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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비밀

‘가셰 박사의 초상’ 130년 여정

가장 고흐적인 작품이 뉴욕으로 간 까닭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가셰 박사의 초상’ 130년 여정

  • 빈센트 반 고흐가 죽기 직전 완성한 마지막 초상화 ‘가셰 박사의 초상’은 가장 고흐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탄생하자마자 주인 고흐를 잃은 이 작품은 이후 무려 13명의 소장자를 전전하며 프랑스-네덜란드-덴마크-독일-미국-일본 등 수많은 나라를 떠돌았다. 이러한 작품 이력도 평생 고뇌하고 방황한 화가 고흐를 연상케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초상화 ‘가셰 박사의 초상’,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초상화 ‘가셰 박사의 초상’,

1990년 5월 15일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 경매번호 21번 ‘가셰 박사의 초상’ 순서가 돌아왔다. 경매 시작가는 2000만 달러. 100만 달러씩 호가가 올라갔다. 3500만 달러에서 한 번 멈칫하더니 이후 거침없이 올라 순식간에 5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치열한 경합이 계속됐고 예상가(3500만~5000만 달러)의 두 배에 육박하는 7500만 달러에서 호가가 멈췄다. 객석에서 소름 끼친다는 듯 탄성이 터져 나왔다. 수수료 포함 8250만 달러에 낙찰된 것이다. 미술품 경매 세계 최고가. 생전에 딱 한 점밖에 팔리지 않았던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세계 미술 시장을 평정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자화상’ ‘까마귀 나는 밀밭’ ‘해바라기’가 아니라 왜 ‘가셰 박사의 초상’이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1939년 8월 나치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주인도 없이 쓸쓸히 미국 뉴욕에 발을 디딘 그림이었기에 그 반전은 더욱 극적이었다.


‘가셰 박사’의 탄생

1890년 5월, 프랑스 생 레미 요양원을 나온 고흐는 아를을 떠나 파리 교외의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겼다. 거기서 동생 테오 소개로 정신과 의사 폴 가셰를 만났다. 가셰는 의사면서도 미술 애호가였으며, 직접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다. 고흐는 가셰 집 근처에 거처를 정하고 그와 교분을 나눴다. 한 달 뒤 가셰는 고흐의 정신병이 치유됐다고 진단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고흐는 가셰의 초상을 그렸다. 바로 ‘가셰 박사의 초상’이다. 

그해 7월 어느 일요일 고흐는 화구를 들고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가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고흐는 피를 흘리며 무표정하게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이를 두고 환각 작용이 있는 싸구려 술 압생트를 많이 마신 탓에 아픈 것을 몰랐다고 보는 이도 있다. 집에서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해 응급조치만 하고 떠났다. 동생 테오가 도착했고 고흐는 동생 품에서 열정적인 서른일곱 해의 삶을 마감했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고흐의 초상화 가운데 최후의 작품이 됐다. 

고흐는 초상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 어떤 것보다도 나에게 감명을 주는 것은 현대적인 초상화다. (중략) 초상화는 화가의 영혼 깊은 곳에서 비롯한 자신만의 생명을 갖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가셰 박사의 초상’에는 고흐의 갈망이 절절히 새겨져 있다. 주인공의 포즈는 독특하고, 얼굴 표정엔 우수가 가득하다.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 보는 이를 끌어당긴다. 구도와 색상, 소품도 보면 볼수록 심상치 않다. 그림 속 테이블에는 디기탈리스라는 꽃이 놓여 있다. 이 꽃은 당시 강심제(强心劑)로 이용됐다고 한다. 당시 가셰가 동종요법(同種療法)으로 정신 치료를 할 때 사용한 꽃이다. 노란색 표지의 책 ‘마네트 살로몽’은 공쿠르 형제의 소설로, 예술과 노이로제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그림 주인공 가셰는 가셰이면서 동시에 고흐이기도 하다. 환자이자 예술가이고, 고통받는 사람이자 치유하는 사람이다. 고흐는 이중의 정체성을 의사 이미지에 투영했다. 인간은 늘 상처받고 치료받는 존재이기에 이 그림은 더더욱 보는 이에게 와닿는다. 이 작품이 “우리 시대 상처받은 마음의 표현” “70여 점 고흐 초상화 가운데 최고 걸작”이란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찌 보면 ‘가셰 박사의 초상’은 가장 고흐적인 그림일지도 모른다.


광기와 위작

고흐가 세상을 떠나고 이 그림은 동생 테오에게 넘어갔다. 이듬해인 1891년 동생마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의 부인 요한나 반 고흐 봉허르는 그림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가져갔다. 1893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전시를 통해 처음 대중과 만났다. 

이후 이 그림은 여러 사람 손을 거쳤다. 1904년 6번째 소장자인 독일인 수집가 파울 카시러가 그림을 독일로 가져갔다. 이때부터 독일 소장자들은 ‘가셰 박사의 초상’을 독일 문화계에 적극 소개했고, 고흐는 독일에서 인기 있는 화가로 조금씩 부각됐다. 프랑크푸르트 마인강변에 있는 시립 슈테델미술관은 ‘가셰 박사의 초상’을 알브레히트 뒤러, 한스 홀바인, 렘브란트 판 레인의 명품과 함께 전시함으로써 그림의 존재감을 드높였다. 

덕분에 1920년대 들어 고흐에 대한 관심이 널리 확산했다. 고흐의 전기와 관련 논문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의학적 관점에서 고흐의 광기(狂氣)에 주목한 점이 특히 흥미롭다. 고흐의 질병을 연구하면서 그의 광기를 천재성의 바탕으로 이해하려 한 것이다. 1922년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고흐를 ‘정신분열증 환자’로 진단했다. 1930년대 일각에서 “고흐는 간질병 환자이며 ‘가셰 박사의 초상’은 정신병 말기 증상에서 나온 그림”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가셰가 입은 재킷의 구불구불한 선이 정신착란의 징후이며, 그렇기에 관람객이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끌려 들어간다는 분석이다. 정신분열증인지, 간질병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두 주장의 반향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엔 어느 하나의 증상 안에 고흐를 가둘 수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고흐의 그림이 개성적이었듯 그의 병도 개성적이기에 어떤 병명으로도 고흐를 규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고흐는 사후 30여 년 만에 조금씩 신화적 인물로 부각됐다. 고흐가 미술계와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자 눈 밝고 영악한 사람들은 딴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고흐의 위작(僞作)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대 독일 순회전에서 고흐 작품 30여 점이 위조품으로 밝혀진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 또한 고흐에 대한 관심의 반영이다. 이로 인해 고흐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나치 탄압과 뉴욕 망명

1938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퇴폐미술전 당시 요제프 괴벨스(가운데), [German Federal Archives]

1938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퇴폐미술전 당시 요제프 괴벨스(가운데), [German Federal Archives]

1933년 독일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입맛에 맞게 예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가셰 박사의 초상’은 프랑크푸르트 슈테델미술관 소장품이었다. 나치는 슈테델미술관 관장 슈바르젠스키를 해고하고자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나치의 이념과 인종주의에 봉사하지 않는 미술품과 문화재를 약탈하고 파괴할 모략을 꾸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퇴폐미술전’(1937년 뮌헨 개최)이다. 나치는 퇴폐미술이라는 어이없는 누명을 씌워 수많은 예술가를 겁박하고 예술품을 조롱하고자 했다. 

퇴폐미술전을 앞두고 나치는 출품작을 마련하고자 전국 곳곳의 미술관과 갤러리, 개인 소장가 소장품을 뒤졌다.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나서 “모든 미술관과 갤러리를 뒤지라”고 명령했다. ‘가셰 박사의 초상’도 몰수 목록에 포함됐다. 그러나 몇 차례 조사에도 슈테델미술관 지붕 아래 작은 다락방에 감춰놓은 ‘가셰 박사의 초상’이 나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를 두고 슈테델미술관 관계자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가셰 박사가 어떻게 그 강도들의 수천 개 눈을 피할 수 있었을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퇴폐미술전이 끝나자마자 나치는 미술품 1만6000여 점을 미술관에서 빼앗거나 불에 태워버렸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일단 이 위기를 피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나치의 ‘겁탈’ 시도는 끝나지 않았다. 1937년 12월, 결국 이 작품은 나치 제3제국 정부 손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듬해인 1938년, 나치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이 자신의 잇속을 채우고자 음모를 꾸몄다. ‘가셰 박사의 초상’을 은행인 수집가인 프란츠 쾨니그스에게 강제로 매각한 뒤 그 돈을 빼돌린 것이다. 그 돈으로 괴링은 태피스트리를 사들였다. ‘가셰 박사’는 이처럼 권력자의 탐욕 덕분에 가까스로 나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쾨니그스는 그림을 몰래 프랑스 파리로 가져간 뒤 곧바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옮겨놓았다. 1938년엔 유대인 은행가 지그프리트 크라마르스키가 이 그림을 매입했다. 그 무렵 나치의 네덜란드 침공이 임박했다. 크라마르스키는 고민 끝에 미국행을 택했다. 생존을 위한 결정이었다. 1939년 8월 그는 ‘가셰 박사’와 함께 영국 런던으로 향했고, 이후 ‘가셰 박사’를 먼저 미국 뉴욕으로 보냈다. 크라마르스키는 2년 뒤 무사히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미국에선 ‘망명 화가들’이란 전시가 열렸다. 반면 네덜란드에선 나치가 유대인 체포령을 내리고 예술품을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주인 없이 홀로 뉴욕에 도착한 ‘가셰 박사의 초상’. 처음엔 쓸쓸하고 긴박했지만 가셰 박사의 망명은 효과적이었다. 특히 세계 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가던 시대 상황과 잘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경제가 풍요로워지면서 미술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가격이 상승하던 시절이었다.
 
고흐는 ‘가셰 박사’와 더불어 미국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크라마르스키는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6번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셰 박사의 초상’을 대여해 전시하도록 했다. 1984~1990년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6년 동안 작품을 빌려줬다. 세계 최고 수준의 미술관에서 ‘가셰 박사’는 6년 내내 관람객, 수집가, 연구자 등과 만났다. 이후 고흐 연구는 절정에 올라섰다.


뉴욕에서 일본 도쿄로

그리고 1990년 5월 15일. ‘가셰 박사의 초상’은 마침내 크리스티 경매에서 세계 미술품 경매 최고가 신기록을 세웠다. 그림이 탄생한 지 100년, 고흐가 사망한 지 100년,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한 지 51년 만의 일이다. 

당시 낙찰자는 일본 다이쇼와(大昭和)제지회사의 사이토 료에이(齋藤了英) 명예회장이었다. 낙찰가 8250만 달러는 미술계를 경악게 했다. 미국 미술 시장에서 “일본의 자금력은 유대계 게티박물관 정도나 흉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엄두조차 낼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가셰 박사의 초상’을 손에 넣은 사이토는 이틀 뒤인 5월 17일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또 7800만 달러에 사들였다. 세계 미술계는 놀라움을 넘어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1980년대 전후, 세계 미술시장의 큰손은 유럽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 1987년 고흐의 ‘해바라기’를 3900만 달러에 사들인 건 일본의 야스다(安田)화재해상보험이었고, 1988년 피카소의 ‘어릿광대’를 3480만 달러에 사들인 것도 일본 미스코시(三越)백화점이었다. 일본의 돈 많은 수집가들이 세계 미술 시장을 쥐락펴락한 1980년대를 두고 일각에서는 ‘광란의 시절’이라는 말도 한다. 어쨌든 ‘가셰 박사의 초상’ 경매는 미술 시장에서 일본이 존재감을 보여준 정점이었다. 

경매 한 달 뒤인 1990년 6월, ‘가셰 박사의 초상’과 ‘물랭 드 갈레트’가 삼엄한 경비 속에서 도쿄 긴자의 고바야시 화랑에 도착했다. 사이토가 잠시 작품을 본 뒤 ‘가셰 박사의 초상’은 화랑의 비밀 창고 깊숙한 곳으로 옮겨졌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1890년 탄생과 동시에 주인 고흐를 잃었다. 이후 동생 테오와 동생 부인 요한나를 포함해 지금까지 무려 13명의 소장자를 거쳤다. 유족, 예술가, 화상, 은행인, 공공미술관, 나치, 유대인 수집가, 일본 기업인 등 소장자 면면도 다채롭다. 그들의 소장 동기나 소장 과정도 다양하다. 개인적인 예술 취향부터 재산 축적, 정치 탄압 등. 그러다 보니 국경을 무수히 넘나들었다. 프랑스-네덜란드-프랑스-덴마크-독일-프랑스-독일-네덜란드-미국-일본. 인류가 남긴 미술품 가운데 이렇게 국경을 많이 넘나든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도 국경을 수없이 넘나드는 수난을 겪었지만 ‘가셰 박사’의 이력을 따라갈 수는 없다.


망명객 가셰 박사 vs 오르세미술관 가셰 박사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가셰 박사의 초상’ 레플리카.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가셰 박사의 초상’ 레플리카.

1990년 경매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됐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가셰 박사의 초상’이 대중에게 그리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1990년 경매는 ‘가셰 박사’를 알리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기억할 것은 경매 순간이 아니다. 이 작품이 그때까지의 수난을 견뎌낸 과정이다. 특히 나치의 폭압을 벗어나 홀로 뉴욕으로 망명하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가셰 박사’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1890년 고흐는 ‘가셰 박사의 초상’을 한 점 더 그렸다. 그림을 본 가셰가 똑같은 것 하나 더 그려달라고 부탁하자 이에 따른 것이다. 일종의 레플리카(복제품)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가셰 유족이 소유하다 1949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그런데 뉴욕으로 망명한 작품과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차이가 난다. 화면 구성, 붓 터치, 색조, 생동감 등에서 뉴욕 망명작에 비해 다소 부족해 보인다. 특히 전체적인 분위기가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레플리카의 한계일까. 수난을 감내하는 지난한 과정이 없었기 때문일까. 

고흐는 떠났지만 그의 그림 ‘가셰 박사의 초상’(망명작)은 130년을 살아남아 이렇게 말한다. 수모를 견디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 과정에서 명작이 만들어지고, 명작은 우리에게 삶의 가치를 다시 보여준다. 상처받은 영혼과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 이것이 이 초상화의 진정한 매력이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그래서 가장 고흐적이다.


끝나지 않은 유랑

1990년 일본 도쿄에 도착한 ‘가셰 박사의 초상’은 이후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일본 재벌이 불후의 명작을 가둬놓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작품을 공개하거나 매매하라는 수많은 요구에도 소장자는 꿈적하지 않았다. 그리고 1996년 사이토는 사망했다. 이후에도 그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30년째다.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혹시 일본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은 아닐까. 미술계에서는 미국으로 이미 팔려갔다는 이야기도 떠돈다. 비슷한 시기 같은 소장자가 낙찰받은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가 소더비 경매를 통해 몰래 팔려나간 것 같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다. 이에 ‘가셰 박사의 초상’도 비슷한 운명일 수 있다는 추론이 나온다. 그러나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평생 고뇌하고 방황했던 빈센트 반 고흐. 가장 고흐적인 그림 ‘가셰 박사의 초상’. 묘한 상념이 몰려온다. 가셰 박사의 유랑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가. 그것이 명작의 또 다른 운명일지도 모른다.


‘가셰 박사의 초상’ 130년 여정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등




신동아 2019년 7월호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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