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여운 명주 솜털을 단 가마발. 시원한 청색 계통 대오리에 하얀 귀갑문을 넣어 짰다.
“그리고 4년 뒤 통영 나전장 송방웅 선생님이 서울에 갔다 와서 전하는 말씀이, 전승공예대전 관계자 분이 ‘통영 공예품으로 나전(자개공예)이나 소목(목가구)은 많이 출품되는데, 발은 단 한 번 올라오고서는 그 뒤로 도통 올라오지 않으니 통영에 가면 발 하시는 분에게 말해서 앞으로 꼭 출품하도록 해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조대용은 비로소 제대로 된 ‘작품’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전승공예대전 출품 날짜까지는 두 달밖에 남지 않아, 밀린 주문품을 분주히 만들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 낸 작품은 평소 만들던 대로 나일론 실로 엮은 발이었다. 그런데도 장려상을 받았다.
“출품작 규정 사항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한 채, 전통 기법대로 엮어야 한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하고 만들었던 거죠. 물론 이듬해는 제대로 만들어 출품했습니다.”
이듬해인 1983년 그가 받은 상은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이사장상이었다. 상도 큰 상이었지만, 이로써 그의 발 작업은 큰 전환을 맞게 된다. 이제 발 작업은 단순한 용돈벌이가 아니라 진지한 작품 활동이 되었으며, 나아가 전통을 잇는다는 의식과 책임감까지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이후 그는 오로지 전통 기법 그대로 발을 만들고 연구하는 일에만 매달려 살게 됐다.
예용해 선생이 재발견한 장인의 세계
그런데 그때 통영 발을 잊지 않고 출품하라고 채근해, 젊은 조대용이 뒷날 무형문화재가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이는 누구였을까? 바로 예용해 씨였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던 예용해 씨는 기자 시절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리 미술과 전통공예품을 생산해내는 장인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인간문화재’로 승격시킨 주인공이다.
“지금도 흔히 인간문화재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무형문화재 기능[또는 예능] 보유자’입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인간문화재라고 불렀고, 전승공예대전도 인간문화재 공예작품 공모전이라고 했어요. 그때 예인과 장인을 ‘인간문화재’로 명명하게 되면서 예인과 장인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졌고,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도 한 단계 발전한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전승공예대전에 처음 출품한 1982년 이후 14년 동안 그는 무려 열한 번이나 상을 탔는데, 1990년에 문화부장관상, 그리고 1995년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화려한 수상경력에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1992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도 인정받았다. 중요무형문화재는 지방무형문화재와 달리 국가가 인정하는 무형문화재로서, 문화부장관상 이상을 수상한 사람만 지원할 자격이 있다. 그만큼 보존할 가치가 높은 분야에서 뛰어난 솜씨를 가져야만 가능하다.
국가가 인정하고 보호하는 귀한 기능을 가진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았지만, 그는 불만이 아주 없지 않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텔레비전에 나와 경회루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건축물로서 경회루의 훌륭한 점과 이를 단기간에 지은 옛사람들의 솜씨를 자랑스럽게 알려주어 반가웠지만, 그 누각에 당연히 걸려 있었을 발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은 유형의 유산에 치중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건물을 보호하고 보수하는 데 주력하는데,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건축물을 어떻게 치장하고 사용했는지,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문화도 함께 소개되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웬만한 다락[루·樓]에는 발을 걸었던 모양이다. 선조들이 지은 한시에 ‘樓外山光翠滿簾(다락 저편 산 빛은 발을 비취색으로 가득 채운다)’는 등의 시구가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면.
“사대부들이 정자나 다락집에서 기생을 끼고 술자리를 여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다 보도록 했겠습니까? 성근 갈대발이라도 사방에 걸어두고 연회를 즐겼을 겁니다. 발을 걸면 야외 정자에서도 오붓한 분위기를 낼 수 있으니 묘한 정취도 있었을 테고요.”
이 정도 되면 발은 단지 그늘을 드리우고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적절한 조명효과까지 발휘하는 예술품이 된다. 더욱이 바깥에 녹음이 우거졌으면 발은 풀빛으로 물들고 노을이 지면 홍조를 띠었을 테니, 그 내밀한 공간을 시시각각 물들이는 은은한 색감은 참으로 사람의 흥취를 돋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발이 등장하는 옛 시가 많은데, 추사 김정희와 대원군도 발에 관한 시를 남겼다고 한다.
세종대왕 능과 종묘의 발을 복원하다
발은 정자나 다락에도 걸었지만 양반집 안방마님의 방문부터 서민의 창문에까지 두루 걸렸고 또 족자용으로, 또는 붓을 싸는 데도 사용됐다. 그리고 곡식이나 채소를 말리는 데 쓰이는 발(자리)도 있다. 그렇다고 발이 일상용품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임금의 능에 있는 정자각과 종묘에도 발을 걸었다. 휘장이 위엄과 예식을 상징하듯 발 역시 그런 제의가 이루어지는 곳에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