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뒤뜰’에서 만난 권력자들

최형우 “대통령, 꼭 하고 싶었다”, 김영삼 “대통령, 다시 하라면 안 한다”

  • 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입력2007-03-08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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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력? 아프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더라”
    • “의원 배지 떼니 사람들 눈길이 달라져”
    • “‘발렌타인 30년’ 자랑 말라, 소주 맛을 잊지 말지니…”
    • 컨테이너 박스에 사는 박영록 전 의원 “후회 없고 떳떳하다”
    • 고급 룸살롱 즐기다 ‘궐’ 밖 쫓겨난 젊은 실세
    • 여성 연예인과 ‘아파트 요정’에서 어울리는 유력인사들
    • 가재도구 압류당한 권노갑, 한쪽 눈 실명 위기 박지원
    • 장관 물러나 자택 청와대 직통전화 떼갈 때 ‘失權’ 절감
    ‘뒤뜰’에서 만난 권력자들

    10년 만에 인터뷰에 응한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2월1일 저녁 무작정 최형우(崔炯佑·72) 전 내무부 장관의 집으로 향했다. 정적(政敵)에 의해서가 아니라 뇌졸중으로 하루아침에 권력에서 멀어졌던 최형우 전 장관. ‘권력자의 뒤안길’이라는 기획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인터뷰하려니 왠지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뇌졸중이라는 불의의 암초에 부딪혀 손에 쥔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내려놓아야 했던 그에게 권력의 무상함에 대해 묻는다는 게 잔인한 짓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내렸다. 출구를 찾는데 작은 꽃집이 눈에 들어왔다. 꽃 중의 꽃이라는 붉은 장미와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노란색 프리지아, 그리고 연한 보랏빛을 띤 소국. 그에게는 소박한 소국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밤 8시. 국화꽃 한 다발을 들고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대문이 열렸다. 그가 거실에 서 있었다. 그는 화색이 도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말투는 어눌했지만 목소리는 화통했다. 그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신체의 오른쪽이 마비돼 움직임이 둔한데도 오른손을 내밀기 위해 애썼다. 보행이 약간 부자연스러웠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자존심이 무척 센 그는 투병 중에도 주변 사람의 손길이나 지팡이 등 의료보조기구의 도움 없이 걷기 위해 애를 썼다고 한다.



    “사전에 약속도 하지 않고 불쑥 찾아와 미안하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그의 집을 찾기까지 인간적인 고뇌가 적지 않았음을 고백했다. 그러면서 “취재에 응할 생각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겠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허허. 아니요.”

    와병 10년 만에 첫 인터뷰

    동석한 최 전 장관의 부인 원영일(67)씨가 “(남편이) 자신의 암울한 처지를 비관한데다 투병생활의 울분을 삭이지 못한 게 그동안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언어 장애도 기자들을 피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최 전 장관만큼 화려한 정치이력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의리파 정치인으로 손꼽히는 그는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재학시절 4·19 혁명에 참여하고 3·15 부정선거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1959년 야당이던 민주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민주화추진협의회 간사장과 6월항쟁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민주산악회장 등을 역임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30여 년 동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문민정부 출범 후에는 집권여당의 사무총장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가 서울 프라자호텔 일식당에서 쓰러진 것은 1997년 3월11일 아침. 약속 장소에 미리 와 있던 서석재·김덕룡 두 민주계 의원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물컵을 들다 말고 정신을 잃었다. 당시 그는 6선(選) 국회의원이자 YS의 ‘오른팔’로 불릴 만큼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뒤뜰’에서 만난 권력자들
    그는 쓰러진 직후 곧바로 서울 시내의 한 군부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돼 뇌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3개월 만에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해 독일로 건너가 뇌졸중 전문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다.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에서 재활치료를 받다가 발병 8개월 만인 1997년 11월에야 귀국했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언어구사에 장애가 생긴 최 전 장관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는 하지만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올해로 투병생활 10년째에 접어든 그에게 “일순간에 정치에서 멀어져버린 게 아픈 것 못지않게 고통스럽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잠시 눈을 감는가 싶더니 “아이고, 나 참” 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괜한 질문을 했나 싶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짧은 대답에서 권력의 무상함이 묻어났다.

    최 전 장관이 겪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투병생활의 힘듦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투병 초기 그는 아내와 가족, 그리고 비서에게 갖은 성질을 부린 것으로 알려졌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자 얼굴 표정과 몇 마디 의성어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곤 했다는 것이다. 단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랬을까. 정치인으로서 ‘생명’이 다한 데 대한 괴로움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권력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권력’ 하면 통상 정치권력을 일컫는다. 시대를 불문하고 권력은 많은 사람의 관심사이자 욕망의 대상이었다. 최 전 장관이 쓰러진 직후 평소 건강관리에 소홀했던 정치인들은 건강검진을 받느라 부산을 떨었다.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권력을 쥐었다 하더라도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최 전 장관은 “(아프고 나니) 그것(권력)은 아무것도 아닙디다” 하고 말했다. “건강할 때는 더 큰 권력을 쥐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지 않았냐”고 반문하자 “그랬다”라고 대답했다(자세한 인터뷰 내용은 기사 뒷부분 참조).

    김영삼 정부 당시 실세 정치인이던 K씨는 “권력은 마약”이라고 표현했다. 중독성이 코카인보다 몇 배나 강할 뿐 아니라 한번 맛들이면 좀체 끊기 힘들다는 것이다. “권력에 중독되면 그 어떤 약으로도 치료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K씨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도,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투쟁했던 정치인도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폼 잡는 데는 국회의원이 낫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드는 게 바로 권력이지요. 언제 칼끝이 내게 향할지 모르는데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얼마 후 닥칠 미래가 눈에 안 보이는 거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부자간, 형제간, 모자간에도 피 튀기면서 쌈질을 하잖아요.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지요. 권력을 소유물로 여기면 정치인 자신도 국민도 망하게 돼 있어요. 절제되지 않은 권력은 폭력이죠. 권력은 독(毒)이 든 사과와도 같아요.”

    정치권 주변에는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수년에서 수십년 동안 기를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예전에 비해 많이 줄기는 했지만 정치지망생은 여전히 차고넘친다. 의사와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해 정당 사무직과 국회의원 보좌관 등으로 활동하는 정치지망생의 첫째 꿈은 국회의원이다. 선거 때마다 국민을 위한 머슴이 되겠노라는 공약을 잊지 않고 유권자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는 국회의원선거 출마자들. 이들이 국회의원이 되려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진정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한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은 고인이 된 변호사 출신 전직 국회의원에게 “왜 국회의원이 되려고 발버둥을 쳤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의뢰하는 사건이 많아져 돈도 많이 벌게 되고 새끼 변호사(월급을 주고 고용하는 변호사를 일컫는 법조계 은어)를 법정에 내보내도 말발이 먹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남자로 태어나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게 정치였다”며 “폼 잡고 사는 데 변호사보다는 국회의원이 훨씬 나은 데다 (자신이 속한) 당에서 대통령이 배출되면 장관을 하거나 청와대에서 한 자리쯤 차지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정치판에 뛰어든 게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과 욕망 때문에 정치인이 됐다는 것이다.

    11대 총선에 첫 출마해 별 어려움 없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이후 세 번 더 출마했지만 죄다 낙선의 쓴잔을 마셨다. 그는 서울 노원구에 있는 자기 소유의 5층짜리 상가건물을 팔아 선거비용을 충당했고 선친에게 물려받은 재산과 처가 재산까지 축냈다. 국회의원 선거 전적 1승 3패. 그에게 남은 것은 집 한 채와 암 덩어리뿐이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얼마 전 세상을 뜬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점차 짙어지자 지인들에게 “정치에 대한 욕망을 접었더라면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텐데 정계에 발을 내디딘 것 자체를 후회한다”는 말을 자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

    4선(11~14대)의 유준상(柳晙相·65, 한나라당 중앙당 상임고문, 좋은나라포럼 대표) 전 의원. 그는 권력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경험한 정치인이다. 유 전 의원의 양복 왼쪽 깃에서 의원 배지가 사라진 것은 11년 전인 1996년. 비교적 젊은 나이(39세)에 국회의사당에 입성한 후 순탄하게 4선에 이른 그는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고 나니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것도,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4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는 온몸에 힘이 팍팍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하하. 그리 보였습니까? 하긴 어딜 가도 어깨를 펴고 다녔지. 정·재계를 막론하고 고개 숙일 일 없이 살았지요. 당 안팎에서 힘깨나 쓰는 정치인이었으니까요. 오랫동안 국회의원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권력의 달콤한 맛에 빠져듭디다.”

    ▼ 그 달콤함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딱히 뭐라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늘 비싸고 좋은 음식과 술을 대접받았고, 날 만나려고 줄을 선 사람이 끊이지 않은데다 상대방에게서 늘 깍듯한 대우를 받았던 게 아닐까 싶어요. 물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은 것도 있었죠.”

    ▼ 정치에 신경 쓰느라 가정에는 소홀했을 것 같은데요.

    “하숙생처럼 살았지요. 집은 말 그대로 잠만 자는 곳이었고. 자녀교육과 집안 대소사는 죄다 아내에게 맡겼지요. 대부분의 정치인이 다 그렇게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 전직 국회의원 C씨는 국회의원이 된 후 가정과 아내에게 무관심해졌고 이를 견디지 못한 아내가 낭비벽이 심해져 이혼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그 부부를 잘 아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가정의 화목이 가장 중요한데. 정치인은 그걸 외면하고 살잖아요. 정치에 미쳐 있을 때는 그걸 잘 모르죠.”

    탄탄대로이던 유 전 의원의 정치항로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15대 국회의원 공천심사가 한창이던 1996년 3월. 그는 자신의 지역구인 전남 ‘보성-화성’에 공천(새정치국민회의)을 신청했다. 결과는 탈락.

    그러자 그는 ‘공천헌금 요구설’을 주장하며 김대중 총재 등 지도부를 공략했다. 그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인간만사 새옹지마, 오늘의 고난은 내일의 영광이리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국민회의 탈당을 선언했다. 그 후 신한국당으로 당적을 옮긴 그는 국회의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 국회의원 배지를 떼고 나니 심정이 어떻든가요.

    “하루아침에 신분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들더군요.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온몸에 힘이 쏙 빠지더라고요.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어요.”

    “전세 살지만 마음은 편해”

    ▼ 무척 힘들었을 텐데요.

    “원외지구당 위원장이 돼보니까 그 설움이 뭔지 알겠습디다. 4선 경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현재 국회의원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지. 내가 잘나갈 때 왜 그들(원외지구당 위원장들)에게 밥 한 끼 안 사줬는지 그리 후회가 됩디다. 단돈 5000원짜리 설렁탕이라도 사줄 걸,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넬 걸, 국회에 있을 때 좀더 열심히 국민을 위해 일할 걸 하고 후회도 많이 했죠. 총선에서 떨어진 이후 5~6년 동안은 내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굉장히 힘들었어요. 아무리 마음을 비우려고 애써도 비워지지 않더라고요.”

    ‘뒤뜰’에서 만난 권력자들

    “의원 배지 떼니 신분이 곤두박질쳤다”고 말하는 유준상 전 의원.

    유 전 의원은 지난 17대 총선 때 서울 광진을(한나라당)에서 출마하면서 서울 서초구 방배동 집을 팔았다. 당선만 된다면 집이 대수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또 낙선이었다.

    “그때의 참담한 심정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어요. 지금이요? 땅 한 평, 집 한 채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세를 살지만 마음은 편해요. 그땐 국회의원직을 오랫동안 유지할 줄 알았고 그 이상의 자리를 차지할 줄 알았죠. 그래서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았고요. 그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가 ‘만일’이라는 단서를 달고 말을 이었다.

    “국민회의에 있을 때 DJ의 권유대로 전라남도 도지사선거에 출마했더라면 정치인생이 달라졌겠죠. ‘국민의 정부’에서 장관이나 국회의장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당시 자만과 오만 때문에 (DJ의) 제의를 완강히 거절했지요. 만약 정치인으로서 승승장구했다면 갖은 유혹을 견디지 못해 지금쯤 국민의 정부 실세들처럼 감옥에 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권력은 일순간의 영욕에 불과한 것인데, 그 유혹이 워낙 강렬해서 성인(聖人)이나 위대한 종교인도 뿌리치기 힘들다고 하잖아요.”

    ▼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는데, 후회하지 않습니까.

    “인간인데 어찌 후회를 안 했겠습니까. 3년 전에야 비로소 마음을 완전히 비웠습니다. 한 끼에 몇천 원짜리 밥을 먹어도 마음이 즐겁고 소주잔을 기울여도 속이 편합니다. 국민의 정부 때 한 장관을 만났는데, ‘만날 발렌타인 30년산을 마신다’며 은근히 자랑하더군요. 나도 한때는 그런 것 마시고 살았는데 그거 별거 아니라고, 소주에 백세주를 섞어 먹는 맛이 더 일품이라고 말해줬지요.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그런 말이 귀에 안 들어온다는 게 문제지요.”

    지난 10여 년 동안 밑바닥 생활을 경험한 유 전 의원은 지난해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좋은나라포럼’을 만들었다. 유 전 의원은 “많은 사람이 우러러 보는 자리에 있을 때는 겉으로만 그들을 돕고 위하는 척했는데, 이제야 진정 소외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고백했다.

    유 전 의원은 전직 국회의원 중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에 속한다. 건강한데다 비록 전세이지만 등 붙일 집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뒤뜰’에서 만난 권력자들

    컨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하는 박영록 전 의원.

    화장실도 없는 컨테이너 생활

    신민당과 평민당 부총재를 지내고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을 역임한 4선(6·7·9·10대)의 박영록(朴永祿·85) 전 의원. 38세에 강원도지사를 지낸 그의 현재 거처는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있는 1.5평짜리 컨테이너 박스다. 방안을 데워주는 보온시설이라고는 전기장판 하나가 전부다. 부엌은 컨테이너와 입구 계단 사이. 화장실은 이웃집의 것을 이용한다. 박 전 의원 부부의 컨테이너 생활은 올해로 4년째 접어든다.

    그는 퇴임 이후에 민족사회단체총연합회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밀린 사무실 임차료를 내지 못해 2003년, 40년간 살던 삼선동의 35평짜리 자택을 공매처분당했다. 그는 남은 돈 200만원으로 컨테이너를 장만했다. 사업에 실패한 차남은 2004년 9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아버지를 따라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장남은 강원도 원주에서 사업을 하다가 빚만 졌다. 지난해 ‘동아일보’를 통해 박 전 의원의 ‘컨테이너 생활’이 알려지자 정대철 전 의원을 중심으로 그를 돕자는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후배 정치인들이 전세금을 마련하려 한다는데 아직 기대하는 금액에 못 미친 모양인가봐요. 고마울 뿐이죠.”

    ▼ 명색이 4선 국회의원 출신인데, 모아둔 돈이 전혀 없습니까.

    “제가 극빈자 생활을 하고 있어 국민이 많이 놀란 모양인데, 정치를 하면서 청렴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어요. 뭘 챙겨서 나와 가족이 잘 먹고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당시에는 야당 정치인이 뒷돈을 챙기다가는 정권과 여당의 표적이 되기 십상인 시절이기도 했지요. 거액으로 매수하려는 여당의 제의를 거절한 적도 있어요. 비록 돈은 없지만 정치인으로서 국민 앞에 부끄러운 짓 하지 않았고 죄 짓지 않고 살아 떳떳해요. 그거면 됐죠. 생활이 조금 불편할 뿐, 마음이 불편한 것에 비기겠습니까.”

    ▼ 청백리처럼 사는 것도 좋지만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허허…. 헌정회에서 한 달에 99만원이 나와요. 그중 80만원은 종로 2가에 있는 범민족화합통일운동본부 사무실 운영비로 쓰고 나머지 19만원으로 생활합니다.”

    ▼ 지금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아뇨. 전혀요.”

    ‘뒤뜰’에서 만난 권력자들

    1999년 6월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앞에서 붉은색 페인트가 든 달걀 투척 세례를 받은 김영삼 전 대통령.

    “그거, 금방 지나가 버려요”

    정치인의 마지막 꿈은 대통령이 아닐까. 대통령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최고 권력의 자리다. 소망한다고 해서 아무나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대통령이 되면 행복할까. 평소 현직 대통령을 인터뷰하게 된다면 꼭 묻고 싶은 질문 중 하나였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노 대통령에겐 못 했지만, 김영삼(金泳三·80) 전 대통령에게 이 질문을 한 적이 있다. 2003년 10월 서울 상도동 YS 자택 거실. YS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신동아’(2003년 10월호)를 전달하기 위해 상도동에 갔다가 배석자 없이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와 마주앉았다. YS가 마당에 있는 단풍나무에 얽힌 추억과 가택연금 당시 좁은 마당에서 서성이던 때를 떠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중학교 때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목표를 세웠다는 그에게 “오랜 꿈인 대통령이 됐을 때 행복했냐”고 물었다.

    “힘들지. 힘들어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외롭고, 자유도 없고. 몹시 외롭고 쓸쓸했지.”

    YS는 “대통령 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며 “어떤 사람은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니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해주고 싶다”고 했다.

    “청와대 생활 5년 동안 가장 힘든 점이 뭐였냐”고 묻자 주저하지 않고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과 박탈당한 자유”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1970년대 말 신민당 총재 자격으로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단독회담을 하던 당시를 회상했다.

    “청와대에 갔더니 박 대통령이 청와대 뜰을 보면서 서 있더라고. 창 밖에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임자, 지금 내 신세가 꼭 저 새 같아’라고 하지 뭐야. 그러면서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물을 훔치더라고. 그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가 ‘인간’으로 느껴졌어요. 그 뒷모습이 굉장히 쓸쓸해 보였거든. 아내를 먼저 보낸, 그것도 총 맞아 저세상으로 보낸 후 회한에 젖은 남자의 고독 같은 게 느껴졌지요. 천하의 박정희도 사는 게 힘들었던 게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박정희를 바라보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엿봤어요.”

    ▼ 가끔 청와대에서 나와 평소 즐겨 먹던 칼국수 식당이며 설렁탕 집을 찾아갔다고 들었습니다.

    “청와대로 주방장을 불러 해 먹을 수도 있었지만, 예전처럼 그 집에 가서 맘 편하게 먹고 싶었거든. 자주 가고 싶어도 식당 영업에 방해가 되고 또 경호 문제 때문에 발길을 줄일 수밖에 없었지요.”

    청와대에서 보통사람이 누리는 ‘자유’를 몹시 그리워했다는 YS는 “청와대에서 보낸 5년이 ‘장구한’ 세월처럼 여겨졌지만 화살처럼 지나가버렸다”고 말했다.

    “아이고.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은 말이지, 5년이 긴 것처럼 느껴질 텐데, 그거 금방 지나가버려요.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그걸 잘 모르지. 피부에 와 닿지도 않고.”

    “시골 장터 돌아다니고 싶어”

    그는 “다시 대통령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는 필자의 질문에 큰 소리로 웃으며 “안 한다”고 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나면 시골장터를 돌아다니고 맘껏 여행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소박한 뜻마저 제대로 이룰 수 없는 처지라고 했다. 전직 대통령이 맘놓고 여행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아닌데다 경호 문제로 선뜻 집 밖을 나서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YS가 대화 도중 거실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뒷짐을 진 채 섰다. 마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의 앞에서 청와대 뜰을 바라봤던 것처럼. 한때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권력자이던 전직 대통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나이든 남자’의 쓸쓸함과 고독이 묻어났다.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체력은 빌릴 수 없다’던 YS. 2004년 10월 말경. 필자는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마주앉았을 때 YS가 한 말의 위력을 실감했다. 취재가 아니라 인사 차원에서 이뤄진 이날 만남에서 DJ의 모습은 병약한 환자 그 자체였다. 목소리엔 힘이 없었고 기억력은 감퇴한 것 같았다. 종종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배석한 비서가 큰소리로 재차 설명하기도 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어쩌면 DJ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현직 대통령도 재벌회장도 아닌 건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의 맛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 맛이 얼마나 독특하기에 많은 사람이 그것을 잡기 위해 기를 쓸까. 권력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재빠르게 파악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호텔과 술집이다. 호텔과 술집 종업원들은 정권이 바뀜에 따라 권력의 실세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죽 지켜봐왔다.

    김대중 정부 초기 동교동계 Q씨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청와대 요직에 발탁됐다. 대통령에게 직보(直報)하는 위치에 있는 그가 고급 룸살롱에 자주 드나든다는 소문이 정치권에 무성했다. 그를 대면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접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입성하기 전까지 별볼일 없는 인물이던 그는 고급 술집에서 ‘술과 여자’에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청와대에서 Q씨의 뒷조사를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결국 그는 청와대에 발을 내디딘 지 얼마 되지 않아 ‘궐’ 밖으로 쫓겨났다.

    실세들이 자주 이용한다고 알려진 서울 강남의 모 룸살롱. 일명 ‘텐 프로’(룸살롱 중 상위 10% 이내에 드는 고급술집)라고 일컫는 고급 룸살롱의 하룻밤 술값은 300만~500만원(4명·발렌타인 17년산 기준)이다.

    ‘뒤뜰’에서 만난 권력자들

    2004년 5월 법정에 출두하기 위해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나서는 박지원 전 장관.

    ‘텐 프로’와 ‘1%’

    ‘텐 프로’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업무 수칙은 술집을 이용한 고객의 신분을 발설하지 않는 것과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옮기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정·재계 인사들이 일반 룸살롱보다 ‘텐 프로’를 즐겨 찾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텐 프로’ 아가씨들은 하루 저녁에도 ‘따블’이나 ‘따따블’을 뛰어요. 메뚜기처럼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옮겨 다니면서 손님을 접대하죠. 그게 관례거든요. 그런데 정치인이나 청와대 사람들을 접대할 때는 아가씨를 ‘고정’으로 묶어둡니다. 아가씨들이 다른 테이블로 가지 못하도록 하는 거죠. 아가씨를 묶어두려면 테이블 팁을 수십만원에서 100만원까지 내야 해요. 술값은 누가 먹든 큰 차이가 없는데 아가씨 비용이 많이 드는 거죠.”

    ‘텐 프로’ 종업원의 말이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실세들의 행태를 눈앞에서 지켜봤다는 그는 고객들의 이름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남성포털사이트 ‘헤이맨투데이’ 구성모 대표는 “정치권에서 이뤄지는 최고급 접대는 따로 있다”고 귀띔한다.

    “정치인들, 진짜 고급 접대는 ‘텐 프로’에서 안 하죠. 업계에서 속칭 ‘1%’라고 불리는 술집에서 이뤄져요. 이런 요정은 일반 상가건물에 있지 않고 아파트나 고급 주택에 자리잡고 있어요. 강남의 신사동과 압구정동 방배동, 그리고 반포 주공아파트 단지 등 몇 군데에서 은밀하게 이뤄지죠. 이곳의 술값은 접대 여성의 이름값에 따라 달라지죠. 술집 여자가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고 주로 연예인이 접대하죠. 누구나 아는 톱스타의 경우 하룻밤에 1000만원이 기본입니다. 그보다 좀 못하다 싶으면 500만~700만원 하죠.”

    필자와 친분이 두터운 한 여자 연예인은 은밀하게 이뤄지는 ‘연예인 성매매’ 실태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있다. TV와 영화에 출연한 지 오래돼 돈이 궁했던 그는 “내가 (술자리 접대부로) 나가면 하룻밤에 1000만원은 버는데 아무리 어려워도 그짓 해서 돈벌기는 싫다”면서 “출연하는 작품이 없고 광고 모델로도 활동하지 않는 여자 연예인 중에는 비밀이 보장되는 요정에서 몸 팔아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했다.

    “주로 정·재계 인사들의 술자리죠. 연예인 중에서도 미스코리아 출신은 돈을 더 받아요. 같은 연예인이라도 미스코리아를 선호하거든요.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품에 안았을 때, 그것도 얼굴 알려진 연예인을 안았을 때 엄청 뿌듯한 모양이더라고요. 연예인과 하룻밤 자고 싶어 환장한 남자가 적지 않은 걸 보면.”

    ‘뒤뜰’에서 만난 권력자들

    2006년 1월, 병원에서 신병치료를 받아오던 권노갑 전 민주당 의원이 검찰의 형집행 정지 연장 신청 불허에 따라 다시 구치소로 들어가고 있다.

    구성모 대표에 따르면 이들 비밀요정 중에서도 반포 주공아파트(현재 반포 주공1단지)는 ‘전통’을 자랑한다고 한다. 1974년 6월28일자 중앙일간지 사회면에 ‘아파트에 고급 콜걸 침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주택공사가 서민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건립한 반포 등지의 아파트 단지에 고급 콜걸이 침투해 윤락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

    당시 이 신문은 AID 차관으로 지은 반포아파트(현재 반포주공1단지) 30여 개 동에서 50~60명의 콜걸이 영업을 하고 있다며 지역명까지 명시했다. 반포를 비롯해 여의도와 동부이촌동의 고급 아파트를 찾는 이들 고급 손님은 주로 부유한 노년층이나 사회 저명인사. ‘조직’을 통하거나 단골이 소개한 손님 외에는 일절 받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고 이 신문은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영업수칙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 대표는 “현재도 P아파트 3채를 빌려 요정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아파트 한 채당 일주일에 한 번꼴로 접대가 이뤄진다”고 했다. 술값이 적게는 1000만원에서 수천만원대라는 것. 여기에다 여자 연예인과 ‘2차’가 이뤄질 경우 술값이 크게 뛴다고 한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권력의 맛에 빠진 이들의 공통점은 권력의 끝, 즉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후에야 권력의 무상함을 깨닫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김대중 정부 시절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실세이던 권노갑(權魯甲·77) 전 의원. 그는 DJ 정권에서 ‘2인자’로 꼽혔다. 당·정·청(黨政靑) 어디에도 공식 직함이 없었지만 그의 말 한마디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던 그는 2000년 총선을 앞두고 현대그룹으로부터 금강산 카지노사업 허가에 힘써달라는 청탁과 함께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돼 2004년 10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 및 몰수(국민주택채권 50억원)와 추징(150억원)이 확정된 뒤 복역과 형집행정지를 반복해왔다. 형집행정지로 출감하면 서울 삼성제일병원 특실에 입원해 전립샘(전립선)비대증, 우울증, 뇌경색, 고지혈증 등을 치료받았다.

    권 전 의원은 추징금 150억원을 전혀 내지 않고 버티다 지난해 1월 가재도구를 압류당했다. 권력의 실세에서 온 집안에 ‘빨간딱지’가 더덕더덕 붙은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형집행정지와 재수감을 되풀이하던 그는 2월9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2월25일)에 맞춘 특별사면 대상자에 포함돼 석방됐다.

    여전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권 전 의원. 석방되기 얼마 전 그를 면회했다는 전직 국회의원은 “추워서 내복을 몇 겹씩 껴입었는데도 견디기 힘들어했다”며 “수감생활의 고통을 토로하는 모습을 통해 권력의 쓸쓸한 말로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권 전 의원의 측근들은 현 정권에 밉보이거나 꼬투리 잡힐 일은 아예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이라도 한 듯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

    DJ 정부의 또 다른 실세이던 박지원(朴智元·65) 전 문화관광부 장관도 마찬가지다. 남북교류협력법 위반과 알선수재 혐의로 징역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박 전 장관은 지난해 11월3일 녹내장과 심장질환 치료를 위해 형집행정지(3개월)로 일시 석방된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지난해 4월4일 서울고등법원 302호 법정에서 최후변론을 통해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투병 중 한 지인으로부터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던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잠언시집을 선물 받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경제인의 후의를 거절했을 것”이라고 뒤늦은 후회를 내비쳤다.

    그는 DJ를 위해 10여 년 동안 일하면서 단 한 번도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직 ‘DJ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살아온 박 전 장관. 권력을 손에서 놓은 후 그에게 남은 것은 실명(失明) 위기에 처한 한쪽 눈과 ‘국립호텔’ 이용권이었다. 국립호텔은 정치인들 사이에 ‘감옥’을 일컫는 은어다. 박 전 장관도 권 전 의원과 마찬가지로 2월9일 특별사면을 받았다.

    최형우 전 장관 인터뷰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뒤뜰’에서 만난 권력자들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투병생활 10년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서울 프라자호텔 일식당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날인 1997년 3월10일 오후 4시 ‘신동아’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이날 평소보다 많은 말을 쏟아냈다. 마치 다음날 아침 뇌졸중으로 쓰러져 ‘말문’이 닫힐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게 ‘성한’ 몸으로 한 마지막 인터뷰였다.

    특별한 병력이 없던 최 전 장관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정치권이 크게 술렁였다. 사람들은 그의 뇌졸중 원인을 ‘누적된 피로와 급격한 스트레스’로 추정했다. 건강 체질인 그가 하루아침에 쓰러진 이유를 놓고 정치권에서는 설왕설래했다. 가장 유력했던 설은 당시 정계 최대 현안이던 집권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 경선 문제와 관련됐으리라는 것이었다. 10년 만에 언론 인터뷰에 응한 최 전 장관에게 그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뇌졸중 발병 3일 전 부산에서 민주계 K의원으로부터 김영삼 대통령이 “최 의원(최 전 장관)은 당대표를 맡는 대신 대통령 후보 경선에는 나서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부산에서 K의원에게 YS의 ‘지시’를 전달받은 적이 있는지요.

    “아니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 없었습니다.”

    뇌졸중 후유증 때문에 어눌한 그는 ‘절대로’라는 단어를 두어 차례 반복했다. 당시 최 전 장관은 부산의 한 호텔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도중 자신을 찾아온 K의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서둘러 자리를 떠나 울산 생가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꼬박 하룻동안 생가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그는 다음날 부산의 상가(喪家)에 들른 후 서울로 올라왔다.

    ▼ 당시 울산 생가에 가셨다고 하던데요. 기억이 납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가를 찾은 이유에 대해 묻자 더듬더듬 설명하려는 최 전 장관 대신 부인 원영일씨가 답했다.

    “그때 나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잖아요. 한보(그룹)에 대한 뜬소문이 난무하는 등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시점이었죠. 민심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남편이)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청와대 생각과 바깥 공기는 다르다고 얘기를 해도 안 먹혀들었으니까요. (남편은) 정권 창출에 힘쓴 이들은 공동체 의식을 갖고 나라가 잘되도록 도와야 한다고 믿고 직보를 했는데….”

    원씨에 따르면 최 전 장관이 YS와 단둘이 만난 것은 쓰러지기 직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고 한다.

    “YS의 ‘지시’ 없었다”

    다시 최 전 장관에게 물었다.

    ▼ 뇌졸중으로 쓰러지던 날 아침 청와대에 들러 YS를 독대했다는 소문도 있던데요.

    “아뇨. (청와대에) 가지 않았습니다. (YS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 YS로부터 대통령후보 경선과 관련해 ‘지시’받은 게 전혀 없습니까.

    “그래요. 없습니다.”

    ▼ 당시 최 전 장관은 신한국당 당권보다는 대통령 출마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솔직히 대통령을 하고 싶었습니까.

    그가 허허 하고 웃으면서 “예. 대통령, 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정말이요?” 하고 되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속내를 밝혔다.

    ▼ 대통령이 되려고 한 이유는요?

    “그거요? 허허. 아이고, 나 참.”

    그가 말을 하려고 애쓰자 표현력이 떨어지는 그를 대신해 원씨가 대답했다.

    “정치인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던 거지요. 대통령의 자리가 탐나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정치를 해오면서 국민이 맘 편히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지금도 TV를 보면서 한숨을 쉴 때가 많아요. ‘쯧쯧’ 하고 혀를 찰 때도 적지 않고요.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야 국민이 편하게 살 텐데 그게 안 된다는 거죠. 과거 민주화운동 당시의 광경이 TV에 비치면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해요. 갖은 고문을 참아내며 일군 민주화인데 그 꽃이 만개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 거죠.”

    최 전 장관이 아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랜 세월 정치를 함께한 YS를 주군(主君)으로 여기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 YS와는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십니까.

    “동지입니다. (정치적인) 동지.”

    ▼ 예나 지금이나 그 생각에 변함없는지요.

    “그렇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임금과 신하 관계가 아닌 ‘평등관계’라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그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 말문이 조금 더 트이면 정치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정치를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그가 손사래를 치며 “아니요. 안 하고 싶어요”라고 천천히 말했다. 정치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의 육체를 갉아먹은 스트레스가 정치에서 비롯된 데 대한 회한이 담긴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맨손체조를 한다. 아침식사 후 남산(겨울철에는 장충체육관)에서 걷기 운동을 한 다음 오후에 3시간가량 물리치료를 받는다. 주말에는 손자 재롱에 푹 빠져 지낸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못다 이룬 정치의 뜻을 아들이 대신 펼쳐주길 바라고 있다. 두 아들 중 누가 자신의 뒤를 이을지 아직 구체적으로 의논해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잊기는 너무한 나의 운명’

    무턱대고 찾아갔지만 선뜻 인터뷰에 응해준 최 전 장관 집을 이틀 후 다시 찾았다. 사진촬영을 위해서였다.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와 감색 양복을 입은 그의 얼굴엔 밝은 웃음이 가득했다. “인터뷰에 응하니 다시 정치인으로 돌아간 것 같지 않냐”고 농담을 건네자 박장대소하며 “그런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씨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옛말이 맞는가보다”라면서 “(남편이) 인터뷰하던 날 밤잠을 설치더니 어제부터 종일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평소에는 집에 손님이 한두 명씩 찾아오는데 설날에는 많은 사람이 세배를 와요. 그러면 손님을 맞이하느라 굉장히 피곤할 텐데 피곤한 줄을 모르더라고요. 정치인의 피가 어디 가겠어요(웃음). 잊지 않고 찾아주는 사람이 고마운 거죠. 그들 틈에 있으면 마치 예전에 정치하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해서 기분이 들뜨는 모양이에요. 그동안 이 양반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겠어요. 목숨을 버릴 각오로 민주화에 앞장섰고 대통령이 돼 자신이 꿈꾸던 정치를 펼치고 싶어했는데 그게 좌절됐으니까요.”

    집에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내지 못하는 정치인의 습성이 몸에 남아 있어서일까. 최 전 장관은 아내에게 서둘러 점심상을 차리라고 재촉했다. 때마침 그의 집을 방문한 의학박사 김창하씨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최 전 장관과 호형호제하는 김씨가 “우리 형님 기사 좀 잘 써주시죠”하고 부탁하자 그가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높여 “없는 것을 만들(어서 쓰)지 말라”고 주문했다.

    김씨가 “형님, 노래 한 곡 하시죠”라고 권하자 최 전 장관이 노사연의 ‘만남’을 불렀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최 전 장관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만남’의 가사가 마치 최 전 장관의 지난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노래를 마친 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정치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그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직 장관 K씨는 아침에 서류가방을 들고 자신의 집 대문을 나선다. 장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내의 보이지 않는 구박이 시작됐던 것. 평생 정치에 몰두하느라 아내와 자식에게 소홀했던 그는 더 이상 눈칫밥을 먹기 싫어 서울 강남에 월세로 오피스텔을 얻어 매일 그곳으로 출근한다. 이 오피스텔은 오갈 데 없는 전직 고위 관료들의 사랑방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똑같이 권력의 뒤안길로 물러났더라도 정치인 출신보다는 장관 등 공무원 출신의 삶이 조금 더 윤택하고 활기찬 것으로 알려졌다. 공무원 연금을 받는데다 전문성을 인정받아 유관 기업체에 고문이나 사외 이사 등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른바 ‘봐주기’ ‘회전문’ 인사로 장관이 된 사람은 물러난 후 받아주는 업체가 별로 없다고 한다.

    ‘국립호텔’ 족보

    장관에서 물러나는 사람이 ‘끈 떨어진 갓 신세’를 실감하는 순간은 자택에 설치된 청와대와의 직통전화(속칭 ‘백색전화’)가 철거될 때라고 한다. 청와대에서 장관 사표가 수리되면 몇 시간 이내에 대통령과 직접 통화가 이뤄지는 전화를 떼 간다는 것. 이때 당사자와 가족이 느끼는 공허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장관직을 그만둔 지 한 달가량은 견딜 만하다고 한다. 그동안 신세진 사람이 인사치레로 찾아오고 밥을 사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달째부터는 찾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한다. 3개월째로 접어들면 서서히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살길을 찾아 나선다고 한다.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고위관료든 ‘끈’ 떨어진 후 ‘돈’마저 없으면 그처럼 처량한 게 없다고 정치인들은 입을 모은다.

    남자가 여자를 ‘쉽게’ 얻으려면 다섯 가지 힘이 필요하다고 한다. 얼굴이 반반해야 하는 미력(美力), 정력(精力)의 의미가 내포된 체력(體力), 말을 잘하는 언력(言力), 그리고 재력과 권력이다. 이 중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권력에는 돈과 여자가 따랐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권력. 그것을 겸손하게 사용한 사람은 가문의 명예와 영광을 떨친 인물로 족보에 기록되겠지만 ‘무기’로 활용한 사람은 ‘국립호텔’ 이용자 명단에 오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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