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지명도가 가장 높다는 특1급호텔의 홍보책임자 자리를 떠난 뒤, 지난 1년 반 동안 만난 지인들이 내게 건넨 첫 인사였다. 내 답은 한결같았다. “낯선 곳에서 마음 가는 대로 지내보고 싶어서요.” 구구절절한 답변은 필요치 않았다. 나름대로 10년을 열심히 ‘달려온’ 나 자신에게 질 좋은 휴식과 놀이가 있는 몇 달간의 시간을 선사하고 싶었다.
평소 간절히 원하던 뉴욕에서의 몇 달을 위해 항공편을 예약했고, 귀국하고 싶을 때까지 아무 계획 없이 오롯이 하루하루를 살자는 다짐을 후회 없이 실천했다. 이어 내 맘 닿는 대로 짐을 꾸려 런던 파리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홍콩으로 하루하루를 위한 터전을 옮겨갔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나를 사람들에게 새로운 여행법과 새로운 명소를 소개하는 일로 이끌었다. 여행에서 만나는 예기치 못한 상황처럼 우리의 삶도 때론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 중의 여행을 ‘삶’이라는 여행으로 꼽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15년간 적지 않은 횟수, 짧지 않은 시간을 해외여행을 즐기는 데 집중했다. 출장이 아닌 순수한 여행으로 발을 디뎌본 도시는 얼추 꼽아도 20곳이 좀 넘는다. 그러는 동안 내 여행방식, 모양새도 바뀌었다. 배낭여행에서 패키지 여행, 그리고 ‘개별여행’이다.
배낭여행은 모험정신으로 중무장하고 낯선 세상에서 만나는 새로운 것들을 열린 사고와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초보단계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세상에 눈을 뜨는 출발점에서 밟는 여행의 개론 코스로는 딱 좋았던 것이다.
바쁜 일상에 허덕이다보면 급작스레 모험정신을 끌어올리는 것이 여의치 않다. 그래서 낯선 곳을 찾아가는 데 흔히 선택하는 방식은 패키지 여행이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시간도 없고, 지도를 들고 목적지를 찾아갈 형편도 아닐 때 숙련된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면 된다. 특히 의사소통이 힘든 비(非)영어권 지역은 우선 패키지 여행을 해보는 것이 좋다. 낯선 곳에 대한 마음의 벽을 깨는 데 도움이 된다.
내 경우도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처음 찾을 때 패키지 여행을 택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분위기와 지리를 익혀놓을 수 있어 도움이 됐다. 그런 후 특히 감상이 좋았던 곳들을 다시 개별여행으로 돌아보니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더욱이 한 번 와본 곳이라는 익숙함은 내게 한층 활력 있는 여행을 선사했다.
뉴욕으로 첫 개별여행을 떠난 몇 해 전 가을을 나는 잊지 못한다. 직장에서 가장 바쁜 시기였기에 시간적으로도 제약이 있었고, 또한 뉴욕은 물가가 비쌀 거라는 막연한 선입관도 무겁게 자리했다. 어쨌거나 마음은 있으나 여건을 탓하며 미루던 뉴욕행은 비즈니스 출장이 잡히는 바람에 현실이 됐다. 언제 다시 뉴욕을 찾을지 모르니 출장 스케줄 후 며칠을 자유롭게 즐겨보리라 결심했다.
저녁식사를 위해 일부러 찾은 레스토랑들은 당시 뉴욕에서 각광 받는 곳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미드타운에 위치한 모건 호텔의 ‘아시아 드 쿠바’ 레스토랑은 요즘 세계적인 트렌드이며 문화코드가 된 ‘힙(hip, ‘최신유행’ ‘진보적인 삶’을 뜻함)문화’에 눈을 뜨게 한 곳이다.
2개층에 중앙이 뻥 뚫린 구조, 화이트톤의 매끈한 실내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에너지로 활력이 넘쳐났다. 단순하지만 기존에 보지 못했던 테이블과 의자 디자인이 내 눈을 자극했다. 특히 1층 중앙에 길게 놓인 폭 좁은 테이블 배치를 통해 낯선 사람들이 한데 앉을 수 있게 한 설정은 색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바로 옆에 낯선 이의 체온이 느껴지고 그들의 대화가 그대로 들리는 경험은 흥미로웠다.
주변 테이블 하나하나의 분위기를 힐끔거렸다. 프라이버시라고는 있을 수 없을 듯한 개방적인 구조지만 누구 하나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공기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한데 이어주는 심장박동과 거의 흡사한 비트의 음악은 당시 인기 최고였다는 ‘라운지 음악’ 장르에 속한 것이었다.
음식의 생소함 또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시아-쿠바 퀴진’이라니, 먹어보지 않으면 그 풍미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릴에 구운 돼지고기를 망고와 파인애플향이 부드럽게 감쌌고 마늘향이 연하게 밴 간장소스는 감칠맛을 더했다. 다양한 열대과일과 해산물을 넣어 볶은 밥에는 실란트로와 같은 동남아시아 허브가 이국적 풍미를 덧댔다.
“당신이라면 향기로운 민트에 깨끗하고 강렬한 모히토가 어울리겠어요!” 블랙셔츠와 팬츠 차림의 젊은 남자 웨이터는 아예 내 의자에 팔을 떡하니 걸치고 너스레를 떨며 칵테일을 골라주었다.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보낸 시간 중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경험이 없었다.
내가 이토록 한 장소, 특히 레스토랑에 대해 세세한 감동을 늘어놓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요즘 박물관이나 유적지 못지않게 각광받는 여행명소가 바로 이런 ‘힙’ 분위기의 레스토랑, 바, 호텔, 갤러리, 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전에 보지 못하던 디자인, 음식, 음악, 그리고 사람들의 패션이 등장한다. 다시 말해, 최신 트렌드이거나 곧 트렌드가 될 요소들을 경험하는 최적의 무대인 것이다.
‘아시아 드 쿠바’에 이어 들른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는 작품전시 못지않게 미술관 내외부 장식의 창의성이 돋보였다. 생활에서나, 일에서나 디자인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 나에게 그곳은 영감과 아이디어의 천국과도 같았다.
뉴요커를 밀도 있게 관찰할 기회를 얻은 것도 개별여행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다. 센트럴파크에 쏟아지는 풍광 사이로 백발의 트럼펫 연주자가 뽑아내는 재즈 선율이 바람을 타고 흐르고, 그 사이를 애완견과 함께 달리는 남자, 자리를 깔고 누워 책을 읽다가 책으로 얼굴을 덮고 낮잠을 청하는 남녀, 피크닉 바구니를 손에 들고 아이와 애완견을 데리고 소풍 나온 사람들. 뉴요커의 일상의 단면을 보는 듯했다.
소호의 유명한 식품점 ‘딘 앤드 델루카(Dean and Deluca)’에는 세련된 모양과 생소한 맛의 케이크가 가득했고 냉장고는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이 고안한 생수병으로 꽉 차 있었다. 실내는 다채로운 옷차림과 머리장식을 한 채 즉석 유기농 식품을 고르는 젊은 뉴요커들로 가득했다. 나 또한 그들처럼 즉석 조리코너에서 우리나라 시래깃국처럼 보이는 채소수프와 표면이 거칠거칠한 통밀빵을 산 다음 입구의 테이블에 기대어 서서 요기를 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회사 업무에 복귀했을 때 여행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업무에서는 아이디어가 솟구쳤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풍요로워진 듯했다.
“당신 뉴욕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호텔의 외국인 총지배인, 총주방장과 뉴욕 스타일을 주제로 즐거운 대화에 빠져들었다. 직장 바깥의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국적인 카페와 레스토랑을 찾아 마치 여행을 떠나온 듯한 분위기와 풍미를 만끽했다. 식품점에서 장을 보는 재미도 한층 더해졌다. 다양한 맛을 경험하는 것 또한 새로운 여행지를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줬다. 낯선 곳이 배경이 되는 영화를 감상하며 잠시나마 그곳의 햇살과 색과 사람살이에 푹 빠져보기도 했다.
파리 코스테스(Costes) 호텔 바에서 듣던 감각적인 라운지 음악을 담은 CD를 들으며 생기 넘치는 파리의 도심을 내 일상으로 잠시 끌어오기도 했다.
이만하면 작지 않은 변화다. 바쁜 와중에 짜낸 소중한 시간과 적지 않은 여행경비를 투자해 얻은 즐거움과 배움은 충분한 값어치를 한다. ‘생활이 윤택해진다는 게 이런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는 요즘도 휴가기간을 길게 낼 때는 런던 파리 뉴욕 밀라노와 같은 장거리 여행을, 5일 이내의 단기 휴가에는 홍콩, 도쿄, 상하이와 같은 주변 아시아 도시 여행을 떠난다. 내 여행 스타일은 여행자나 관광객들이 아닌 현지인들에게 더 각광받는 명소(레스토랑, 갤러리, 호텔, 바, 공원 등)를 찾아 각 지역의 라이프 스타일을 경험하는 데 집중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식이다.
내 수첩의 방문 리스트에는 그야말로 ‘뜨는’ 곳 못지않게 오랜 세월에 걸쳐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장소가 적지 않다. 사실 이런 곳에서 그 지역 고유의 색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막상 처음 개별여행을 시작하고 한동안은 꽤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우선 각 지역 명소에 대한 정보를 찾고 정리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린다. 인터넷에 원하는 정보가 모두 들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떠나는 기내에서는 전문여행서 한 권을 독파했다. 예산에 맞게 즐기고 효율적인 동선을 만들 수 있도록 일정을 짜고 또 짰다.
그래도 늘 예산보다 돈을 더 지출했고 어디부터 가야 할지 어떻게 이동할지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유명 레스토랑과 호텔은 어김없이 비쌌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서나 먹고 자고 싶지는 않았다. 한 번에 다 돌아봐야 한다는 욕심은 어디서든 제대로 즐기는 걸 방해했다. 지도 보기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장애물 넘기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때로는 “왜 내가 사서 이런 고생을…?”하며 한탄한 적도 있다.
야릇한 건, 그럼에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내에서는 어김없이 얄궂은 뿌듯함과 괜한 감동이 몰려왔다는 사실이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지난 고생과 난관까지 달콤한 추억으로 남았다. 그러는 동안 제법 노하우도 쌓였다. 여행정보 수집은 평상시에 조금씩 해두는 게 습관이 됐다.
책, 잡지, 신문,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틈틈이 가고 싶은 곳을 적어두었다. 여행지에서는 지도를 들고 찾아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동선을 짜는 요령을 터득했고 인내심과 집중력은 덤으로 향상됐다.
스케줄을 내가 통제할 수 있으니 좋아하는 곳에서는 좀더 머무르고 마땅치 않은 곳에서는 시간과 비용의 낭비 없이 바로 나올 수 있었다. 여행지에 머무르는 동안 정보사냥의 감각, 긍정적인 사고방식, 활력, 인내심, 자아성찰 등 얻는 것이 갈수록 늘어갔다.
개별여행의 묘미에 깊이 빠져들어 탄력이 붙을 즈음부터는 아예 여행마다 나름의 테마를 정했다.
“이번엔 요즘 뜨기 시작한 런던 최신 식도락 문화를 즐겨야겠다” “홍콩에서는 인테리어와 생활용품에 관한 쇼핑을 제대로 해봐야겠어”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탈리안 카페들을 먼저 둘러보고 나파밸리와 소노마 카운티로 가서 와인 여행을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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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지식과 기술 못지않게 라이프 스타일 감각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독특한 명소는 도시와 국가의 경쟁력이 되지만 그곳을 먼저 둘러본 개인에게도 남다른 감각과 창의성이라는 커다란 자산을 안겨준다.
“다음 여행지는 어디에요?” 요즘 만나는 사람들이 물어오는 말이다. “글쎄요…, 베를린, 프로방스, 플로리다 사우스 비치, 암스테르담, 바르셀로나…, 아니면 내일이라도 미처 생각 못했던 다른 어떤 곳을 찾게 될지도 모르죠. 그것도 개별여행의 재미 중 하나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