관하고 ‘구로선언’까지 선포한 것을 첨단 디지털 산업단지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는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구로선언’이 채택됨으로써 구로가 세계 도시간 정보 공유 및 전자정부화(化)를 선도하게 됐습니다. ‘구로선언’이 구로디지털단지 내 기업의 해외 진출 교두보가 될 것입니다.”
지방자치단체로서 세계 지방정부의 행정가들과 지식인 2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국제 행사를 무리 없이 진행함으로써 도시의 명성을 높이고, ‘구로선언’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남긴 ‘2007 국제전자 시민참여 포럼’은 초청인사 구로디지털산업단지 방문 및 한국전통문화체험으로 마무리됐다.
한편 구로구가 주관하는 행사를 구로구 안에서 소화할 수 없었던 것은 ‘구로 잔치’에서 아쉬움으로 남는 점이다. ‘시민 참여’를 위해 고민하는 포럼에 시민 참여가 저조했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덧붙여 이번 행사가 그야말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구로의 이미지를 바꾸는 촉매제가 되기 위해선 구로구가 당초 계획했던, 환경·교통·교육 등을 모두 개선하는 새 구로 청사진이 차질 없이 실행으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