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재수 끝에 대학에 들어간 아들은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느라 여념이 없는 듯했다. 한심스러웠다. 당연히 부자간의 대화는 갈수록 엉망이 됐다. 그런데 문득 30년 전을 돌아보니 나도 그 시절, 어른이 된 듯 행동했던 것 같다. 아들에게 불쑥 편지 주고받기를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2050 강 뛰어넘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한 달에 한 번이면 어떻고, 내가 다섯 통을 쓰도록 아들이 한 통밖에 안 쓴들 어떠랴. 일단 시작했고 20여 통의 e메일을 주고받았다. 지금도 ‘진행형’인 아들과의 e메일 프로젝트 중 지난해 주고받은 편지 일부를 공개한다. 아무쪼록 이 세상의 아버지와 아들이 남자 대 남자로 속을 터놓는 그날을 앞당기는 데 보탬이 됐으면 한다.
e메일 대화의 주인공 최영록(왼쪽)·최한울 부자.
나는 마음이 부푼다. 가벼운 흥분까지 인다. 약속을 하자. 편지를 받으면 늦어도 2~3일 내에 ‘답멜’을 보내자. 메일을 보낸 후 ‘답멜’을 받을 때까지 그만큼의 설렘이 있을 것이다. ‘어린 왕자’에서도 읽었지? 여우가 왕자를 4시에 만나기로 하면 3시부터 스쳐가는 발걸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런 설렘은 이성 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친구 간에, 부자간에, 형제 간에, 다른 모든 관계 속에도 늘 이런 떨림이 있어야 한다. 네가 흔쾌히 응해줘서 무척 고맙다. 일주일 전만 해도 사는 게 악몽 같았으나 이제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환한 세상이 우리 앞에 전개되는 느낌이다.
나는 여기 이 마당에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 것이다. 언젠가 편지에 쓴 것처럼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를’ 고스란히 너에게 전해주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너는 발전하고 전진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 마라.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過猶不及: 猶는 오히려 유, 도리어 유로 읽는다)와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 나고드는 출입을 꼭 부모에게나 주변에 알리라는 뜻이다)을 오늘의 화두로 던진다.
〈 아들 〉 2006-05-22 “내 최고의 야망은 아버지”
오늘 ‘싸이’(싸이월드 미니 홈페이지-편집자주) 다이어리에 이렇게 썼습니다.
“지난 석 달간 내가 알게 된 사람들은 참 글을 잘 쓴다. 자기 생각을 분명히 표현할 줄 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해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살며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 그런 면에서 난 ‘꽝’이다. 내가 써놓은 글을 보면 종잡을 수가 없다. 하긴, 글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지. 한 사람의 글에는 그 사람이 오롯이 담겨 있다. 깊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내 자신이 깊어져야겠지. 아직은 깊이 있는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냥 느낀 점만 마구 갈겨놓은, 글이라고 하기엔 너무 창피한 글입니다. 하지만 제 진심은 아시겠죠? 요즘엔 어떤 책을 봐도 끝까지 보기 힘들고 금세 졸리고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하기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깊이 있는 글이라니.
‘백수의 월요병’(아버지 최영록씨가 2005년에 펴낸 수필집-편집자주)만 보면 아버진 깊이 있는 글을 쓰는 것 같지 않습니다. 책 낼 때 출판사 사람들이 깊이 있는 글을 뺐다고 그러셨죠. 이제 알겠습니다. 아버지가 보내주신 메일, 그동안 쓰신 칼럼 등을 보면 아버지의 글이 꽤 깊이 있다는 걸 저도 알겠더라고요. 제 글의 목표는 아버집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야망 중 현재 최고의 야망은 아버지네요. 그러고보니 평론가나 칼럼니스트가 가장 가까운 꿈이네요. 대체 뭐가 뭔지. 이 버릇부터 고쳐야겠습니다. 잘나가고 있다가 옆길로 팍 튀어버리는 버릇.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자꾸 책 밖으로 나가려는 눈을 고정시키고 책을 봐야겠습니다.
〈 아버지 〉 2006-05-23 “글을 잘 쓰려면”
매일 아침 아들이 보낸 e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최영록씨.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현 문화재청장)님은 “아는 만큼 보이게 된다”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남부럽지 않은 글쓰기 능력을 원한다면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라”고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할 일은 많이 읽는 것이다. 대학시절만큼 원하는 책을 마음놓고 읽을 시간은 살면서 많지 않다. 우선 주제를 정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는 남독(濫讀)이 좋겠다. 남독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너의 특성을 계발해줄 계통의 책을 취사선택할 능력이 생긴다. 그런 후에는 일로매진(一路邁進)해야 한다. 수능시험 준비로 밤을 새운 적은 있어도 좋은 책을 읽으며 한 밤을 꼬박 새운 경험은 없겠지. 이제 그런 생생한 경험을 자주 해야 한다. 책에 몰입하다보면 어느새 희붐한 여명(黎明)을 맞게 된다. 그때의 뿌듯한 기분은 맛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 나는 네가 이런 기분을 자주 맛보기 바란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대해 말하자. 우선 너희 대학에서 교재로 쓰고 있는 ‘창의적 글쓰기’라는 책을 정독(精讀)하기 바란다. 한번 훑어봤는데, 간단한 예를 많이 들어 정리를 잘 해놓았더구나. 우리 서가에도 ‘디지털시대의 글쓰기’나 ‘글쓰기의 힘’ 등 관련 책이 있는데, 그것까지 다 읽고 시작할 필요는 없다. 나중에 읽을 기회가 있을 게다. 얼마 전 아빠가 선사한 어문교열기자들이 쓴 칼럼모음집 ‘한국어는 있다’를 찬찬히 읽어보면 좋겠다.
글쓰기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 중 하나인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한다. 언론계에서 꼬박 20년 동안 글만 만지다 대학 교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제 좀 익숙해졌지만. 아빠가 하는 일은 어떤 것이 뉴스가 되고, 어떻게 글을 작성하면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을지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생각하고 판단한 후 글을 써야 한다.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야 글을 잘 쓸 수 있다. 언젠가 너희 논술시험 답안지를 봤는데, 모두 어떤 틀에 맞춰 쓴 것 같아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옷이 있듯 자기에게 맞는 글쓰기 형태가 있다. 요즘 생각해보면 나는 ‘수상록(隨想錄)’ 형식의 글에 강한 것 같다. 반면 논리적으로 생각을 전개해가는 논술에는 약한 편이다. 네 글은 몇 편 보지 않았지만, 나의 이런 기질이 네게 전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가깝고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신문(新聞)이다. 신문 한 달치를 정독한다고 생각해봐라. 300페이지 책 몇 권의 분량이다. 더구나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다. 신문이야말로 정보(情報)의 보고(寶庫)다. 아버지는 그 신문만 보면서 20년을 넘게 살아왔다. 그러니 깊지는 않지만 두루 널리 아는 박식(博識)의 경지에 오를 수밖에. 텔레비전보다 신문을 가까이 해라. 빈둥빈둥하는 자투리 시간에도, 화장실이나 지하철에서도 신문을 손에서 놓지 말기 바란다. 많이 읽는다는 것은 너의 경쟁력을 구비하는 데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다. 집에 한우충동(汗牛充棟)이 있은들, 읽지 않으면 종이뭉치에 불과할 것이다. 그동안 내가 사 모은 책이 차고 넘치는데, 너는 마치 너하곤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모르쇠’로 일관하면 되겠느냐.
또한 많이 읽는 것 못지않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이 들어야 한다. 듣는 귀도 읽는 눈만큼 중요하다. 세상은 네 생각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중론(衆論)이라는 것도 있고 여론(輿論)이란 것도 있다.
또 하나, 많이 생각해라(多商量). 나는 어떤 주제로 칼럼 한 편을 쓰려면 일주일 정도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다. 관련된 책이나 구절도 생각하고, 남의 의견도 들어보고, 나만의 창의적인 생각을 하면서 묵새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후에 생각이 발효되면 글이 나오는 것이다. 책이나 신문을 읽을 때 발견한 중요한 내용은 메모하는 습관을 들여라.
귀가 시간이 늦는 게 흠이지만 아버지와의 e메일 대화에 선뜻 응한 기특한 아들, 최한울.
아들아, 새벽부터 쓴 글이 1시간 만에 여기까지 이르렀다. 오늘은 ‘글쓰기 능력’과 ‘좋은 글쓰기’에 대한 주제로 여러 얘기를 했다만, 솔직히 모두 명심하여 너의, 아직은 굳지 않은 뇌 조직에 ‘피와 살’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의 1차 목표가 나이든, 1차 꿈이 칼럼니스트나 평론가이든, 어쨌거나 좋은 일이다. 네 말대로 ‘자꾸 책 밖으로 나가려는 눈을 고정시키고’ 책을 봐라.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도 있지 않더냐. 너무 다급하게 생각지 마라.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 42.195km도 결국 끝장내고 만다.
〈 아들 〉 2006-05-24 ‘첨부파일’ 동거에 대한 고찰 억지로 바꾸려고 해서는 안 돼
3년 전 ‘옥탑방 고양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결혼 전의 남녀가 옥탑방에서 동거하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였다. 혼전동거는 지금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인데 당시엔 어떠했을까. 그러나 최근 혼전동거 바람이 불고 있다. 혼전동거 연결 사이트가 생겨났으며, 대학가 주변 자취방이나 오피스텔을 보면 결혼하지 않은 젊은 남녀가 동거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는 혼전동거에 대해 찬반 여론이 팽팽하게 맞서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사람들이 동거를 환영하는 이유, 동거를 반대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그리고 왜 동거가 문제가 되는지 살펴보자.
동거를 찬성하는 측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이유는 자신들의 결혼생활이 어떠할 것인지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결혼이 전제가 되는 동거일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유지만 일리가 있다. 배우자로 낙점한 사람과 같이 살아 보고 그 사람의 취향, 가치관 그리고 결혼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이혼 사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성(性)생활에 대한 부분이 자신과 맞는지를 살펴보고 결혼하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근거는 최근 우리나라의 이혼율을 살펴보면 더욱 힘을 얻는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약 47%로 50%에 육박하며 세계 3위다. 반면 이혼율이 33%에 불과한(?) 프랑스에서는 혼전동거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혼전동거 찬성론자들은 프랑스의 사례를 들어 혼전동거를 통해 이혼율을 줄여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살펴보자. 혼전동거가 꼭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만 있을까. 대학가 자취방, 오피스텔에서 하는 동거가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일까. 아니다. 단지 서로 금전적 부담을 줄이고 성적 욕망을 충족하려는 요구가 조합돼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동거가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와 무엇이 다를까. 첫째로 미혼모 문제를 들 수 있다. 일부 찬성론자들은 성관계를 갖지 않기로 약속하고, 서로 피임에 관해 조심하면 문제될 게 없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젊은 남녀가 한지붕 아래서 MT처럼 1박2일, 2박3일 지내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한 달, 길게는 1년 정도를 같이 사는데 성관계를 배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피임 문제. 일반적으로 안전하다고 알려진 콘돔의 경우 찢어지거나 정액이 새는 등 실패율이 10%로 결코 낮지 않다. 이렇게 생긴 미혼모에 관한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 알려져 있다.
동거가 자연스러운 현상인 프랑스의 이혼율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낮지 않냐는 주장은 정확한 수치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반대측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거와 낮은 이혼율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프랑스는 우리나라와 달리 복지제도가 굉장히 잘 마련되어 있는 나라다. 육아에 대한 부담이 우리나라에 비해 아주 작다. 복지제도로 인해 좀더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있으며 이는 부부가 서로에 대해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꼭 복지제도뿐 아니라 다른 이유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게 결혼과 이혼 문제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낮은 이혼율이 자연스러운 동거 덕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1995년 약 16%에서 2005년 약 40%로 2~3배 뛰었다. 급격한 이혼율 상승에는 미디어가 큰 영향을 했다. 지금도 방영되고 있는 ‘부부클리닉’, 그리고 5월23일 종영한 ‘연애시대’ 등이 이혼을 아름답게 그림으로써 사람들이 이혼에 대해 자연스러운 감정을 갖게 했다. 비단 서로 가치관 및 성격이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혼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풍토에는 동거가 맞지 않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혼전순결에 대한 이미지와 할아버지 세대에 뿌리박힌 유교문화 등으로 인해 동거와 같은 혁신적인 문화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는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더 문제가 된다. 찬성론자들은 말한다. 그런 깊이 뿌리박은 인습부터 바꿔야 된다고. 그러나 억지로 뿌리를 뽑으려고 하다간 나무 전체가 뽑혀버리는, 되돌릴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 아버지 〉 2006-05-25 “과제물에 대한 아버지의 어드바이스”
아들, 이번엔 학교에 내는 과제물을 메일로 보냈구나. 이것도 우리 ‘e메일 프로젝트’의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대학생들의 혼전동거’, 과제명이 너무 어렵구나. 혼전동거라. 잘 읽었다. 첫 번째 느낌은 ‘이 놈이 이야기를 제법 풀어가는구나’였다.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서부터 최근에 끝난 드라마 ‘연애시대’를 빗대어 이혼과 혼전동거, 미혼모 등 달라진 결혼풍속도를 짚은 것은 좋았다. 프랑스의 낮은 이혼율을 예로 든 것도 칼럼의 설득력을 더한다. 이 주제가 정말 네 말처럼 ‘찬반여론이 팽팽하게 맞선’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사회현상의 한 부분인 만큼 어느 정도 ‘담론’의 성격은 되리라 생각한다. 이런 표현이 눈에 띄어 기분이 좋았다. ‘~을 살펴보면 더욱 힘을 얻는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도 있다’. 어떤 주장을 펼 때 너무 단정적이면 글이 딱딱해지고 만다. 조금은 완곡하고 부드럽게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아주 잘 했구나.
네가 단 제목은 ‘동거에 대한 고찰-억지로 바꾸려고 해서는 안 돼’인데, 나로선 불만이다. 첫째 ‘동거’는 막연하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혼전동거’이고 그것도 ‘대학생들의 혼전동거’이다. 당연히 제목은 ‘대학생들의 혼전동거’이어야 하고 ‘고찰’은 딱딱하다. 나라면 ‘대학생들의 혼전동거에 대한 짧은 생각’ 정도로 달겠다. 네가 말하고자 한 것이 ‘억지로 바꾸려고 해서는 안 돼’일 터이지만, 무엇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냐. 혼전동거는 말도 안 된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을 말함이냐. 혼전동거가 어른들이 보듯이 나쁘거나 부정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냐. 또한 찬반여론이 팽팽하게 맞선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이냐. 나로선 ‘찬성론자’가 그렇게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은 너무 구체적이어도 안 되지만 너무 추상적이면 곤란하다.
네 결론은 이런 것 같다. 혼전동거를 사시(斜視)로만 보지 말라. 그런데, 그것도 ‘찬성론자들은 말한다’로 되어 있다. 찬반론을 나란히 늘어놓기만 한다면 ‘주장글’이 아니다. ‘이런 의견도 있고 저런 의견도 있는데, 내 의견은 이렇다’가 되어야 한다. 칼럼이 꼭 ‘주장글’일 필요는 없지만 항상 객관이라는 미명 아래 ‘제3자적 시각’을 갖는 언론을 흉내낼 일은 아니다.
글에서 ‘우리나라 이혼율이 47%’라는 등 독자가 수긍할 만한 통계수치를 대는 것은 아주 좋다. 이혼 급증에 대한 원인 중 ‘미디어가 큰 영향을 했다’고 했는데, 실례를 조금 더 드는 게 좋을 것이다. 미디어라 하면 신문과 방송을 말하겠지. 방송은 이제 신문보다 영향력이 막강하다. 언론이 어떠한 점에서 이혼을 부추기거나 유도하고 이혼에 대한 인식을 둔감하게 했는지를 말했어야 한다. 요새 드라마 작가들을 비난해도 좋다. 또한 ‘큰 영향을 했다’는 표현은 어색하다. ‘언론의 영향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정도로 고치면 어떨까. 아들아, 네 글을 꼬치꼬치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평생 글을 매만지며 산 아빠에게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를 판별하는 눈은 있단다.
글을 다 쓴 후 꼭 큰소리로 읽어보기 바란다. 읽다가 뭔가 목에 걸리는 게 있으면, 반드시 문장이 잘못됐거나 의미에 혼동이 있기 때문이다. 단문(短文)을 쓰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단문들이 엉켜 복문(複文)이 되면 의미 전달이 쉽지 않다. 칼럼의 글은 한 문장이 15단어 정도로 이뤄져야 좋다고 한다. 한 문장에 같은 단어가 두세 번 나오면 이것은 아니다. 동의어 쓰는 습관을 들여라. 이것은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도 세 번 이상 들으면 짜증이 나지 않더냐. 글을 다 쓴 후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읽으면서 이런 것들을 퇴고해야 한다. 또한 불필요한 수식어를 많이 쓰지 마라. 괜히 의미만 헷갈리게 할 뿐이다. 글은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깔끔하게 정리된 글을 읽어봐라. 의미 전달이 분명하면 글을 읽은 후 기분이 좋다.
아들아, 네 칼럼 한 편을 ‘칼질’한 꼴이 되었다만, ‘전문가’의 어드바이스라고 생각하고 한번쯤 되새겨보기 바란다. 글도 쓰면 쓸수록 느는 법이다. 노력만큼 중요한 덕목이 어디 있겠느냐.
〈 아버지 〉 2006-05-26 “프로젝트 전선 이상 무(無)!”
새벽잠이 없는 나는 새벽 5시쯤 일어나 메일함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붙었다. 우리들의 ‘프로젝트 전선’에 이상이 없는지, 오늘은 무슨 사연이 올라와 있는지 궁금하고, 나는 무엇을 쓸 것인지 궁리하며 기분이 들뜨는구나.
엊그제 신문에서 읽었다. 대학생 아들과 아버지가 하루 대화하는 시간이 15분을 넘는 가정이 없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하루 15분이면 정말 ‘양반’이겠다. 일주일 내내 통틀어도 30분을 넘을까. 그만큼 공통된 화제가 없는 탓이기도 하겠고, 각자 자기 세계에 빠져 상대방(아들이나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적은 탓이리라. 이것은 상당히 ‘곤란한’ 문제다. 너도 어느 정도 나의 생각에 공감하는 바가 있었기에 이 e메일 프로젝트에 참여한 거겠지. 우리 같이 오래도록 노력하자꾸나.
너는 아침잠 없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아빠가 부럽다고 했지? 그래,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는 출근하는데 너는 곤하게 자고 있구나. 깨울까 하다가, 밥이나 먹고 자라고 호통을 치려다 그만두었다. 네가 고쳐볼 생각을 갖고 있으면 네 자신이 고치겠지 싶어서다. 규칙적인 생활은 아주 중요한 덕목(德目)이다. 나중에 사서삼경을 읽으면 공자(孔子)가 말씀한 ‘성실’에 대해 알게 된다. 군자(君子)로 대변되는 ‘이상적인 선비상(像)’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군자는 홀로 있어도 몸을 삼가야 한다는 말을 아느냐.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사람 노릇을 해야 하고,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게 유교철학의 핵심이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어려운 주제가 어디 있겠느냐. 늘 깊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젊음을 믿고 경거망동(輕擧妄動)하는 것은 금물(禁勿)이다. 그래서 규칙(規則)이 필요하다. 자제(自制)란 자기규제(自己規制)를 이른다. 자유와 방종(放縱)이란 말도 알겠지. 쉽지 않은 문제다.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늘 충고이고 훈계 같구나. 조심하마.
〈 아들 〉 2006-05-26 “뭔가 할 일이 많은데…”
아버지 메일과 제 메일을 꼬박꼬박 저장해두고 있습니다. 언제 썼고, 언제 보냈는지도 꼬박꼬박 저장해두고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아버지랑 얘기할 수 있어서 굉장히 좋네요.
솔직히 얘기하면 지금 노는 기분에 조금 취해 있습니다. 당장 토익 공부도 해야 하고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는 트럼펫도 레슨 받을 곳을 알아봐야 하고, 뭔가 할일이 굉장히 많은데 이렇게 놀고만 있습니다. 아, 과외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공연 후에 재즈에 제대로 빠졌습니다. 도서관에서 ‘Jazz it up’이라는 책도 빌려 보고, 다른 재즈 서적도 이것저것 뒤지고 있고요. 벌써 1시42분이네요. 자야겠습니다. 내일 수업이 없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아버진 두 시간 있다가 e메일을 보시겠군요.
〈 아들 〉 2006-05-29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에요”
오늘도 바쁜 티만 낸 월요일이었습니다. 어제는 마냥 한가롭기만 한 일요일이었고요. 이제 12시가 지났으니 아침 9시 수업이 있는 화요일이네요. 무료한 나날입니다. 분명 즐거운 평일이고 학교 다니는 것도 좋은데 뭔가 허전합니다.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에요.
지금 시간 밤 12시22분. Ella Fitzgerald · Louis Armstrong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Jazz입니다. 방금 전화해서 트럼펫 레슨 시간 잡았고요. 돈 쓸 일이 너무 많아요. 이제 곧 토익 공부에다 이따가는 트럼펫에다가, 지금 당장은 휴대폰도 사야 되고요. 용돈을 30만원이나 받는데도 이렇게 금전적 부담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고. 아버지 어머니 노고를 치하드립니다. 저도 어떻게 돈 좀 벌고 싶은데 과외가 얼른 잡히면 좋겠습니다.
〈 아버지 〉 2006-05-30 “과유불급, 미쳐야 미친다”
그래, 이래저래 돈 쓸 일이 많겠지. 왜 걱정이 안 되겠니. 지금 당장은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존해야 할 처지이니 미안하기도 할 것이고.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앞으로도 제법 오래도록 부모와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적이 됐든, 경제적이 됐든 말이다. 그러니 사이가 아주 좋아야 한다. 네가 실제로 독립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말이다. 휴대전화는 앞으론 소중히 다루는 습관을 갖도록 해라. 오늘 점심에 사줄 터이니 오너라.
네 일기 중 내가 눈여겨본 대목은 ‘재미는 있는데 뭔가 허전하고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모든 것이 신선하고 재미있고 이것저것 들여다보기 바쁠 때인데. 그러나 내가 왜 그 짐작을 못하겠니. 네가 네 친구들보다 조금 더 일찍 빠진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재미, 또 그 친구와 소원한 요즘, 일상의 많은 시간을 그 친구와 같이했을 터인데, 떨어져 있는 느낌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아들아. 중요한 것은 그런 느낌이 네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고, 극복도 네 자신의 몫이라는 것이다. 시간은 씻을 수 없는 미움이나 증오도 가라앉혀준다. 너에게 요즘 자주 하는 말이 ‘과유불급’이지만, 우정도 그렇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느니, 차라리 모자람이 더 나을 때도 있다. 자주 홀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라. 물론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미쳐야 미친다’는 책을 네 책상 위에 놓아두마. 조선조 괴짜선비, 한 방면에 일가를 이룬 기인(奇人) 같은 선비들 이야기이다.
어제 토익시험 일자가 공고되었더구나. 학원에 등록하든지, 빨리 공부를 시작해라. 지금 네 머리에 넣어두는 외국어야말로 평생 갖고 갈 재산이 될 것이다. 알바도 하고 트럼펫도 배우고, 말초적인 쾌락이나 소모적인 것에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프레시맨(FRESHMAN) 시절에 무슨 일을 해도 괜, 찮, 다. 그것도 부모가 능력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 않겠느냐.
〈 아들 〉 2006-09-14 “청춘까지 자본주의에 찌들어서야”
요새 대학생은(나도 요새 대학생이지만) 다들 취업준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공모전이다 토익이다 토플이다 IT자격증이다 이러저러한 준비해야 할 것들 때문에 막상 학생회관은 열정 없는 동아리 회원이 태반이다.
나는 물론 내려다보는 입장은 아니지만, (물론 386세대 어른도 아니고) 이런 건 뭔가 대학생답지 않은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스물, 아무리 고학번이라고 해도 스물 중반, 제때 들어갔다면 다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취업할 때 도움이 되는 경력, 그거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건 좀 아니라고 본다.
음악, 춤, 스포츠 등 동아리들의 퀄리티가 갈수록 낮아지는 이유도 자연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에 마음이 꽤나 맞는다고 생각했던 동기가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음악이 밥 먹여주진 않잖아?” 물론, 음악 특기자가 아닌 아마추어 대학생 연주자로서는 그런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난 그래도 내가 실력이 안 된다고 해서, 합주를 못 한다고 해서 그런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저 내가 좋으니까 열심히 하는 거고 그 자체로 만족을 느끼는 거지. 밥 먹으려고 음악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 생각해보니 열정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내가 GrooV라는 음악동아리에 대학생활을 올인한다고 해서, 다른 GrooV동기들에게 내 열정을 강요할 수도, 올인을 강요할 수도 없는 거다. 동아리라는 집단이 통제력이나 강제력이 약한 단체다보니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결국엔 자신이 원하는 것만 얻으려 하는, 결국엔 자율 이기적 분위기가 인간소외 현상을 낳고 계속 인간성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거 아니겠나.
물론 시대가 철저한 인간상을 원하는 건 알겠는데, 이십대 초반에 벌써부터 마음에 강박감 가지고 살아가는 건 전혀 신나지 않잖아? “신이 나든 말든 지금 사회는 철저한 개인적 자본주의에 지배받고 있잖아!”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난 짧은 식견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청춘까지 자본주의에 찌들어서는 종국에 가서는 괴물이 되고 말걸.”
〈 아버지 〉 2006-09-17 “공감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봐야 한다”
메일 받아본 지 한 달은 넘은 것 같다. 마지막 보낸 날짜가 8월16일이더구나. 궁금했다. 네가 대체 어떤 생각으로 방학을 보냈는지, 2학기는 어떻게 맞을 건지, 군대는 언제 가려는지, 대화가 없어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차에 ‘대학생활과 동아리활동’에 대한 너의 짧은 글을 접하고 기뻤다. 마음먹고 들어간 재즈동아리 활동을 공부와 병행하면서 느낀 괴리에 대해 썼더구나. 그래, 마음껏 놀고 싶은데,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취직을 염두에 둔 기초공부에만 빠져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이런 게 대학생활인가? 나도 그래야 하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겠지.
나도 네 말에 동의한다. 아니 공감한다. ‘20대 초반부터 마음에 강박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전혀 신나지 않는’ 일이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개인적 자본주의에 지배받고’ 있는 사회가 못마땅할 수도 있을 게다. 이제 조금씩 세상사에 눈을 뜬 네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빈부격차가 심하고, 경쟁이 치열하고 돈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 절망감도 들 것이다. 그래서 너는 글의 결론을 ‘청춘까지 자본주의에 찌들어서는 종국에 가서 괴물이 될 거’라고 맺은 듯하구나.
하지만 사회가 ‘철저한 인간상’을 원하는데, 자칫 거기에서 낙오되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왕따’가 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한울아, 조금은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일단은 학생의 본분에 대해 생각해보자. 2학년 때 네가 가고 싶은 전공학과를 가려면 이번 학기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성적이 좋아야 한다. 임형택 교수가 최근 펴낸 ‘공부의 즐거움’이라는 책은 다 보았니? 거기서 임 교수는 그러더라. 자기 평생의 좌우명이 ‘공부하면서 놀자. 놀면서 공부하자(學而遊 遊而學)’라고. 사실, 놀면서 공부하는 것이 훨씬 더 바쁘지 않겠니?
어쨌건, 칼럼은 전체적으로 잘 쓴 것으로 보인다.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개에서부터 결론까지 잘 정리했다. 썰렁한 동아리방, 그나마 시들한 회원들의 활동과 그들의 근황,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에 부응하는 데 급급한 친구들, 이건 아닌데 하며 약간의 갈등을 겪는 너,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없는 동아리활동 등을 ‘개인적 자본주의’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규정하고 ‘종국에 괴물이 되고 말’ 것이라고 했는데, ‘괴물’이란 영화와 매칭되는 것도 제법 잘한 것이다.
원고량도 200자 원고지로 6.2장이더구나. 신문 칼럼이 6장에서 8장 분량이다. 이런 주제로 칼럼을 써보는 것은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전에도 말했지만, 다 쓰고 나서 여러 번 ‘소리내어’ 읽어보거라. 읽다보면 목구멍에 탁탁 걸리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문장은, 그 단락은, 그 단어는 뭔가 맞지 않는 것이다. 비문(非文)이거나 문장이 길어 호흡이 가빠오거나(그럴 때 필요한 게 쉼표다), 단어의 중복 사용은 짜증이 난다. 네 칼럼에도 맨처음 등장하는 ‘요새 대학생은(나도 요새 대학생이지만)’을 보자. 괄호 안에 ‘요새 대학생’이 바로 앞에 있는 것하고 중첩이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나도 그렇지만’ 등으로 바꾸면 낫지 않겠니? 어쨌든 일상에 대한 너의 감상을 일정한 분량으로 정리해보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많이 읽어라, 많이 생각해봐라. 많이 써봐라. 성취 있기 바라며.
〈 아들 〉 2006-09-20 “글을 쓰면 마음을 다잡게 돼요”
요새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기보다 글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글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끄러운 것들이지만. 가만히 앉아 책을 보기가 괴로운 걸까요, 아니면 글쓰기라는 창작 노동의 즐거움을 깨달은 탓일까요? 만약 후자라면 요새 들어서 사진과 그림, 글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는 거겠죠? 싸이에 글을 쓰건, 아버지께 편지를 쓸 때건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쓰다보면 내가 어디서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다가오거든요.
〈 아버지 〉 2006-12-17 “남도 여행을 떠나보렴”
지금은 새벽 3시반. 방을 따로 두고 너도 깨어 있고 나도 깨어 있다. 방금 네가 엄마와 나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읽었다. 박스에 넣은 알록달록한 커피잔 2개도 잘 받았다. 어제는 우리의 결혼 22주년이었다. 엄마가 바깥일로 새벽 3시에 들어오는 바람에 외식도 못했지만, 네가 엄마를 기다렸다가 축하한다며 포옹을 하고 선물을 전해줘 기뻤다. 밖에는 초저녁부터 내리던 눈이 소담스럽게 쌓였구나.
편지글에 이번 방학에 너 혼자 전국에 걸쳐 10박 정도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지. 그래, 잘 생각했다. 결심을 했으면 바로 시행토록 해라. 어느 정도 경비는 내가 대주마. 어디 조용한 어촌에 가 허드렛일도 며칠 해봐라. 남도의 산사에서 하룻밤 묵어보기도 해라. 네 말대로 민폐 끼치기 쉬우니까 친척집은 피하도록 해라. 1학년 때 사귄 친구들이 있는 부산이나 광주에서 하룻밤 신세지는 정도야 괜찮겠지. 여수나 부산에 있는 아빠의 친한 친구나 후배를 찾는 것도 한 방법이다. 네가 원한다면 바로 추천해주마.
무엇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편을 읽고 난 후 행선지를 결정했으면 좋겠다. 1984년인가 ‘동아일보’에서 근속 10년 특별휴가를 받아 우리 가족이 유홍준님이 추천한 ‘문화유산답사 1번지’ 남도여행에 나섰다. 너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겠지만, 가라는 대로, 묵으라는 대로, 먹으라는 대로 1주일을 보냈는데 무척 좋았다. 추천 1코스다. 벌교에서 피조개나 참꼬막도 먹어보고 승주 선암사 뒷산도 걸어보고, 낙안읍성에서 막걸리도 한잔 걸쳐보아라. 다산초당에서 남해를 바라보며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의 나라 사랑의 심정을 느껴보면 좋겠다.
절대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결심을 했으면 바로 실행하라는 것이다. 내주 친구들과 스키장만 한번 다녀오고 바로 떠나기 바란다. 혼자 해보는 여행이 네 인생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삶의 고독을 알지 못하면 헛것이다. 마음 맞는 벗들과 하는 여행도 좋지만, 네 자신을 단련하고 숙성시키는 것은 ‘혼자’여야 한다.
아들아, 부모의 결혼기념일이라고 선물을 고르고 늦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다가 안아주는 아들 생각에 이 한밤 흐뭇하다. 너도 기분이 좋겠지. 결국은 가족이다. 가족은 사랑이다. 모든 사랑은 가족에서 비롯된다. 쉬운 말 같아도 결코 쉽지 않다. 죽을 때까지 우리가 가지고 갈 당위적 명제가 바로 가족이다. 슬프고 기쁘고 아프고 괴로울 때, 누가 우리 곁에 있어주겠는가. 바로 가족이다. 집을 떠나봐야 집의 소중함을 안다고 하지. 새도 해가 기울면 돌아갈 둥지가 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아무리 잘낫다고 떠들어봐야 ‘집’뿐이다. 긴 소리 할 것 없이, 바로 여행을 떠나라! 너의 길을 찾아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