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한국신용평가가 국내 1584개 상장 기업(거래소 702개, 코스닥 882개)을 조사 분석한 결과 내놓은 ‘한국의 장수기업’에서도 동화약품은 국내 최장수 기업으로 꼽혔다. 설립일을 기준으로 부여된 동화약품의 KOSPI 기업 고유번호는 00020. 같은 해 탄생한 조흥은행의 00010 다음이다.
1896년 서울 배오개시장(현 동대문시장)에 문을 연 포목점 ‘박승직 상점’이 두산그룹의 시원(始原)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광복 이후 두산그룹 어느 계열사에서도 포목 중개업의 자취를 찾아보긴 힘들다. 두산그룹의 역사에서 현실에 비추어 그 모태적 형태를 찾아볼 수 있는 기업은 1933년 일본 기업 소화기린맥주를 광복 후 인수해 만든 동양맥주다.
독자적인 자기 브랜드를 갖지 못한 기업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동화약품은 창업 이후 한 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개업과 동시에 생산 판매한 활명수가 아직도 시장지배 상품으로 위력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세월 제약업 외에는 손을 뻗지 않았다. 국내 최고령 기업인 두산을 제쳐두고 기업 분석 전문가들이 동화약품을 국내 최초의 기업으로 꼽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동화약품이 9월25일로 창립 110주년을 맞았다. 동화약품은 1897년 창업 이래 한자리에서 동일 상호를 내걸고, 동일 제품을 100년 이상 생산해온 국내 유일의 기업이다. 창업 당시 동화약방의 소재는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순화동 5번지, 동화약품은 지금도 이곳을 본사로 쓰고 있다. 창업자 민병호 선생은 당시 궁중 선전관이었는데, 한성부 서소문 차동에 있던 자신의 집에 ‘동화약방’ 간판을 내걸었다.
동화약품이 위치한 순화동은 조선시대에는 서대문에 인접해 숙박시설이 많고 관청의 수레들이 모여들었다 해서 수렛골 또는 차동(車洞)이라 불렸다. 현재 서대문 사거리 인근 경찰청 맞은편 뒷골목의 동화약품 본사 자리는 1667년 4월23일 숙종대왕비인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이며, 일제 강점기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비밀 연락기관인 서울연통부가 있던 곳이다.
‘민족이 합심하면(同和) 잘살 수 있다’
약방 이름이 왜 ‘동화(同和)’였을까. 민병호 선생은 그 이름에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민족화합의 정신을 담았다고 한다. 동화약품이 쥘부채(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를 상표로 선택한 것도 많은 부챗살이 한데 결속돼 부채를 만들 듯 ‘합심하면 잘살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후 동화약방은 1909년 통감부에 ‘부채표’ 및 ‘활명수’를 상표등록하고, 1931년 동화약방을 ‘주식회사 동화약방’으로 법인화하면서 본격적인 제약업소의 면모를 갖췄다. 기업명과 상표에서 드러나듯 동화약방은 경술국치 이후 민족기업의 길을 걸으며 일제에 항거한다. 이 회사 직원들은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며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동화약품의 역사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 민족의 건강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요즘 기업에선 보기 드문 내용의 사시(社是)를 그들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화약품 본사 인근에는 초대 사장인 민강(1883~1931) 선생과 동화약품의 항일정신을 상징하는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서울연통부(聯通府) 기념비가 바로 그것. 연통부는 1919년 7월 상해임시정부가 국내와 국외를 연결할 목적으로 만든 비밀 연락부서로 각 시, 도, 군, 면까지 조직을 갖춘 행정조직이다.
민병호 선생의 아들인 민강 선생은 이 연통부를 당시 동화약방 내에 설치했다. 그리고 연통부를 통해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결국 연통부는 1922년 일제에 적발됐고, 이로 인해 민강 선생과 동화약방은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95년 8월15일 서울시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연통부의 그 같은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현재의 동화약품 본사 담벼락 옆에 연통부 기념비를 설치했다.