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달마도 보시 20년, 석주 이종철 화백의 일갈

“달마도는 부처의 마음일 뿐, 달마 이외의 것은 바라지 말라”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7-03-09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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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의 제자인 달마선사의 그림이 홈쇼핑에서 거래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상업성에 찌든 달마도를 거부하고 부처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달마도 무상 보시에 나선 선화가도 많다. 석주 이종철 화백이 전하는 진정한 달마도의 세계와 가난한 달마도 화가의 삶.
    달마도 보시 20년, 석주 이종철 화백의 일갈
    1500여 년 전,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추앙받는 달마선사가 당시 중국의 황제이던 양(梁)나라 무제를 만났다. 무제는 인도에서 불경을 들여와 번역하고 수천 곳에 절을 세워 ‘불법천자(佛法天子)’로 불리는 인물. 그가 달마선사에게 물었다.

    “이만큼 절을 짓고 불경을 번역했으니 내 공이 얼마나 대단한가. 나는 어떤 보상을 받겠는가?”

    그러자 달마선사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무공덕(無功德), 오히려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

    양 무제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달마선사는 “불식(不識·알 수 없다 또는 당신과 나를 구별할 수 없다)”이라고 답했다. 부처의 마음에는 공덕에 대한 대가를 바라거나 서로를 구별하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달마선사는 이 한마디로 설파했다. 이후 달마선사는 소림사로 들어가 9년의 면벽좌선(面壁坐禪) 끝에 선종을 창시했고, 그의 선법은 곧 부처의 마음을 헤아리는 수단의 하나로 널리 전파됐다. 이로써 그는 부처의 28대 제자가 됐다.



    이처럼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고자 노력한 달마선사를 화폭에 담은 달마도가 돈을 받고 팔리는 상품으로 둔갑했다. 인터넷 홈쇼핑과 신문 광고를 통해 팔려 나가는 달마도는 수맥(水脈)을 차단한다거나 좋은 기(氣)가 나온다는 선전에 힘입어 또 하나의 유행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노력 없이 무턱대고 행운을 바라는 사람들의 허영과 영합한 ‘상업 달마도’는 고유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일개 부적 신세로 전락했다.

    가짜 ‘禪화가’들

    하지만 혼탁한 달마도 시장과는 먼 거리에서 달마선사의 마음 자체를 예술적으로 승화하기 위해 노력해온 선(禪)화가도 있다. 석주(石舟) 이종철(李鍾喆·64·대한불교원효종문화원장, 선화미술원장) 화백도 그 한 사람이다. 원효종 승려인 이 화백은 지난 20여 년간 큰 행사가 있거나 우환이 있을 때마다 초대형 달마도를 그려 행사를 축하하거나 사람들을 위로했다. 20여 년간 그에게 무료로 달마도를 받아간 사람만 수만명, 그는 “달마도를 그리며 보시한 숫자를 헤아리는 행위 자체가 달마를 욕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달마도는 누구나 그릴 수 있지만, 그리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부처님께 다가가 있는지가 핵심”이라는 것.

    대전시 동구 용전동에 있는 그의 화실 석주선원미술원(dalmado7173@ hanmail.net, 선화사랑모임방) 벽 전체에 그려진 백팔(해탈) 달마도는 어느 하나도 같은 표정이 없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무섭게도 보이고, 장난기 넘치게도 보이는 달마도들. 진짜 표정을 알아내기 어려운 ‘모나리자’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달마의 얼굴에서 활달하게 뻗은 선은 끊기지 않고 내려가 장삼이 되고 몸통을 이룬다. 화폭에 드러난 극도의 생략과 절제는 보는 이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여유를 심어준다. 달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되묻게 하는 작품들이다.

    그는 상업 달마도를 그리는 ‘가짜’ 선화가들 때문에 무척 화가 나 있었다.

    “팔아먹을 게 없어서 달마를 팔아먹습니까. 달마선사가 알면 까무러칠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달마가 누구입니까. 무상무심, 무공덕, 불식의 경지를 설파하고 간 불교계의 큰 어른이자, 선종의 초조입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이에요. 특히 우리 조상들이 그린 달마도는 예술적 가치가 높고 구도(求道)의 혼이 담겨 있어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신라의 솔거로부터 조선시대 연담 김명국, 김홍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달마도는 일본의 박물관에서 국보급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보지도 못한 달마선사를, 그것도 붕어빵 찍어내듯이 똑같은 모양으로 그려 팔아먹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달마도에서 달마 이외의 것을 바라는 데서 생긴 일입니다.”

    상업 달마도를 비판하는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날 그가 그린 달마도의 달마선사는 잔뜩 골이 난 모습이다.

    “달마도 보시는 利他行의 길”

    달마도 보시 20년, 석주 이종철 화백의 일갈

    2003년 2월 발생한 대구지하철 참사를 그대로 예견한 석주 이종철 화백의 그림 ‘지옥기차’(위)와 그가 그린 달마도.

    석주 화백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또 다른 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그리는 그림은 달마도가 아니라 복돼지였다. 그는 모 일간지의 신년호에 독자를 위해 황금 복돼지 그림을 그려줬다 뜻밖의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독자를 상대로 그냥 몇 작품 그려주겠다고 한 것이 화근이 되어 647명에게 복돼지 그림을 그려주게 된 것. 작품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기를 불어넣다보니 몸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시름을 잊었다. 금을 갈아 만든 금 물감 값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그는 개인전과 시연회에서 들어오는 수익을 지체장애인 복지시설과 복지센터에 기증했다. 대학 입시철이 되어 수험생 달마도를 그려달라면 그려줬고(1만여 장 이상), 난치병 환자 치료 모금행사가 있으면 달려가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이타행(利他行)을 수행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린 달마는 국가적 경사나 우환이 있을 때 국민과 함께 웃고 울었다. 달마가 축구공을 들고 있는 2002년 월드컵 4강 기원 달마도를 그렸는가 하면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때에는 대회의 성공을 기원하고 지하철 화재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250m에 이르는 초대형 달마도를 그렸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그려진 달마도 중에서 가장 긴 작품으로 지금도 대구시 산하기관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석주 화백은 2173(개최연도 2003+당시까지의 희생자 170)명의 달마를 250m 화폭에 담았는데, 달마 제각각의 포즈와 표정이 모두 달라 시민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달마도의 화룡점정 격인 눈은 시민들이 하나씩 직접 그려 넣게 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대회가 끝난 후 그에게 대통령 표창이 상신됐지만 그는 수상을 거부했다.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게 이유였다.

    2005년 9월 청계천 복원공사가 완공됐을 때에는 청계천의 길이(5602m)에 맞춰 달마도를 그려 5602명에게 나눠줬다. 맑은 물을 보면서 달마의 맑은 마음을 느끼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 몇 달 뒤인 11월 부산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 때에는 각국 정상이 우리 달마도의 기상과 한국인의 순수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화실 월세도 못 내

    그는 특히 지체장애인과 노인에게 관심이 많다. 지난해 3월 경남지체장애인애호협회 초청으로 달마도 전시회를 열어 수익금을 전달했으며, 대전·충남지역의 지체장애인 시설에는 수익금이 생길 때마다 보내왔다. 또한 지난해 5월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달마도 시연행사를 통해 모인 540만원을 노인복지협회에 기부하고, 노인 3000명에게 점심을 무료로 제공했다. 석주 화백은 “정신지체아들은 이런저런 계산을 하지 못하지만 순수한 인간성을 지녔다. 바로 그들에게서 달마의 진면목을 느낀다”고 했다.

    석주 화백 주변에는 연예인과 정치인이 많이 모여든다. 달마도를 그리면서 쌓은 마음의 여유와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 상담까지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조계에도 이름만 대면 알 사람들이 그에게 달마도를 받으러 오지만 석주 화백에게 그들은 불법(佛法)을 알려야 할 대중일반일 따름이다. 그가 정치인에게 써주는 문구에는 뼈가 담겨 있다. “권력은 눈밭을 걸어간 기러기 발자국이니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에게 달마의 모습이 비치어 반목을 거두어주시기를….” 그는 “최근 자살한 가수 유니와 같이 정신적으로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에게 달마도를 그려주며 인생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달마도를 무료로 그려주고 전시회에서 거둔 성금을 이리저리 나눠주면서 어떻게 생계를 꾸려갈까. 그는 달마도의 대가답지 않게 몹시 가난했다. 그는 최근 서울 충무로에 있는 화실의 월세를 내지 못해 대전의 화실로 내려왔다. 대전의 화실도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후배가 무료로 빌려준 곳이다. 화실 월세조차 못 내는 사람이 금 물감으로 복돼지를 그려주다니. 종이며 붓, 먹을 대는 것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 사정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달마도는 가난해야 더 잘 그려집니다. 불자들이 선원에 들러 얼마씩 넣어두고 가는 돈으로 생활하지만 더는 욕심이 없어요. 달마도를 받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만이지요.”

    달마도 보시 20년, 석주 이종철 화백의 일갈

    불교계의 판소리인 범패를 부르며 동자승 선화를 그리는 범진 스님(왼쪽)과 석주 화백의 제자 일륜 스님.

    그의 이렇듯 낙천적인 인생관은 부유했던 어린 시절에서 연유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불교에 입문하고 달마도를 그리기 전까지는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 풍운의 한세상을 살았다. 일본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한국에 들어온 그는 고교시절까지는 미대 진학을 목표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60년대 특수수색대에서 복무한 후 그의 발길은 연예계로 향한다. 국내에서 가장 젊은 쇼 단장으로 서영춘, 최무룡 같은 스타들과 전국을 누볐다. 물려받은 집 두 채를 그 시절에 날렸다. 그러고도 예술에 대한 ‘끼’를 못 버려 사진작가 생활을 15년 정도 하다 1987년 팔공산 동화사에서 도운(道雲) 스님을 만나 불교에 입문했다. 도운 스님은 그의 달마도 스승이다.

    한때는 달마도 무료 보시를 그만두려 했다. 대처승인 그에게는 부인과 10대의 자식이 있다. 그들을 보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붓을 놓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사건 때(2월18일)의 기이한 경험이 바로 그것.

    “공주문화원 초청으로 달마도 전시회를 준비하던 때였지요. 2월 초순인데, 지하철에 불이 나 사람들이 아비규환에 빠진 꿈을 꾸고는 밤을 꼬박 새운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그 꿈을 화폭에 담았어요. 그러곤 달마도 전시회 콘셉트에 맞지 않지만 출품했죠. 그런데 대구로 옮겨 전시회를 하던 중 참사가 났어요. 모골이 송연했습니다. 저 자신도 너무 놀랐습니다. 그때 새삼 깨달았죠. 이 길이 내 길이라고….”

    당시 공주문화원에서 발행한 ‘공주문화소식’을 찾아봤더니 석주 화백이 그렸다는 문제의 그림이 사진에 나와 있고, 2003년 2월7일부터 11일까지 전시회를 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이 난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절명하는 그 그림은 아직도 석주 화백의 화실에 한쪽을 차지한 채 걸려 있다. 그가 이후 국내 최장인 250m의 달마도를 그린 것도 그때의 충격 때문이었다.

    범진 스님과 일륜 스님

    석주 화백의 얘기를 듣고 있을 때 인근 공주 마곡사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석주 화백과 함께 달마 선화가로 이름난 범진(梵眞·65, 조계종) 스님.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인 범패(梵唄)의 달인이기도 하다. 지난 30여 년간 ‘불교의 판소리’로 일컬어지는 범패를 부르면서 달마도를 그려왔다. 청아한 그의 범패 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며 화실 전체에 공명을 남겼다. 사실 그는 달마도보다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동자승의 그림을 더 잘 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범패를 부르며 동자승 선화를 큰 화선지 위에 그려 나가자 석주 화백이 그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러고선 일필휘지로 달마도를 그린다. 종단은 다르지만 예술 앞에서는 부처님의 마음으로 하나가 됐다. 화폭에 펼쳐진 달마와 동자승, 그리고 범패…. 무아의 경지가 따로 없다. 조금 있으니 범진 스님도 달마를 그리기 시작한다. 두 대가가 만나 진정한 달마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다.

    “범패와 달마도는 많은 점에서 닮아 있지요. 절방 스님의 수행수단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소리를 하고, 그림을 그릴 때 ‘내가 없는 경지’, 즉 무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에서는 별다를 바가 없지요. 무상무념의 경지, 바로 그것입니다.”

    범진 스님은 달마도를 그려 ‘기적이 일어난다, 기 치료를 한다’며 선전하는 현재의 상업 달마도를 개탄하며 스님들이 수행의 자리로 되돌아올 것을 호소했다.

    잠시 후 또 한 사람의 달마도 선화가가 석주 화백의 화실을 찾았다. 법성사의 일륜(一輪·53) 스님이었다. 기자가 그 명성을 듣고 석주 화백의 문화원으로 초청했는데 와서 보니 석주 화백의 제자였다. 그는 달마도 화단에서 상업 달마도에 대해 가장 보수적이며 강성으로 대처하는 스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도 스승처럼 달마도를 무상 보시하며 선의 수행으로 삼고 있었다.

    석주 화백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그의 필치는 다르다. 석주 화백의 달마도가 ‘여백의 달마도’라면 그의 달마도는 꽉 찬 느낌을 준다. 그는 “3개월 할부로 달마도를 파는 사람들, 공장에서 찍어낸 달마도로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은 감히 달마도를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화실을 나서는 기자에게 석주 화백이 애써 미소를 띠고 말했다.

    “욕심 없이 살기는 너무 힘들고, 바보같이 살기는 더욱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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