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우 교수에 따르면 한국 개화기의 상징적 인물인 박서양은 1908년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917년 간도로 이주해 병원을 세우고 한국인 유일의 양의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민족교육기관인 숭신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는 후일 만세운동을 벌이는 등 일제와 맞서다 일시 폐교되는 위기를 맞는다. 이후 그는 간도 지역에 세워진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의 일원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도 바로 그였다. 박 교수는 “당시 발간된 ‘동아일보’와 ‘신동아’도 이번 논문을 준비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됐다”며 “박서양을 독립유공자로 추천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박 교수는 박서양이 서양 근대음악의 도입에도 일정한 기여를 했으며 그가 1924년 간도에서 동아일보 간도지국 기자로 활동한 사실도 새로 밝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