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영원한 ‘국민배우’ 안성기

“지루하면 5분도 못 참는 관객… 이제 진지함의 시대는 갔다”

  • 황호택 동아일보 수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7-03-09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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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년 인기 유지 비결은 ‘꾸준한 변신’
    • “한 시대 풍미한 ‘양념거리’ 베드신…일부러 피했다”
    • “배역 때문일까? 꿈에서도 바람피운 적 없어”
    • “연기 상승작용 일으킨 여배우 이미숙”
    • “영화 ‘한반도’ 反美정서, 관객몰이용 계산 속 아니다”
    • 이 시대 관객의 요구, ‘단순하게 즐겁거나 정신없이 근사하거나’
    • “1990년에 3金으로부터 정치입문 제의받아”
    • 성실과 겸손은 ‘생존을 위한 처세술’?
    • 핸디 7 부동의 싱글, 평균 비거리 230∼240야드
    영원한 ‘국민배우’ 안성기
    늦겨울 찬바람이 50대 중반 영화배우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는 갈색 캐주얼 바지에 하늘색 폴라 티셔츠, 검정색 콤비 차림이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아주머니가 소녀 때의 기분이 살아난 듯 “안성기씨” 하고 불렀지만, 못 들었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한 여성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나이 들어서도 중후한 멋이 있다”고 했다. 몇몇 여성은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그와 함께 사진 찍을 기회를 잡으려고 주변에서 얼쩡거렸다.

    영화배우 안성기(安聖其·55)씨의 청계천 나들이는 그래도 차분한 편이었다. 장동건 권상우 이병헌 조승우가 청계천에 나타났더라면 소녀 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몰려들었을 것이다. 폰카를 들고 그에게 다가오는 여성들 중에 10대는 보이지 않았다. 인기를 먹고 사는 배우에게 나이는 숙명 같은 것인가보다.

    인터뷰 장소를 섭외하면서 필자가 그의 집이나 사무실 쪽으로 가겠다고 했는데도 굳이 동아일보사 쪽으로 오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청계천에 처음 와본다고 했다. 그가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줘 사진촬영은 금방 끝이 났다. 그에게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불편하겠어요”라고 하자 “좋은 점도 있다”고 했다.

    “기간 만료된 여권을 들고 공항에 나간 적이 있어요. 신원이 확실하니까 그날로 만기 연장을 해주더라고요.”

    안씨는 지난해 말 ‘라디오 스타’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과 영화평론가협회 남자연기상을 받았다.



    “1990년 청룡영화상이 부활하면서 ‘남부군’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죠. 그러니까 16년 만이죠. 영화평론가협회상은 1996년 임권택 감독의 작품 ‘축제’로 받은 지 10년 만입니다. 2001년 ‘무사’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받은 적이 있지요. 남우주연상을 탄 것이 그렇게 오래 됐는지 몰랐어요. 거의 해마다 무슨무슨 상을 탔거든요. 공로상, 유공자상이나 조그마한 데서 주는 상이라도 매해 받았죠.”

    가족 이야기는 ‘No!’

    ▼ 50대 배우가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안성기씨가 처음이더군요. 주류 영화에서 50대가 주연을 맡기 힘든가요.

    “그렇지요. 워낙 관객이 젊어요. 젊은 관객 취향에 맞는 영화가 주류를 이루면 저 같은 배우는 그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받은 상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씨는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는다. 그는 다섯 살 때 영화사에서 일하는 아버지(안화영·83) 덕에 아역배우로 영화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안씨의 아버지는 현진영화사 사장을 지냈다. 전문적인 아역배우가 없던 시절이었다. 안씨는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 방년 열여덟 살의 김지미와 함께 데뷔했다. 그 뒤로 70편이 넘는 영화에 아역배우로 출연했다.

    영원한 ‘국민배우’ 안성기

    지난해 스크린쿼터 수호를 위한 1인시위에 나선 안성기씨.

    ▼ ‘황호택이 만난 사람’이 이번에 68번째입니다. 그런데 안성기씨처럼 너무 많이 알려진 사람을 인터뷰하자면 난감해요. 대중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인물에게서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죠. 뻔히 아는 사실을 물어보자면 맥이 빠지고….

    “그럴 거예요. 다른 기자들도 그렇게 말해요.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 새롭고 좋은 얘기가 나올까 하고 고민한대요. 저도 인터뷰를 워낙 많이 해 늘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저 자신도 인터뷰를 하면 신이 나고 흥분돼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서….”

    ▼ 강수진 기자와 지난해 9월 동아일보 ‘초대석’ 인터뷰를 했더군요.

    “했죠, 했습니다.”

    ▼ 강수진 기자도 바로 그런 고민을 했는가봐요. 술을 마시면 좀 색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술집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술을 마시니 오히려 더 ‘범생이’가 되더라더군요.

    “맞아요. 이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인터뷰를 했는데….”

    강 기자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모범답안만 말하니까 재미가 없었죠. 술을 마시며 이리저리 찔러도 꿈쩍도 안 해요. 반듯하고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두 시간 반이나 인터뷰를 했는데 이야깃거리를 못 건져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사를 썼죠.”

    인터뷰에 앞서 사전 공부 삼아 안씨의 긴 인터뷰를 여러 개 읽어봤는데 한 가지 특징이 발견됐다. 영화에 관해서 물으면 답변이 다소 길고, 사생활이나 영화인들에 관해 물으면 답변이 극도로 짧다는 것. 특히 쿡쿡 찌르는 질문에는 더 반응이 없었다.

    “저희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는 특히 조심하죠. 가족사진이 나오는 것도 피하지요. 왜냐하면 저 때문에 가족이 피해를 볼 수 있잖아요. 괜히 알려지면 남을 의식하게 되거나, 자기 삶을 사는 데 좀 지장을 줄 것 같아서…. 그리고 사는 게 뭐 대충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이렇게 가려져 있어야 모양이 괜찮은 것 같아요.”

    필자가 처음에 집 구경을 하며 인터뷰를 하자고 제의했는데 “집은 좀 그래요”라며 고사한 이유를 알 만하다.

    골프는 인생보다 어렵다

    ▼ 강수진 기자는 안성기씨의 트레이드마크인 성실과 겸손에 대해 ‘생존을 위한 처세술’이라고 이해하더군요. 성실하면 오래간다, 혹은 겸손해야 살아남는다, 말하자면 겸손과 성실은 처세술로 선택한 결과물이라는 거지요. 이런 행동주의 심리학적 분석에 동의합니까.

    “살아남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 따라 하지는 않았고요. 살다보니까 그런 것이 굉장히 중요하구나 느낀 것이죠. 오히려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였던 것 같고요.”

    ▼ 특별한 계기나 누구의 가르침이 있었나요.

    “부모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는 회사일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오셨죠. 늘 가정을 중심으로 살았고 술을 못 하세요. 어머니는 무척 사려 깊은 분입니다. 항상 자신보다 남 생각을 먼저 하시죠. 심성은 어머니 쪽을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저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조용하고 내성적인 스타일로 인간형이 바뀌었습니다. 차분해진 거죠. 하여튼 옛날 어린 시절에 하던 것들을 다 잊고, 어릴 때의 말이라든가 행동은 다 없어졌어요.”

    필자도 “사람은 여러 번 바뀐다”고 맞장구를 쳤다. 실제로 신체나 지능지수는 타고나는 부분이 많지만 성격은 후천적 요소가 크다.

    영원한 ‘국민배우’ 안성기

    청계천을 배경으로 필자와 함께.

    필자가 “혹시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까”라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갑자기 성공한 사람이 태도를 바꾸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고 말했다.

    “늘 보아온 사람이 어느 날 뜨니까 쓱 바뀌는 거죠. 그러면 저는 바로 못 보죠. 자신이 늘 가지고 있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쉽고 안타깝다고 할까요. 그런 것도 겸손하면 다 묻혀 들어갈 텐데….”

    영화계는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지거나,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는 사람이 많은 동네라서 안씨가 그런 사람들을 관찰하며 느낀 점인 모양이다.

    ‘결점이 없다는 게 결점’

    ▼ 중국영화 ‘묵공(墨攻)’에서 중국말을 곧잘 하던데요. 본인이 직접 더빙한 건가요.

    “옛날에 영화 ‘무사’ 할 때 두어 달 기초 회화를 배웠지요. 그 영화를 한 5개월간 촬영하는데 한국 기자들이 왔을 때 스태프들이랑 중국말 하니까 잘한다고 하더라고요. 촬영 현장에서 사용하는 말이야 뻔하잖아요.”

    ▼ 최근에 읽은 책이 있으면 소개해주시죠.

    “교보문고에서 ‘내 인생의 첫 떨림, 처음처럼’이라는 시집을 사 읽었는데 참 좋았어요. 신경림 시인이 좋아하는 시를 골라 모은 책입니다.”

    ▼ 아까 언급한 ‘앤티’ 여성에게 ‘당신, 이 영화 좀 보고 얘기하라’고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저는 좋아하지만 관객이 안 들었던 영화인데, ‘개그맨’(1989년)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그 다음으로는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 ‘깊고 푸른 밤’(1985년) ‘킬리만자로’(2000년) ‘무사’(2001년)를 추천하고 싶네요.”

    ▼ 영화감독이 돼서 영화 한 편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그런 재능이 좀 있으면 참 좋겠는데 없어요. 재능이 있더라도 저지를 용기가 없죠. 제가 감독의 고통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섣불리 거기에 달려들지 못하는 거죠.”

    그의 좌우명은 평범하다. 아이들한테 늘 ‘착하게 살자’라고 말한다.

    정치권에서 유혹을 받은 적은 없었을까.

    “1990년에 3김씨 당에서 제의를 많이 받았지요. 제가 워낙 정치 쪽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얘기를 안 하지요. 어느 쪽을 선택하면 선택 안 한 쪽에서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게 너무 강해 정치 근처에 가고 싶지 않아요. 영화는 이 사람 저 사람 전부 좋아해야 되는데 그런 걸로 괜히 어떤 적대적 감정에 부딪히면 결국 배우로서는 큰 손해지요. 그런데 요즘 젊은 영화인들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 어려서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았을 것 같아요.

    “한자로는 ‘성스러울 성(聖)’ 자에 ‘터 기(基)’자죠. 아주 성스러운 이름이죠. 우리 한글 발음으로 하면…. 그런데 성이 그나마 ‘안’ 씨라서 괜찮아요. 백성기 강성기 이런 분들은 곤란하겠지요. 예전에 임성기 약국이 있었어요. 성병약국이었죠(웃음).”

    ▼ 항상 반듯하게 살면서 모든 사람한테 두루 잘 하고, 겸손하고 칭찬받으며 살자면 좀 피곤할 것도 같은데요.

    “지금 상태로는 그 반대로 가기가 저로서는 더 힘들 것 같아요. 이렇게 살아온 스타일이 저하고 대충 맞았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저같이 산다면 아마 돌겠지요. 성직자처럼 살아야 되니까. 그런데 저한테는 그런대로 맞아서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얼마 전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이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안성기씨는 단점이 없는 게 단점이에요’라고 말하더군요. 어쩌다가 1년에 한 번, 두 번 술이 조금 과해 같이 어울리면서 흰소리 좀 하고, 혀가 약간 꼬부라지면 다들 좋아해요. 제가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니까 너무 인간적이라고….”

    그는 조각을 전공한 부인 오소영씨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다. 부인은 아이들 키우는 재미에 빠져 조각을 접었다. 두 아들은 미국에 있다. 큰아들은 고교 3년이고, 둘째는 중학교 2년이다. 큰아이는 미국 건너간 지 벌써 6년째란다. 기숙사학교라서 기러기 가족은 아니다. 1년에 등록금 3만달러를 포함해 5000만원 정도가 든다. 둘이면 1억원이다.

    “저도 아들만 3형제였어요. 집안 분위기가 삭막하다가도 어쩌다 이모님들이 오시면 그렇게 분위기가 좋아졌어요. 딸이 하나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죠.”

    요즘은 아들 실컷 키워놓으면 딸 가진 집한테 뺏긴다는 세상이다. 그런 면에서 남아선호 사상은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저라는 사람이 어디 가겠어요?”

    ▼ 진짜 인생의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내 이외에 몇 명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글쎄 몇 명은 있을 것 같은데요.”

    ▼ 거기에 박중훈씨도 포함됩니까.

    “통화는 거의 매일처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지 않나 싶네요. 비영화인들 중에서는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을 자주 만나요.”

    신장 176cm에 몸무게 72kg. 4년 전 담배를 끊고 나서 3kg 늘었다. 나이에 비해 머리숱이 많은 편이다. 배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동네 헬스클럽에서 하루 한 시간 반가량 운동을 한다.

    “시간을 건전하게 이용하니까 배가 안 나오지요. 어쩌다가 술자리를 두세 번 하고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 운동을 못하는 상태로 일주일만 지나가면 배가 땅땅해지더라고요, 그런 생활 몇 달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남 배 나왔다고 흉볼 일이 아니더라고요.”

    실제로 목욕탕에서 그의 몸매를 목격한 사람들은 가슴에 임금 왕(王)자가 그려져 있다고 말한다. 아직도 30대 같은 왕성한 체력과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도, 쏟아내지 않고 자제하는 태도가 존경스럽다고 박중훈씨는 말했다.

    종교는 가톨릭. 세례명은 요한. 그는 신앙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는 질문에 말을 한참 더듬다가 “하여튼 살아가면서, 이렇게 얘기하면 또 뭐하지만, 안 좋은 면보다 좋은 점이 훨씬 많다고 얘기할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 어떤 여성은 안성기씨가 너무 범생이라서 남편감으로는 ‘딱’이지만 연애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안성기씨를 좋아하는 여성도 많아요. 한 여성이 나이 들어도 멋을 잃지 않는 리처드 기어 같은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고맙고요.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겠다고 전해주시죠.”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새로운 이야기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전체 윤곽은 비슷할 거예요. 저라는 사람이 어디 가겠어요? 늘 그렇죠”라고 말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해달라는 요청에 부담을 느꼈던 모양이다.

    인터뷰 끝나고 바로 아내 혼자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는 시간을 6시에 맞추고 다른 약속이 없는 것을 보면 필자가 저녁 먹자고 붙잡으면 붙들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온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안성기가 자주 간다는 강남 현대낙지에서 소주라도 한잔 걸치며 흐트러진 모습을 관찰하고 싶었지만 감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쉬웠다.

    영원한 ‘국민배우’ 안성기
    ▼ 오늘은 ‘신동아’ 인터뷰라서 200자 원고지를 100장 넘게 채워야 합니다. 답변을 길고 재미있게 해줘야지요. 강수진 기자는 ‘음주 인터뷰도 안 통하니까, 골프 인터뷰를 해보라’고 하더군요. 골프를 좋아한다면서요.

    “골프를 치면서 인터뷰를 한다면 골프에 비유한 얘기는 많이 나올 것 같네요. 골프와 우리 삶이 비슷한 구석이 많죠. 골프 칠 때 뭐라 그럴까, 좀 약이 오르는 게 있지요. 겸손하게 살면 대충 잘 되잖아요. 그런데 골프에서는 그게 용납되지 않는다는 얘기지요. 욕심내지 않고, 그냥 겸손하게 그린 조금 바깥에 공을 떨어뜨려놓고, 그 다음에 온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봐요. 그래도 그렇게 안 되는 경우가 사실 많잖아요. 그럴 때는 감정을 추스르기가 상당히 힘들다는 거죠. 좀 다른 얘기로 흘렀는데…. 하여튼 골프가 우리가 살아가는 어떤 일반 상식보다도 훨씬 까다로운 운동이라는 거지요.”

    인생은 쉽게 풀렸는데, 골프는 그만큼 잘 안 풀리더라는 뜻 같다. 비슷한 이야기로 모 재벌그룹 회장이 “골프공과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아마추어는 공을 원하는 장소에 떨어뜨리기가 쉽지 않다. 그의 핸디는 7. 본인은 타수가 80대 초반이라고 밝혔으나 부동(不動)의 싱글이라는 동료배우 박중훈씨의 전언이다.

    ▼ 장타(長打)로 알려졌던데 드라이버 비(飛)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50대 중반이면 벌써 거리가 줄기 시작할 나이인데….

    “거리가 전혀 줄지 않았습니다. 전성기의 거리를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어요. 운동을 계속해 그런지…. 하여튼 근력이 빠졌다거나 배가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임팩트가 더 정확해졌어요. 평균 비거리는 230∼240야드입니다.”

    ▼ 그 정도면 장타는 아닌데요. 270∼280야드는 나가야지.

    “그런데 260, 270, 280 나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실제 재보면 230야드예요. 제가 정확하게 한번 재봤어요. 제 생각에 어마어마하게 쳤는데 재보니 정확하게 240야드 나갔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보통 그 정도 쳐놓고 270∼280야드 나갔다고 할 거예요. 아마추어가 230∼240야드 나간다면 굉장한 장타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치마 두르고 레이디 티에서 치는 사람들이 230야드 쳤다면 장타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건강한 중년 골퍼의 230야드는 정확히 말해 ‘에버리지’다.

    ▼ 골프할 때 내기도 겁니까.

    “조그마하게 하죠. 스킨스.”

    ▼ 얼마씩 갹출합니까.

    “네 명이 5만원씩 내고 한 홀당 1만원씩 빼먹는 거죠. 나머지 2만원으로 숏 홀에서 니어리스트에 걸고.”

    ▼ 따는 편입니까, 잃는 편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먹는 편입니다.”

    ▼ 주로 함께 치는 플레이어들이 누구죠. 박중훈씨한테 “성기 형과 자주 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렇죠. 다른 배우들은 한 달에 한 번 ‘싱글벙글’ 모임에서 만나요. 1년에 한 번밖에 못 나오는 친구도 있죠. 상관없어요. 하여튼 우리는 계속해 나갈 테니까 시간이 나는 사람은 와서 하자고 해서…벌써 3년 된 모임이에요. 그 다음에 고등학교 동창하고도 하죠. 조용필씨와도 가끔 치고요.”

    영원한 ‘국민배우’ 안성기

    기쁜 우리 젊은날(1987년), 달빛 사냥꾼, 하얀전쟁, 그대안의 블루(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성직자 같은 삶

    안성기와 조용필은 경동중학교 동창이다. 안씨는 6·25전쟁 중 가족이 서울에서 마산으로 피난 가는 길에 태어났다. 피난 도중 어머니가 대구에서 산통을 느껴 그곳에서 탯줄을 끊었다. 어디선가 ‘출생지’를 대구라고 말했더니 그 후에 경북도민회 에서 연락이 오더라며 웃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에 올라와 그 후 20년 가까이 돈암동에서 살았다. 그가 다닌 돈암초등학교, 경동중학교, 동성고등학교가 모두 집에서 도보 통학 거리 안에 있다.

    ▼ 얼마 전 박중훈씨가 인터뷰에서 “결혼한 뒤에 외도를 안 해 본 사람은 아마 안성기 선배님이 유일할 것”이라고 보증을 섰더군요. 실제로 바람을 피운 적이 없습니까. 이건 ‘오프 더 레코드’로 묻겠습니다.

    “진짜 없어요.”

    ▼ 유혹하는 여성도 없었나요.

    “그게 참, 없더라고요. 제 영화의 캐릭터가 섹스어필한 느낌을 주지 못해요. ‘바람 불어 좋은 날’에 중국집 배달부로 나오고, 그 다음에 ‘만다라’에서는 스님으로 나오죠.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사회성 있는 영화들을 주로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한테 이성으로 접근하는 여성이 전혀 없는 거 같습니다.”

    ▼ 인생의 첫 키스를 부인을 만나서 6개월 만에 했다고 말했더군요. 이걸 믿어도 됩니까.

    “그럼 박중훈씨 얘기도 안 믿겨지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뭐 그런 거를 자랑이라고 내놓기도 사실 좀 그래요.”

    1988년 ‘칠수와 만수’를 찍을 때였다. 촬영장에서 안씨가 박중훈씨에게 “어젯밤 꿈에 예쁜 여자가 육체적으로 유혹하더군. 가정을 지키기 위해 유혹을 물리쳤어”라고 말했다. 박씨는 “꿈에서 외도하면 어떻다고 그래. 꿈에서라도 해보지”라고 핀잔을 주었다. 박씨는 “성기 형은 꿈에도 그런 일이 없는 분”이라고 공언했다.

    ▼ 안성기씨가 기타학원을 먼저 다니며 조용필씨를 자극해 기타를 배우게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조용필씨에게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부인하던데요.

    “농담으로 한 말이죠. 제가 중학교 1, 2학년 때 돈암동 로터리에 기타학원이 있었어요. 학교 끝나면 거기 가서 좀 배웠거든요. 그래서 제가 친구들 있는 데서도 기타를 쳤어요. 조용필씨가 더러 그걸 보았죠. 그래서 제가 기타 치는 걸 보고 용필이가 기타 배우기 시작했다고 농담한 거지요.”

    영원한 ‘국민배우’ 안성기

    무사, 헤어드레서, 실미도, 라디오 스타(2006년)(왼쪽부터 차례로)

    소설가 최인호, “잘 커줘서 고맙다”

    최동훈 감독의 ‘타짜’가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됐다. ‘라디오 스타’는 190만명 정도의 관객이 들었다. ‘타짜’는 19세 미만 관람불가 영화였는데도 600만명을 넘겼다.

    ▼ ‘라디오 스타’가 손해 본 것 같아요. ‘타짜’에는 폭력 섹스 도박이 골고루 배합돼 흥미를 유발했는데.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라디오 스타’는 뭐랄까, 영화를 보라고 강권해도 보지 않는 사람에겐 썩 당기지 않는, 뻔한 이야기 같죠. 뭔가 새로움이 없을 것 같죠. 거기 나오는 배우들도 오랫동안 봐온 배우들이고. 다만 이준익 감독이 ‘왕의 남자’를 했으니까, 그래도 뭔가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일단 본 사람들은 너무 좋다고 얘기합니다. 그 세월을 산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스토리죠. 하여튼 영화 많이 했지만 ‘라디오 스타’는 저한테 특별한 영화가 됐어요. 그리고 제 본래 모습이 상당히 많이 나온 영화예요.”

    ▼ 어떤 모습인가요?

    “평소에는 점잖고 조용한 거 같은데, 사실 제가 평소 ‘라디오 스타’에서 보여준 것 같은 모습이 많거든요. 어떤 때는 막 떠들기도 하고….”

    필자가 “오늘 좀 떠들어봤으면 좋겠네요”라고 하자 그는 “이 정도면 많이 떠들고 있는데요”라고 응수했다. 안성기는 말보다 웃음이 많다. 기분이 나빠도 웃고, 감정처리가 곤란해도 웃는다. 그러나 웃음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게 지인들의 분석이다. 화가 나면 말수가 줄어든다.

    ▼ ‘타짜’의 조승우, 김혜수는 둘 다 쓸 만한 배우입니까.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되지요(웃음).”

    ▼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좋은 배우라고 해야 할까요…. 좋은 배우도 말이 안 되네요. 이미 다 좋은 배우이니까요. 그건 별로 질문이 안 되는 말씀을 한 것 같은데…(웃음).”

    ▼ 아역배우가 성인배우로 대성한 예는 안성기, 강수연씨를 빼놓고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던데요.

    “관객이 용납을 안 하는 거지요. 배우 자신은 나이가 들었지만 관객은 그 배우가 갖고 있는 어린 이미지를 계속 떠올리지요. 그러니까 실패할 수밖에 없지요. 어른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데 자꾸 옛날 이미지가 겹쳐 관객은 아이로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감동을 줄 수가 없죠. 결국 성인 역에 적응 못하게 되는 거죠.

    다행히 저는 중학교 때까지 아역배우를 하고 10년 남짓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역을 했던 친구가 새로 시작하는구나’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때 영화를 처음 보기 시작한 젊은층은 ‘신인배우가 나왔구나’라고 생각했겠죠. 10여 년 의 공백기는 저를 잃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죠. 제 외모에도 변화가 많았어요. 예전에는 좀 통통하고 동그랗는데 성인이 되면서 길쭉하고 좀 마른 형상으로 변했죠. 이미지 자체가 달라져서 금방 성인 역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아역배우를 하다보니 어린 시절에 주로 어른들하고 생활해 애어른이 돼버렸어요. 어른들과 같이 당구장에 다니고, 도리짓고땡도 같이 하고, 심지어 육백도 쳤죠. 마작도 했어요. 촬영장에서 좀 쉴 때 그런 거를 하거든요. 계속 어른들 옆에 있으니까 다 보고 배우는 것이지요. 그 시절에는(명동 신상사파 같은) 조폭이 영화계에 많이 들어와 있었어요. 지방에서 영화촬영을 하고 있을 때 다른 영화사 조폭이 저를 데려가겠다며 상에 칼을 꽂는 것도 보았어요. 말도 주로 어른들이 쓰는 말을 했어요. 너무 일찍 애어른이 돼서 성인배우로 다시 나왔을 때 순수한 맛이 없었지요. 그것이 가장 큰 장애요소였습니다.

    1980년에 최인호(소설가) 선배님을 처음 만났는데, 당시 이장호 감독이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였죠. 최 선배님은 ‘불새’라는 소설의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었죠. 이 감독과는 서로 친구 사이입니다. 이 감독이 최인호 선배님에게 저를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최 선배님이 저를 딱 보고 첫 말씀이 ‘야, 참 잘 커줘서 고맙다’였어요. 제가 어릴 때 워낙 영화를 많이 찍었고 당돌한 면을 지닌 아역배우였으니까, 또 애어른이었으니까 그 때가 그대로 묻어 있으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순수한 느낌을 줬던 모양입니다. 그런 점이 제가 다시 영화를 해 나가는 데 큰 힘이 된 거지요.”

    당돌하던 아역배우의 애어른 티를 벗기 위한 노력이 지금의 성실과 겸손으로 바뀌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겠다.

    배우 이미숙과의 인연

    ▼ 여배우 중에서 호흡이 잘 맞는 배우는 누구인가요.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하는 여배우를 만나면 아주 편하고 좋았어요. 저의 연기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거든요. 요즘에는 두 작품을 같이 한 여배우도 없어요. 젊은 여배우의 상대역을 하기에는 지금의 제가 약간 외곽에 있거든요. 최근 작품 중에 ‘라디오 스타’는 박중훈씨와 저의 버디 무비이고, ‘한반도’에는 그런 장면이 없죠.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 최지우씨랑 약간의 멜로가 형성됐지요. 예전에는 이미숙씨와 여러 편을 같이 했어요. 이미숙씨가 배우로서 참 좋은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이런저런 역할에 다 맞죠. 다양한 연기를 합니다. 같이 연기를 하면 상승작용이 일어났지요.”

    지독한 섹스신 알레르기

    ▼ 지금은 베드신 할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겠지만, 젊은 시절에는 일부러 피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지금은 뭐, 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거죠(웃음). 제가 1978년부터 성인배우로 나섰는데, 1970년대에는 좋은 영화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외화 수입 쿼터를 따기 위한 반공영화 계몽영화 우수영화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죠. 호스티스 영화는 검열에 걸렸어요. 그때는 사전, 사후 검열이 다 있었어요. 제가 다시 영화를 시작해 4편의 조연을 맡았죠. ‘병사와 아가씨들’은 건전영화였어요. 두 편의 영화는 여자주인공에 남자들이 조역으로 나오는 여성영화였죠. 그 다음에 반공영화를 찍었어요.

    1970년대는 암담했지요. 물론 저 자신도 암담한 시절이었죠. 그러다가 1980년 이장호 감독을 만나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찍으니까 그냥 피가 끓는 거예요. 당시 서울 변두리에서 있음직한 사실적인 영화였거든요. 영화계 쪽에서는 ‘야, 이거 검열 통과 못한다’ ‘나중에 다 짤린다’ ‘극장에 못 붙일 거야’라는 얘기가 나왔죠. 박 대통령 죽고, 광주민주화 운동 나고,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어수선한 틈을 타 개봉된 거예요.

    제가 다시 영화를 시작할 때는 나름대로 영화를 통해 인생을 걸어보겠다고 생각했죠. 정말 의미 있는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결심했는데 1970년대 말을 거치며 ‘잘못 선택한 것 아닌가’ 회의가 생겼죠. 그 정도로 암담했어요. 그러나 1980년에 ‘바람 불어 좋은 날’ 하면서 용기를 가졌지요. 그래서 그 숱한 사랑 이야기가 있었던 1970년대를 뒤로하고, 우리가 그때까지 하지 못했던 어떤 새로운 이야기들을 천착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 다음에 뭐 사회성이 있는 작품들을 주로 골라서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멜로적이거나 부드러운 감정, 사랑의 감정은 약해지게 마련이었죠. 아무래도 강한 생각과 시선을 갖게 되니까요. 부드러운 멜로는 제 성에 안 차는 거예요. 198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멜로드라마에는 베드신이 양념처럼 들어갔어요. 요즘에는 영화에 양념 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더 확실한 것들이 다른 데 다 있으니까. 자기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당시에는 그런 매체가 별로 없었지요. 그러니까 예술도 해야 하고, 흥행도 시켜야 했죠. 그러다보니까 ‘야, 이런 데는 좀 이렇게 좀 하자’라는 식의 타협을 한거죠. 그래서 속이 좀 상했지요. 아주 확실한 이유가 있으면 좋죠. 예를 들어 ‘깊고 푸른 밤’에서는 상당히 격렬한 것도 있었죠. 임권택 감독님의 ‘오염된 자식들’도 그런 게 주제였어요. 그런 거는 확실하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근데 그런 것도….”

    안성기는 ‘베드신’ 혹은 ‘섹스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것’ ‘그런 것’이라는 대명사를 썼다. 입에 올리기도 싫어하니, 연기하기는 정말 싫은 모양이다.

    “그것을 보여줘야 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나도 떳떳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신은 촬영합니다. 그런 장면이 양념처럼 들어가면 감독과 얘기해, 절제하거나 아니면 생략하고 탁 넘어가는 게 영화적으로 훨씬 더 좋지 않으냐고 설득했지요. 제가 하여튼 그런 식에 익숙하다보니까…. 멜로영화도 굉장한 연기력이 필요하거든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거나, 입을 맞춰도 아주 분위기 있게 하는 것을 저는 잘 못해요. 쑥스러워서 그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거죠. 한마디로 서투른 거죠. 그래서 그런 작품을 많이는 못했죠. 결과적으로 보면 저한테 좋은 선택이었어요.”

    꽤 긴 답변이다. 베드신에 관해 할말도 많고 안성기의 고민이 컸던 듯싶다.

    고리 끊긴 선후배

    ▼ ‘한반도’는 흥행에 실패했죠.

    “실패했어도 관객 400만명이 들었는데요. 1000만명을 목표로 잡았는데 400만명밖에 안 봐서 실패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 400만명도 스크린 독식(獨食)이 도와준 것 아닌가요.

    “그런 거지요. 스크린을 많이 열어 가지고 쫙 잘나가다 ‘괴물’한테 먹혔어요.”

    ▼ 영화가 너무 작위적이라 감동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의도가 너무 많다보니까 드라마의 감동은 좀 줄어들었다는 그 말씀은 뭐….”

    ▼ 한반도에는 반미, 반일, 친북 코드 비슷한 얘기들이 더러 나오더군요. 문성근씨가 현 대통령하고도 가깝고…. 영화인이 반미정서를 영화에 집어넣지 않으면 젊은 관객을 끌어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우파 지식인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감독이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두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다고 봅니다. ‘야, 이것을 이렇게 하면 관객이 몇만명 더 들 거야’ 하는 계산 속에서 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 신상옥 감독 장례식 때 젊은 영화인이 많이 오지 않아 안성기씨가 화를 냈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났더군요.

    “제가 화낸 것은 아니죠. 영화를 사랑하는 어떤 기자들이, 아니면 네티즌들이 아마 그랬을 거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신상옥 감독님을 잘 아니까요. 신 감독님이 만든 ‘자매 화원’이라는 영화에도 아역으로 출연했죠. 최은희 여사님과는 몇 편 영화를 같이 했고요. 당시에 신상옥필름 규모는 대단했거든요. 제가 그걸 직접 봤고, 그분이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죠.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신 감독님과) 같이 일할 기회가 없었고 만날 기회도 별로 없었을 거예요. 우리 영화계에 선후배의 연결고리가 조금 느슨해요.

    선배와 후배의 연결고리가 뚝 끊긴 상태에서 제 밑의 후배들이 나왔다고 할까요. 결국 1970년대는 확 날아가버린 거예요. 중간에 계셔야 할 분들이 없는 거죠. 김승호 허장강 선생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신성일 선배님도 여성 주인공을 보조하는 영화에 많이 출연했죠. 남자배우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의 절대수가 적었죠. 남자배우들의 마음이 영화판을 떠나 있었다고 봐야죠. 관객 역시 배우들의 매력을 영화 속에서 충분히 느끼지 못했죠. 1970년대는 한국 영화사에서 완전히 공백이었죠. 그래서 연결이 툭 끊겼다는 겁니다.

    중간 위치에 있는 제가 좀 부담스럽더라도 전부 와서 같이 참여하자고 했어야 하는데 못했죠. 그냥 저만 간 거죠. 일본 영화 현장에 가보면 나이 많은 사람부터 아주 젊은 사람까지 같이 일해요. 우리는 일단 나이 많은 분이 없어요. 하여튼 현장에서는 제가 최고령이에요. 사실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이죠.”

    필자가 안씨의 대표적인 블록버스터로 ‘투캅스’와 ‘실미도’를 꼽자 그는 “블록버스터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영화라는 의미”라고 정정해주었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로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초(超)대작이라는 뜻과 크게 히트한 영화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재미있거나 근사하거나

    ▼ 1980년대 흥행에 성공한 영화와 최근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에는 어떤 패턴의 차이가 있습니까.

    “기획되는 영화의 성격이 크게 달라요. 사회의 변화에 따라 영화도 달라졌죠. 영화는 사회의 거울이니까요. 문민정부 이후 영화가 각종 제약에서 벗어나 소재의 폭이 넓어지고 표현도 자유로워졌지요. 그 전 영화들은 풍자 위주이거나, 약간 우회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관객과의 암묵적 약속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970, 80년대에는 인서트로 학교 교문을 당겨 잡으면 ‘아, 저거 데모를 해 저렇게 됐구나’ ‘주인공이 어렵게 됐구나’ 하고 유추하는 거죠. ‘고래 사냥’에서 남대문경찰서가 나오고 거지가 나오면 ‘저거 운동하다가 지금 거지 흉내내는구나’ 하는 형식이지요. 관객과의 약속 아래 영화를 보는 맛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 왔습니다. 완전히 무한경쟁시대로 접어들었죠. 예전 분들이 적응하기 상당히 힘들어졌죠. 예전에는 많은 제약 속에서 어떻게든지 뭔가를 풀어내려고 애썼는데, 제약이 풀어지니까 발가벗겨진 느낌이 생긴 거죠.

    1990년대 초부터 기획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지요. 관객의 취향에 맞추는 영화가 많이 나온 거죠. 예전에는 관객이고 뭐고 생각을 못했지요. 영화 속에 담긴 진실을 어떻게 끌고 나가서 (검열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하는 생각만 많았지요.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지면서 관객하고 정면승부하게 된 거죠. 이후부터 새롭고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지구를 지켜라’ 같은 영화도 그런 맥락에서 봐야죠.

    요즘 관객이 영화에 대해 요구하는 게 예전과 다릅니다. 예전에는 영화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려 하고, 공감하려 했죠. 취미가 영화감상이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었어요. 요즘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그저 즐거움을 얻고자 합니다. 일종의 현실도피죠. 그래서 ‘개그 콘서트’ 같은 게 잘되겠지만. 영화 역시 진지함이나 끈기를 가지고 관객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봐야 하는 영화는 안 됩니다. 장르로 보면 코미디나 로맨틱 코미디 쪽을 좋아해요. 요즘에는 지루한 것을 못 참아요. 한 5분이라도 지루하면 옆에서 보기가 불안할 정도예요. 빨리빨리 뭐 좀더 재미난 게 나와야 될 텐데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거든요.

    요즘 관객이 영화라는 매체에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즐거움 쪽이에요. 아니면 정말 정신없이 근사한 영화를 내놓든가…. 그런 영화는 1년에 한두 편 나올까 말까 하죠.”

    ▼ 1980년대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바람 불어 좋은 날’ 같은 사회성 짙은 영화를 하다가 조금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저는 조금씩 변화하고 거기에 적응해갔거든요. 그래서 제가 주연에서 조연으로 넘어갈 때도 큰탈이 없었죠.”

    ▼ 어떤 사회평론가가 우리나라는 386 이전과 이후 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386 세대는 인간의 종자가 다른 신(新)인류라는 것이죠. 영화에서는 어떤까요.

    “영화는 장르가 워낙 다양하죠. 박찬욱 감독이 민주노동당 당원인데 ‘올드보이’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영화가 민노당하고 관계 없잖아요. 오히려 암울했던 시기로 가면 정치적인 색깔이 더 짙게 나타날 겁니다. 지금은 대부분 자기가 지향하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안성기씨도 연기 잘해요”

    박중훈씨는 안씨에게 “형은 바른생활 사나이라서 아무래도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처럼 악마적 카리스마를 지닌 배우가 되긴 힘들겠어”라고 한 적이 있다. 안씨는 이에 “중훈이 네 말도 맞아. 자신을 해체해서 예술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 그러나 나는 지키는 쪽에 더 가치를 두며 인생을 살고 연기를 하겠어. 해체가 전부는 아니잖아”라고 답했다.

    ▼ 조폭영화, 갱스터영화도 영화의 한 장르 아닙니까.

    “예전에도 있었어요. 박노식 장동휘 독고성 선배님들이 하던 장르가 있었어요. ‘명동 브루스’ 등 ‘명동’이 들어간 제목이 많았죠. 그 다음에 좀 없어졌다가 다시 나오는 거죠. 갱스터영화는 미국에서는 아주 큰 장르거든요. 어떻게 보면 우리도 그쪽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아간다고 볼 수 있어요.”

    ▼ 도덕군자들 중에는 “조폭영화가 폭력조직을 미화해 청소년들의 모방 심리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현실은 현실이고 영화는 영화라고 생각하는데요.

    “영화를 영화로 그냥 봐줘야 하는데, 자꾸 현실하고 결부시키면 상당히 어려워지죠.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적으로 봐줘야 합니다. 그 속에는 픽션이 많이 가미되어 있으니까 현실과는 좀 다르다고 봐줘야 합니다.”

    ▼ 김기덕 감독이 ‘괴물’을 향해 스크린 독식이라고 비판했는데요.

    “‘괴물’을 대놓고 얘기하다가 좀 문제가 돼 영화계를 떠나겠다고 했지요. 한 영화가 스크린을 독식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남아 있어요. 시장원리대로 그냥 놔둘 것인지, 아니면 스크린 수 제한을 할 것인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지요. 자기가 처한 시각에서 보면 현실에 문제점이 많이 있는 거지요. 정말 영화가 잘돼서 관객이 밀어닥치는데 그것을 극장수가 적어서 제대로 수용 못한다고 하면 안타깝겠죠. 지금 적절한 방법을 찾기 위해 꾸준히 모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 대(大)스타도 앤티(anti)가 30%쯤은 있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국민배우’라고 하지만 앤티도 있지 않겠습니까. “안성기씨는 연기보다 인간성으로 평가받고 있는 거 아니냐”는 앤티 여성의 지적도 있더군요. 연기의 폭이 좁다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억울하다고 생각합니까.

    “아주 좋네요. 그 정도로 해준다면 아주 애교가 있네요, 진짜로 고맙죠. 글쎄 모르겠어요. 요즘에 그렇다는 건지, 예전부터 그렇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 분 연세가 어느 정도 됐나요?”

    필자가 “20대”라고 대답하자 그는 “1980년대부터 쭉 봐오셨다면 아마 그런 얘기 못했을 거 같아요”라고 반론을 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말보다는 웃음이 많았는데 처음으로 표정이 굳었다.

    “중훈이가 인터넷에서 ‘안성기씨도 연기를 잘해요’라는 댓글을 봤대요. 중훈이가 그것은 ‘이창호씨도 바둑을 잘 둬요’라는 것과 비슷한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지나간 것에 대한 배려나 존경심이 없는 것 같아요. 뒤로 돌아가 찾아보려 하지 않고 그저 지금, 현재를 중심으로 늘 생각하죠. 생각의 폭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콘텐츠에 대해 깊이 있는 관찰을 해야 합니다. 시네마테크가 제대로 운영돼 예전 영화를 끊임없이 보여주는 상영관이 생긴다면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겠지요.”

    영화와 라면의 공통점

    그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만다라’도 그렇지만 그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다. ‘고래사냥’에서는 돈키호테 같은 거지로, ‘깊고 푸른 밤’에서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밀입국자로, ‘안녕하세요 하나님’에서는 정신박약아로, ‘성공시대’에서는 출세지상주의자로 다채로운 연기를 했다.

    안씨는 지난해 이맘때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 1인 시위를 한 적이 있다.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제작한 TV 광고에는 “욕을 먹어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해야겠습니다. 문화는 교역의 대상이 아니라 교류의 대상입니다”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이 광고는 방송광고공사 심의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해 방송이 불가능해졌지만 온라인 매체를 검색해보면 볼 수 있다.

    ▼ 한국은 무역해서 먹고 사는 나라입니다. 미국산 쇠고기에서 뼛조각 하나 나온 것 가지고 전량 반송하니까, 미국에서는 지금 현대자동차 한 대에서 불량품이 나오면 자동차 수송선에 함께 실려 온 모든 차를 반송하겠다며 화를 냅니다. 우리 경제의 미국시장 의존도가 높습니다. 한국이 쌀이나 영화시장을 못 열겠다고 버티면 거꾸로 미국 처지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농민은 형편이 어려우니까 그래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영화인들이 FTA 반대 1인 시위를 하고 일일교사를 하며 어린 학생들에게 FTA 반대 교육을 하는 것은 좀 잘못됐다고 봐요.

    “지금 제 얘기를 끌어내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거죠?”

    필자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실제로 이 속의 생각이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생각이 그래요?”라며 다소 놀라는 표정이었다.

    “지구상에서 할리우드 영화와 아무 대책 없이 맞서서 이긴 나라가 한 나라도 없어요. 지금은 정서적으로 좀 안 좋은 시기지요. 1998, 99년에는 국민이 영화편에 섰지요. 그러나 IMF 경제위기 이후에 전체적으로 상황이 나빠지는데 영화는 반대로 좋아졌어요. 경제 불황기에 영화는 활황이 되지요. 사회가 호황이면 사람들이 영화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하지 않아요. 더 큰 재미를 찾아 밖으로 나가거나…. 영화는 단돈 7000원이거든요.”

    ▼ 불황 때 더 팔리는 라면 비슷하군요.

    “그런 거예요. 영화는 현실 도피의 탈출구 같은 거지요. 우리가 영화를 재미나게 잘 만들어요. 아이디어도 좋고. 그런데 레드 카펫을 밟을 때 입는 의상을 요란하게 보도해 본질에 관계없이 안 좋은 인식을 자꾸 심어주게 되죠. 그래서 영화인들이 시위를 시작하니까 우리나라가 잘살기 위해서 양보 좀 하라는데 영화하는 사람들 왜 그렇게 양보심이 없냐는 말이 나오지요.

    아무튼 한미 FTA 4대 선결조건 때문에 스크린 쿼터는 반이 잘려 나갔습니다. 프랑스 일본 같은 영화 강국에도 스크린 쿼터에 해당하는 제도들이 다 있어요. 다른 나라는 없는데 우리만 갖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요. 형식이 좀 다를 뿐이지요. 국민정서가 등을 돌리고 있으니까 현재는 상당히 어려운 상태예요.”

    ▼ 우리 영화가 밖으로 진출하는 한류(韓流)는 형편이 어떤가요.

    “한류가 봇물 터지듯이, 화산이 폭발하듯이 한 2, 3년 막 터져 나가다가 지난해에 아주 썰렁했거든요.”

    영화배우들은 개런티를 물어보면 절대로 대답을 안 한다. 안씨도 마찬가지였다. 필자가 “얼마 전 강우석 감독이 송강호와 최민식을 향해 고액 개런티 문제를 거론해 논란을 빚은 적이 있는데요”라고 말을 꺼내자 “잘못했다고 했으니까 이름을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라고 잘랐다. 하여튼 안씨는 사람 이름만 나오면 말조심을 했다. 이미 신문에 나온 이야기인데도.

    “성공하면 태도 바뀌는 사람이 싫다”

    ▼ 미국이나 한국이나 스타가 영화판의 돈을 거의 다 가져간다는 비난이 있더라고요.

    “다른 배우가 그런다고 ‘야,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말하기가 어렵지요. 요즘에는 배우들이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돼 있거든요. 모든 관계가 비즈니스로 얽혀 있지요. 예전에는 사람의 정으로 얽혀 개런티를 많이 못 올렸죠. 어떤 절충점을 찾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스타 때문에 영화에 사람이 몰리니까, 자본주의 경제에서 어쩔 수 없는 대목일 수도 있겠지요.

    “맞아요. 그런데 그렇게 요구하는 사람도 그만한 위험을 감수하는 거예요. 사실 평생 잘나갈 수는 없거든요. 단기간에 자기 몫을 빼겠다는 전략이지요. 메이저리그의 거물 스타였던 새미 소사도 연봉 50만달러(4억원)에 마이너리그로 갔어요. 저는 마라톤 페이스거든요.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고 대신 평생 끈기 있게 가려고 합니다. 확 당겨 쓰는 것은 그만큼 짧다는 의미가 될 수 있어요.”

    다음은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의 회고다.

    “안성기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였죠. 새로 뜨는 배우들이 개런티를 올려달라고 하려면 ‘안성기나 강수연 수준에 맞춰달라’고 요구할 정도였습니다. 영화계가 한참 어려울 때 개런티를 1억원에서 1억2000만원으로 올려주겠다고 제의했는데, 성기가 ‘제가 올려받으면 모두 올려달라고 할 거 아닙니까’ 라면서 1억원만 받더군요. 성기는 영화판을 사랑하는 배우입니다. 배우 혼자 다 가져가면 영화계가 시든다고 생각했던 거죠.”

    이 사장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을 제작할 때 최민식을 주연으로, 안씨를 조연으로 정해놓고 출연을 부탁했다. “개런티가 1억5000만원 할 때였는데 우수리 떼자고 했더니 성기가 ‘그러죠’라고 하더군요. 조연 맡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개런티를 깎자고 해도 선선히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취화선’ 출연진 단합대회 날 우리 같은 노인네와 젊은 배우들 중간에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계속 노래를 불렀어요.”

    필자가 “우리나라 최고 스타들이 요즘에는 한 5억, 6억원 받는 것으로 아는데요”라고 말하자 안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도 할리우드 스타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예전엔 100분의 1 수준이었죠. 요즘 들어 우리가 올라가긴 했죠. 요새 젊은 친구들 중에 보통 1년에 한 편, 아니면 1년에 한 편도 못하는 친구도 많거든요. 스포츠 쪽과 비교해보면 그쪽에 훨씬 많이 받는 사람 많아요.”

    ▼ 용돈을 많이 쓰는 데가 어딥니까.

    “경조사에 가장 많이 써요. 저는 연락 오고 시간 되면 다 가요. 그게 좀 힘들어요.”

    그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현대아파트에 20년째 살고 있다. 59평형이라 꽤 값이 나간다. 덕분에 지난해 종합부동산세를 맞았다. 가장 큰 재산목록이라고 했다.

    그는 누룽지를 좋아한다. 그러나 쫀득한 맛이 없거나, 구수한 맛이 안 나면 절대로 안 먹는다. 자주 가는 음식점은 압구정동 현대고등학교 건너편 골목길 ‘현대낙지’. 세발낙지와 감자탕을 하는 집이다. 거기서 낙지볶음을 즐겨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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