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호

사바나

20대, 나쁜 권력자 욕하고 싶어 ‘각도기’ 들고 다닌다

  • 최진렬 기자

    display@donga.com

    입력2020-06-17 10: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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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욕죄·명예훼손죄 위험 피하며 욕하는 문화

    • “권력자 행태에 절망…화 표출할 방법 있어야”

    • 20대, SNS서 “각도기 챙기라”며 서로 주의

    • 내로남불 저격하는 ‘???:’ 밈의 등장

    • 전문가 “표현의 자유 억압하는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

    • “그저 욕이라도 안전하게 하고 싶다”

    ‘사바나’는 ‘회를 꾸는 , 청년’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의 뉴스랩(News-Lab)으로, 청년의 삶을 주어(主語)로 삼은 이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입니다. <편집자 주>

    페이스북에 업로드된 
기사 댓글 창에 
네티즌들이 
“아이엠 그루트”를 
외치고 있다.

    페이스북에 업로드된 기사 댓글 창에 네티즌들이 “아이엠 그루트”를 외치고 있다.

    “메모장을 열겠습니다.” 

    취업준비생 도상국(22) 씨가 페이스북에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회계 비리 의혹에 관한 기사를 보고 작성한 댓글이다. 도씨는 “이용수 활동가의 폭로 이후 하루에도 몇 건씩 정의연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는 것을 보고 답답했다. 욕을 하려다가도 합의금으로 낼 돈이 없으니 참고 ‘메모장을 연다’”고 말했다. 

    컴퓨터 운영체제 윈도의 기본 프로그램인 메모장은 20, 30대 사이에서 은어로 쓰인다. 온라인 공간에서 특정 인물을 비판하다 자칫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수 있으니, 해당 내용을 개인 컴퓨터 안 메모장 프로그램에 작성해 홀로 보겠다는 의미다. 정말로 메모장에 해당 인물을 비방하는 내용을 작성하지 않아도 된다. ‘메모장을 열었다’는 선언만으로 상대방을 욕하고 싶다는 의사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모장은 ‘각도기’의 대표 양식이다. 

    각도기란 법적 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비판 글을 모호하게 작성하는 양상을 총칭한다. 각도기로 정확한 각을 측정하듯 법리의 영역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표현을 신중하게 검토한다는 뜻을 지닌다.



    “SNS 할 때는 각도기 챙겨라”

    개그맨 유민상(41) 씨가 자신에게 일본 게임을 한다고 비판하는 누리꾼을 두고 4월 9일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각도기 작은 거 하나만 지참하시고 욕하셔도 된다”고 발언한 것이 대표적 예다. 주로 비방 대상이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거나, 대화의 전체 맥락을 알아야 의미가 파악되는 식으로 글을 쓰는 형태다. 메모장의 경우 전자에 포함된다. 비슷한 방법으로는 마블 캐릭터 그루트의 대사인 “아이엠그루트(I am Groot)”를 댓글창에 입력하는 것이 있다. “아이엠그루트”라는 표현으로만 의사를 전달하는 캐릭터의 특성에 빗대 욕설 역시 같은 표현으로 대체하는 방식이다. 

    청년들이 SNS에서 서로에게 수시로 “각도기 챙겨라”라며 주의를 주는 이유는 간단하다. 날 선 표현으로 상대를 비판하다 자칫 명예훼손죄(형법 제307조)나 모욕죄(형법 제311조)로 고소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공연히 사람을 모욕할 경우 모욕죄가, 사실(허위 포함)을 언급하며 명예를 훼손할 경우 명예훼손죄가 적용된다. 

    대학생 박창준(가명·25) 씨도 소송 염려로 SNS를 할 때마다 각도기를 챙기는 청년 중 한 명이다. 박씨는 2018년 SNS에서 군 문제를 주제로 누리꾼과 설전을 벌이다 상대가 박씨를 모욕죄로 고소해 30만 원에 합의를 봤다. 박씨는 “SNS에서 거친 생각을 그대로 나타내는 사람을 보면 ‘아직 안 겪어봤구나, 나도 저런 적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후 박씨는 SNS에서 일반인은 물론 공인을 비판할 때도 항상 각도기를 지참한다. 주로 비판 대상 당사자의 과거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방식을 차용한다. 

    박씨는 이후 유시민(61)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비리 의혹을 변호하는 내용을 담은 포스팅을 보고 SNS에서 “???: 60대가 되면 뇌가 썩는다”는 댓글을 남겼다. 해당 발언은 유 이사장이 2004년 중앙대 특강에서 한 말이다. 박씨는 “공인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비판 댓글에 보다 관대하게 대응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상대방이 과거에 한 말을 맥락을 소거한 채 인용하는 방식을 활용한다”고 말했다. 


    ‘내로남불’ 겨냥한 새로운 비판 문화

    한 누리꾼이 페이스북에서 사회 이슈에 대해 “메모장 on”이라는 표현을 남기며 불편한 마음을 내비치고 있다.

    한 누리꾼이 페이스북에서 사회 이슈에 대해 “메모장 on”이라는 표현을 남기며 불편한 마음을 내비치고 있다.

    박씨가 사용한 ‘???:’ 양식은 ‘내로남불’이 부상하면서 활발히 사용되는 각도기 밈(Meme)이다. 밈은 콘텐츠를 복제하며 즐기는 문화 현상이라는 뜻으로 온라인에서 인기 있는 콘텐츠 양식을 그대로 끌어와 사용하는 것을 총칭한다. 물음표로 정체불명의 인물 표시를 한 후 현재의 모습과 배치되는 과거의 언사를 인용하는 식이다.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비판을 하더라도 “그냥 당사자가 과거에 한 말을 그대로 적었을 뿐이다”라고 해명하며 빠져나갈 틈을 만들 수 있다. 

    ‘???: ’은 조국 사태 이후로 2030세대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조 전 장관의 자녀 장학금 특혜 의혹 기사에 과거 그가 페이스북에 쓴 글인 ‘???: 교수 월급을 받는 나는 사립대 다니는 딸에게 장학생 신청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 댓글을 적는 방식이 대표적 예다. 

    청년들은 고소·고발 위험을 피하면서 효과적으로 내로남불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 각도기를 지참한다고 설명했다. 대학생 이호준(22) 씨는 “한국은 사실을 적시하더라도 명예훼손이 성립해 공인이라도 SNS에서 실명을 걸고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정치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도 참아왔다. 하지만 ‘???:’ 등의 방법으로 각도기를 지참해 고소 위협에 대응하는 방패가 생겼다”고 말했다. 

    앞서의 방식으로 각도기를 지참할 경우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로 처벌하기가 어렵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단순히 과거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이나 욕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모욕죄나 명예훼손죄 적용 대상이 되지 않는다. 모욕죄에 해당되려면 인격을 비하하거나 욕을 해야 한다. 앞서의 방식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지지자들의 등쌀 역시 SNS에서 각도기를 챙기게 하는 요인이다. 대학생 이승제(20) 씨는 “정치인들을 비판하면 지지자들이 내용은 보지도 않고 ‘친일파다 매국노다, 토착왜구다’라고 말한다. 도저히 설득할 수가 없다. 그러니 다른 말을 더하지 않고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인들의 과거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는 식으로 비꼰다. 조국 교수가 예전에 트위터에 남긴 글을 ‘???:’를 달아 적는 것이 대표적이다. 중장년층의 경우 글을 이해하지 못해 비판도 못 한다”고 설명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각도기 문화를 두고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사회 분위기에 반발해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 달라는 외침”이라고 설명했다. 구 교수의 말이다. 

    “기본적으로 발언을 막을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고개를 든다. 사회 전반적으로 정당한 비판마저 혐오표현이라고 뭉뚱그려 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다. 청년들이 이러한 분위기에 항의하고 싶어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것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조롱을 하면 안 되겠지만 정부 인사나 권력자 및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비판할 수 있다.” 

    각도기의 한쪽 면에 비판이 있다면 반대쪽 면에는 재미가 있다. 유광현(27) 씨는 “단순히 상대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학적인 표현도 동시에 사용해야 하다 보니 젊은 또래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놀이가 됐다”고 말했다.

    누가 ‘선’을 잘 타나

    놀이의 핵심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느냐’다. 흔히 인터넷에서 악플은 ‘선 넘는 댓글’이라 불린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범위(선)를 넘어선 댓글이라는 의미다. 악플을 작성할 경우 “선 넘었다”며 누리꾼으로부터 비판받는다. 부모 욕을 의미하는 ‘패드립’(패륜적 드립)이 대표적 예다. 각도기를 지참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는지를 댓글 평가의 척도로 삼는다. 이 때문에 각도기는 SNS에서 하나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기도 했다. 

    이는 각도기 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도 이어진다. 아슬아슬하게 상대방을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일반인을 상대로 오남용될 수 있다는 우려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각도기 문화는 고소를 피하기 위한 지능적 움직임이 청년들 사이에서 하나의 놀이 문화로 발전한 경우다. 법적 대응이 어려운 만큼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 있다. 자칫 범죄 수법을 공유하는 양상으로 흐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청년들은 각도기가 악플로 이어질 우려는 인정하면서도 악플을 지향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물류업계 종사자 장하림(27) 씨는 39만 명이 구독하는 페이스북 유머페이지에 우수팬으로 등록됐다. 포스팅마다 댓글을 남기며 활발히 활동했기 때문이다. 

    장씨는 “SNS를 하다 보면 ‘제가 돈이 없어서 차마 여기(댓글 창)에 적지 못하고 메모장에 쓰겠습니다’라는 글을 많이 본다. 이들의 비판은 딱 여기서 멈춘다”면서 “악플 다는 사람들은 각도기를 깨뜨리며 선을 넘어버린 사람들이다. SNS에서 중장년층의 경우 각도기를 안 지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각도기의 승패가 얼마나 선을 잘 타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만큼 선을 넘는 악플은 각도기를 지참하는 청년 사이에서도 버림받게 된다는 뜻이다. 

    책 ‘공정하지 않다: 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의 공저자인 박원익 작가는 이를 “상대방으로부터 고소를 당해 버리면 오히려 상대를 도와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작가의 말이다.

    “그저 욕만이라도 하고 싶다”

    한 청년이 2019년 8월 31일 서울 종로구 마이크임팩트스퀘어에서 열린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와 관련된 행사에서 공정과 기회의 균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한 청년이 2019년 8월 31일 서울 종로구 마이크임팩트스퀘어에서 열린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와 관련된 행사에서 공정과 기회의 균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기본적으로 각도기 문화는 패드립과 욕설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상대방에게 선을 넘는 비판을 해 사안이 명예훼손이나 모욕의 문제로 비화할 경우 원래 비판하려 했던 논점이 흐려진다. 이는 비판 대상을 오히려 순교자로 만들며 도와주는 꼴이 된다. 청년들은 고소나 고발의 여지를 만들지 않고 상대방의 아픈 곳만 때리기 위해 각도기를 든다. 팩트폭력 문화와 연결된 측면이 있다.” 

    청년들은 왜 각도기를 들면서까지 정치인 등 유명인을 비판하려 할까. 다수 청년이 “여러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이제는 그저 비판이라도 안전하게 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취업준비생 도상국(22) 씨는 “제도권이 내가 고민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국 사태를 보며 좌절감만 커졌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 자녀들을 어떻게든 끌어올려주려 한 모습을 보며 절망감을 느꼈다. 우리 부모님이라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으셨을까 생각하니 속만 터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 미안함을 느낀다고 한 말을 듣고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원하게 욕을 한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나만 고소를 당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SNS에서 메모장 연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문 대통령은 2020년 1월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 전 장관에 대해 “그분의 유무죄는 수사나 재판 과정을 통해 밝혀질 일이지만 그 결과와 무관하게 이미 조 전 장관이 지금까지 겪었던 고초, 그것만으로도 저는 아주 크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선우(20) 씨 역시 조국 사태 당시를 회상하며 “그냥 넘어가기에는 화를 표출할 방법이 있어야 했다. 젊은 층 사이에서 IP를 우회해 비판 글을 작성하기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욕했다. 각도기도 그중 한 방법이다”고 설명했다. 

    박창준 씨는 “단순히 좌우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사모든 달빛기사단이든 대화가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라며 “‘나 하나 말한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하고 자주 생각한다. 하지만 틀린 것은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해 각도기를 들고 SNS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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