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호

기억을 지우고 싶다면 꼭 봐야 할 영화 ‘이터널 선샤인’ vs ’메멘토’

[황승경의 Into the Arte⑰]

  • 황승경 공연 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1-01-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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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차례 개봉, 관객 더 늘어난 ‘신기한 영화’

    • 너의 흔적이 사라져도 가슴 떨림은 남는다

    • “내 기억을 믿지 마라” 끊임없이 던지는 ‘메멘토’

    • 기억을 지운다고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위)과 ’메멘토’ [Focus Features, Newmarket Capital Group]

    영화 ‘이터널 선샤인’(위)과 ’메멘토’ [Focus Features, Newmarket Capital Group]

    2020년 2월 한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자 영화계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제작사는 영화 개봉 일정을 연기했고, 극장들은 저마다 재개봉 영화를 내걸었다. 신작도 아닌데 돈 내고 보는 게 의아할 수도 있지만, 영화계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재개봉작의 흥행을 경험했다. ‘재개봉 덕후들’ 덕분에 고사 직전 한국 영화계는 겨우 호흡을 이어갈 수 있었다. 

    국내 재개봉작 신화로 꼽히는 영화는 미셸 공드리(57)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2004)과 크리스토퍼 놀란(50) 감독의 ‘메멘토’(2001)다. 처음 개봉할 때에는 꽈배기처럼 꼬인 영화 구성이 난해했지만,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감독이 의도한 영화의 맛에 빠져든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와인 같은 사랑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즐릿 분)이 일하는 서점을 찾은 조엘(짐 캐리 분), 자신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다는 카드를 받고 자신도 기억을 지우는 조엘. [Focus Features]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즐릿 분)이 일하는 서점을 찾은 조엘(짐 캐리 분), 자신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다는 카드를 받고 자신도 기억을 지우는 조엘. [Focus Features]

    ‘이터널 선샤인’은 2004년 첫 개봉할 때만 해도 관객들에게 ‘그저 그런 난해한 사랑 영화’로 평가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머릿속에 자꾸 맴도는 영화다. 2004년 개봉(관객 16만9000명) 때보다 2015년 재개봉(49만6000명), 2018년 세 번째 개봉(50만 명) 등 시간이 갈수록 관객이 더 많아진 ‘신기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가슴 시린 멜로가 없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지만, 가슴을 쫄깃하게 하는 긴박함이나 추억을 되씹는 달콤함도 없다. 그러나 사랑의 달고 쓴맛을 경험한 관객이라면 영화가 선사하는 사랑의 통찰에 무릎을 친다. 와인이 숙성 기간에 따라 그 풍미(風味)가 다르듯, 사랑에 대해 알아가는 관객들의 여운도 달라진다.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끄려고 할수록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처럼, 아픈 사랑의 기억은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아.” 



    소심한 성격의 조엘(짐 캐리 분)은 출근하다 말고 즉흥적으로 몬탁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몬탁은 미국 뉴욕에서 3시간 정도 걸리는 해안 도시. 조엘은 겨울바다의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2년 만에 노트에 일기를 쓴다. 노트 앞장은 찢어져 있다. 그곳에서 파란색 머리 염색을 한 유쾌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즐릿 분)과 마주친다. 클레멘타인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미국의 유명한 민요(Oh, My Darling Clementine)를 부르지만, 조엘은 어린이도 흥얼거리는 이 민요를 도통 모른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보이고, 둘은 정반대 성격의 상대에 끌려 불타는 사랑을 시작한다. 사랑은 변한다고 하던가. 처음에 둘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툼이 잦아지더니 급기야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헤어진다. 클레멘타인을 잊지 못한 조엘은 그녀가 일하는 서점으로 가서 사과를 하지만 클레멘타인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한다. 충격을 받은 조엘에게 카드 한 장이 전달된다. 

    “클레멘타인은 당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웠습니다. 그녀에게 옛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말아주세요,” 

    기가 막힌 조엘은 카드 발신인인 ‘라쿠나’라는 회사를 찾아간다. 이 회사는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다. 조엘도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강 얼음판 위 속삭임… 영화의 白眉

    미국 보스턴 찰스강 얼음판 위에 나란히 누운 클레멘타인과 조엘. [Focus Features]

    미국 보스턴 찰스강 얼음판 위에 나란히 누운 클레멘타인과 조엘. [Focus Features]

    얼마 뒤 머리에 헬멧 같은 기구를 쓴 조엘은 자신의 집 침대에 누워 ‘라쿠나’ 직원들의 도움으로 기억을 지운다. 가상세계에서 클레멘타인과 쌓은 추억과 맞닥뜨린 조엘은 가슴속에 각인된 추억들을 하나둘 소환한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새록새록 그녀와 함께한 추억이 떠오른다. 두 사람은 보스턴의 얼어붙은 찰스강 얼음판 위에 나란히 눕는다. 순백색의 겨울 낭만이 고스란히 담긴 이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조엘은 얼음이 깨져 강에 빠질까 두려워 가슴이 콩닥콩닥하고, 클레멘타인은 조엘이 사랑스러워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이내 평정을 찾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밤하늘 별을 헤며 다정하게 이야기한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그녀를 기억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조엘은 “그만해 달라”고 말한다. 그녀와의 사랑은 아픔과 상처뿐이라고 예단했지만 진실을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다. 소중한 기억을 잃는 게 두려운 조엘은 다른 과거의 기억으로 숨어버린다. 

    설상가상. 기억 차단 작업을 하던 ‘라쿠나’ 직원들의 조작 실수로 기기가 오작동한다. 직원들의 다급한 ‘SOS’에 조엘의 집으로 달려온 기억 삭제 프로그램 설계자 하워드 박사와 직원 메리는 수면 상태의 조엘 곁에서 사태를 수습한다. 

    이때 생뚱맞은 장면이 연출된다. 이 다급한 상황에서 메리는 하워드 박사에게 구애를 한다. 메리는 17세기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의 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를 읊는다. 하워드 박사가 메리의 사랑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박사의 부인이 창문 밖에서 모든 장면을 목격한다. 체념한 하워드 박사는 자포자기하며 메리에게 둘은 과거 내연관계였고, 자신의 아내에게 발각된 적이 있다고 알려준다. 메리의 기억에서 자신들의 사랑에 관한 기억도 모두 지웠다고 실토한다. 

    한편 조엘은 가상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녀와 함께한 세상은 하나둘씩 사라진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에게 몬탁에서 만나자고 속삭인다.


    ‘영원한 햇빛(Eternal Sunshine)’의 의미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Focus Features]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Focus Features]

    자신을 속인 박사에게 배신감을 느낀 메리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환자들과 관련된 모든 테이프와 진단서를 당사자들에게 보낸다. 다시 사랑을 시작한 조엘과 클레멘타인도 자신들의 녹음을 확인하고는 질색한다. 지금은 강렬한 사랑을 하지만 이내 서로의 단점을 발견하고 다투다가 실패를 경험할 거 같다. 조엘은 그런 클레멘타인을 향해 ‘상관없다’며 다독이고, 두 사람은 미소를 머금은 채 눈물을 흘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포프의 시’는 실존인물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중세 최대의 스캔들을 소재로 한다. 중세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는 파리 대성당 성직자의 조카딸인 엘로이즈(1101~1164)의 가정교사였다. 22살 차이에도 둘은 비밀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지만, 아벨라르의 창창한 출세 길에 방해가 될까 엘로이즈는 수녀원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죽은 뒤에야 합장돼 영원한 부부가 된다. 둘은 1132~1137년 사이 12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시인 포프도 엘로이즈의 편지 3통을 읽고 영감을 받아 시를 지었다. 

    “그녀는 세상을 잊었고, 세상은 그녀를 잊었다. 정결한 정신의 영원한 햇빛! 모든 기도를 받아들이고, 모든 바람을 체념하니”라는 구절에서 영화 제목을 따왔다. 엘로이즈가 수녀가 돼 속세에서 벗어나니 그제야 정결한 마음의 소유자로 영원한 햇살을 얻게 됐다는 표현이다. 시에는 ‘잊으면 행복하다’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이터널 션샤인’의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만(62)은 애초 클레멘타인이 죽을 때까지 아무도 모른 채 몇 번이나 ‘기억 지우기’를 반복만 하는 비극적 설정을 구상했지만 관객들이 각자 느낄 수 있도록 ‘열린 결말’로 바꿨다고 한다. ‘찢어진 노트’ ‘누구나 아는 민요(클레멘타인)를 모르는 남자’ 등 영화 곳곳에는 이미 두 사람이 기억을 지우고 만나고 있다는 복선이 깔려 있다. 많은 연인이 다시 만나면 힘들 것을 알지만 자신들만의 사랑을 기대하며 ‘이터널 선샤인’을 만든 것이다.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의 퍼즐 맞추기

    ‘메멘토’ 스틸컷. [Newmarket Capital Group]

    ‘메멘토’ 스틸컷. [Newmarket Capital Group]

    영화 ‘메멘토’를 집에서 편하게 누워 감상하면 이해가 잘 안 된다. 흐트러진 퍼즐을 연결하는 수고를 거쳐야 한다. ‘메멘토’에서 주인공은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려 10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긴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기고, 사진 뒤의 메모로 기억을 유추한다. 영화는 부부의 삶을 구렁텅이로 내몬 범인을 쫓는 스릴러다. 놀란 감독의 첫 상업영화인 만큼 신예 감독의 기발한 천재성이 영화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영화는 컬러와 흑백 장면으로 나뉘는데, 시간 구성상 초반 절반은 흑백영상, 후반 절반은 컬러 영상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스크린에는 시간상 결론으로 나와야 할 마지막 컬러 장면이 깔린다. 그리고 맨 처음 흑백 장면이 두 번째로 등장한다. 영화는 컬러와 흑백이 번갈아 가면서 나오는데, 순간이라도 ‘멍 때리면’ 영화 전개를 따라갈 수 없을 때가 많다. 

    컬러는 역순이고 흑백은 시간상 맨 처음부터 순차대로 연결된다. 시간 순서로 장면 1부터 22까지는 흑백, 23부터 44까지는 컬러다. ‘44-1-43-2-42-3-41-4…’의 순서로 장면을 유추하면 된다. 이렇게 장면 연결이 안 되고 뚝뚝 끊긴 데는 단기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 분)의 답답한 호흡을 관객도 함께 느끼게 하려는 감독의 노림수가 깔려 있다. 

    주인공 레너드는 보험회사의 평범한 조사 직원이다. 어느 날 오밤중에 강도들이 아내를 잔인하게 폭행한다. 이후 시름시름 앓던 아내는 유명을 달리한다. 충격 탓에 레너드는 10분 간격으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다. 10분마다 감쪽같이 기억이 사라지니 아내의 복수는 오롯이 경찰 몫. 그러나 그는 나름의 규칙을 세워 차근차근 살인자를 찾아 나선다. 결국 피의 복수를 이루지만, 복수가 될 수 없다. 부인을 죽인 범인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그가 단기기억상실로 당뇨병을 앓는 부인에게 인슐린주사를 과다 투여해 사망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기억을 믿습니까

    아내의 복수를 위해 살인자를 찾아 나선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 분). [Newmarket Capital Group]

    아내의 복수를 위해 살인자를 찾아 나선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 분). [Newmarket Capital Group]

    인간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일단은 감추고 도망갈 출구를 찾는 경향이 있다. 실낱같은 자신의 기억을 합리화해 옳다고 소리치기도 한다. 영화에서 레너드는 잊힌 기억을 붙잡기 위해 자신만의 문신이나 사진, 메모 같은 ‘기억 장치’를 만들어 기억한다. 놀란 감독은 이런 선별된 기억을 맹신하는 주인공을 통해 기억의 오류와 왜곡을 되씹는다.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레너드처럼, 사람들은 기억하는 단서들에 의지한 채 상대의 기억을 부정하고 자신의 선별된 기억만을 맹신한다. 

    영화 ‘메멘토’는 아내의 복수를 위해 살인자를 찾아가 응징하는 순애보가 아니다. 진실을 감당하지 못해 어떻게 기억을 이용해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는지를 파헤치는 영화다. 영화 속 기억이 겹치는 같은 장면에서 노크하는 횟수, 사진 확인하는 공간, 동작하는 시점 등 디테일을 다르게 연출했다. 

    나의 기억은 절대적일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상대가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건 아닐까. ‘이터널 선샤인’과 ‘메멘토’ 두 영화는 모두 기억을 지우거나 선택한다고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보이지 않고 기억나지 않는 모든 것을 부정하더라도 무의식 저편에서 진실은 언제나 떠오른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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