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은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이름을 ‘세종’으로 정했다. 그런데 작명(作名) 작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충남대 도수희 명예교수는 “세종은 도시명으로 부적절하다. 건설청은 자문위원으로부터 전문적 의견을 제대로 구하지도 않은 채 대중영합 식으로 졸속 작명했다”고 비판하는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2006년 9월 아리랑위성 2호가 보내온 ‘행정중심복합도시’ 예정지.
전문가 배제하고 여론몰이만
그런데 도시 이름을 짓는 것이 매우 특수하고 중요한 과제임에도 행정시건설청은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광범위하게 전문적 의견을 구하는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다. 대다수 행정기관은 이 정도의 사안이라면 우선 학술적인 검토부터 받아본 다음 실무적 단계의 작업을 진행한다.
아마 행정시건설청은 대중의 여론을 수렴해서 지명(地名)을 제정하면 될 것으로 편리하게 예단한 것 같다. 작명과정을 보면 이 같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행정시건설청은 대중에게 도시명을 공모하여 응모된 명칭 중 10개를 선정한 뒤 설문조사를 통해 3개로 압축했고, 다시 설문조사를 벌여 최우수작을 확정하는 절차를 밟았다.
지명을 정하는 과정에선 지명학적인 연구가 충분히 뒷받침돼야 하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당국은 연구에는 관심이 없었고 공모 등 ‘여론몰이’에 주력한 인상이다. 이런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왜 지명학자들은 행정시 지명 제정 때 침묵했는가”라고 질책할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명학자는 침묵한 것이 아니라 ‘배제’된 것이다.
지명은 언중(言衆)이 공유하는 공동의 이름이다. 한 도시의 지명은 그 도시 거주자뿐 아니라 국민 전체가, 혹은 전세계가 공유한다. 더욱이 나라의 수도가 될 도시 이름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지명은 어휘 중에서 가장 수가 많고, 사용 빈도가 가장 높으며, 가장 변하지 않는 어휘다.
‘고려사 지리지’ ‘팔도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 역대 지리지들은 하나같이 지명을 앞세워 기술되어 있다. 우선 행정단위 지명부터 내세워야 그 지명 내의 지세·고적·지리·교통·정치·경제·문화·교육·상업·산업·민속·인물 내용을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명은 해당지역의 크기에 따라 대, 중, 소지명으로 나눌 수 있다. 모든 지명이 다 소중하지만 그래도 기능면에서 보면 그 중요도는 대>중>소의 순이 된다. 행정단위 지명에서 가장 큰 지명은 수도명이다. 그 다음이 시(광역)·도명이고, 그 아래가 시·군·면명, 그 아래가 부락(里洞)명이다. 우리는 수도명과 시·도명을 대(大)지명으로 묶을 수 있다.
도시명과 도시는 운명공동체
그러면 행정시 지명은 어디에 해당할까. 당연히 대지명에 해당한다. 대지명 중에서도 수도명과 맞먹는 지명이다. 따라서 그 이름을 제정하는 데 있어 격(格)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했다. 도시 지명은 일단 결정되면 도시의 얼굴(간판)로 도시와 영구히 운명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도시 지명의 생성 및 변천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 부류로 구분된다.
제 1 부류 : 소지명(마을 이름)이 그곳에 건설된 도시가 발전하면서 저절로 대지명(대도시명)으로 격상해간다. 이와 달리 소지명→중지명→대지명→중지명 소지명과 같이 지명이 흥망성쇄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한밭(大田)’이라는 지명을 보자. 지금의 대전광역시는 ‘넓은 밭’이라는 의미의 작은 시골 마을인 한밭에서 출발했다. 한밭은 최소 행정단위(里·洞)도 아닌, 겨우 닷새장이 서는 자연부락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곳에 경부선 역이 건설되면서 소지명인 한밭은 대전으로 바뀌어 대전역이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이후 도시의 발전에 따라서 대전은 중(中)지명을 거쳐 결국 대지명으로 승격하게 됐다.
반대로 소지명 시절의 대전(회덕군 산내면 대전)을 거느렸던 ‘회덕(군)’은 점점 퇴락해 이제는 대전광역시 대덕군 회덕동으로 격하됐다. 우리의 대지명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전한 ‘역사성’을 갖고 있다.
2006년 1월12일 노무현 대통령이 충남 연기군 행정중심 복합도시건설청 개청식에 참석, 터치버튼을 누르고 있다.
이 방법은 두 지명에서 뿌리 하나씩을 가져다가 접목함으로써 원래의 뿌리를 통합된 새 지명에 잔존케 하려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사실 이는 지극히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다. 말 그대로 통합 지명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명에서 그 사례는 다음과 같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①절취 원칙: 충주(忠州)+청주(淸州) →충청(忠淸), 대전(大田)+회덕(懷德)→대덕(大德)
②흡수 원칙: 익산(益山)+이리(裡里) 익산(益山), 대천(大川)+보령(保寧)→보령(保寧), 온양(溫陽)+아산(牙山)→아산(牙山)
제 3 부류 : 새로운 도시가 건설될 때 해당 지역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전혀 새로운 지명이 제정되기도 한다. 중세시대에는 새 왕조가 수도를 옮길 때 새 수도명을 제정했다. 고려는 철원에서 천도할 때 현지의 지명이던 ‘부소갑(扶蘇岬)’ ‘송악(松嶽)’ 등을 버리고 ‘개주(開州)’라 제정했다. 조선도 천도하면서 ‘한양(漢陽)’ ‘양주(楊州)’를 버리고 ‘한성(漢城)’으로 칭했다. 그러나 이때도 해당 지역의 기존 지명이 일부 수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의 ‘개주’는 이웃한 ‘개성(開城)’에서 ‘개(開)’를 절취했으며, 조선의 ‘한성’도 본래의 ‘한양(漢陽)’에서 ‘한(漢)’을 절취하여 제정한 것이다.
집을 지으려면 우선 설계부터 해야 한다. 집은 구조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도시 건설에서도 설계는 중요하다. 지명 제정 또한 ‘설계 우선’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특정한 조어가 마음에 든다고 이름으로 확정하는 것은 작명이 아니다.
지명도 조어법에 따른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의 지명 중에서 3개 지명소(어두+어중+어미)로 구성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조치원 등). 대개는 2개 지명소(어두+어미)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대도시의 지명은 전부 2개 지명소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단어의 구성과 마찬가지로 지명어 구성에 참여하는 지명소도 조어법에 맞게 배합돼야 한다. 지명어도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가령 ‘서울, 인천, 수원, 대전, 대구, 부산, 전주, 광주’는 지명의 조어법을 잘 지킨 것들이다. 이들 지명을 ‘울서, 천인, 원수, 전대, 구대, 산부, 주전, 주광’과 같이 지명소의 위치를 바꾸면 한국 지명으로서의 구조가 파괴된다. 지명은 조어법에 맞게 지어져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금강, 세종, 한울
행정시건설청은 행정시 지명을 공모하면서 몇 가지 응모 기준(총 배점기준 100점)을 뒀는데 그중 지리적 특성(30점)과 역사성(30점)의 비중이 높았다.
한국의 대도시 지명은 지난 수천년 간 고유 지명의 원형을 잃지 않은 채 이어오고 있어 역사성이 뛰어나고 지리적 특성도 잘 발휘되어 있다(셔벌>서울, 달구벌>대구, 한밭>대전, 전나도>전라도 등). 또한 역대 한국의 수도 지명(한성, 개주 등)은 해당 지역의 기존 지명에서 일부 절취하고 일부는 새로 지어 전통성과 새로움의 조화를 꾀했다.
행정시 역시 이러한 특성을 지명 제정에 반영, 이름을 통해 도시 건설의 정당성, 정통성, 친밀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이른바 ‘5대 원칙’도 이런 취지에서 마련됐다. 그런데 실제 지명 제작과정에서 이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우선 가장 배점이 높은 항목인 행정시의 지리적 특성이란 ‘전국의 중심지역’을 의미한다. 응모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채택된 세 지명은 ‘금강’ ‘세종’ ‘한울’이다. 셋 중 어느 것도 행정시의 ‘지리적 특성’을 담고 있지 않다. 특히 행정시의 지명으로 확정된 ‘세종’은 전국 중심이라는 의미도 없을뿐더러 행정시가 위치하는 충청도의 지역적 특성과도 동떨어져 있다.
행정시 지명 제작의 원칙 중 역사성이란 특히 ‘지명사(史)적 전통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지명사에서 사람의 이름이나 시호(諡號)를 도시 등 특정 지역의 지명으로 쓴 전례가 없다. 다만 광복 이후 시호는 퇴계로, 을지로, 세종로, 충무로처럼 도로명으로만 사용됐다.
서양에서는 사람 이름으로 지명을 짓는 사례가 흔하다. 서양은 연장자의 이름을 마음대로 호명하는 언어사회다. 따라서 인명으로 지명을 작명해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문화가 다르다. 연장자 또는 선조의 이름을 그대로 호칭하지 않는다.
‘세종’은 다른 응모 기준인 상징성·도시 특성·대중성·국제성 중 도시 특성을 빼고는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세종대왕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정부가 세종을 도시명으로 채택한 데엔 분명 세종이라는 인물의 대중적 인기를 ‘차용’하겠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행정시 건설은 상당한 논란 속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판론자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정부는 ‘대중 영합적인 이름’에 집착했을 수 있다.
‘세종에 간다’?
그러나 ‘세종’은 활용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나라의 모든 도시명은 따로 이름 뒤에 ‘시(市)’를 붙이지 않아도 독립적으로 쓰인다. 서울, 수원, 대전, 대구, 부산, 청주, 전주, 광주는 그 자체로 의미가 명확하다. 외국 도시도 마찬가지다. 도쿄, 베이징, 뉴욕, 런던, 파리, 모스크바 등은 뒤에 ‘시티(City)’를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된다.
그러나 ‘세종’은 그렇지 않다. 홀로 쓰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세종에 간다’ ‘세종에서 태어났다’ ‘세종에 산다’라고 하면 정확한 의미 전달이 안 된다. ‘세종에 간다’는, 아예 말이 안 되는 표현으로 느껴질 것이다. 한국인에게 세종은 사람 이름이라는 관념이 뿌리 깊기에 세종 뒤에 바로 ‘~에’를 붙이면 어색하게 들린다. 지명 ‘세종’은 기존의 언어 전통을 지나치게 도외시한 것이다.
또한 세종을 지명으로 인지한 이후에도 ‘어느 세종(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세종대, 세종시 등)’인지 한번에 알 수 없다. 특히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세종대 등은 2000만 인구의 활동 무대인 수도권에 위치해 있어 자주 사용되는 이름들이다. 따라서 다른 지명은 모두 홀로 쓰이는 데 반해 세종이라는 지명은 반드시 ‘-시’를 접미해 ‘세종시’로 호칭해야 한다. 이는 사용자에게는 큰 불편이 아닐 수 없다. 비경제적인 어휘는 좋은 어휘일 수 없다.
혹자는 “왜 ‘세종로’는 괜찮고, ‘세종시’는 안 되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 이유는 도시명(대지명)은 도로명(소지명)보다 훨씬 비중이 높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뉴욕의 가로명인 ‘월가(Wall street)’는 지명인 ‘월(Wall)’ 뒤에 ‘스트리트’가 항상 접미되어 사용되어도 큰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도시명인 ‘뉴욕’이 반드시 ‘시티’를 접미해 사용해야 하는 불완전한 이름이라면 용인되기 어렵다.
지명 세종을 찬성하는 사람은 “미국의 수도도 사람 이름을 따서 워싱턴이지 않은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지명 ‘워싱턴’ 역시 큰 폐단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 워싱턴은 수도 이름(워싱턴 DC)과 주(州)의 이름(워싱턴 주)으로 함께 사용된다. 이 때문에 미국인들은 워싱턴 뒤에 ‘디시(DC)’나 ‘스테이트(State)’를 접미해야 한다. 아니면 아예 수도를 지칭할 때는 워싱턴은 빼고 ‘DC’라고만 말한다. 이럴 경우 워싱턴이라는 지명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사용되지 않는 지명은 나쁜 지명이라는 의미다. 또한 워싱턴 주는 수도 워싱턴에 비해서 인지도가 떨어지므로 사용자는 반드시 워싱턴 뒤에 스테이트를 붙여야 한다.
하나의 이름이 여러 지점을 동시에 나타낼 경우 이런 심각한 폐단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대중적 인기영합주의에 집착해 굳이 애매한 지명을 새로 제정한 것이다. 이 때문에 지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 지역적 특성, 역사성, 사용의 편리성, 배타적 구별성 등을 포기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행정시 지명 제정을 위해 필자를 포함해 여러 자문위원을 초빙하기는 했으나 자문하는 과정은 형식에 치우쳤다.
지역성, 역사성, 편리성
행정시 지명이 바르게 제정되는 과정은 어떠해야 할까. 우선 행정시의 위치, 규모, 기능이 고려돼야 한다. 이에 따르면 행정시는 위치상 국토의 중심, 규모와 기능에선 국가행정의 핵심이 된다. 지형은 평지다. 도시명의 생성 발전 부류 중 제 3 부류에 해당된다.
다음 단계에서 이런 원칙을 고려해 어두 지명소와 어미 지명소를 나란히 정하면 지명 제정이 완료된다(지명소 A+지명소 B 지명 AB). 여기엔 우리 나름의 전통이 있다. 어두 지명소(A)에선 지리적 특성이 고려되고, 어미 지명소(B)에선 역사성이 고려된다. 이럴 경우 부르고 듣기에 어색하지 않고 정감이 생긴다.
행정시는 지리적 특성에서 전국적 특성이 지방적 특성보다 우위에 있다. 그런데 가장 큰 전국적 특성은, 행정시가 국토의 정중앙에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자어로 하자면 A 지명소에 ‘중(中)’이나 ‘충(忠)’을 쓸 수 있다. 특히 충(忠)은 ‘중(中)’ ‘심(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충’은 전국의 중심이라는 지역적 특성뿐만 아니라 행정시의 소재지인 ‘충청도’의 어두 지명소인 ‘충’을 뿌리로 삼는다. 행정시 지명이 소재지 지역의 지방적 특성과 정서에도 부합하는 것은 큰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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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명의 어미 지명소 중에서 오래 전부터 널리 쓰인 말이 ‘벌’이다. ‘셔벌·셔라벌(徐伐·徐羅伐)’, ‘사벌국(沙伐國)’, ‘달구벌(>대구)’, ‘비사벌(>전주)’ 등에서 잘 나타난다. ‘벌’은 백제의 어미 지명소 ‘부리(夫里)’의 변화형이다. ‘부리’는 마한의 ‘비리(卑離)’로 소급된다. 마한 54국명 중에는 ‘점비리, 내비리, 모로비리, 여래비리, 감계비리, 초산도비리(占卑離, 內卑離, 牟盧卑離, 如來卑離, 監溪卑離, 楚山塗卑離)’ 등 어미 지명소 ‘비리(-卑離)’가 많이 발견된다.
삼국시대의 고유 지명이 신라 경덕왕 16년(757) 때 한자 지명으로 개정된 이래 어미 지명소 ‘벌’은 ‘원(原)’으로 한역(漢譯)됐다. 이후 그 맥이 이어져 ‘철원(鐵原)’ ‘강원(江原)’ ‘수원( 水原)’ ‘청원(淸原)’ ‘남원(南原)’ ‘창원(昌原)’과 같은 지명이 생겼다. 이처럼 ‘원’은 한국에서 큰 지명의 어미 지명소로 자주 쓰인 역사성을 갖고 있다.
이 같은 지명 제정 과정을 따르면 행정시의 새 지명은 ‘충원(忠原)’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