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영애의 죽음을 다룬 ‘신여성’ 1933년 9월호 기사. 왼쪽 사진은 정성진과 윤영애 부부.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수재 남편과 일본 유학까지 마친 신여성 아내. 엘리트 부부의 꿈결같은 신혼생활은 조선반도 모든 이가 부러워할 만했다. 그러나 불과 10개월 만에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감춰져 있던 가족 안의 갈등과 모순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수백년 이어져온 조선 사회의 구습과 새로운 문화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두 사람의 이야기.
윤영애의 죽음을 다룬 ‘신여성’ 1933년 9월호 기사, 왼쪽 사진은 정성진과 윤영애 부부.
보름 남짓 입원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윤영애는 남편과의 추억이 곳곳에 서린 무교정 신혼집 대신 당주동 친정집에 머물며 신변을 정리했다. 무교정 신혼집에 살고 있는 시부모와 가끔 만나 남편의 유품 처리를 상의하는 것 외에는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지나도록 당주동 친정집 부근에서는 밤이면 구슬픈 울음소리와 한 맺힌 하소연이 들리곤 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태어나 고학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지 1년 만에 죽은 남편이 유산을 남겼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끼니를 걱정할 만큼 생활고에 직면하지는 않았다. 윤영애의 친정은 수원에서 손꼽히는 유지였다. 무교정 신혼집 역시 친정오빠 윤태종이 마련해준 것이었다.
먹고 입을 걱정이 없는 처지였지만, 언제까지고 집안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결혼으로 포기한 사회생활에 대한 미련도 컸거니와 집안에 갇혀 지내니 남편을 향한 그리움과 운명에 대한 번뇌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윤영애는 미용실이나 양장점을 차려서 사는 재미를 붙여볼 결심을 했다. 한동안 소원했던 친구들도 만나고, 의욕적으로 사업구상도 다듬어 나갔다. 여학생 시절의 씩씩하고 쾌활하던 모습을 되찾는 듯했다. 안타깝고 괴로운 기록이 가득 찬 일기장과 노트도 불살라버리고, 친한 친구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완고한 오빠가 ‘먹고 입을 것 걱정 없는데 여자가 무슨 장사냐’며 양장점을 내는 데 반대해도 싫은 내색 없이 차분히 설득했다.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된 7월 중순, 윤영애는 불면증이 생겨서 어머니와 한 방에서 자기가 불편하다며 평소에 쓰지 않던 뒷방을 치우고 혼자 지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각방을 쓴 이후에도 윤영애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일을 돕거나 친구를 만나러 외출했고, 여가 시간에는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었다. 밤늦도록 자지 않고 무엇인가 열심히 쓰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7월27일, 좀처럼 늦잠 자는 일이 없던 윤영애는 아침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가 방문을 열어보니 윤영애는 자리에 누워 신문을 읽고 있었다. 윤영애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밥 생각이 없네요. 어머니 혼자 식사하세요.”
어머니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30분쯤 후, 윤영애의 방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황급히 방문을 열었을 때, 그날 아침 윤영애가 한 움큼 집어삼킨 칼모틴의 독 기운은 이미 온몸에 퍼진 상태였다. 불면증 치료에 쓴다고 받아온 수면제를 목숨을 끊는 데 써버린 것이다. 서둘러 병원으로 옮겨 응급조치를 해보았지만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다음날 신문 사회면에는 청상과부의 자살 소식이 짤막하게 실렸다.
27일 오후 2시경 시내 당주동 113번지 윤태종의 누이동생 윤영애가 칼모틴을 다량으로 복용하고 신음하는 것을 집안사람이 발견하고 즉시 병원으로 후송해 응급조치를 베풀었지만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윤영애는 작년 봄에 결혼한 후 불과 1년도 못 되어 그의 남편이 죽었음을 비관해 자살한 것이라 한다. (‘청상 자살’, ‘동아일보’ 1933년 7월28일자) |
윤영애가 자살한 1933년에는 수많은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학대를 못 이기고 목숨을 끊었지만, 반대로 일부 신여성들은 시어머니를 학대해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조선일보’ 1933년 1월21일자에 실린 안석영의 만문만화 ‘33년식 가정쟁의’.
“금전보다 중한 게 의리”
윤영애는 1911년 슬하에 1남1녀를 둔 수원 부호 윤성단의 늦둥이로 태어났다. 부모와 오빠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족하게 지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지만, 자애 깊은 어머니와 정 많은 오빠 덕분에 외로움과 서러움을 모르고 자라났다. 수원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해 잠깐 동안 경성실천여학교에 다니다가 일본 모지(門司)의 진세이(鎭西)고등여학교로 전학했다.
영애는 퍽 총명하고 또 이지적 여성이면서도 지순한 감정과 발랄한 기상을 가진 순수 모던 걸이었다고 그와 친한 동무는 이야기해준다. 영화감상의 취미를 알고, 문학과 소설을 이야기하고,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읽고, 사회문제를 비판해보고, 서점과 백화점을 유영(遊泳)해 다닐 줄 알고, 스포츠를 이해하고, 시를 쓰고, 음악을 아는 요컨대 그네들 말대로 순수 모던 걸이었다. 학교에서의 성적은 어디서나 우수했으며 더욱이 모지 진세이고등여학교에서는 발군의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빠지지 않는 용모, 세련된 체구! 다시 거기에 물질적 혜택까지 갖추고 있는 여성이요, 가정에서의 간섭과 구속조차 적게 가진 여성이었다. 실로 행운의 소녀요, 선앙(羨仰)의 소녀였다. 가슴에는 불같이 타는 지식욕이 있었을 뿐이요, 대망을 가슴에 안고 스스로 기뻐하는 여성이었다. (‘윤영애 순종(殉從) 애화’, ‘신여성’ 1933년 9월호) |
진세이고등여학교에 다닐 때 기숙사 사감이 사적인 편지를 뜯어보았다고 사감의 뺨까지 치면서 잘못을 질책한 일화가 전해질 만큼 성격이 급하고 거칠 것이 없었다. 진세이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해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했다. 일본에서 전문학교나 대학까지 마칠 생각도 있었지만, 서울에서 홀로 지내는 어머니 걱정에 유학생활을 더는 지속할 수 없었다. 오빠 소유의 당주동 집에서 어머니와 둘이서 재미있고 행복하게 지내면서 신촌 이화여전까지 통학했다.
달콤한 신혼
마냥 행복하게만 보이던 신여성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일본 유학에다 전문학교 교육까지 받고보니 어느덧 스무 살이 훌쩍 넘어버렸다. 어머니는 윤영애의 혼사가 마냥 늦어지는 것을 몹시 근심했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공부는 그만하면 됐으니 시집가라고 다그치자 윤영애 역시 결혼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애 앞으로 나타나는 신랑후보자의 행렬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얼굴 곱고 마음 착하고 교양 있고 재산 있고 이보다 더 나을 신부가 또 있을 것인가? 장안의 청년이란 청년이 전부 동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한 사람도 OK의 검인을 맞은 이가 없었다. 모두 어딘지 부족했다. 그때 혜성같이 나타난 청년이 있었다. 영애는 정성진이라는 호남자를 소개받았다. (‘윤영애 순종(殉從) 애화’, ‘신여성’ 1933년 9월호) |
정성진은 가난하지만 유서 깊은 양반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휘문고보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32년 졸업한 이후에는 곧바로 경성지방법원 서기로 임용될 만큼 수재였다. 학창시절 운동선수로 활약했고, 성격이 쾌활하고 견실해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다.
윤영애와 정성진이 처음 만난 것은 경성법학전문학교와 이화여전을 나란히 졸업한 직후인 1932년 4월. 까다롭게 신랑감을 고르던 윤영애도 정성진 같은 청년이라면 평생을 의지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정성진 역시 윤영애에게 남다른 매력을 느꼈다.
당사자 사이에 마음이 맞으니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혼담이 오가고 약혼하고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5월15일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변호사 김병로의 주례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는 가인(街人) 김병로는 신랑 정성진의 경성법학전문학교 은사였다.
윤영애의 자살 배경을 전한 ‘동아일보’ 1933년 7월29일자.
신혼부부는 시집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하는 것이 조선의 오랜 풍속이었지만, 가난한 정성진의 집에는 신혼부부가 거처할 공간이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정성진은 당주동 처가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비록 처가살이였지만 신혼부부의 생활은 원앙도 부러워할 만큼 단란했다. 아침이면 신랑은 서소문정 재판소로, 영애는 신촌 모교의 도서관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출근했다. 마침 당주동 집에서 두 사람이 출근하는 곳은 방향이 같았다. 두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나란히 출퇴근하며 남다른 행복감에 젖었다.
신혼 첫 달이 꿈결같이 지나간 때, 정성진은 도쿄로 고등문과시험을 보러 갔다. 짧은 이별이었지만 두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전보와 전화로 서로 사랑을 확인했다. 신혼 초 잠깐 동안의 이별은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확인해주었다. 정성진이 시험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후 두 사람은 다시 행복한 신혼생활로 돌아갔다. 사랑하며 살다보니 무더운 여름날도 더운 줄 모르고 지냈다. 그해 정성진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윤영애는 실망하지 않았다. 젊고 유능한 남편에게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 믿었다.
9월이 되자 윤영애는 졸업 후에도 계속 다니던 이화여전에 더 이상 나가지 않고 주부로서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했다. 아이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자니 집이 문제였다. 매달 40원씩 받는 남편의 월급만으로 내 집 마련은 요원한 꿈이었고, 가난한 시댁에서 도움을 받기도 어려웠다. 결국 윤영애는 수원에 있는 오빠를 졸라 무교정에다 1만5000원짜리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정성진 부부는 윤태종의 도움으로 결혼한 지 불과 넉 달 만에 영원한 안식처를 장만했다. 윤태종은 도와주는 김에 기분 좋게 도와주고자 집의 명의까지 매제 정성진에게 넘겨 주었다.
뜻밖의 시집살이
무교정 신혼집으로 이사한 후 정성진과 윤영애는 뛸 듯이 기뻤다. 남부럽지 않은 집도 생겼고, 지금은 비록 박봉의 재판소 서기일 뿐이지만 남편의 실력이라면 고등문관시험 합격도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20대 초반의 젊은 부부는 소꿉놀이보다도 더 재미있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바랄 것이라곤 내일도 오늘만큼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달콤한 신혼의 단꿈에 취해 있던 바로 그 순간 비극의 씨앗은 움트고 있었다.
부부 사이의 정분만 떼놓고 보면 정성진 부부는 조선 어느 가정보다 단란했다. 그러나 조선의 가정이 단지 부부 사이의 정분만으로 유지되지는 않았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기를 펼 수 없을 만큼 갖가지 제도와 인습의 굴레를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이 행복의 절정에 취해 있을 때 그것을 괘씸하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정성진의 부모였다.
부모를 모르는 자식! 부모를 잊어버린 자식! 계집에게 홀린 자식! 이 몇 마디 말만으로도 성진이의 등 뒤를 협박하는 폭풍을 짐작할 것이다. 가문이 낮으나 부자란 맛에 얻은 며느리였다. 그런데 덕은커녕 그 며느리는 자기 아들을 빼앗아간 셈이었다. 다달이 타는 40원 월급조차 이제는 저들 두 식구에게로만 가고 자기네들에게 돌아오기는커녕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처음 결혼시킬 때는 이럴 예정이 아니었다. 며느리 덕으로 편안한 살림을 해보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윤영애 순종(殉從) 애화’, ‘신여성’ 1933년 9월호) |
정성진이 처가의 도움으로 무교정에 대궐 같은 신혼집을 장만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부모의 분노가 폭발했다. 시부모의 간섭이 시작되자 행복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파란에 휩싸였다. 새로 집을 산 지 열흘 남짓 지난 후 정성진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왔다. 아버지는 자식의 불효를 책망하면서 아들의 명의로 등기된 집문서를 빼앗았다. 그리고 며느리는 물론 아들도 모르게 빼앗은 집문서를 전당 잡히고 몇 천원을 빌려 썼다.
윤영애의 학교 선배인 김자혜가 ‘신여성’ 1933년 9월호에 기고한 ‘윤영애 자살에 관한 사견’.
윤영애는 분하고 억울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황당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일본 유학에 전문학교까지 나온 신여성이 시어머니의 염치없는 행동을 묵묵히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참아야 했다. 시어머니가 뭐라고 하건 윤영애는 묵묵히 순종하고 인내했다. 결혼한 지 반년 만에 명랑하고 해맑던 신여성은 비참한 지경에 처한 가여운 어린 양으로 일변했다.
시어머니의 학대는 간섭에만 그치지 않았다. 안방을 차지한 시어머니는 여세를 몰아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시부모의 제2단계 계략! 그것은 성진 부처를 이간질하는 것이었다. 둘 사이의 애정을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부모로 자식의 생활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부모가 끼어든다고 자식의 생활이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예를 우리 조선의 과거 생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들의 마음이 부모에게서 떠나서 아내에게로 향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섭섭하다고 그것에 질투가 난다고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려는 것은 어떻게 보든지 죄인의 할 짓이다. 하루 또 하루 즐거울 성진 부처의 생활은 괴로웠다. 그러나 그들은 부모의 뜻에 반항할 만한 용기를 갖지 못한 인습에 얽매인 조선의 아들딸이었다. 그러나 저들에게 있어서 다만 한 가지 즐겁고 든든한 것은 서로 믿는 것이었다. 서로의 사랑을 믿고 마음을 믿고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윤영애 순종(殉從) 애화’, ‘신여성’ 1933년 9월호) |
시어머니는 젊은 부부를 이간질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총동원했다. 아들이 출근하면 며느리에게 입에 담기 어려운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고, 퇴근한 아들에게는 며느리 험담을 귀가 따갑도록 늘어놓았다. 시어머니의 간섭과 이간질은 날이 갈수록 가혹하고 교묘해졌지만 젊은 부부의 사랑을 갈라놓지는 못했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간섭해도 윤영애는 정성진을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고, 어머니가 아무리 아내의 험담을 해도 정성진은 끝까지 윤영애를 믿었다. 어떠한 시련이 와도 두 사람의 사랑과 믿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1932년 12월, 시부모의 등장으로 행복한 결혼생활의 위기가 시작된 지 석 달이 지났다.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시어머니의 학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윤영애는 남편 한 사람만 쳐다보며 하루하루를 가까스로 버텼다. 그러나 아내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돼주어야 할 남편이 아내보다 먼저 허물어졌다. 학창 시절 운동선수로 활약할 만큼 건강하던 남편은 겨울에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수척해지더니, 연말에 가까워져서는 급기야 몸져누웠다. 원인은 어이없게도 십이지장충에 의한 빈혈이었다.
시어머니는 아들의 빈혈까지 며느리 탓으로 돌렸다. 부부가 떨어져 지내야만 나을 병이라며 며느리를 친정으로 내려 보냈다. 윤영애의 친정어머니는 딸을 시집보내고 고향인 수원으로 내려가 아들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윤영애는 병든 남편을 시어머니 손에 맡겨두고 외로이 수원으로 내려갔다. 서럽고 억울했지만 시어머니에게 반항했다간 남편 병세가 더 악화될 것 같아 묵묵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정성진이라고 어머니의 부당한 처사에 불만이 없을 리가 없었으나, 드러내놓고 항변할 수도 없어 눈물을 머금고 아내를 떠나보냈다.
야속한 죽음
윤영애가 친정에 내려온 지 일주일 후, 정성진이 아픈 몸을 이끌고 밤차를 타고 수원으로 내려왔다. 아내가 떠난 일주일 동안 남편의 안색은 몰라보게 초췌해졌다. 윤영애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남편을 서둘러 인근 병원에 입원시켰다. 입원 뒤에도 정성진의 병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병상에서 새해를 맞고 또 한 달이 지났다. 윤영애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남편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경성제국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자신의 처소는 시어머니가 안방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무교정 신혼집 대신 비워뒀던 당주동 친정집에다 마련했다.
정성진이 대학병원에 입원하자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아들이 이처럼 쇠약해진 것이 모두 며느리 탓이라며 며느리를 병든 아들 곁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하루 종일 병자의 귀에 대고 며느리 험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정성진은 어머니가 무슨 험담을 하건 한사코 아내만을 찾았다. 아내가 없을 때는 식사조차 거부했다. 담당의사가 정성진의 어머니에게 왜 병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간병을 막으려 하느냐며 타일렀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남편의 병이 하루이틀에 나을 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윤영애는 무교정 신혼집의 살림을 정리하고 사글세를 주려했다. 그 과정에서 시아버지가 몰래 집문서를 전당 잡히고 돈을 빌려 쓴 사실이 드러났다. 정성진은 부끄러워 차마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다.
성진은 미안한 생각에 집의 명의를 변경하겠다고 인장을 꺼내 영애의 오라버니한테 보냈다. 그러자 그만 성진을 중심하여 대풍파가 생겨났다. 성진 부모는 처가와 여편네만 알고 부모를 모르는 자식이라며 성진을 나무랐다. 영애에게는 집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윤영애 순종(殉從) 애화’, ‘신여성’ 1933년 9월호) |
어머니는 아들의 병이 나으려면 치료가 아니라 요양이 필요하다며 아들을 퇴원시켜 시외 청량사로 데려갔다. 담당의사가 이대로 퇴원하면 환자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고 말렸지만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뜻하지 않게 청량사로 옮겨간 정성진은 아내에게 마음의 고통을 하소연하는 편지를 쓰고 찾아와줄 것을 부탁했다.
시어머니가 있는 곳이라면 몸서리가 났지만 병든 남편의 애절한 부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윤영애는 당주동 친정집에서 청양사로 매일같이 찾아갔다. 그러나 간병을 구실로 병자 곁을 지키고 앉은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아들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막았다. 효심이 지극한 정성진도 더는 참지 못했다.
“제발 어머니! 마지막 부탁이에요. 간병은 영애에게 맡기고 어머니는 집에 가 계세요.”
목에 핏대를 세우고 거듭 간청해도, 어머니는 병자의 애끊는 마지막 부탁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불효를 책망할 따름이었다.
“여편네만 알고 부모는 모르는 고얀 자식!”
하루는 종일토록 시어머니에게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고 옥신각신하다 남편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윤영애 앞에 정성진이 뛰쳐나왔다. 정성진의 몸은 여윌 대로 여위어 산사람 몸 같지 않았다. 윤영애가 비틀거리는 남편을 방에 누이자 남편은 아내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아내의 처지를 동정하며 부모의 잘못을 대신 사과했다. 남편의 애끊는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윤영애는 수척해진 남편이 불쌍하고 측은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지경이 되어서까지 아내만을 생각하는 남편의 마음이 한없이 고마웠다. 엇나갈 대로 엇나간 결혼생활이 야속하지만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정성진의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정성진은 그날 낮을 넘기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2월28일! 윤영애의 남편은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저버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윤영애는 급한 마음에 꽃잎 같은 제 손가락을 찍어 점점이 흐르는 붉은 피를 남편의 입에 넣어보려 했건만 그나마 시어머니가 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윤영애 하종 후문’, ‘동아일보’ 1933년 7월29일자) |
정성진의 죽음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윤영애는 남편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정성진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빈혈이라는 병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무서운 질병은 아니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냐며 담당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퇴원시켜 절에다 방치한 것이 화근이었다.
“너 때문에 생자식 죽었다”
간병 한번 마음대로 해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남편을 죽음의 길로 떠나보낸 윤영애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했다. 자기가 좀더 용감하지 못했던 것이 뒤늦게 후회됐다. 스물두 살 젊디젊은 나이에 남편의 장례를 치르는 윤영애에게 시댁사람 어느 누구도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장례 기간 내내 시어머니는 “너 때문에 생자식 죽었다”고 쫓아다니며 통곡했다.
남편의 장례가 끝난 후, 윤영애는 당주동 친정집으로 돌아갔다. 슬픔과 피로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윤영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건강은 이주일이 지나서야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겨우 몸을 추슬러 퇴원하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차례로 발생했다.
세상의 한 귀퉁이를 잃고 상심에 젖어 있는 윤영애의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사단(事端)은 너무나 추악한 것뿐이었다. 성진의 부모는 성진이 죽은 후 관리하고 있던 무교정 집을 방매에 내부쳤다. 혹시 영애가 이의를 제기할까봐 사람을 보내 협박까지 했다. 결혼기념으로 성진의 동료가 보내준 책장 한 개마저 시댁 사람들이 몰려와서 성진의 세간이라고 빼앗아 갔다. 시댁 사람들이 하는 일은 인정 없고 냉혹하고 추악한 것뿐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영애의 신상을 모략하는 갖은 풍문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윤영애 순종(殉從) 애화’, ‘신여성’ 1933년 9월호) |
오빠가 마련해주었지만 어영부영 시부모에게 넘어간 무교정 신혼집에서 윤영애는 시부모와 몇 차례 남편의 유품 처리를 상의했다. 그러나 시부모는 신혼의 달콤한 추억이 아로새겨진 찻잔 하나 내주지 않았다. 시집간 지 채 1년도 되기 전에 한없이 영락한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날이면 날마다 친정어머니를 붙잡고 울며 억울한 심사를 하소연했다. 몇 번이나 떨리는 손으로 독약 그릇을 들었으나 번번이 들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억지로 지속했다.
눈물과 한숨 속에 언제 왔는지 모르게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왔다. 윤영애는 떠나가는 봄과 함께 슬픔을 떨쳐버리고 자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죽은 남편도 자신이 씩씩하게 살기를 바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여학교 시절부터 해보고 싶었던 미용실이나 양장점을 차려 사는 재미를 붙여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친정에서 윤영애의 앞길을 막았다. 윤영애가 차분히 사업계획을 설명하면 오빠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
“입고 먹을 것 걱정 말고 그냥 집에 있으렴.”
한번 결심하면 물러서지 않는 오빠의 성격을 잘 아는 윤영애였기에 몇 번 설득하다가 그만 포기했다. 사회활동을 하겠다는 계획이 좌절되자 윤영애는 급속히 허물어졌다.
‘나이 스물둘. 남편도 아이도 없이 평생 집안에 갇혀 지내야 한다.’
자신에게 남은 길고 긴 인생을 생각하니 끔찍하기만 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희망을 잃었고, 마지막으로 택해본 작은 희망도 무참히 깨어졌다. 게다가 시댁에서 퍼뜨린 추악한 소문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지금 깨끗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가장 행복해지는 길이다.’
죽음을 각오한 윤영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신변을 깨끗이 정리했다. 친한 동무에게 마지막 서신을 쓰고 함께 찍은 사진과 동봉해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일기장과 노트를 모두 불사르고 자기가 살아 있던 흔적이 될 물건을 전부 없앴다. 자살할 내색이 전혀 없었기에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런 윤영애의 행동이 새출발의 결의를 다지는 것처럼 보였다.
자살하기 열흘 전 윤영애는 불면증이 생겨서 어머니와 한 방에서 잠자기 불편하다고 평소에 쓰지 않던 뒷방을 치우고 혼자 지냈다. 약국에서 불면증 핑계를 대고 칼모틴을 타오고, 며칠 밤을 새워 유서를 썼다. 준비가 끝날 때까지 윤영애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7월27일 아침, 윤영애는 칼모틴을 한 움큼 집어삼켰다. 아직 의식이 남아 있을 때, 어머니가 아침 먹으라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윤영애는 황급히 곁에 놓인 신문을 집어 들었다. 희미해져만 가는 의식을 집중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밥 생각이 없네요. 어머니 혼자 식사하세요.”
돌아서서 방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윤영애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어머니, 행복하세요.’
신여성의 딜레마
신여성에게 결혼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사회는 급격히 개화되었지만 가정은 그대로 구(舊)가정이었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이란 조선사회의 인습은 신교육을 받은 신랑의 가정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로라하는 모던 보이의 어머니도 구여성이긴 마찬가지였다. 신여성에게 구식 시어머니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여학교 동창회 날이면 시집 안 간 후배에게 “시어미 있는 사람하고는 연애도 걸지 말아요. 사람이 그냥 썩어요. 썩어!”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시어머니의 학대로 수많은 부부가 이혼했고 윤영애처럼 수많은 며느리가 자살했다. 이혼이나 자살처럼 파국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신여성에겐 사회와 단절된 시집살이 자체가 비극이었다. 신여성은 ‘여학생 며느리는 못 쓴다’는 비아냥거림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시집살이를 해야 했고, 그러자면 결혼 후 여학생 시절의 습속을 깨끗이 잊어야 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두 여인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서로 친해지기 어려운 관계다. 시어머니는 언뜻 보기에 남성중심주의의 충실한 수호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성중심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다. 시어머니가 아들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들이 자기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성진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인생이 있었다면 며느리를 그처럼 가혹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대 이전 시집살이가 남성중심주의가 빚어낸 비극이었다면, 근대 문화의 세례를 받은 신여성의 시집살이는 남성중심주의와 고부간 문화 차이가 빚어낸 이중의 비극이었다. 조선시대 며느리는 훗날 자신의 며느리로부터 과거 시집살이의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때 조선시대식 며느리였던 신여성의 시어머니는 자신의 며느리로부터 과거 시집살이의 고통을 보상 받을 수 없었다. 신여성 며느리를 구식으로 시집살이시키면 며느리가 정체성의 위기에 빠졌고, 아들 내외의 신식 가정을 인정하면 시어머니가 본전생각이 났다. 신여성의 시집살이는 조선시대 시집살이보다 훨씬 심각한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윤영애 친구의 언니이자 이화여전 선배였던 여성기자 김자혜는 윤영애가 좀 더 적극적으로 시부모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사감 선생의 그릇을 보고 뺨을 치고 질책하던 그 용기를 가지고 왜 자기의 시부모의 그릇은 바로잡지 못했는가? 그렇게 씩씩하던 성격을 가지고서 왜 침묵 속에서 말 한 마디 변변히 못하고 불의의 희생이 되고 말았는가? 인종만이 며느리의 도덕이 아니라는 것을 영애가 가진 상식쯤이면 확실히 알았을 것인데 왜 자기의 소유, 자기의 자유, 자기의 인권 심지어 부부간의 사랑까지도 빼앗기면서 머리를 숙이고 말 한 마디 없이 못난이 노릇을 했는가는 의심쩍은 일이다. 처녀 때 가졌던 그 쾌활한 성격으로 주부로서의 권리를 찾았더라면, 만일 시부모로부터 떠나 소가족 제도를 실시해서 불완전한 조선의 대가족제를 깨뜨리는 사표가 되었더라면 그 시부모들로 하여금 저널리스트의 회자거리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자혜, ‘윤영애 자살에 관한 사견’, ‘신여성’ 1933년 9월호) |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 시부모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것이다. 부당한 행동을 했다고 사감 선생의 뺨을 치던 당찬 신여성이 어디 시부모가 무서워서 저항하지 못했겠는가. 윤영애가 시부모의 학대에 저항하지 못한 것은 시부모가 무서웠기 때문이 아니라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
윤영애가 자살한 지 70여 년이 지났어도 시어머니는 여전히 무서운 존재, 며느리는 여전히 얄미운 존재로 남아 있다. 아들과 남편이 세상의 전부인 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은 해결될 수 없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여성이 아들과 남편의 매개 없이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완벽하게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